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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서 유럽편(런던, 파리, 밀라노)


 아래  슬라이드 쇼 다음에 사진을 곁드린  여행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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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영,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서 유럽 편(런던,파리,제네바,밀라노), 2008년 4월


이번 여행은 서유럽의 일부인 런던, 파리, 제네바를 거쳐 이태리 밀라노에서 필라로 돌아오는 6박 7일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2008년 4월 24일 오후 8시 30분 필라 공항을 떠났다.

여행을 위해선 가기 전에 처리해할 일들로, 돌아 와서는 밀린 일 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부산을 떨게 마련이다.

우리부부는 유럽을 외곽으로부터 돌아보고 난후에 가까운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천천히 돌아보기 위해 미루다보니 주위 분들 대신 외지 분들과 함께 여행해야 했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만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관계를 유지해 가느냐에 있는 것 같다.


여행출발 하루 전에 나에게 중대사건이 벌어졌다.

“결혼 날 자 받아놓고 신부가 등창난다”격으로 나는 가슴에 심한 통증으로 응급실에 들어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혹시 “하드 어택의 신호?”여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만양 젊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몇 가지 심장 테스트 끝에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여행을 다녀와도 좋다”는 심장의사의 허락을 받고서야 안심을 하고 싸다가 밀쳐놓은 여행 가방을 다시 챙겨 항공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공항으로 달려갔다.


8시 30분이 되자 우리 부부를 실은 US Air는 필라 공항 활주로를 서서히 이륙하여 런던으로 향했다. 항공기내에서 밤을 새우고 예정대로 현지시간으로 다음날 아침 9시경 런던 근교의 “Gatwick Airport"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필라 시간과 5시간 차이를 고려해 볼 때 비행시간은 7시간정도 걸린 셈이다.

런던 공항에 내린 많은 사람들이 공항 출입국을 통과하기 위하여 붐비고 있었지만 담당관들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여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직업, 여행목적”등을 상세히 묻고 있었다. 영국의 출입국 관리인들은 비교적 친절한 편이었지만, 제한된 시간에 여행을 해야 하는 여행객의 입장에선 느린 처리 속도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미국의 9.11사태이후 전 세계가 출입국시에 테러방지를 위한 불순분자의 출입 통제로 모든 국가가 출입통제를 엄격히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영국은 어느 누구나 영국에 일단 들어온 후에는 교육, 병원 복지 문제 등 모든 복지 문제를 영국당국이 책임지게 되어 있어 불순 의도로 입국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까다롭게 점검하고 있다는 것이다.

런던의 공항은 “Gatwick Airport" 이란 곳 이외에 4군데나 더 있다.

우리부부가 공항을 나오자 여행 가이드가 노스케로 라이나 지역에서 먼저 도착했다는 50대의 한인 부부와 함께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인접 “Heathrow"란 터미널로 이동했다.

이번 함께 여행할 대부분의 일행들이 그곳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어 그들과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12시 정오가 다 되어서 모든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모두 출발지와 시차 관계로 오랜 시간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한 형편인 셈이다.

현지 한국 식당으로 안내되어 “김치찌개”로 시장기부터 해결한 후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행들은 미국, 캐나다등지에서 모인 29명의 한인들로, 연령층은 유행의 첨단의 도시 파리의 매력 때문인지 비교적 젊은 부부와 미혼 아가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으며 일행에는 한국에서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전투기 조종사 생활을 하다가 대령으로 예편하여 카나다로 이민했다는 36년생의 부부와 역시 카나다에서 오셨다는 38년생의 두 부부를 제외해놓고는 모두 나보다 젊은 층들인 것 같았다.

런던에서의 일정은 하이드팍, 버킹감 궁전, 타워 브릿지, 국회의사당, 템즈강을 따라 웨스트미니스터 사원등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대영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영국, 런던-편”


런던을 찾아서

영국은 국제 신사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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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거리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수도 런던은 1,600㎢의 면적에 80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유럽 최고의 도시이다.  또한, 영국의 정치,경제,무역의 중심인 동시에 서유럽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필수 관광지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유럽 여행을 시작하는 관문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소호(SOHO)지구를 중심으로 두 개의 시로 나누어지는데, 동쪽은 이스트엔드로 서민적인 분위기를 접할 수 있으며, 서쪽은 웨스트엔드로 비교적 귀족적이고 화려한 분위기라 관광지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 녹지율이 세계 제일로 꼽힐 만큼 도시 곳곳에서 녹지와 공원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런던은 국제적이고 현대적인 특징과 잉글랜드적인 특징이 흥미롭게 복합되어 있는 이색적인 도시이며, 특히 왕조시대의 전통적인 의식에서부터 쇼핑, 오락 등 현대적인 낭만까지 모두 갖춘 곳이다.

버스 창문을 통하여 굴뚝이 눈에 띠는 오랜 된 집들이 보였는데, 그 집 뒤로는 빠짐없이 정원이 있는 것이 특징이란 안내의 설명이다.

현재 집값은 90-150년 정도 오래된 보잘것없는 1 Bed Room의 집이 미화로 60만 불 정도인데 이 값은 6년 전에 비해 40-100%이상 상승한 금액이라 했다.

안내의 말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모르나 집값이 고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기후는 겨울에 눈을 보기 힘들 정도이며, 그렇다고 한여름에도 섭씨 30도를 넘지 않을 정도로 덥지도 안은 편이지만 안개가 많아 우울증환자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영국은 한때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 일컬을 만큼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초강국이었던 잔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며 이 나라는 제조업으로 유명하지만 국제 금융의 30%을 차지 할 정도로 금융업이 발전해 있으며 유럽 연합 상임 이사국이면서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국 화폐인 “파운드”를 쓰는 것을 고집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기준으로 “1파운드”의 가치는 US달러로 2불 정도이다.


가끔 거리에서 “C'라는 글자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무어냐고 물으니, “Control Zone"이라했다.

이 지역은 차량이 이지점을 진입할시 마다 차량 통행료를 낸다는 사인이라는 것이다.

통행료는 승용차를 기준으로 $16정도라 한다. 대기오염과 교통 혼잡을 막자는 정책의 일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런던의 많은 사람들은 150년 이상 된 건물 밑으로 뻗어 있는 지하철이나 지상의 2층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 편이라 했다.

영국은 또한 섹스피어를 비롯하여 많은 유명문학가들을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점심식사를 마친 직후라 나른한 몸들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첫 일정인 Hyde Park으로 이동했다. 런던의 거리는 생각보다 좁지만 구획정리가 잘되어 있었으며 코너마다 영국을 상징하는 키 큰 붉은 원통의 우체통이 눈에 띠었고, 시가지를 누비다 지친 지붕 높은 검은 택시가 길가에 비켜서서 손님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가하면, 2층 관광버스가 시내 관광객을 태우고 거리를 서성이고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의 모습이었지만 또 어떤 거리는 비교적 소형 차량들로 “교통의 혼잡”을 이루는 양면의 얼굴을 갖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런던의 모든 차량은 일본에서와 같이 좌측통행을 하고 있어 차량 우측통행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겐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모든 차량들이 우리 앞으로 달려오는 착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4월의 날씨는 온화한 편이지만 이상 기온현상으로 어제까지 추운날씨로 방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기온이 급상승하는 바람에 거리행인들의 옷차림이 여름옷과 겨울옷이 뒤섞여 있는 것을 목격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차창으로 거리를 관광 하면서 버스는 “하이드 공원”에 가까이 다가갔다.


런던, 하이드공원(Hyde Park)

하이드 공원은 런던의 가장 넓은 왕립 공원이다.

원래는 헨리 8세의 사냥터였다가 찰스 1세가 공원으로 조성한 뒤 1637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는 곳이다. 도심에 이렇게 넓은 녹지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워진다.

하이드파크에서 유명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이다.  마치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같은 공원이어서 중대 범죄 사항이 아닌 웬만한 불평불만은 문제 삼지 않는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187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국에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에는 승마를 할 수 있는 로튼 로(Rotten Row), 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음악당(Bandstand), 아름다운 아치문인 마블 아치(Marble Arch)와 웰링턴 아치(Wellington Arch)가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모두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없어 잠시 스쳐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공원 좌측을 끼고 돌아서자 안내가 숲속의 붉은 궁전을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Diana Princess” 가 살던  켄싱턴 궁전과 아름다운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자빈격인 다이아나가 외간 남자와 염문을 뿌리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여 전 세계의 뉴스거리를 만들었던 “Diana"---!.

그녀가 살던 궁전이라는 말에 모두들 호기심에 고개를 길게 늘여 트리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아이로닉 하게도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유명한 “켄싱턴 백화점” 이란 거대한 백화점이 보였는데 그 백화점 아들이 바로 다이나의 애인으로 다이아나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공원은 유명연예인들의 공연이 자주 있는 편이다.

얼마 전 영국의 유명한 “크리프 리차드”란 가수의 공연 때에는 많은 관중들로 이 넓은 공원이 꽉 채워졌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가수는 지금까지 익명으로 전 세계의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구입 후원금의 20%정도를 분담한 숨은 자선가로 밝혀지면서 인기가 더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가수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존경받는 자선가이기도 한 셈이다. 우리는 공원 한편에 1837년부터 100여 년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위대한 통치자“빅토리아 여왕”의 거대한 동상 앞에서 자유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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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공원의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동상


“빅토리아 여왕”동상 앞으로 다가가니 동상 위에는 수호의 천사의 상이 있었고, 중앙 부분에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여걸답게 풍만한 육체를 과시하며 그녀가 정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상 길 건너편에는 원래 독일의 황태자 신분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 된 “알버트공”의 기념관이 보인다.

마치 로마의  베르시움 원형극장을 방불케 하는 붉은 원형 석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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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공의 기념관

런던, 버킹검 궁전(Buckingham Palace)

우리는 하이드팍(Hyde Park)을 거쳐 “버킹검 궁전”으로 이동했다.

트라팔가 광장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영국 입헌군주 정치의 중심인 버킹검 궁전(Buckingham Palace)은 영국 여왕의 런던 공식 거주지이자 집무실이기도 하다.

1702년 버킹검 공작의 런던 사택으로 지어졌으나 1762년 조지 3세가 사들여 왕족들이 거주하는 여러 저택중의 하나로 지정하였고 1837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처음으로 왕족의 거주지로 지정되면서 1993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격일로 행해지며,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되어 약 45분간 진행 되어 볼만하다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교대식을 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곳에서 집무를 수행하고 주말엔  “Windsor Castle”로 이동하여 부군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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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버킹검 궁전 앞에서 필자,
    휴일이라 문이 닫혀 있고 관광객만 북적인다
.


현재 이 버킹검 궁전엔 400여명의 직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궁전 길 건너편 붉은 벽돌건물에는 황태자 촬스가 살고 있는데 세간에서는 “마구간” 이란 닉네임을 붙였다고 한다.

촬스 황태자부부가 모두  말상이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왕실에는 촬스 황태자와 다이아나와 사이에 두 아들이 있는데 현제 촬스의 나이가 62세나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직도 건장함으로 촬스는 가장 오래 왕자리를 기다리는 황태자가 되는 셈이고, 어쩌면 왕위가 촬스 황태자를 넘어서 다이아나와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윌리암”에게 계승될 수도 있다는 외신 뉴스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주말이 되어서 버킹검 궁전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오직 붉은 유니폼을 입은 초병이 로버트 같은 모습으로 궁전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현재 영국 여왕이 쓰고 있는 왕관에는 다이아몬드가 2,868개, 사파이아가 17개, 에머랄드 11개, 루비 5개 그리고 273개의 Pearls가 부착되어 있어 그 값을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 왕관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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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여왕의 왕관,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2,868개 부착되어 있다.


