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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자회견/모교 기자 회견

대학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오영은 누구?)


⃟‣⃟ 다음은 성균관 대학교 학생 기자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엘리스 아일랜드상을 수상한이후 한국 서울에서 연합신문, KBS방송, 대학기자 및 이곳 일간지및 주간지등에서 인터뷰내용을 대서특필 한바 있습니다.
그중 대학 기자 인터뷰가 보다 광범위하게 저에 대해 다루었다고 생각하고 이내용을 여기 남겨 둡니다. 아래 사진들은  KBS 방송국 기자 총연 방문 인터뷰 장면입니다.

기자: 우선 취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엘리스 아일런드 상' 수상자로 선정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엘리스 아일런드상' 이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측면이 있습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이오영: 엘리스 아일랜드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을 말하며, 이 섬은 미국 초기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희망과 변화와 가능성을 찾아 미국으로 들어왔던 길목으로 미국 이민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곳엔 역사적인 이민 박물관이 있으며, 매년 5월 이곳에서 성대한 엘리스 아일랜드 수상식을 개최하고 있습 니다.

△ 기자와 인터뷰중

이 상은 1986년도에 NECO(National Ethnic Coalition of Organization)에서 제정한 상으로 정확한 상의 명칭은 "Ellis Island Medal of Honor"라고 합니다.

이 상은 매년 어려운 이민생활을 극복하고 소속사회에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미국 사회발전에 공헌한 사람, 개
인적으로 또는 전문지식을 통하여 다방면으로 인류에 크게 기여하였거나, 소수민족, 인종 그리고 종교구룹과 미국사회에 징검다리 역할에 공헌한 공적이 인정되는 사람 등을 선발 하여 수여하는 메달입니다.

이 상에 대해 미국 상•하 양 의회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상으로 결의한바있으며, 수상자 명단은 의회에 기록되어 역사에 남게 되는 영예로운 상입니다.

지금까지 대법원장, 노벨상 수상자, 6명의 미대통령과 체육 및 연예, 산업 활동에 크게 기여한 저명인사들이 수여한바있습니다.

기자: '엘리스 아일런드 상'을 받으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이오영: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주위에는 묵묵히 봉사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부족한 사람이 이 상을 받게 되어 미안한 마음과 영광스런 마음이 교차합니다.

특히, 저는 지난 30여 년간 한인단체의 중요 단체장으로, 미국사회보다 한인사회를 위해 더 열심히 봉사했다고 생각했는데 미 주류사회에서 더 인정해주는 것 같아 감사 하고, 앞으로 더 많은 봉사를 하라는 의미로 알고 기쁘게 받아드리기로 했습니다.

기자: 제 19대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회장을 맡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오영: 이 사람은 1983-4년, 필라델피아 지역한인회장, 2001-3년,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이하 총연) 총 회장이 되어 나름대로 봉사했습니다.

미국은 다문화 민족이 복합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우고 있는 선진 국가이며, 지정학적으로 세계열강의 대표들이 모여 있는 UN본부가 존재하는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한인사회는 불과 40여년이란 짧은 역사 속에서 지금 그 수가 250만(그 수는 점점 증가함)이란 거대한 민족 집단으로 성장 되어 민족 공동체를 이루며 각계각층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750만 해외동포는 물론, 그 해외동포의 35%이상이 미국에 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미주 동포들은 조국 대한민국의 세계화는 물론 경제 발전의 중요 인적 자산임에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이민의 나라로 어느 민족이나 주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의 미국 이민사는 “이민 초기 이민정착을 위해 유랑민과 같은 삶을 살아온 교민의 시대를 거처, 민족공동체를 구축하여 동포의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는 동포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에 주인으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민족시대”를 창조하기위해 총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인들의 꿈은 한•미간의 동맹관계를 지속적으로 돈독히 하는 한편 미국 땅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고유문화전통을 지켜가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민문화를 창조 하여 “한민족 시대” 를 앞당겨 열어 가는 것이라 생각 하고 그 원동력은 250만 미주 동포들이 힘과 지혜를 한데 모으는데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앞당기는 사명이 미주 총연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소임을 감당하기위하여 총회장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2001년 제 19대 총 회장에 당선 되었습니다.

기자: 미주한인회총연합회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오영: 한인회 총연합회의 연역은 1903년 임민 초창기에 도산안창호가 조직한 친목회를  시작으로, 1907년 24개 단테 대표 30여명이 호놀루에서 한인 단체를 총망라하여 조직한 한인 합성회로 부터 입니다.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는 1978년 1월, 7개지역 한인 회장이 모여 발기 총회를 시작으로 결성 발전 되어 지금은 180개의 전 미주 지역의 한인회가 가입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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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주총연 회장 직무실

미국에는 250만 한인이 50개주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으며, 한인이 살고 있는 곳이면 예외 없이 자생적으로 한인회가 창립되어 나름대로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봉사 하고 있습니다.

