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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스웨덴 편

 

1)   스웨덴(Sweden), 스톡홀름 편

스웨덴은 북동쪽으로 핀란드, 서쪽으로는 노르웨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는 9백만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나라이다. 국기는 청색 바탕에 노란색 십자가로 되어 있으며, 기후는 대부분 온화한 , 북쪽지역의 겨울에는 암흑을 경험할 있고, 여름에는 단기간 백야 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다. 넓은 광야와 자연이 풍부한 나라이기도 하며 핀란드 보다 1시간 늦은 시차를 갖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경을  넘나드는데는 아무런 규제가 없다. 같은 나라의 도시와 도시를 넘나드는 식으로 국경이 Open 되어 있다. 필란드에서 크루스로 스웨덴으로 입국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안내가 구입하여준 쿠르스 Ticket 받아들고 국내를 운항하는 선박에 오르듯 각자의 짐을 끌고 선박에 대기하고 있는Silja Line이란 대형 쿠르스에 승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선박에서 같은 시간에 모여 선실 식당에 푸짐한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친다음 피로 하시다는 연로한 분들을 제외 하고는 선박의 갑파위인 12층에 올라  일행들이 삼삼오오 환담 으로 또는 선박위 트랙을 걸으며 시원하게 불어 오는 바다 바람을 쏘이면서 이국의 밤을 맞이 했다. 이렇게 선상위에서 발틱해의 밤은 깊어 가는데 아직도 어두어 지지않는 백야는 신비를더해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를 실은 실자 라인호(Silja Line) 묵묵히 잔잔한 파도를 혜치며 스톡홀름으로 향하고 있다. 자정이 가까워 오자 잠을 자야겠기에 필자 부부는 실자호 몸을 맞겨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호텔대신 하루밤을 보내야 하는 선실방은 겨우 부부가 누울정도의 작은 공간이지만 피로가 겹친 몸을 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한참을 잦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으나 새벽 2 30분이다. 긴장과 시차 때문인지 다시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뒤적이다 5시경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6 28일이 밝아온것이다. 실자호는 이렇게 바다의 새벽을 깨우며  스웨덴의 수도 Stockholm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일행은 배에서 하선 하기전에 선내 식당에서 아침을 했다. 
                                             
쿠르스 식당엔 언제나 푸짐한 음식이 준비 되어 있다. 이제 이배를 하선하면 우리는 선상의 풍요로운 음식을 그리워 할것이다. 오전 9.30 배가 스톡홀름 선착가에 완전 정착되기를 기다려 집시처럼 가방을 끌고 하선할 준비를 했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다른 여행객들보다 서둘러 실자호를 내려야 한다는 안내의 말을 불평없이 순종하면서---.

스웨덴, 스톡홀름 으로

아침 9 30분경 짐을 끌고 스웨덴의 쿠르스 선창가를 나와 보니 미국 LA에서 살다 왔다는 스톡홀름 현지 동포 안내양()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안내를 따라 관광버스에 올랐다. 안내가 인원을 확인한후 버스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내는 오늘 하루의 스케줄에 대해 설명한다.  Stockholm 명승지인 시청사, 바사 박물관, 중세시대의 구시가지, 왕궁, 대성당 그리고 중세 시대의 대광장등지를 안내하는 것으로 안내양의 임무를 마치게 된다고 했다. 이날 이지역의 기온은 섭씨 28도로 더운편이었으나 바람이 있어 체감온도는 가을 같이 시원했다. 엊그제 까지도 비가 내려 섭씨 15대를 오르내리더니 오늘 갑자기 더워 졌다는 말도 덪부쳤다. 20년간 스웨덴에 살고 있으며 현재 고교선생을 하고 있다는 안내양은  버스가 바사 박물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유창하게 스웨덴에 대해 설명을 계속한다.                  

스웨덴의 넓이는 45 Km2, 인구는 900, 유럽에서 6번째 크기의 국가로 한반도의 2.5배나 되며, 국가는 많은 섬과 섬으로 연결되어 있는 스칸디나 반도 동쪽 기름지고 프르게 연결된 지점에 자리잡은 발틱 해안의 나라이다. 특히 물과 자연 공원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는 나라로 언어는이나라 고유어를 쓰고 있으면서도 모든 국민이 영어에 능통할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다고 한다.