영국이 아직도 국민의 막중한 세금으로 왕실을 유지 하고 또 귀족 신분제도를 그대로 인정 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왕실이 건재 하고 있음은 영국민 특유의 전통과 자존심이기도 하거니와 잔류하는 귀족제도는 2차 대전 때 귀족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입대 하여 국가를 지킨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사와 존경심이 영국 국민들 마음속에 아직도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궁전 입구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웨스트미니스트 사원으로 이동했다.


런던, 웨스트 미니스터 사원(Westminster Abey)

국회의사당의 서쪽, 팔러먼트 광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웨스트미니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딕 건축 사원으로 영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고딕 양식의 중세교회이다.

웨스트미니스터 사원은 1066년부터 모두 42명의 영국 왕과 여왕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대관식이 펼쳐지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아울러 왕족의 결혼식,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진다.

그리고 역대 영국의 왕과 여왕, 정치가, 작가, 음악가, 기사, 배우, 왕족 등 3,000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무덤으로 처칠의 묘, 엘리자베스 1세의 묘, 헨리 7세의 묘,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묘 등과 같은 유명인들의 무덤이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가 그의  스페인부인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 했으나 캐토릭 룰에 의해 교황청이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당시 종교개혁 물결이 일어나자 이에 편승 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해서 영국특유의 성공회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영국은 현재 70%(혹자는 50%?)가 성공회 신자가 있지만 종교 개혁이후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장로교 등 4가지의 신교가 파생되어 있다.

사원 입구에서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행정중심구역이라는 11번가의 백색 유리창으로 둘려싸인 이민국사무실을 지나 “의회 당과 타워부릿지”를 바라볼 수 있는 Thames 강변으로 이동했다.


영국, 의회당 및 타워부릿지

영국의 민주주의 기본은 불문헌법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영국을 이끌고 있는 힘은 의회당(Houses of Parliament)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런던, 템즈강 건너 빅토리아 여왕 때의 최초 국회의사당


이 의회당에서 그 유명한 마그나칼타, 시민장전을 비롯하여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주옥같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영국을 이끌어 가는 의회 당은 런던의 Westminster지역 테임스 강변에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 같이 고딕양식의 타워를 곁들려 세워져 얼핏 보면 옛날 궁전이나 성당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회 당은 원래 1265년에 세워졌으나 1835년도에 화재로 인하여 붕괴된 것을 건축가 Charles Barry경에 의해 새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의사당을 향하여 왼쪽부분은 하원이, 우측부분은 상원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의회당 양쪽으로 Thames강을 건너는 2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좌측의 붉은색갈의 다리는 상원의 다리, 우측의 초록색을 하고 있는 다리는 하원의 다리라 했다.


런던, 타워 부릿지(Tower Bridge)

런던의 상징인 타워 브리지는 템즈강 하류 의사당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빅토리아 스타일로 건축된 교각이다. 호레이스 존스 경의 디자인으로 8년에 거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런던은 무역의 중심지요 500개의 금융계통의 회사가 있을 정도로 경제의 요새지답게 런던을 상징할 수 있도록 80만 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이 다리를 건축했다 한다.

이 다리는 120년 전에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세계 2차 대전 때 파괴되었으나 16세기경 영국의 정치가 Oliver Cromwell의 개인 저택에 커튼을 드리운 형상 같은 모습을 본 따 전통성을 살려 재건축했다는 것이다. 이 다리는 강 중간에 142‘의 높이의 두 개의 아름다운 타워를 세워놓고, 이를 관통하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양쪽 타워사이의 다리는 큰 배가 지날 때는 영도다리처럼 완전히 들려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건축 되어있다 한다.

“Tower Bridge"의 전망이 좋은 우리가 서있는 템즈 강변에는 기울고 있는 모양의 유리 빌딩이 있었다. City Hall Building이다.

 

 런던, 템즈강의 타워 브릿지 와 기우러진 모양의  시청 유리 건물


유행의 첨단으로 금방 옆으로 쓸어 질듯이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유리건물은 설계사 로만포스타 의해 건축 되었다고 했다.

피렌체 서쪽 30km에 있는  “피사 탑”을 연상하게 하는데 피사는 지금도 조금씩 계속 기우러 지고 있는 데 반해 이 시청건물은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감명을 주고 있다.


영국, 대영박물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18세기 초에 창립하여 현재 255주년을 맞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박물관으로서 44개의 이오니아식 원주가 받치고 있는 장엄한 그리스양식의 건축물이다.


 

  영국, 대영박물관 입구


이박물관은 비록 그들이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제국을 호령할 때 침략지로부터 강제로 들여온 자료들로 전시되어 있었지만, 창립 이후 지금까지 세계 인류 문화재를 수집 전문적으로 보전하여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대영박물관의 기초는 슬로언 경(1660-1753)이 수집한 79,575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국왕 조지 2세에게 기증하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대영박물관은 무료입장이다.

그러나 출입 시간은 엄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관광을 수용하기위해 질서가 중요했기 때문이라 생각 되어 이해가 간다.


이박물관의 무료입장은 영국이 침략지인 식민지로부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강제적으로 반입한데 대한 사죄(?)를 의미하는 것이거나 이 박물관을 통하여 한때 유럽의 종주국으로서의 영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을 이용하여 엄청난 관광객을 유치하여 막대한 관광 이익을 노리자는 국가 전략차원과 무관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대영 박물관은 처음에 나포리에서 배 2척분의 도자기와 로마에서 유명한 조각품을 사온 것을 비롯하여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을 시작으로 박물관의 면모를 다져갔다.

그리고 이박물관에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품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1799년 영국의 엘킨 경이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플대사로 임명 된 이후 1816년경 그리스 당국의 허가를 받아 조각품들을 영국으로 들여와 전시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1823년의 고대 이집트의 국왕 “아멘호텝 3세의 두상”, 그리고 이집트를 통일 시킨 “람세스 2세의 두상” 원본이 전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엔 BC 7,000 토기이전신석기시대, BC 4,000 토기신석기시대, BC 2,000 청동기시대를 비롯하여 1811-1820년도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강의 평원에서 발견되었다는 글씨가 새겨진 벽돌과 원통 도장, 음악 점토판 문서 등을 볼 수 있었으며, 바빌로니아 및 앗시리아의 중요 생산품을 비롯하여, 문명의 발생지 유역의 국가들을 포함하여 로마제국으로부터 오토만 제국을 거쳐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주옥같은 보물들이 수없이 전시 되어 있었다.


고대 근동 지방 전시실

기원전 4,000년경에 사용했다는 채색물잔, 기원전 6,000년경의 조각품으로 추정되는 덤불속의 양, 2,600년경에 사용했다는 우르왕의 깃발,  기원전 2,333경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메소포타미아의 돌 도장 및 신상, 기원전 700-500으로 추정되는 돌 판에 새겨진 바빌로니아 상형문자, 기원전 865년경의 머리는 사람이요 몸은 사자인 사자 상, 한때(기원전 9-7세기) 이집트에서 페르시야 만을 지배했던 앗시리아 궁전의 부조 물로 조각된 왕들의 위엄을 나타낸 석판, 기원전 7세기 성경에 나오는 바빌로니아 대홍수이야기가 상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 금팔찌 등을 볼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 전시실

이슬람의 역사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후 그곳에서 신자들이 사회를 형성하면서(서기 622년)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선 이들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는 이슬람을 비롯한 당시 열강들의 유물들이 이곳 영국 박물관의 전시품을 통하여 관측해 보는 것도 흥미스러운 일이다.

서기 1200년경 이미 고도의 금속공예의 면모를 갖춘 황동 물 항아리, 이슬람계율로 화려한 묘지건축을 금하고 대신 기념비를 세워 죽은 이를 추모하는 대리석조각판(자비로운 하나님의 이름으로),도기 접시, 금화, 구형향로, 회교 사원에 비치하기위한 금박을 입힌 채색 유리 램프, 자기대야(터키산-서기1530-40), 무굴제국의 황제들이 즐겨 수집했다는 1625년경에 만들어진 금과 루비로 장식한 단도 등 이외의 이슬람세계의 역사적 유품을 통하여 그들의 특성 및 발전상을 살필 수 있었다. 회교도들은 복종을 의미 하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예언자 모하메트가 신의 계시를 받아 그 내용을 코란에 기록했다는 경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같이 한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한명의 예언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성직자 제도가 없는 대신 법적, 신학적 충고를 하는 신학자와 회교사원에서 기도를 인도하는 “이맘” 이란 것이 있다.

회교도들은 이슬람의 5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

1)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예언자 마호메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확신을 갖아야 하며

2)기도,

3)자선

4)회교력(성스러운 라마단)의 제 9월중 단식

5)가능한 메카로 성지 순례가 그것이다.


아프리카 전시실

전시된 토기를 통하여 아프리카는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수공으로 제작된 튤립 물 컵을 보면서 이들은 기원 전 1,750년경에 튤립 꽃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물 컵을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680년경에는 이집트의 스핑크스의 영향을 받아 신전을 지키는 스핑크스를 만들었음을 볼 수 있었다. 교회 무덤 벽화에서 이집트의 통치시절 파라오 왕에게 금, 향, 동물 등을 바치는 모양의 벽화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이마에 십자가가 새겨진 청동주물, 나무 가면, 구리와 철제 던지기 용 칼, 사암조각, 을 비롯하여 근대 2,000년경 케냐에서 출생했다는 “앙모아 오둔도”가 만들었다는 도자기 등을 볼 수 있었다.


이집트 전시실 

이집트 아랍 공화국(아랍어: 굼후리아트 마스르 알 아라비야, 또는 줄여서 이집트(이집트 아랍어: 마스르, 문화어: 에짚트)는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1922년에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며 1953년, 육군 장교인 나세르가 공화국을 선언하였고 카이로(아랍어로 '카히라')를 수도로 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 나일 강 유역의 주민들은 주위의 아프리카 주민들과는 다른 문명을 소유 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일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개발하기 시작 했고 사냥기술과 석기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집트는 제1 왕조 탄생인 기원전 3,100-2,800보다 500년 이전(기원전 3600년)에도 이미 석영으로 만든 무기로 사냥을 하면서 정착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그들은 기원전 3,100년 전경에는 나일 강 계곡과 하구의 삼각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멤피스에 최초의 수도를 건설하여 왕권의 중심이 되고 국왕은 파리오(큰집)라 불렀고 인간인 동시에 태양의 아들인 신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일부 입증할 수 있는 기원전의 유물로 전쟁터를 묘사한 팔레트의 조각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림이 조각된 상아손잡이의 석 칼등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이집트를 통일한 위대한 왕 제 19대 왕조“람세스 2세”의 신전에 있던 역대 왕들의 이름이 상형 문자로 새겨져 있는 “카투쉬”라고 불리 우는 타원형 돌 판 조각을 볼 수 있었고,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의 윗부분이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전시 되어 있었다.