지역한인회는 크게는 LA,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와싱턴 DC, 필라델피아 등 몇 십만에서 몇 만이 넘게 한인들이 사는 대도시로 부터 500여명 전후로 사는 아주 작은 도시까지 현재 180여개의 지역한인회가 있으며, 이모든 지역한인회를 하나로 연합하여 협의체를 만든 것이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입니다.

미주 총연의 조직은 150명이상의 임원 이사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으로 대외적으로 250만 미주 한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회장은 미주 50개주 전역의 전•현직 회장들에 의해 직접 선거로, 매 2년마다 투표에 의해 선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자: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으로서 역임 중에 이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하셨 는지 궁금합니다.

이오영: 제가 총연합회 회장당시 임기 중 내걸은 “5대 지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민족 공동체 구심을 위한 Network 구축
   2.
한인의 위상 제고 및 정체성 확립
⏗3.미래지향적 개혁 및 한인 정치인 발굴지원,
⏗4.한•미 양국 교량 역할 및 자립재정 확립
⏗5.한민족시대 건설 여건 조성

그리고 “중점 사업”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가. 180개 지역한인회 간에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700만 해외동포 네트워크 확산
나. 친한 미정치인 지원 및 한인 정치인 발굴 지원
다. 한미 지도자 정치 포럼 개최, 한인 위상 제고.
라. 지역한인회 활성화 지원
마. 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전 미주에 확산 성대히 추진
바. 한인회 100년 및 총연 25년사 발행
사. 총 연 재정 기틀을 위한 정부 발전지원금 획득
아. 모국정부의 적극적인 열린 해외 동포 정책 수립 촉구
자. 동포들의 권익 신장, 정체성확립, 고유문화를 중심으로 이민문화 창달
파. 9.11 테러 참사 성금 모금 및 본국 태풍피해사건 성금모금으로 성원
사. 미 행정부 및 상하원 정치인에게 본국과 한인들의 권익 보호차원의 권리 주장

기자: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 역임 중 기억나는 사건들이 있으시다면?

이오영: ⏨ 열린 해외 동포정책 및 이에 따른 동포에 관한 법 제정 촉구를 위해 각종 포럼및세미나 참석을 비롯하여 본국 정부와 국회 관계부처의 로비를 위해 서울을 드나들 던 일.

⏗ 제 2차 세계한인회장 대회 의장으로 피선되어 당시 동포재단이사장 권병현대사와 600만 재외동포의 권익신장에 관해 각국의 한인 대표들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던 일, ‘한상대회’ 창립의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하고 세계한인회장 대회 결의문에 담아 창립을 준비하고 한국 정부에 협조를 건의 하던 일.

⏗ 2001년9월11일, 항공기 납치 미국을 자살폭탄 공격으로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 미국 9.11 사태 당시 참담했던 희생자들의 지원을 위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모금활동 을 전개하여 4.5밀리언 달라 라는 거금을 미주 한인사회로부터 모금, 한인사회의 저력을 과시하여 부시 미대 통령과 파탐킴 뉴욕지사로부터 감사의 서한을 받는등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던 일.

⏗ 2002년 6월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효선이 미선이 사건을 기화로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반미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무엇인 가 잘못되고 있다고 판단, 어린 소녀들의 죽음의 애도를 표하는 것은 마땅하나 반미 운동으로 변형 확산시키는 것은 불순 배후세력때문인 것임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 회견을 통하여 반미 운동 확산을 저지하던 일---.

* 6.25사변 당시 미군들은 “가보지도 못한나라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기위해 한국전에 참전하여 4만여 명의 그들의 고귀한 젊은 목숨을 잃어 버렸는데도 지금와서 그 고마움을 모르는 행위는 일종의 배신행위임을 부각 시키며, 반미확산을 조기 차단 하기 위해 노력 했었다.*

⏗ 2002년도 한국에 태풍 수재 피해 및 2003년도 대구 지하철 대 화재 사건에 현지에 방문하여 애도를 표하며 미주 동포들의 작은 성금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문하던 일.

기자: 앞으로의 한인사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 갈 꺼라 생각하시나요?