     스웨덴 지도(황색 부분)

그리고 노르웨이의 수도 스톡홀름은 인구 180만명의15개의 섬과 52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한인이 2,000 인데 반하여 한인 입양자가 9,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입양자들은 주로 196-70년대 입양된 아이들로 이제 모두 성장한 상태라 했다. 이나라의 영주권은 외국인이 이나라에서 5년이상 살아야 하고, 영주권 얻은지 3 후면 시민권 받을 자격이 부여 된다고 한다스웨덴은 16세기 러시아와 함께 유럽 일대에 세력을 확산했던 국가로 노르웨이를 오랫동안 통치한적이 있었다. 그들은 노르웨이를 독립 시키면서 쓸모없다고 생각한 서쪽 산악지대를 노르웨이에게  넘겨 주었는데 지금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산악지대에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량의 석유와 천연 가스가 쏟아져 나와 배아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톡홀름, 바사  박물관으로

우리는 바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스톡홀름은  850 이란 역사를 지닌 고전도시이다.  이도시엔 매일같이  Silja Line 호와 같은 대형 쿠르스(8 5천톤급) 4-5대이상 들어와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어 항상 거리마다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다 한다. 그래서 그러한지 우리가 바사 박물관 입구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다리 건너자 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 Parking장에는 관광 버스가  어지럽게 주차 되어 있었으며 여기 저기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 구릅 안내들은 자기가 아내하고 온 식구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톡홀름, 바사 박물관

바사 박물관(Vasavarvet)에는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바사호 옆면


바사호 내부 대포장치

바사호는 스웨덴 최초로 참나무로 건조된 전함으로 1628 3년간에 걸쳐 길이 70m x 50m x 높이 20m 450명이 승선할 있는 크기의 거대 함선으로 구축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함선은 구축이 완료 되고 시항을 위하여 축제속에서 귀족들을 태우고 바다로 출항한지불과 1.5Km 거리에서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물속으로 침몰되어 50명의 귀족들과 함께 물속에 수장되어 최 단명의 전함으로 제역활을 하지 못했던 비운의 함선이다.


바사호 전면에서

이함선은 그로 부터330년간 바다속에 잠기어 있다가 1961 인양된 역사적 유물이다. 처음  바다 에서 인양해 놓고 보니 배의 표면나무들이 부식하기 시작하여 고민하던중 안데스 프라즈 학자가 16년간 선체에 기름을 치며 건조시키기를 반복하여 부식을 방지할수 있었다는데 현재 95% 원형의 모습으로 지금 박물관에 보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배는 후미에 대형 돛과 돛위에 둥군 관망대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선체 양쪽 측면에는 함포를 거치할수 있는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화구가 있었다. 화구의 수는 윗줄에 12, 아랫줄에 14개등 합이 26개로 양측에 52개나 되었다. 박물관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바사호 내부를 이해 하기 좋게 부분별로 나누어 전시해 놓았으며, 화기를 장치 할수 있는 홀마다 대형 대포들을 설치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각층의 갑판은 각층마다  병사들이 활동 하는 모습을 단층 측면의 모형으로 만들어 당시상황을 현실감있게 느낄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이함선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일제 침략에서 구원 하신 이순신 장군의 1500년대 제조한 거북선이 생각난다. 현대 전함 못지 않게 과학적으로에 제조된 거북선은 이 바사호에 비하면 훨씬 100년이상앞선 정말 자랑스러운 것이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를 찾아서

바사박물관을 나와 스톡홀름의 시청사를 찾았다.
언제나 여행객에게는 처음 보는 도시가 모두 아름답게 보일수 있겠지만,
시청사로 가는 시가지는 4-5층의 화강암으로 건축된 건물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비교적 안정감있는 도시로 유럽풍을 느낄 수 있었으며, 거리는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했다. 시청사는 붉은 벽돌집으로 2층으로 검소하게 건축된 건물이다.

     

스톡홀름, 시청사 정면                                     

시청사를 들어서니 아래층에 시원하게 확트인 넓은 공간이 있었다. 1,500 정도 인원을 수용하여 행사를 치룰수 있다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매년 12 12 연중 만찬식이 거행되고, 노벨 평화상이 수여 되는 곳으로 한국의 김대중대통령도 이곳에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
.


스톡홀름
, 시청사 내부 천정에 설치된 전자 올간 시스템

바닥은 프른 빚을 띠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원래는 지붕을 Open하여 하늘의 프른 색으로 바닥과 조화 시키려 했으나 비바람의 피해때문에 지붕을 덮어 씨웠다는 것이다. 뒷쪽 벽과 천정이 맞다은 부분에 영구 전자 올간 시스템이 만들어져있어 그방의 예술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화려한 파티나 리셉숀이 열리면 왕과 왕비가 2층에서 부터 우아하게 계단을 밟고 내려온다는 계단을 역으로 우리일행들의 부부들은 왕과 왕비처럼 팔장을 끼고 우아하게 이층으로 올라가니 또다른 넓은방이 있었다. 주로 무도회를 위하여 사용되는 방이란다.


스톡홀름
, 시청사  실내 벽화, 지역 수호신

금가루를 입힌 모래 가루로 온통 방이 황금으로 모자이크되여 있었다.