 대영박물관내,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왕의 석상


또한 많은 미라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조시대 이전의 무덤에서 간단한 부조물들이 발견되어 온 것을 보아 이들은 이미 사후의 세계를 믿어 왔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후에 영혼(카)이 머물 수 있도록 석조로 무덤을 짓고 시체를 썩지 않도록 미라를 만드는 법을 개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라는 초기에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어 뜨겁고 건조한 모래에 의해 시신이 보존 되도록 해오다가, 후에 장기는 모두 빼내어 “카노피” 라는 단지에 장기별로 따로 보관하고 시신은 천연 탄산소다인 자연소금을 이용해 건조시키고, 시신을 고운 아마포로 쌓아서 부적과 귀금속을 덮고 여러 겹의 관속에 넣어 무덤 속 묘실에 있는 거대한 석관에 안치시켰었는데 그 유물들이 거의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출토된 고분벽화, 소로 경작하는 부장품, 그림이 그려져 있는 상자 등을 통하여 이들의 문화의 발전과 이집트의 고대 귀족의 생활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대 왕릉에서 출토된 유품과 상형문자 등을 통하여 이들은 어느 민족에 앞서 찬란한 문화 문명의 발전을 주도해온 민족임을 느끼게 했다.


중국 전시실

이곳에는 기원전 3,500년 전 신석기시대의 석재유품, 기원전 1050-771년 것의 의식 및 예식용에 사용된 청동제기 등이 다량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기 618-1125년경에 사용했다는 금은 머리빗 등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8세기 당 왕조 고창지방에서 발굴했다는 채색된 점토와 나무, 비단으로 만든 부장용 말과 청동주물의 반라의 씨름 상, 날개달린 백자의 인어 상, 수초와 물고기가 그려진 자기 접시, 도기 재판관 형상, 찬란한 칠보 자기단지 등의 정교한 작품들이 거의 원형대로 수집되어 중국이 아닌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전시실

한국 전시실은 빈약한 편이었다. 한국 문화 전파를 위해 보다 넓은 외교력이 요구된다.

그곳에는 고려청자, 유학자의 초상화, 고려 1341년 아미타경의 채색사본, 청동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말 모양 청동 띠고리, 금귀고리 등을 볼 수 있었다.


인도 전시실

인도지방의 최초인류 정착지는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되나, 문명의 발생은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1,900년경부터 인더스문명이 쇠퇴해 지고, 기원전 500년경부터 갠지스 강 유역에 히스티나푸라, 카우삼비, 바라나시, 그리고 파탈라프라 같은 대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도문명의 발생과 발전의 한 단면을 대영박물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새겨진 동물조각 과 현재까지 해석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자가 새겨진 도장, 동석을 보면서 인도의 찬란한 문화 문명을 새삼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소형 부도탑 모양의 사리함과 인도의 흰두교 성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원 모형, 만물을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사바나타리자의 청동상”, 불교에서 가장 높은 여 보살이라는 “타라 금동 상”, 8세기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티벳에 전했다는 “파드마삼바의 청동상”판에 새겨져있는 찬델라 왕조를 상징하는 조각물, 그 속에 아직도 그 당시의 고승의 사리와 동전까지 보관되어있었다.


일본 전시실

일본의 유물은 원래 역사가 없는 나라이어서 그러한지 칠기 벼루 집, 노가면, 채색 목각 그리고 후지 산의 그림 등 이외에 별로 인상적인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일본은 유명박물관에 일본관을 마련하고 있는 외교술과 앞을 바라보는 긴 안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영 박물관을 둘러보고 6시30분경에 그곳을 나와야 했다.

우리는 런던시내에 위치한 한인 식당에 들려 생태찌개로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늘 느끼고 있는 일이지만 여행사에서 얼마나 여행객 식사 메뉴의 단가를 내려놓았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여행지에서의 한인 식당의 질과 량은 낙제점수이다.

저녁식사를 하고난 후 호텔로 가는 도중 런던 번화가를 돌아서 통과하기로 했다.
 

 

  런던 시내 2층 버스가 이색적이다.


극장 문화 공간이 집중되어있는 런던 시가지를 차창을 통해서라도 더 보고 싶다는 일행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 시내 복판에 “레미제라블”이란 대형 포스타가 보였다.

현재 35나라, 249개 도시에서 9,000번째 공연을 하고 있다는 “레미제라벌”을 아직도 이곳 런던에서 상영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작품의 위대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 극장을 지나자 “오페라 유령”의 포스타가 붙은 극장과 “마마미아”를 상영하는 극장이 연이어 보였다.

극장가를 지나자 좌측으로 울긋불긋한 낮 익은 색깔의 건물들이 운집해 있는 마을이 보였다. 중국 촌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런던의 중심 거리는 고풍이 풍기는 오래된 4-5층의 석조 건물과 현대 멋을 한껏 살린 초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사이로 현대를 상징하는 승용차가 바쁘게 돌아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비교적 많은 인파가 거리를 활보 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도 교통난의 심각한 문제가 예외가 아님을 쉽게 간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혹 대한항공이란 한글 간판도 눈에 띠었으나 거리 상가는 비교적 간판이 없거나 있어도 작은 간판이 달려 있어 간판 미화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도시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런던은 “고대, 현대”를 한곳에 축소시켜 미래로 향하는 역동적인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은 한때 제조업으로 세계두각을 나타내던 나라에서 이제는 아이디어 사업으로 전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런던 거리의 보통 상점의 문 닫는 시간은 저녁 7시이고, 일요일엔 통상 상점을 열지 않는 것은 미국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일행들은 강행되는 일정으로 피로한지 졸고 있었다.

필자도 졸음이 쏟아 졌으나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억지로 참고 있었다.

한 시간이 훨씬 넘는 버스 이동 시간으로 보아 호텔은 시가지를 벗어난 교외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사가 런던 시내의 호텔비가 비싸 교외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일 아침 파리 행 열차출발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역과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는 가이드의 해명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Holiday Inn Hotel"에 도착했다.

“아침 기상시간은 5시 20분, 호텔 Check out 시간은 6시10분, 아침은 도시락으로”라는 가이드의 간단한 안내를 받고 각자 호텔방으로 헤어졌다.


“프랑스의 파리” 편


프랑스 파리로 가자

5시 20분 Wake Up Call Phone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우리 부부는 기상하였다. 고단 하지만   어제밤 몸을 씻고 워낙 늦은 시간에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아 비몽사몽 뒤척이다 6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비에 나오니 일행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다.

모두들 부지런하다고 생각 되었다. 가벼운 인사들을 나누고 함께 버스에 올랐다.

8시30분에 예약된 런던 발 파리행의 특급열차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St. Pancras International Station"역전에 늦어도 8시까지는 도착해야 한다며 7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안내가 나누어주는 도시락은 빵 두 조각과 요그릇이 전부였다

다이엇을 하는 사람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여행사가 경제성만 고려한 음식이지만 모두들 여행 중 고생을 각오 했는지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호텔에서 역전까지는 30여분정도 걸려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출발시간 까지 1시간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챙기고 출발해도 충분한데 비상을 걸어 고생시키고 있다고 잘 참고 있던 일행들이 한마디씩 불평을 시작했다.

안내가 준 것으론 아침을 대치 할 수 없어 아침식사거리를 찾아 역구내를 살피니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 있었다.

터키 샌드위치를 주문하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열을 가한 철판에 압축 시켜 뜨끈뜨끈하게 만들어 주었는데 따끈한 한 잔의 커피와 곁들이니 그런대로 입맛을 돋웠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프랑스로 들어가는 입국 수속을 시작 하였다.

입국 수속이라야 안내가 여권을 모아가지고 출입국사무실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역전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칸막이로 국경을 가르는 출입국 관리국이 있었다.

이 영국 역전에서 칸막이를 통과 하면 프랑스 영토에 진입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극장입구에 서있는 검표 관 앞을 통과 하듯 입구에 서있는 관리국 직원을 지나니 여권 수와 통과하는 사람의 수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쉽게 통과 시켰다.

우리가 타고 갈 특급 열차의 비용은 미화 $300으로 소요시간은 3시간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또한 파리로 가는 도중 지구상에서 가장 길다는 영불해협을 해저로 통과하게 된다.

아침 8시 30분이 되자 우리를 실은 열차는 파리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우리는 열차가 파리로 달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일행들과 격의 없이 각자 현재 거주지에 이민 하게 된 동기와 그간 고생담을 나눌 수 있었다.

특히 뱅쿠버 예비역 공군대령의 옛날 파이롯트 시절의 경험담은 지루한 열차시간을 단축시켜준 느낌 이었다. 이 열차는 3시간 가까이 달려 현지시간으로 오전 11시가 되어서 "Paris Nord"라는 파리 북쪽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리는 런던보다 1시간이 늦은 시간차가 있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엔 ---.

프랑스는 남북으로 지중해에서 영국 해협과 북해까지, 동서로 라인 강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유럽 연합을 세울 때부터 유럽 연합 내에서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다(1966년 탈퇴, 1992년 재가입). 프랑스의 노동법은 만 16세 미만의 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프랑스 북부 일 드 프랑스 지방의 중앙에 있다. 세느강을 기준으로 우안(rive droite)과 좌안(rive gauche)으로 나뉜다.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에는 소르본을 비롯한 대학 및 그랑제콜 연구소 등이 집중해있다 소르본대학은 많은 최고 경영자를 배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1894년 6월23일 이 대학에서 개최된 스포츠 관계자 국제회의에서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를 창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면적은 105㎢. 인구는 1999년 기준으로 213만 명이다. 파리 시의 행정 구역은 1~20구로 나뉘어 있다. 관광객은 년간 7,900만명, 관광 수입은 그들의 GDP에 6%나 차지할 정도로 높은 편이다. 이 나라는 교육평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 학벌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이다. 파리를 일컬어 예술의 도시 또는 유행의 도시라고도 한다.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하고, 에펠탑의 조명을 감상할 수 있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세느강이 연인들과 시인들의 접근을 유혹하는 도시, 지구상의 유행 첨단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 도시이다.

이러한 제반 명분들은 여행을 좋아 하는 사람들에게 이도시를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드디어 파리 "Paris Nord"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현지여성 가이드의 안내대로 대기 하고 있던 버스에 짐을 싣고 우선 점심을 하기 위하여 현지 식당으로 갔다.

점심 메뉴는 파리에서 유명하다는 달팽이 요리였다.

양념에 삶은 소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달팽이는 작은 폭크로 돌려 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일인당 6개씩 서부 되었다. 메인 Dish 가 나오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한 아페타이져로 달팽이 요리를 끝내니 메인 Dish로 Steak이 나왔다.

말이 스텍이지 샌드위치용으로 준비해놓은 것이 얇은 고기조각이 서브되었다.

여행사와 가격을 맞춘 탓에 그이상의 서비스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리의 이색적인 달팽이 요리가 있어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 점심을 끝내고 앞으로 여행중 필요한 유로를 환전 하기위하여 유태인이 운영하는 “Grand Boulevard"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공식적인 사설 국제 화폐 환전장소이며 은행보다 좋은 조건으로 환전 할 수 있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 했다.

환전이 끝나자 우리는 파리의 중심가로 서서히 이동을 시작 했다.