이오영: 지구촌 구석구석 지금 한인이 나아가 있지 않은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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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를 여행했었는데, 그곳에 까지도 한인들이 상당한 숫 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구촌 구석구석에 한인이 나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력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 장려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한국 국회가 해외 동포의 투표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이제 동 포참정권 시대가 도래 한


△ 북미주대학 총동문회 회장취임식, 동문회기 인수장면


셈입니다.
향후 한인회가 구성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한국 정치 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포들의 국내 권익신장에 일목할 수 있다고 생각 되지만 이에 따른 동포 분열과 잡음도 많을 거라 예 상되어 우려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위 제도가 성공하려면 참정권 행사 과정으로 파생되는 동포 분열방지책 및 부정선거 예방 또는 사후 조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마련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기자: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오영: 저는 학훈 3기 출신 장교로 파월 장병이기도 합니다.

월남에서 느낀 것인데, 미래를 위한 삶의 질을 높이기위해선 젊은 시절 적절한 시기에 좁은 국내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 부딪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저 스스로 시야를 넓이고 자식들에게 보다 폭넓은 사회 속에서 경쟁의 기회를 주자는 아내와 연애시절부터 꿈꾸던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서 새 출밣은 현재의 안일한 생활을 버리고 굴곡의 험난한 미래를 감수하는 모험에 찬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은 젊음이 갖는 특권이기도 하여 결코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기자: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며 어려운 점이 있으셨는지?

이오영: 인종차별, 반 사회적 범죄 위험에 노출 등,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존재 한다고 봅니다.

특히 미국은 이민의 나라로 가장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하지만 이민정착과정에서 백인은 물론 흑인들로부터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사업장에서 “Go back to Korea"라는 멸시를 종종 받는 경험을 합니다.

한번은 78년도에 현재 집으로 이사를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동포 손님들이 왔는데 밖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펑크를 내어 놓기도 했으며, 어느 친구의 집엔 매일 밤마다 저원 잔디밭에 쓰리기 백을 던져 놓았던 일들도 있습니다.
강도, 살인등의 강력 범죄도 한인을 상대로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등 한마디로 그들이 우리를 멸시하고 경원시하고 있는 풍조가 만연할 때는 미국에 온것을 후회하기도 했었 습니다.

그러나 한인들의 근면과 성실성을 알고 난 후 부터는 이웃과 친해질 수 있었고 사업장에서도 그들과 인간 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서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뀐 편입니다.

기자: 이민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요?

이오영: 처음에 미국에 오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법대 출신에 학훈 장교로 임관하여 10여 년간 군 생활이 나의 이력의 전부 이었으니까요.
다행이 아내가 RN으로 병원을 나가니 먹고는 살 수 있겠지만 남자의 자존심은 엉망이 된 거죠.
처음 몇 개월은 부엌에 들어가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며, 학생시절 자취하던 솜씨를 발휘해야 했습니다. 그러노라니 사람이 점점 작아지고 열등의식이 생기자 짜증만 늘어가게 되더군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가족에게 신경질을 내는 졸장부로 변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선 한 번도 말다 틈 같은 거 없었는데, 바쁘고 피곤한 생활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진 결과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가족은 1년여 헤어져 있다 결합되었지만, 만남의 기쁨도 잠시 우리는 아이들을 돌보며 이민 정착을 위해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낮 시간에 병원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저는 밤 시간에 일하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번갈아 돌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처음 은행 컴퓨터실에 들어갔었는데 고생에 비해 너무 주급이 얕아 항공기 부속품을 만드는 생산 공장 “Machine Operator"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는데, 부부가 하루를 둘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3살, 2살짜리 어린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던 가슴 아팠던 이민초기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부부는 서로 얼굴 마주치기가 힘들어 필요한 대화를 냉장고 문에 메모로 남겨놓는 것으로 대화를 대신 했습니다. 주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를테면, “큰애는 감기기운이 있으니 관찰이 필요하고, 작은애는 밥을 안 먹었으니 무엇을 먹이라”는 등의 메시지였지요.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는 동안 시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는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미국에 왔다고 하면서 일속에 파 묻혀 아이들 자는 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던 안타까움에 남 몰래 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강도를 만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기에서 좌절하며 미국에 온 것을 후회 하던 때도 있었지만, 월남에서 살아온 내가 설마 이곳에서 ?!  하며 위기를 극복 하던 때도 생각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뒤 다행히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 큰애는 교정치과 의사로 작은애는 변호사로 전문직을 찾아 사회인으로 그들의 몫을 감당하고 있어 매사 하나님께 감사하고 당시의 고생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 외에 기억나는 일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이만 합시다.