시청사 실내벽과 천정까지 이해 할수 없는 각종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그림이 모두 몇개나 되는냐고 안내에게 물으니 셀수 없을 정도라며 필요하면 직접 세어보라고 핀잔을 준다. 안내로서 건방진 태도라 생각 되었지만 참기로 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은 99.9% 완벽한 벽화로 평가 되고 있으나 벽뒷면 상단에 말탄 기사의 목이 잘린 부분이 있어 0.1% 오차가 있었다는 평도 아울러 받고 있다했다. 2층 홀 정면 으로 중앙에 기형적인 형상의 대형 팔등신 여인상이 있었는데, 여인은 메라노라는 지역 수호신 상이다.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대광장, 왕궁과 대성당

시청사를 나와 안내를 따라간곳은 시청사 바로 뒷편에 있는 구시가지였다. 바닥이 돌로 포장된 좁은 양편으로 고전 냄새가 물신 풍기는 전통상가가 줄지어 있는 곳이다. 구시가지 중심부 사거리 코너 벽모서리 상단에는 17-27Ave. 라는 주소가 유난히도 확실하게 눈에 들어 온다. 상점들은 거리의 고전미를 살리기 위해 모퉁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간판만 부착되어 있었고 상점사이로 좁은 길이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스톡 홀름 구시가지 상가

상가의 유래를 설명듣고 안내는 우리를 주얼리 계통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안내했다. 몇사람을 제외 하고는 아이 쇼핑만 하고  그가게를 나오고 있었다.  이제 다시 스웨덴의

성시대인
1600년대에 건축했다는 왕궁 앞에 자리잡은 대광장이란 자리로 이동했다. 대광장이라고 해서 드넓은 광장을 기대했으나 도착한곳은 아주 작은 광장에 불과 했다. 16세기 당시 시각으론 분명 대광장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현대시각 으로는 소광장에 불과했다. 왕궁과 대성당은 대광장을 가운데 두고 서로 인접해 있었다.   스웨덴은 현재 왕이 아들이 없어 첫번째 딸인 빅토리라공주 차기 왕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나라엔 적자 장손의 왕위 계승권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란다. 왕궁과 대성당에 거의 인접해 있는 건물 정면 입구 유리문에 노벨 흉상이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노벨상 기념관었다.

      

                        
*
스톡홀름, 노벨 기념관

필자 부부는 예정에없는 코스지만 호기심에 노벨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                          








*스톡홀름, 노벨기념관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니 카운터에 안내가 입장객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


, 카운터 뒤로는 자료 상황실 처럼 꾸며 있어 각종 자료를 현대식으로 정리해 놓아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입장료를 내야 했다. 필자 부부는 일행에서 낙오 하지 않기 위해 더이상 오래 머물수가 없어서 입구에서 제한된 범위만 둘러 보고 기념관을 나왔다.


스톡 홀름 대광장

광장 앞 쪽엔 물의 축제를 위한 (탑에 대해 정확히 아는사람이 없어 필자의 추측) 같은 것이 건축되어 있었는데 현지 학생들로 보이는 남녀 젊은이들이 가면을 쓰고 종이에 대사를 손에들고 한사람이 무어라 중얼거리면 한여성이 물을 푸는 동작을 하는 연극을 하고 있었다. 연극의 특별한 의미를 알고 싶었으나 안내도 그들의 행사에대해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Stockholm 중요 부분을 수박겉 할키식으로 둘러보고 현지 식당에서 오찬을 끝으로 안내와 헤어진 후 우리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이제 부터 동에서 서로 6시간이란 긴시간을 육로로 이동해야한다.   국경을 넘는 일로 거리가 500Km 다되다보니 300Km되는 중간 지점 칼스타드(Karlstad)라는 지역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새벽에 계속해서 오슬로로 이동하기로 했다.. 칼스타드(Karlstad) 작은 시골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동안 일행들은 버스안에서 오락 시간을 가졌다. 모두돌아 가며 노래를 포함한 각자의  특기와 각종 쪼크등으로 모두둘 함께웃을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물론 진한 쪼크는 인격과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Stockholm에서 칼스타드까지 도로는 비교적 곧게 뻗은 1차선의 좁은 산업도로 였으며, 도로에는 이따금씩 오가는 트럭이 눈이 띠였으며 승용차들도 심심치 않게 지나치고 있었다. 도로 주변엔 향나무, 소나무로 보이는 활옆수가 잡목들과 어울려 차창밖의 시야를 가로 막고 있어 마치 미국의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연상케 하였다. 저녁 6시경, 우리를 실은 버스는 칼스타드 (Karlstad) 진입 하여  예약된Claion Hotel” 도착했다.

칼스타드(Karlstad) Claion Hotel에서 하루밤을

 이곳은 오슬로로 가기전에 하루 쉬어 가기위해 찾아온 마을이지만 이고장의 특색을 체험하기 위해 호텔에서 저녁을 한후에 일행들과 헤어져서 호텔주위를 산책했다.
칼스타드는 교통이 한가하고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로 거리엔 신호등마져 없었다.
이곳에서 하루밤을 보낸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자 마자 다시 오슬로를 향해 3시간의 긴 여정을 위해 출발 했다.

 

다음은 노르웨이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