파리의 중심가에 500년 되었다는 일반 성당도 자리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나포레옹 시대에 건축 되었다는 4-5층의 건물들이 전후좌우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석조 건물들이 햇볕에 반사되어 마치 두부를 반듯하게 잘라 놓은 듯 하얗게 입체형을 이루고 있어 설계도의 모형물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아래는 상점, 위는 주거지 아파트가 있는 “지상 복합 아파트” 형식의 석조 건물이 많이 보였다.

누구나 파리에 왔으면 최소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나포레온 개선문은 보아야 한다는 말을 상기 하며 우리는 시가지를 지나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사전 예약된 시간을 엄수해야 되며 4명 이상일 경우 실내 안내원이 필요한 곳이라 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LOUVRE)”을 찾아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전에는 박물관 관람을 그리 좋아 하지 않은 편이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점과 유명화가 들의 그림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 등을 이해하기가 난하여 따분한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여행을 하면서부터 “유럽의 여행은 박물관이 시작이고 끝”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물관을 통하여 유럽의 흥망성쇠의 발자취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제국을 형성했던 로마나 그리스 그리고 파리는 현재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며, 각국 마다 찬란했던 궁중 문화는 그 나라의 부강의 척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파리에는 “루브르 박물관” 이외에 60여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이 있다한다.

루브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서 8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국가 발전과 왕가의 파란 만장한 역사가 서려 있는 기념물이라 볼 수 있다.

루브르의 200년의 긴 역사와 규모가 하도 방대하여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며, 그렇다고 루브르 박물관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하루에 10만 이상의 관람객들이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우리가 센 강변의 '튈르리 정원' 앞에 도착하니 디귿자 형의 거대한 성곽 같은 건물과 정방형궁정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건물이 바로 “루브르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사이와 궁전입구엔 투명 유리 피라미드가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파리의 루브르 궁전 앞 유리 피라미드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소아 미테랑(P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제시한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의 하나로 공개 공모에 의해 당첨된 설계로 건축된 작품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고대와 현대를 연결시켜 놓은 20세기의 걸작 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설계자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이라는 사람이다.

이 피라미드 밑에는 중앙홀(나포레옹 홀)이 있고, 안내소와 매표소가 있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리슬리관(Richelieu), 쉴리관(Sully), 드농관(Denon)”으로 나뉜다.

기술실과 방문객을 효과적으로 관리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라 한다. 방문객은 누구나 입구에서 보안점검을 위해 보안 X-Ray를 통과 하여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이곳에도 9.11테러폭파의 영향으로 보안 검열이라는 새로운 검문 과정이 생겨 난 것이다.

이렇게 보안검열을 받고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현대와 고대가 함께 통하는 유리 박물관 밑 통로를 거쳐 박물관 안으로 진입했다.


루브르 박물관 내부

박물관엔 1일 평균 10만 정도의 인파가 방문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박물관 안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관광객 모두에게 수신기를 착용하게 하는 덕분에 그렇게 혼잡한 박물관내에서 가이드를 바짝 따라 붙지 않아도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오랜만에 Up Grade된 관광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전시되어 있는 유물만 볼게 아니라 박물관 중앙부로 들어가면 초기의 건물기초를 살펴보아야 할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이 궁전은 12세기 말 영국군의 침공에 대비 하려는 목적으로 필립 어거스트(1165-1223)가 세느강을 이용하여 남서쪽 모퉁이에 탑과 건물과 성곽을 건축하여 “뤼파라(Lupara)라는 잡초 우거진 버려진 땅에 요새를 구축하여 감옥과 병기창 그리고 왕실의 보관소로 사용하다가 후에  본채를 높이고 새로운 건축물들을 확 트인 공간의 화려한 ”나선형 계단“으로 연결시켜 중세 왕궁의 면모를 갖추어 놓았다.


 

유리 피라미드 밑, 박물관 매표소


이곳을 샤틀 6세가 잠시 궁전으로 사용하면서 고딕 스타일의 아름다운 거처에 왕의 희귀품인 보석 및 귀중품을 가득 채우고 격조 높은 서재를 꾸며 놓았다.

그러나 샤틀 6세의 광기어린 성품, 계속되는 내전 그리고 백년전쟁 등을 겪는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왕들은 파리를 떠나 르와르강 주변에 머물면서 이곳을 방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소와 1세(1494-1574)때 프랑스 왕국의 궁전으로 다시 개조 발전시키게 된다. 소위 이시기를 “루브르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608년 앙리 4세 때 이르러 파리를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지로 표명하고, 예술가들에게 개방되는 황제의 도시 건설을 꿈꾸며 센 강 연안을 따라 매우 긴 건물인 “그랑드 갤러리(Grande Galerie) 또는 강가의 갤러리”를 건설하기로 하여 루이메뜨조와 쟈크 두앙드루에뒤 세르쏘(Jacques ll Androuet du Cerceau)에 의해 460m 길이의 웅대한 모습으로 완성시켰으나 루이 14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매료되어 파리를 떠난 후 18세기 까지 그 궁전은 방치되어 잡다한 인종의 예술가들이 몰려 살기도 했다.

그 후 1802년 나폴레옹1세가 궁전 재건을 시도 하면서 궁 안뜰 입구에 카루셀 개선문을 세우고 공원을 서로 연결하는 널찍한 길을 내는등 의욕을 보였으나 그는 루부르 왕궁연결지점의 북쪽 측면공사를 하는데 그쳤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3세가 즉위 즉시 궁정 양쪽에 세 건물을 추가로 세우고 옛 건물과 하나로 연결하면서 정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입체감 있는 궁전으로 탄생시킨다. 이렇게 황제의 도시가 탄생했으나 후에 “코뮌” 파리 혁명 자치정부가 들어서고 1870년에는 보불전쟁이 발발 하면서 이 건물은 화재에 많은 부분이 손상 된다.

루부르 궁전은 프랑스의 혁명의 격동기속에 1793년 8월 10일 공식적으로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그러나 중앙미술관은 1768년 마리니 백작이 당시 계몽주의와 철학가들에 힘입어 루이 15세에게 왕실 소장품을 국민에게 전시할 것을 건의 하였다가 거절당하였으나 앙기 빌러 백작이 루브르에 보관된 왕실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고 손상 입은 그림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초대 관장인 위베르 러베르가 천정에 조명을 설치했다고 한다.

1791년부터 예술가 위원회가 결성되어 박물관개관준비를 마치고 회화들이 전시되고 고대 미술품이 전시된다. 1803년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재 명명된 루브르는 당시 비방드농(Vivant Denon)의 지휘 하에 특별한 전시실을 증축 하였다.


이 박물관의 특징은 소품들을 일관성 있게 부별로 재분배 해놓은 것이다.

지하입구층에 이슬람 미술, 프랑스 조각, 고대 이집트, 고전기 이전의 그리스, 에투리아, 로마, 그리고 루브르의 역사실과 임시전시실이 있고, 1층엔 5-18 & 18-19세기 프랑스의 조각품,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 고대 에투루리아 및 로마, 그리고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및 아메리카 미술품이 2층엔 고대이집트(파리오시대), 고대 그리스세라믹, 청동등의 귀중품, 프랑스, 스페인 , 이태리, 영국국가 등의 회화, 그밖에 그래픽 및 임시전시실, 3층엔 프랑스회화(14-19세기),15-16세기 독일, 17세기 플랑드르, 16-17세기 네델란드,벨기에,러시아,스위스,스칸디나 비아 국가 등의 주옥같은 회회들이 전시 되어있다.

통상의 경우 박물관내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나 루부르 박물관은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유명한 작품 몇 개를 선별하여 소개 하고자 한다.


작품 1 : 밀로의 비너스

나는 낮이 익은 여인상 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 유명한 비너스 상 앞이다.

비너스 상은 양팔이 없는 반라의 그리스의 여신(아프로디테 또는 바다의 여신 암피트리테)이다.

밀로라는 섬에서 발견되어 통칭 밀로의 비너스(La V'enus De Milo)라 불리기도 한다.
 

     루브르 박물관의 밀러의 비너스


 반라의 이여신은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아한 분위기로 절제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고전적 미와 혁신적인 기법을 함께 엿볼 수 있어 이박물관에서 그리스 미술 소장품 중 특출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 2 :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

기원전 190년경 사모트르케라는 사람이 대리석으로 제조한 높이 3.28m의 여신상으로 배의 안전과 승리를 기원하는 봉헌 물로 고대 그리스의 함선위에 부착했던 작품이다. 이작품의 특징은 머리와 두 팔이 없으며 양 날개가 있었다. 아름다운 몸매에 휘감겨있는 물보라로 장식된 주름무늬는 태풍에 저항하는 강인한 여인처럼 보인다.


     루부르박물관에 전시된 “승리의 여신상”


오른쪽 날개 일부가 잘려 나간 것을 석고로 다시 만들어 놓아 세밀히 관찰하면 진품 날개와 차이가 있지만 그 서정적인 특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승리의 여신상”은 나포레온 3세 때 훽토르퓌엘(Hector Lefuel)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웅장한 계단윗부분에 전시되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품 3 : 모나리자

여인의 온화한 미소로 우리에게 모나리자로 알려져 있는 이 회화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나리자는 모조품이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모나리자는 진품이라는데 의미가 있었다.

이작품의 원래 이름은 “리사 게라르디아의 초상화”였으나 통칭 “모나리자 또는 라조공드”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거장 “레오날드 다빈치”가 0.2mm의 세필로 4년여에 걸쳐 그렸으나 아직도 미완성으로 생각하며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프랑스에 가져갔다가 프랑소와 1세에게 돈을 받고 팔아버린 그림이다. 그 후 다빈치는 1519년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때 이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자국작품으로 회수해 갔다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가 돈을 지불하고 정식으로 구입한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다시 프랑스로 환원되어 이곳에 전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누구였을까?

혹자는 화가 자신을 여성으로 표현한 자화상으로 보기도 한다.


     루부르박물관에 전시된 진품의 모나리자상


그러나 정설은 피렌체의 부호 “프렌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 디 자놀리 델 지오콘도(Francesco di Bartolomco di Zanoli del Giocondo)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아(Lisa Gheradini)”가 두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불행하게도 그 아이를 잃어버리는 비운을 당하고 슬픔에 젖게 된다.

프렌체스코는 아내 리자를 위로하기 위해 다빈치를 초청하여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모델의 신원은 현재 까지 정확히 알려 지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모나리자가 미스인지 부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막연히 처녀일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모델의 진실이야 어땠던 이 초상화로 인해 이상형인 여인으로 이탈리아 회화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모나리자의 그림(사본)을 여러 군데서 보아왔지만 그림 속 여인의 미소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아 그림을 지나쳐 왔었다. 무지의 소치인지 모르지만 그림 속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엷은 미소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모나리자는 나의 마음속에 새로운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양 어께를 덮을 정도로 늘어뜨린 긴 머리와 적당히 살이 찐 균형 잡힌 얼굴과 옛날 귀족의 아낙네가 흔히 입고 있는 흑갈색의 아름다운 드레스 속에 감추어진 풍만한 육체를 상상할 수 있었으며, 하얗게 드러난 여인의 목과 가슴부위 그리고 손등을 통하여 이 여인의 완숙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다빈치가 세필로 수없이 터치를 반복하여 입체감 있게 표현된 은은한 명암은 그녀의 다문 입술위로 조용한 미소가 떠오르게 했으며 그녀의 오뚝한 코 그리고 청아한 눈망울을 통하여 여인의 정갈함과 따뜻함이 넘쳐 나오는 듯 했다.