기자: 성균관대에서의 기억나는 추억이 있으시다면?

이오영: 대학 2년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밤낮없이 도서관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기침이 심해지고 각혈이 시작되어 병원에 가보니 폐결핵 중등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좌절과 실망이 한순간에 밀려옵디다. 모든 것을 포기 하고, 방황하던 때 친구(백종길)의 도움으로 마음을 추수려 치료를 시작했던 일,

대학 3년, 땡전 한 푼 없던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제가 법정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했는데, 어려울 때 마다 친구들(정성률, 조철용, 염영탁, 김영규)이 손목시계와 입고 다니는 코트 까지 전당포에 잡혀가며 지원했는데도 결국 낙선하고 실의 찬 친구들을 위로 하기위해 명륜동에서 대포 잔을 기우렸던 씁쓸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마신 술값대신 풀어 놓은 저의 손목시계는 영영 제 손목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요.

그리고 당시 저와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출마 했던 동철과 오용근(KBS방송국에 근무하다, 대학교수로 정년퇴직)과 함께 은행나무 밑에로 유권자들을 모아놓고 그 친구 기숙사에서 끓여온 커피를 권하며 한 표를 부탁하면서 의기투합하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기자: 성대생들에게 미래의 인생에 있어서 바라는 자질 같은 것이 있다면?(ex. 리더십 등)

이오영: 우선 참다운 리더의 자질은 매사에 솔선수범 하되, 주어진 여건을 혼자 해치우는 것 보다 통 크게 주위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여 함께 팀워크로 주어진 과제를 해결 해 나가려는 지혜를 구비하고 있는 성품이 리더들이 갖추어야할 자질이 아닌가 생각합 니다.

그러나 이 자질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고 연마함으로서 누구나 터득할 수 있는 후천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청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용기와
불가능에 도전하는 모험심과
막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생각의 신선 함 이려니---“

여기 어느 시인의 시한구절이 생각나기에 소개 하며 후배들에게 한마디 더 첨언 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후배들--!
청춘을 마음껏 구가하시라. 그리고 주어진 여건과 현실에 충실 하라,
이런 것들은 미래로 가는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열어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보라. 그리고 무한한 꿈과 이상을 마음에 품고 미래를 향해 뜨거운 열정으로 중단 없는 도전을 계속하라.
뚫지 못할 장애에 부닥치면,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구를 찾아라.
도전을 멈추면 당신은 이미 생존경쟁에서 패배를 시인한 것임을 명심하시라.

기자: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이오영씨 자신의 어떠한 면이 가장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생각 하시나요?

이오영: 이 나이가 되도록 별로 이룬 것이 없지만, 나름대로 현실과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며 좌 절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늘 도전해 왔습니다.

특히 학훈 장교로 군 생활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군에서 조직사회를 배웠고, 군 생활을 통하여 좌절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몸에 익혀 왔 던 것이 이민초기의 어려웠던 순간순간들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이민 초기 가장 말단에서 구진 일들을 했던 경험도 차후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좌우명이나 인생의 목표

이오영: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 하자. 막히면 발상의 전환으로 재도전 하자. 가장곤경에 빠졌을 때 비굴하지 말자, 책임은 언제나 내가 있던 그 사회나 자리에서 아쉬워 할 때 그 자리를 떠날 줄 아는 용기를 갖자. 후배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선배가 되자. 였습니다.

기자: 앞으로의 이오영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오영: 제 나이 이제 한국나이로 68세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언제 부터인가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엔 잔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희어가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저는 늘 청춘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주위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모양 입 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에게는 이민 1세로서 미국 땅에 “한민족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 리는 꿈이 있기에 청춘이기를 포기 하지 않으렵니다.
지난 30여 년간 나는 한인 사회를 위해서 봉사한답시고 동분서주 했습니다.

필라한인회장, 미주 한인회총연합회장, 제2대 세계한인회장대회 의장, 민주평통 상임위원 및 필라협의회장, 북미주 ROTC 총연합회 회장, 북미주 성균관대학교 총동문회 회장 등 동포사회에 중요 한인단체장과 주류사회의 지역 경찰 자문위원 및 교통법원장 자문위원 까지 맡아 봉사하며 최선을 다해 왔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인생을 정리해야할 때임으로, 도전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정리하며, 젊었을 때 봉사활동 한답시고 사업을 아내에게 맡겨 놓고 고생시킨 데 대한 사죄도 할 겸 시간 있을 때 마다 아내와 미지의 세계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데 많은 시간을 활애 하렵니다.

그곳엔 인류의 역사와 현실과 미래가 함께 공존하기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