한마디로 모나리자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하여 “여인의 삶의 행복과 미래의 꿈”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모나리자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의 아내 “리자”가 맞는다면 이 여인은 부호가의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포근함과 여인으로서의 완숙미가 함께 넘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 되었다. 혹자는 다빈치가 4년 동안 심혈을 기우려가며 자기의 이상형의 여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모델 “리자”라는 여인이 원래 눈썹이 없었는지 알 수 없으되, 화폭에 나타난 모나리자의 얼굴엔 눈썹이 없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 4 :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대관식 장면

루부르 박물관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작품 중에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을 기념하기 위하여 황실 수석화가 “다비드”가 그렸다는 높이 621m, 폭 9.79m “나포레옹 1세 황제 대관식”을 그린 대형 작품이다.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식 장면


이 그림은 19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되었다는 나포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하는데 그림 속에는 사랑하는 6세의 연상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어 주고, 교황 바오로 7세가 축복을 내리고 있는 호화로운 장면을 조화 있게 돋보이게 한 다빈치의 상상력이 잘 나타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포레옹 1세 황제 대관식”그림에는 좌편에 5명의 나포레옹 여동생이 나란히 나열해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엷은 희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궁전”에 전시 되어 있는 같은 그림에는 5명의 여동생중 좌측에서 2번째 여인에게 핑크색 드레스를 입혀 놓았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다빈치가 그녀를 짝사랑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관식 그림은 후세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짓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구설수에 올라 있다.

1) 우선 나포레옹이 키가 작은 사람인데 크게 그려 놓았다는 것.

2) 나포레옹의 어머니 “나타시아”가 나포로옹의 연인 조셉핀을 싫어하여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대관식 중앙에 높다랗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림의 웅장함 속에는 나포레옹의 위력이 얼마나 컸었나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 5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을 묘사한 그림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작인 이 그림은 대각선 구도로 여인을 상징하는 상체 나체를 비롯하여 엘리트, 학생, 소년 등 모든 계급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고 흰색, 붉은색, 파랑색등을 통하여 자유, 평화, 평등을 추구 하는 역동성을 나타내는 혁명적인 작품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샤를 10세가 즉위하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대다수 시민들의 선거권을 박탈하자 민중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1830년 7월 28일 민중이 일어난 것이다.

이 혁명으로 1830년 8월 3일 샤를 10세는 퇴위 당했고 시민 왕으로 “루이필리프” 등극한다.

작가 “드라클루아”는 혁명직후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잔해 위에 우뚝 서서 민중을 전투로 이끄는 한 여인에 의해 상징된 자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라 생각 된다. 이작품은 사실주의와 상상의 세계, 휴머니스트적 이상에 대한 묘사와 야만적 주제를 적절히 조화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그림은 1831년 루이필리프가 전시회에서 구입하였으나 반체제적 성격이 담겨 있다고 해서 공개 하지 않고 25년간 숨겨 두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으로 인해 다른 혁명이 점화 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니 이 그림의 위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루브르에는 주옥같은 미술품과 조각 작품들을 많지만 모두 소개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오페라 하우스”거리

파리는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가 오늘의 시가지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한다.

우리는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거리에서 잠간 멈추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 거리


그리고 나포레옹이 오스트리아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하늘높이 치솟은 “청동 기념비”를 잠간 돌아본 후에, 하루 밤에 $2,500의 숙박료(Suit Room)를 지불해야 한다는 350년 전에 건축되었다는 고풍의 호텔을 지나서 개선문으로 이동했다.


콩코르드광장에 잠간 들려

이 광장은 757-79년에 걸쳐 루이 15세의 지시로 작크앙쥬 가브리엘의 설계를 기초로 만들어진 광장으로 한때 루이 15세 왕의 기마상이 서 있다가 혁명 때 파괴 되었으며, 그 후 단두대가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분수대


설치되어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그의 왕비 마리앙트를 비롯하여 단튼, 롤랑부인, 로베스피엘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곳이다.

39세의 나이로 단두대선 루이 16세는 “나는 결백하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끝으로 앞으로는 더 이상의 희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당당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곳을 “콩코드르광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795년이며, 1836-40년까지 건축가 히틀프에 의해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광장 중앙엔 이집트 룩소르에서 가져온 높이 23m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이조형물 전체에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1831년 모하메트 알리가 루이 필립에게 기증했다지만 나포레옹이 강제로 수탈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

상형문자는 태양신을 숭배하던 BC1300년경 람세르 2세의 업적과 영광을 고대 이집트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오벨리스크 (그리스어로"바늘")란 뚯은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광장의 4구석에는 8개의 여인상이 서있었는데 프랑스의 주요도시를 상징한다.


파리, 개선문 과 상제르제를 찾아서

나포레옹은 프랑스를 근대화시킨 위대한 지도자답게 파리곳곳에서 그의 업적을 나타내는 잔유 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1806년 나포레옹이 프랑스 군에게 바치기 위해 제작을 지시한 것으로 “샤르그랑”이란 건축가가 완성한 1개의 아치로 되어 있다. 이문은 상제리제거리 언덕정상에 자리 잡은 드골광장에서 12개의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있는 중앙에 세워져 있다.

이날 아치 중앙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평상시에 없던 깃발이 VIP 방문 행사를 위해 깃발을 달았다는 것이다. 개선문은 높이 50m, 폭 45m의 대형아치형의 작품으로, 아치 표면에는 지원병 출발을 의미 하는 “마르세이즈”(오른쪽 부조물)를 비롯하여 많은 부조물이 새겨져 있었다.


 

  

파리의 개선문(나포레옹이 프랑스군에게 바치기 위해 건립)


개선문 아치 바닥 부분에는 1920년 이후 프랑스를 위해 산화한 무명전사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무명전사의 묘(제단)”가 있었는데 그 묘 제단에는 지금도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많은 꽃다발과 향불이 타고 있었다.


 

개선문 밑, 무명전사자의 묘지(제단)


우리는 개선문을 둘러보고 상제리제 거리에서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유난히 많은 마로니에 나무가 늘어선 거리, 서쪽으로 “콩코오드 광장” 까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는 그 거리를 일행들과 떨어져 아내와 단둘이 거닐어 보았다.

햇볕이 유난히도 내려 쬐이는 날씨였지만 마로니에 그늘을 찾아 보도 불럭을 거니노라니 옛날 연애 시절이 생각났다.


 

  

파리, 상제리제의 거리에서


현재 상제리제 거리 양쪽에는 공원지대가 조성 되어 있고 거리 양쪽에는 호화로운 상점, 극장, 레스토랑, 중요 항공 회사 등이 보도를 따라 늘어서 있다.

프랑스의 제 2왕정 시대당시는 파리의 살롱, 밀회장소, 귀족들의 주택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시가 함께 흐르는 “미라보 다리”

자유 시간이 끝나자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모여 전망 좋은 세느 강변으로 이동했다.

큰 뱀의 몸통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느 강변을 중심으로 인근에는 에펠탑, 노들탐성당,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숱한 공공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세느강의 미라보다리를 와보고 싶었었다.

대학시절 필자가 애송했던 “미라보다리”라는 시의 진원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내에게 미라보 다리를 찾으니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다리를 가리키며 내일 그곳을 지나게 된다고 말했다.

미라보 다리는 세느 강을 가로 지르는 몇 개의 평범한 다리중의 하나이지만 이 마을 태생인 아폴리네르 (Apollinaire,Guillaume:1880.8.26 ~1918.11.9:소설가/낭만시인)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애절한 회한과 추억”을 담은 애절한 시가 머물고 있기에 젊은이들의 마음에 특별하게 다가오고 있는 곳이다. 그 시의 제목이 바로“미라보 다리”이다.

안내가 가리키는 미라보다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센강의 다리 야경  


미라보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파리, 몽마르뜨 언덕

4월 27일 아침 8시에 오늘은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날이다.

프랑스어로 “몽”이란  산이란 의미이고, “마르뜨”는 순교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려면 고생 꽤나 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언덕이 높지 않게 느껴졌다. 언덕양편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마치 상가입구를 들어서는 것 같은 기분에서 였다.

이 언덕에는 “성심성당”“화가의 광장”그리고 “선물을 파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2시간 후에 입구에서 모이기로 하고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헤어졌다.


몽마르뜨 언덕의 “성심 성당(샤크레 쾨르)”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다보면 화가의 광장을 들어서기 전 정면에 웅대하게 축조된 하얀 석조 건물 주위에 4개의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크고 작은 돔으로 되어 있고, 뒤는 각형을 이룬 종루가 있는 하얀 건축물(성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호국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당국의 지원 하에 건축되었다는 “성심 성당(샤크레 쾨르)”이다.


  

몽마르뜨 언덕위의 성심 성당(사크레 쾨르)


이 성당은 1919년 로마네스크와 비쟌틴 건축 양식을 섞은 건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곳 종루에는 19톤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정면 정문은 3개의 아치로 입구를 만들었고 그 위에는 성왕 루이와 프랑스의 여걸 쟌다르크의 기마상이 있다. 이 쟌다르크 상은 “리보리 거리” 모퉁이의 피라미트 광장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피라미드 광장의 쟌다크 동상은 1874년도에 세워진 황금색의 마상이며, 이곳은 매년 5월 12일 순례단체가 출발하는 예식을 갖는 곳으로 유명한곳이다.


몽마르뜨언덕, 화가들의 광장에서

화가의 광장은 한때 반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로트렉 등 세계적인 화가들이 이곳을 거처간 곳으로 유명하지만 현재는 그들의 후예인 무명 화가 들이 모여 각자의 기량을 뽐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유명을 달리하신 대가들의 작품의 가치는 엄청난 고가 이지만, 정작 초창기 몽마르뜨 언덕 “화가들의 광장”시절엔 그들의 작품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배고픔과 무명의 서러움을 참고 살아갔을 것이다.

지금 무명화가들도 그들이 그려놓은 한 폭의 풍경화를 팔거나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궁핍한 생계를 꾸려가지만 그들은 선배 거장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선배들의 명성을 자기의 것으로 하겠다는 밝은 미래의 꿈을 잃지 않고 있기에 표정들이 밝아 보였다. 과거와 현재, 회화의 개념은 변했어도 화가들의 생활모습은 정지된 시간과 함께 그곳에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몽마르뜨언덕의 화가들의 광장에서


우리부부는 흥미롭게 광장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화가들의 ‘3각 이글대’ 앞에 다소곳이 앉아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화가들은 그들 모델의 얼굴을 하얀 화폭위에 담기 위해 바쁜 손길을 움직인다.

눈과 코 그리고 입술을 먼저 화폭에 담고 나중에 머리 결을 그리면서 얼굴 윤곽을 잡고 있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동그라미로 얼굴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 눈코입술의 위치를 점선으로 디자인한 후에 부분 부분을 세밀하게 그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화가도 있었다.

먼 훗날 지금 자기의 모습을 그린 화가가 유명화가가 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 부부도 한 장 그려 두고 싶었으나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어느새 예정된 집결시간이 다 되어 생각을 접은 체 “화가의 광장”을 떠나야 했다.


성심성당 앞을 지나다가 어린이의 이름 알파벳을 연결하여 장난감 기차를 만들고 있는 돗자리 상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손녀 Taylor(유리)와 Ella(은아)가 생각나서였다.

손녀들이 자기 이름으로 된 기차를 끌고 놀면서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하나씩 만들어주면 좋겠다 생각하고 아내와 나는 쭈그리고 앉아 흩어져 있는 알파벳에서 우선 첫째손녀 유리이름에 해당하는 알파벳을 열심히 찾아 “TAYLOR"를 연결시키고 앞뒤로 기차머리와 화물칸을 연결시키니 훌륭한 장난감 기차가 되었다.

그러나 알파벳에 “E"자가 없어 둘째손녀 은아(ELLA)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둘째에겐 미안한일 이지만 다른 선물을 사다 주기로 하고 집결지에 늦지 않게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일행이 함께 움직일 때 집결시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미 예약된(저녁 7시 30분)  에펠탑과 센 강의 유람선 야경을 관광해야 하는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차질이 없도록 모두들 협조를 잘했다.

우리는 에펠탑의 제1 엘리베이터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불어로 소띠(Sortie)는 영어로 Exit(출구)이다. 에펠탑위에 올라 갖다가 단체 행동에서 이탈 될 경우 당황하지 말고 아래 “소띠” 앞에서 만나자는  안내의 말이다.


파리, 에펠탑(Elffel Tower)에서

에펠탑은 한마디로 파리의 명물이다. 그리고 “철의 시대”를 예고한 철의예술 작품이다.

철의 작품으로 대표적인 구조물로는 파리의 에펠탑과 영국의 포스교(Forth Bridge)를 손꼽을 수 있다. 파리의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를 위해 정부가 공모하여 700여 작품 중에서 구스타프 에펠(Gustve Elffel)의 설계가 선정되어 1887년 1월 28일부터 1989년까지 25개월간에 걸쳐 300여명의 노동자 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곡예사 같은 솜씨로 이와 같이 거대한 철의 교각 에펠탑이란 불멸의 예술품을 탄생 시킨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A.G. 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


에펠탑은 보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걸작의 철탑으로 이탑의 구조물은 4개의 철각으로 조립된 윗부분에 탑을 얹어 놓은 것으로 4개의 다리를 버텨 주는 콘크리트 기초로 되어 있다. 동쪽과 남쪽의 기초부분은 길이 10m, 폭 6m, 두께 2m, 북쪽과 서쪽은 길이 15m, 폭6m,두께 6m의 콘크리트 기초위에 높이(안테나를 포함) 320m, 무게 연철 175톤이  사용된 큰 들보와 철판이 1만 3,038개, 그리고 리벳만 해도 105만846개를 사용하여 1,652개의 계단을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지금은 완전히 현대식 엘리베이터로 관중을 위아래로 실어 나르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수압을 이용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에펠의 구상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에펠탑,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내부를 올려다본 전경


에펠은 183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었을 때 “샤를 누보”에게 인정받아 철도 시설기술자가 되면서 34살 되던 1866년 에펠회사를 창업하여 국제적인 건설업체로 도약한 능력 가이기도 하다. 그는 1886년에는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제작에도 참여 했다.  에펠은 발명가 에디슨과도 교분이 있던 사이이며 에펠탑을 제작하기전인 1882년에 프랑스에서 난공사라 불리는 “가라비(Garabit)”라는 거대한 철의 고가교를 제작하기도 했다.

“가라비 철교”는 높이 122m, 길이 564m 의 골짜기에 열차가 달릴 수 있도록 궤도를 설치하는 대 역사이지만, 중앙부에 길이 165m의 아치를 설치하고 그 양쪽에는 철골제의 교각으로 교량의 주형을 버텨 주는 구조의 난공사였지만 이를 성공리에 완성 했다.


그런데 에펠탑엔 얽힌 사연이 많다.

에펠탑 건설당시 예술성과 공업성, 추함과 아름다움을 두고 시비가 많았으며, 예술의 자부심을 해친다는 이유로 파리시민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1887년 1월 28일 시공을 위한 첫 삽을 뜨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람회기간 중 세계 각국에서 6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관람객이 몰려들어 찬사를 아끼지 않음으로서 이를 반대 하던 시민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지구상에 철의 시대의 막을 올리는 기념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파리의 중심에서 도시의 균형과 안정을 지켜주며 숱한 세계관광객을 유인하고 있는 에펠탑--,

밤 10시, 파리의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는 시점에 에펠탑에 장식된 20,000개(?)의 다이아몬드 Light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라. 그 황홀함은 직접 바라보지 않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밤의 에펠탑,밤 10시 20,000개의 다이아몬드 불이 점화

                                   찬란함이 극치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탑의 설치 장소는 20년간 임대한 것으로 20년 만기가 끝난 1910년이 되자 에펠탑은 해체 위기에 직면 하게 되었다. 제 2의 시련기를 맞은 셈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펠탑 제작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탑의 보전 운동이 이러나게 되었다. 프랑스인에게는 에펠탑이 없는 파리의 하늘이 공허하여 상상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아니면 파리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은 각종 첨단 통신 시설을 비롯하여 기상관측장비와 항공운항 통제 장비까지 에펠탑 정상에 설치 활용 하게 됨으로 에펠탑을 헐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것이다.

당시 에펠은 이 탑 건축을 반대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에펠탑이 있음으로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상 300m 높이에 프랑스 국기를 휘날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자”라고 역설하며 에펠탑 제작에 몰두 하기위하여 공사 현장에서 기거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에펠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완성하여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건설되기 이전까지 40여 년 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도 각광을 받았다.

에펠탑은 점차 파리 시민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이 탑을 소재로 각종 음악과 문학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탑은 지상 150m지점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는 곳이 있는데, 이때 고공 공포증이 있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는 다면 그곳 전망대에 내려 파리 시가지를 관람하고 내려올 수 있다지만, 우리 일행은 최정상 관망대인 260m지점 까지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정상 타워에 올라 파리 시가를 내려 보지 않고는 에펠탑을 가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시가지 전체가 두부를 잘라 놓은 듯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정리되어 도시전체가 마치 하얀 모형도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시가지-
도시중간에 센 강이 흐르고 있다


센 강의 밤 !

수많은 시인들이 흐르는 센 강을 바라보며 시상에 젖어 있는 강----.

이강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영원히 쉴 줄 모르고 이렇게 도도히 흐르고 있다. 지구상에 세계적인 강이 있다면 “독일의 나일강, 영국의 템즈강, 벨지음의 뫼즈강과 프랑스의 세느강”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인류의 문화는 이와 같은 강을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피우고 있다. 오늘도 이 세느 강변에는 유란선 야경을 위해 수많은 여행객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혹자는 도시가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히 갈라놓은 모습에서 문명의 삭막함마저 느낀다고도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지의 중요지점은 Option이란 명목으로 현지에서 추가 요금을 내라는데 기분상하는 경우도 있다. 이날 에펠탑을 Option으로 올라간 것도 그 한 예이다.

값싼 여행비용을 찾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여행사가 내놓은 고도의 상술로 파생되는 부산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녁 8시 40분경 유람선을 타고 센 강변과 에펠탑의 야경을 보기 위하여 저녁 9시에 예약되어 있는 부두로 이동해야 했다.

예술을 꽃피우고 밤이 아름다워 여성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파리---.

파리의 야경은 마치 40대의 여성이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과 같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센 강의 유람선위의 관광객


이렇게 늘어선 관광객의 긴 줄은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강 야경을 관람하기위해 이와 같이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례를 기다려 승선했다.

벌써 관망이 좋은 2층 갑판은 사람들이 만원이 되어 자리가 없었다.

겨우 자리를 하나 만들어 아내를 앉게 하고, 나는 이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에 서있기로 했다.

계단 위라 전망이 좋은 편이었지만 어둠속의 강바람이 제법 쌀쌀하여 한기마저 느꼈다.

두터운 잠바를 챙겨 입기를 잘했다고 생각 했다.


유람선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으며 몇 군데서 수시로 출발하고 있었다.

유리로 실내 응접실을 방불케 할 분위기를 연출한 고급 여객선같이 꾸며진 유람선부터 1층을 일률적인 의자를 고정시켜 놓고 강당처럼 넓게 꾸며 많은 승객을 유치할 수 있게 하고 이층은 완전히 Open되어 전망이 좋지만 밤의 차가운 강바람을 감수해야 할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유람선이 있다. 모두 강가를 유람하는 것으로 크기는 2-300명이 승선 할 정도 같았다.

시간이 되자 우리를 실은 보통 유람선은 고동소리를 내며 센 강의 한 부두를 서서히 출발하여 흐르는 센 강을 가르며 속도를 내기 시작 했다.


센 강은 파리 중앙 하단 부분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고, 이 강변을 따라 주위엔 에펠탑, 노틀담 교회, 그리고 센 강 왼쪽 편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르세이 미술관”도 보였다.

13-14세기에 건축되었다는 콩세르즈리 건물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 들이 조명에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유람선이 아름다운 곳을 지날 때마다 승객들은 찬사의 환호를 아끼지 않는다.


 

센 강변의 “오르세이 미술관”


“콩세르즈리”는 16세기에 궁중의 음모가 소용돌이치던 어두웠던 시대의 국사범 수용소로 혁명시대에는 군주들이 독방에 갇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역사 현장이다.

그리고 “빵떼온 신전”도 희미하게 보인다.

이신전은 국립묘지처럼 알려 지고 있었으며, 루이 16세에 맞서 싸웠던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라 일컬었던 “미라보”백작(후에 루이 16세에게 굴복했다는 역사 자료가 발견되어 문제가 됨)이 안치되었다가 근래에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현재 빅톨유고, 큐리부인을 비롯하여 유명인사 64명이 영면하고 있다 한다.


센 강의 다리들은 낮에 보면 대수롭지 않은 다리로 보일 수 도 있으나 조명이 찬란히 비치는 야경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알렉산더 3세 다리와 에펠탑의 야경


그중 “알렉산더 3세의다리” 위에 세워진 날개달린 황금색 동상이 야간 조명에 황금 덩어리처럼 찬란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 다리는 1896-1900년도에 건설되어 황제의 아들 “니코라 2세” 입석 하에 개통된 다리로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협약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 된 것이다.

2개의 교각 오른쪽은 프랑스 중세와 새로운 시대를, 왼쪽은 프랑스 르네상스와 루이 14세 시대를 나타내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알렉산더 다리입구에 새겨진 센 강과 네바 강의 무늬는 지금도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다리의 특징은 파리의 수많은 다리 중에서 유일의 금속제이고 길이가 107m, 폭40m,레스프라너드데장바리드 광장과 상제리제 거리를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센 강에는 분지가 형성되어 “시테 섬”이란 아름다운 작은 섬이 있다.

센 강의 흐름을 좌우로 갈라놓은 이 섬의 끝은 마치 선상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퐁네프다리로 육지와 연결 되어 있었는데 이 섬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주위의 우거진 숲과 다리에 비친 밤의 조명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렇게 센 강 야경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 유람선은 출발했던 그 지점으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밤11시가 넘어서 Hilton Hotel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파리, 센 강변의 자유의 여신상.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오른손엔 횃불, 왼손에 독립 선언서를 들고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하면 뉴욕을 생각하게 된다.

 

 

 파리의 “자유의 여신상”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뉴욕(실제 구역 뉴져지 주)에 제작된 이 자유의 여신상을 위하여 프랑스 국민들도 모금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뉴욕의 명물인 이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규모가 작긴 하지만 “파리의 센 강변”과 일본의 “오다바이 레인보우 브리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파리의 센 강 주변에 많은 볼거리에 도취되어 유람선에서 이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쳐 버리는 수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먕화 노트르담의 꼽추로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

어제 야경덕분에 늦게 취침해서 그런지 4/28/08 아침 7시 기상하기가 뻐근했다.

TV를 켜고 일기 예보를 들으니 섭씨 24도로 쾌청하단다.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 호텔을 떠나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어제 밤 유람선에 비친 노트르담은 조명으로 황홀함과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오늘은 이 성당을 직접 보기 위하여 퐁네프다리를 건너 “시테 섬”으로 들어갔다. 
 

  

 노트르담 대성당 모형도


이곳은 1804년 “나포레옹 1세의 호화로운 대관식”이 거행된 곳일 뿐 아니라 학창시절 감명 깊게 감상했던 “빅톨유고”의 원작“노틀담의 곱추”라는 소설을 영화화하여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 성당을 직접 볼 수 있다는데 마음이 조금은 설 례였다.

현지에선 “대 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노트르담은 1163년 로마시대 일반 그리스도 교회가 있던 곳에 주교 “모리스 드쉴 리”지시 하에 본당건축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1250년 건축가 “피엘드 셀” 지휘 하에 본당의 복도 몇 개와 예배당을 완성함으로서 1345년 말에 대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1871년 화재로 일부 파괴되어 1844-64년 “비올레루 독크”에 의해 수리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손상을 입기도 했지만 이 성당은 비교적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bourgeois- revolution)당시 위기를 맞는다.


프랑스의 시민 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99년 11월 9일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絶對王政)의 구제도(舊制度;앙시앵레짐)를 타파하고 자유평등을 기초로 공화정을 건설한다. 이렇게 시민 혁명으로 구제도을 무너뜨리고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 년 동안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체제가 바뀌며 극도로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 하였다.

프랑스의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 대륙의 역사에서 정치적 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시민 에게 옮겨지는 역사적 과정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며, 1830년 샤를 10세 타도를 위한 7월 혁명과 1848년 당시 돈밖에 모르던 루이 필립을 타도한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왕국의 종말이 온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전제 군주왕국의 종말로 시민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구제도의 유물인 노트르담성당의 철거를 주장하게 된다.

이때 “빅톨유고”는 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이 성당을 보호하자는 목적으로 “노트르담의 곱추”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는데, 그는 저서에서 어려서부터 세상과 단절되어 성당에서 갇혀서 자란 “콰지모르”라는 못생긴 꼽추와 아름다운 집시 무희인 “에스멜랄디”를 등장시켜 군으로부터 억압받는 시민의 상을 부각시키고, 형이상학적인 사랑의 감성을 유발시키면서, 결국 성당의 종소리를 통하여 자유와 인간애의 승리를 느끼게 함으로서 이 성당이 시민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의 명작을 6개월 만에 완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노트르담의 곱추”이다. 실제 그 영향을 받아 혁명군이 이 성당을 파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틀담 성당 코너에서 필자 부부


노트르담 성당 앞에 서있노라면 거대한 조각 작품을 대하고 있는 듯 했다.

많은 성자와 천사 등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조각하여 자연을 보는 느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측벽면은 언제나 칼라 풀한 정원수와 센 강이 흐르고 있어 정취를 더해 주고 있으며, 뒤쪽은 사람이 서로 포옹 하듯이 리드미컬 한 분위를 자아내고 있어 성당 외부는 마치 거대한 조각 작품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성당 앞면엔 고딕식의 3개의 정문이 안으로 열려 있었다.

중앙정문은 고딕 예술 중에 가장 격조가 높은 “최후의 심판”이 조각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상과 성 죠바니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천사들”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치형 주위는 천국과 지옥으로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고 중앙정문을 다시 두 개의 적은 문으로 나뉘면서 그 기둥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악한 화신과 순교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1160-1170에 만들어진 우측 정문은 성 안나로 불리고 있으며, 이곳에 조각 작품들은 12세기부터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이문을 다시 두 개로 나누는 기둥에는 5세기의 성 마루셀의 상이 새겨져 있었다.

반월형이 있는 곳에는 두 사람의 천사를 양쪽에서 지지하는 “사교 모리스트 쉴리와 왕 루이 17세”가 있다.

좌측 정문은 성처녀라 불리는 문으로 가운데 기둥에 성모 마리아가 있어서 성처녀 문이라 부르게 된 것 같으나 필자의 눈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보였다.

반월형에는 성처녀의 생애와 죽음과 영원의 세계 및 승천을 격조 높게 표현해 놓았다.

세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가이드의 말이다. 

 

  

노틀담 성당 정면에서


정면 윗부분인 왕의 로대라 불리는 곳에 28명의 이스라엘과 유대왕의 조각이 있었는데, 1793년 시민들은 이를 시민들이 증오하던 프랑스 왕들로 착각하고 파괴 하였으나 사실이 아님을 알고 난후 다시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중앙에는 직경 10m나 되는 “장미창”이라 불리는 창이 있다.

또한 성모 마리아상과 천사들의 상 사이에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도 보였다.

정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노트르담 성당내부

마침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 아침이라 엄숙한 미사를 집전 중에 있어 많은 신도들로 가득 찼었다. 이성당에 들어서면서 두 번 놀란다.

한번은 미사 중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는데 놀랐으며

또 한 번은 모자를 벗어 들고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우선 내부 구조의 아름답고 화려함과 웅대한 규모에 또 다시 놀란 것이다.

들어가는 통로는 130m, 폭 50m, 높이 35m 그리고 9,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성당 이였다. 직경 5m의 거대한 원기둥은 성당을 5개의 복도로 나누고 있었으며 양쪽으로 열리는 창문을 통하여 천정위에서 부드러운 빛이 들어오고 있어 신비감을 주고 있었다.

성당 안은 1600-700년대 이르는 귀중한 미술품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방사상으로 설계 되어 있는 예배당 복도에는 많은 묘가 있었으며, 순교자들의 성 유물과 은제품 그리고 18세기의 오르간도 보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와 가시관, 그리스도 손에 박혔던 못등 성유물들이 소중하게 간직 되어 있었다.

성당 안 모퉁이를 돌아가자 수많은 난쟁이 촛대들이 둥근 판위를 밝히고 있는 곳이 있었다.

5유로를 내고 각자의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곳이다.

 

 

 노틀담 성당안에서 축원기도를 하고있다


우리부부도 촛대 하나를 구입하여 불을 붙이고 “지금까지 우리가정의 행복을 지켜주심과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해 주신 은총”에 감사드렸다.

노트르담을 나와 다시 퐁네프다리를 건너자 모퉁이에 작은 목로 잡화점이 보였다.

주로 작은 선물품목과 사진, 그림 등을 파는 목로 점이었지만 그 역사가 300년 이상 되어 현재 유네스코 문화제로 지정받은 곳이라 하여 놀랐다.


파리, 베르사유로 가는 길

점심을 하고나니 3시가 넘었다.

다음 코스는 육로로 20분 이상 거리의 외곽에 위치한 베르사유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는 “풍차가 돌아가는 마을”이란 뜻으로,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

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행사하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로마제국의 후예들인 겔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편이며 현재 자전거 타기를 권장하고 있는 작은 시골도시이기도 하다.

이동하는 동안 도로에서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 단어”들이 보였다.

물론 불어를 아는 사람들은 별 관심 없는 단어들이겠지만 불어를 모르고 프랑스를 처음 방문 하는 분들에겐 참고가 될 것 같아 다음에 몇 자 적어 볼가 한다.

“RUE”는 one way, “불루바/Boulevard”는 순환 형대로, “Ave”는 동서남북으로 나뉘는 길, “뿔라스/Place”는 광장, 소띠(Sortie)는 출구(=Exit), 쌀은 더럽다는 뜻이란다.


베르사유 궁전을 찾아서

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

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프랑스 베르사유에 위치한 왕궁으로 루이 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가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렸던 유럽 최고의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1642년 왕이 되어 72년간 프랑스와 나바라를 다스리며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루이 14세가 1682년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서 이곳이 바로 프랑스 구시대의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 전경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 궁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궁정을 베르사유에서 다시 파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일행은 이 박물관을 오후 4시 10분에 입장하여 한 시간 정도 돌아본 후 파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궁전의 내부는 물론 밖의 정원의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아름다워 1시간으로 돌아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 아쉬움을 남기며 그곳을 떠나야 했다.


 

  

베르사유 궁전 성당 내부



베르사유 궁전 천정 벽화


 

  

베르사유 궁전의 호화로운 국빈 접대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베르사유 궁전 전경과 보도블록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
확 트인 통로 양 옆으로 당시 사냥터가 보인다.


스위스, 제네바를 찾아서

4월28일 스위스 제네바로 이동하는 날이다.

우리는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들고 호텔을 나와 프랑스가 자랑하는 초고속 열차 T.G.V를 타고 제네바로 가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타고 스위스로 건너간 T.G.V. 열차


제네바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아름답다는 레만 호수, 꽃시계 등을 감상하고 제 1회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샤모니로 이동하여 케이불카를 타고 “몽불랑”에 올라 브레방 이나 에귀디미르 전망대에서 알프스의 만년설을 감상하고 내려오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포레옹 루트를 따라 이태리 국경을 넘어 산업 도시 밀라노로 이동하여 고딕 양식으로 유명한 두우모 성당을 관광 하고, 시내를 돌아본 후 하루 투숙하고 베네치아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는 일정에서 우리 부부는 밀라노에서 필라델피아 행 항공기를 탐으로서 이번 여행일정을 마치게 된다.

계속되는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베네치아, 피렌체 그리고 로마지역 일정은 몇 년 전 기회가 있어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엔 일정 중간에 여행을 중단 하고 일행들과 헤어지기로 된 것이다.

TGV열차로 프랑스 국경을 넘은 우리는 4월 28일 아침 11시 스위스 제네바 역에 도착 했다.

스위스는 전 국토의 65%가 산악지로서 인구는 약 600만 명, 그중 제네바의 인구는 15만이라 했다. 그리고 제네바는 포로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제네바 포로협정”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기원 1세기, 로마의 시저가 정복하여 한때 로마의 영토였으나 후에 나포레옹이 정복하여 프랑스 영토이기도 한곳으로 유럽의 모든 문화가 함께 어울려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완충 역할을 한 덕분에 비교적 전쟁의 피해를 가장 적게 받은 도시이기도 하다. 제네바 역에 내리자 현지 안내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챙긴 후 우리는 제네바(레만)호수로 향했다.

 

  

제네바(레만) 호수, 145m높이로 물을 뿜는 분수가 보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호숫가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만 호수입구에 도착하니 인공 꽃시계가 눈에 들어 왔다.

모양은 별로 이었는데 로랙스 시계회사에서 만들어놓은 것으로 시간의 정확도는 자신 있단다. 레만 호수는 74Km x 14Km의 넓이의 큰 호수였지만 여행객에게 어필할 이렇다 할 특색 있는 호수는 아닌 것  같았다. 이 호수 가에서 50분간 자유 시간을 가졌다.


당시 레만 호수는 조용히 내리는 비로 가벼운 물결을 일으키며 침묵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호수가에서 50여분을 보낸다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아내와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30여 분 정도 옛 추억을 생각하며 연인처럼 호수 가를 거닐었다.

잊고 지냈던 지난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우리 부부의 발길은 내리는 비를 역류하며 145m 높이의 물길을 하늘로 뿜어대는 분수 분수대 앞에서 멎었다.


분수대 주위엔 하얀 물새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한국엔 200m높이로 뿜어대는 분수대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에 비하면 이 분수는 별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번 모국을 방문할 경우 그 분수대를 찾아볼 예정이다. 보슬비로 시작하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받쳐 든 우산으로 비를 가리기엔 한계가 있어 옆으로 들이치는 비에 옷이 젖어버려 걷기를 포기 하고 대기 하고 있는 버스로 돌아오니 모두들 벌써 돌아와 있었다.

이러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현지 식당으로 이동하여 폰드(고기:쇠고기,칠면조,닭)로 점심을 하고 우리는 “몽부랑”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늘은 비 내리는 제네바의 한 호수 가를 아내와 거니는 추억을 만든 셈이다.


“샤모니”를 찾아서

제네바에서 다시 프랑스 국도를 따라 얼마쯤 이동하니 프랑스와 스위스를 가르는 국경지대가 나타났다. 특별한 검문 없이 프랑스의 국경으로 들어간 시간은 오후 1시경 이었다.

샤모니는 제 1회 동계올림픽개최지로서 행정구역은 프랑스이지만 이곳을 통하여 도전하려는 알프스의 몽블랑은 만년설로 뒤덮인 산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가 함께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이야말로 국경의 개념이 제일먼저 없어진 곳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나포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말달리던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지금은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아스팔트 도로를 만들어 이렇게 쉽게 달리고 있지만 당시 나포레옹이 넘었던 알프스산맥은 만년설이 뒤 덮인 정말 험 하디 험한 산길이었을 것이다.

몇 개의 작은 긴 터널을 지나고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 지대에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보면서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도 지났다.

고속도로선상 도로표시판에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표시 된 낮선 표지판이 보여 안내에게 물으니 붉은색갈의 글자 쪽은 프랑스, 초록색(E)쪽은 유럽 연합에 속해 있다는 의미란다.

마지막으로 11.5Km 길이의 알프스를 산자락을 뚫은 긴 터널을 지나자 눈앞에 만년설로 뒤덮인 몽부랑 “몬테비얀코”(하얀산)가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서 차량의 대기오염 Test와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버스는 편도요금이 117유로라고 했다.

그리고 랜덤 식으로 대기오염 배출 테스트를 하여 합격차량에 한하여 출입을 시킨다고 했다. 공기 오염을 막기 위하여 배려하는 이 나라의 환경 정책의 일환인 것이다.

이곳엔 알프산을 두고 비화가 많았다.

1930년 영국 등반대원이 알프스 산을 등반하다가 30대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한 청년이 있었다. 그 후 남편이 78세가 되던 해에 아내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마음속에 묻고 흘러가는 세월 따라 78세라는 황혼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내를 찾게 되었지만, 아내는 실종당시의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눈 속에 잃어버리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통한의 세월을 보냈을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눈 덮인 알프스계곡에서 정지된 세월 속에 잠들어 육제의 늙음이 정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아내의 시신을 안고 회한에 차 통곡하는 백발이 성성한 남편의 모습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 했으리라.


이곳엔 100여명의 등반에서 실족된 사고자가 아직도 눈 속에 묻혀 있는데 그중 한국인도 2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2시경 몽부랑 마을입구에 도착했다.


 

알프스 몽부랑이 있는 마을


이곳은 조용한 시골마을로 중세풍의 냄새가 물신 풍기고 있었다.

나무로 건축된 낮은 건물에 돌 조각의 지붕을 하고 있는 가옥들이 많이 보였는데 폭설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우리는 알프스 최정상인 몽부랑과 알프스의 만년설을 보기위해 케이블카로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늦은 점심을 해야 했다.

생 닭고기, 소고기, 양고기를 자료의 뽕디(=오일 사브사브: 즉석에서 끓는 오일에 익혀 먹는 요리)라는 요리가 우리를 기다렸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런 대로 이국의 정취를 느끼며 이색적인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점심을 마치니 오후 4시가 되었다.


만년설 알프스, 몽부랑에 오르다.

모두들 준비해간 두터운 잠바들을 꺼내 입고 알프스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이제 몽부랑 마을에서 20분정도 거리에 있는 샤모니(제 1회 동계올림픽개최지)란 곳으로 이동하여 케이불카로 “브레방과 에퀴미르” 전망대에 올라 최정상의 몽부랑과 아름다운 만년설의 뒤덮여 있는 알프스 산을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샤모니에 도착하니 케이블카를 타기도 전에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케이블카가 정상을 향해 위로 오를수록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케이블카 창문 밖은 온통 하얗게만 보였다.

 

 

 알프스 몽부랑 3,400m 정상의 눈덮인 전망대 


알프스의 최정상인 몽부랑(Mont Blanc)은 4,807지점이지만, 우리가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알프스는 최고 높이 3,842m 지점인데 이날은 3,462m을 오르기로 했다.

눈이 많이 내려 시계가 차단되는 바람에 더 오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이 높이도 신체조건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어지럽거나 고혈압)은 1차지점인 2,200m관망대에서 내려 관망하고, 원하는 사람만 3,400m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알프스의 만년설을 직접 밟아 보고 싶었다.

아내는 1차 전망대에서 기권하고 필자는 몇몇 젊은 일행들과 그날 오를 수 있는 정상까지 올랐다. 3,400m정상에 오르니 관망대가 휘청 휘청 흔들리고 있어 기분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눈이 몹시 내려 시계가 10-20m도 되지 않아 알프스 산과 하늘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현기증을 호소했다.

아마도 산소부족과 압력차이 때문으로 생각 되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다 기후가 좋지 않아서 그러한지 케이블카는 물론 관망대의 매점도 텅 비어 있었다. 오른 김에 알프스의 정상을 밟고 싶어 전망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알프스산맥 정상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 온통 하dig게만 보이는데다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눈보라까지 불어치고 있어 밖에 오래 서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 손과 귀가 시려왔다. 4-5월의 산 아래 마을과 알프스산 위의 온도는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만큼이나 현격한 차이었다. 비록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긴 했으나 알프스 정상에 올랐다는 기분만 내기로 하고 온통 하얗게만 보이는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 왔다.


“위에 올라가서 하얀 눈만 보고 내려오느라 고생만 했다”는 나의 말에 “그럴 줄 알고 1차 관망대에서 내렸다”고 선견지명을 내세우는 아내의 변명에 함께 웃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 하루의 일정도 이렇게 끝났다. 저녁식사는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하기로 했다.

우리는 나포레옹 루트를 따라 프랑스의 행정 구역에서 3시간여를 달려 이탈리아국경을 넘어서 밀라노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가 지나고 있었다.

갈릴리오라는 이태리 식당으로 직행했다.

이 저녁이 끝나면 밀라노 두오모를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일행들과 아쉽게 헤어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부부로서는 이번 저녁이 일행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식사가 되는 셈이다. 인간은 사는 동안 여러 경로로 만나 인간관계를 유지 하게 된다.

특히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여행 중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난 열린 마음이 바탕이 되어 그러한지 쉽게 격의 없는 사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만날 때 반갑지만 막상 헤어질 때는 섭섭해진다.


이날저녁 나는 일행들과 함께 석별의 잔을 나누고 싶어 포도주를 특별 주문했다.

포도주를 들고 건배 했다. “참으로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부부는 내일 아침 여기서 필라로 돌아갑니다. 계속 즐거운 여행이 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건배 합시다.”  포도주가 한잔씩 돌아가고 나니 분위기가 좋아졌다.

지난 5-6일 동안 같이 즐겼던 사안들을 이야기 하며 우리는 격의 없이 흐뭇한 저녁시간을 함께 하며 송별의 밤을 갖았다.


이태리, 밀라노의 두우모 성당

저녁식사를 마치고 예정대로 우리는 밀라노의 두오모(=성당을 칭함/ 돔은 원형의 둥근 지붕을 하고 있는 건축물을 말함) 야경을 보기위하여 이동했다.


 

밀라노의 성당 정면 야경


이 성당은 이미 본적이 있어 두 번째 찾아오는 것이지만 이곳은 몇 번을 와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그날의 야경은 내 가슴에 또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1396년 밀라노 갈레아치오 비스콘티 공작의 명으로 착공되어 450년에 걸친 공사로 19세기 초에 완공된 성당이다. 가장 높은 첨탑에는 도시를 수호하는 황금의 마리아 상이 세워져 있다.


 

밀라노 두오모 옆면 야경


이 성당의 외부는 2245개의 거대한 조각 군의 장식과 135개의 첨탑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조각 예술품으로 보기에 장관이다. 세계 4대 성당(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독일의 쾰른 대성당)의 하나이다.


 

밀라노 성당 모퉁이 청탑에 하늘로 치솟은 

도시를 수호하는 황금의 마리아 상

피렌체의 두오모 (Duomo di Firenze)
미라노 두오모를 두 번째 찾아와 보니,
피렌체의 두오모(Duomo di Firenze)가 생각난다.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피렌체의 두오모(Duomo,Santa Maria del Fiore)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기행문을 마치기전에 지난번의 기억을 더듬어 “피렌체의 두오모”에 대해 간단히 써두려 한다.


이곳은 르네상스시대에 찬란한 꽃을 피웠던 곳으로 3대 천재 예술가인 미켈란 제로, 라파엘로, 레오날드 다빈치와 같은 거장들이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으로  ‘꽃의 성모 마리아 두오모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당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것으로, 실외는 하얀색으로 윤곽선을 두른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 판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성당은 153m의 길이와 38-90m에 이르는 폭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측랑에서 아치까지의 높이는 23m이고, 바닥에서 돔의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90m에 이른다.

고딕적인 실내는 광대하고 비어 있는 듯 한 인상을 준다.

이처럼 대성당 안이 비어 있는 것은 종교적 엄격함에 기인한 것이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내부와 외부의 아름다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사랑을 잉태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당을 연인끼리 같이 올라가면 평생 행복하게 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영화가 촬영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일까 ? 간단히 소개하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중세회화 복원사로 일하고 있는 준세이가 등장한다.

그에겐 평생 잊지 못할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오이, 서른 번째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사랑의 약속을 가슴에 깊이 묻은 채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아오이의 소식이 전해진다. 그녀가 살고 있다는 밀라노로 달려가 보지만 이미 아오이 곁엔 마빈 이라는 다른 남자 가 있었다. 어색한 만남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준세이---.



 

피렌체 두오모의 전경

설상가상으로 그가 공들여 복원해오던 치골리의 작품이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고, 일터인 스튜디오마저 문을 닫게 되자 준세이는 다른 미래를 찾아 도쿄로 돌아간다.

훗날 이들 두 연인이 어찌되었을까 ?

미래에 대한 판단은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영화는 끝난다.


필자도 밀라노의 도오모 야경을 끝으로 여행 중에 한없이 펼쳤던 공상의 나래를 이제 그만 접어야 한다. 우리 부부가 5박 6일을 함께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여행사에서 특별히 마련해준 교통편을 이용하여 공항 근처의 호텔로 이동하여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필라 행 여객기에 올랐다. 
밀라노여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