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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스라엘 편(1)

이오영의 더 넓은 세계를 찾아서

이스라엘 편

성지순례의 마음으로 (서언)

이번 여행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믿음의 경지를 한층 높이는 계기로 삼고, 95%가 사막인 이집트가 나일 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를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번 여행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여행 편의상 성지 순례 코스가 역으로 되어 있어, 기행문을 쓰는데 헷갈리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여행 코스대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자한다.


참고로 마음 설 례이며 준비 했던 여행 D day가 가까워 오자, 때마침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일어나 그 위험이 고조되고 있어 여행 자체가 거의 취소 될 번했으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을 기점으로 양국이 극적인 휴전으로 여행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번 성지 순례 구성원은 거의 연합교회 교인중심으로 되어 있었으며,  담임 목사님 부부가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성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 또한 크다.

그러나 중동의 전쟁위험이 언제 재발할지도 모르는 지역에 여행을 한다는 것이 지나친 모험이라며 반대하는 큰 며늘아기의 걱정스런 만류도 있어, 필자도 약간은 망 서려졌지만, 우리부부가 빠지면 함께 가기로 했던 멤버 중에서 많은 사람이 동조 이탈이 생길 것 같아 내색 않고 동참하기로 했다.


어쨌든 여행 D day가 다가왔다.

필라 공항에 34명의 일행들이 런던 텔아비브 공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항공기를 타기 위하여 한명의 낙오도 없이 속속 모여 들었다.

모두가 순조롭게 공항수속을 마치고 British 7141기편은 예정대로 승선하자, 저녁 6시 55분경 항공기는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며 서서히 활주를 이탈, 하늘로 치솟아 올라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과 필라의 시차가 5시간임을 고려 할 때, 이제 7시간 정도 비행하면 현지시간으로 아침 6시 40분경 영국 런던 공항에 도착, 다시 이스라엘 항공기 편으로 갈아타기로 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텔아비브”공항에 도착 시간은 그곳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 50분경이었다.

런던과 이스라엘간의 2시간의 시간차를 고려할 때, 필라 와 이스라엘의 시간차는 7시간인 셈이며 비행시간은 12시간으로 여행 첫째 날은 이렇게 항공기에서 모두 보내야했다.

이번 여행기록이 너무 많아 몇 가지 지역으로 나누어 연재한다.


이스라엘 편 사진 슬라 이드로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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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발자취를 역으로 찾아서
 

우리 부부는 일행과 함께 2009년 2월 8일 오후 6시55분, 필라를 출발하여 다음날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 50분경, 이스라엘 공항에 도착 하여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잔뜩 흐려있었고 예상보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쳐간다. 현지에서 14년 넘게 머무르며 박사학위를 획득한 후 목회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풍채 좋은 김 목사님이라는 분이 방한 잠바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의 복장으로 미루어 우리가 지금부터 찾아 가는 지역의 날씨가 추울 것이란 생각이 들어 기후를 물어보니, 안내는 감기기운이 있어 두툼한 잠바를 입고 나왔을 뿐, 우리들이 입고 있는 가벼운 복장으로 충분 하단다.

어제까지 날씨가 가문 편이었으나 오늘 유독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했다.

날씨가 너무 가물어 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우리가 비를 몰고 온 것 같다는 멘트를 한 후 마침 우리일행들이 낮 시간에 이곳을 도착하여 버스 창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대 자연과 해가 지기 전에 두 지역(엠마오 교회 및 히브리 대학 전망대)을 돌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 밤잠을 못자 피로한 몸들이지만 밝은 표정으로 예루살렘을 우리가 지금 버스타고 입성하는 것이다.

그 옛날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신 때의 모습을 생각 하면서----.


엠마오 교회

공항에서 우리를 실은 관광버스는 1번 국도를 따라 1시간정도 달려 “엠마오”교회를 찾아 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 40일간 머무시는 동안 여섯 번을 나타나셨다는데, 대부분 산지지역에 나타나시다가 두 곳의 해안지역에 나타나시게 되는데, 그 곳의 하나가 “엠마오 교회”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나타나신 곳, 그날의 흔적을 보기위하여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버스 창문을 통하여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농촌 풍경은 어느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름이 가득하여 농토가 비옥하게 보였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한 나라이다.

그들은 1948년,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로 부터 줄기찬 도전과 공격을 15개월간의 전투 끝에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아랍 국가들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때 해안 평야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지역은 이스라엘 영토로, 유다와 사마리아지역은 요르단이,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아래 편입 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 되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는 요르단이, 서부는 이스라엘이 관활하게 된 것이다. 그곳의 인구는 2백만으로 독립이후 국가 건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라이다.

지구촌 어디를 가든 한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퍼져 있지만, 현재 이 나라에도 한인이 500여명 살고 있다고 한다.

지형은 통상 해안, 평지, 산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항지역이 해발 10m로 “해안 지역”, 예루살렘이 해발 800m 로 “산지 지역”이라 부르고 공항에서부터 우리가 향하는 지역을 향하여 점차 오르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간 지점을 “평지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얼마 전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일방적인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 지구”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2시간정도 드라이브 거리에 있다.

위험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현재 하마스가 보유하고 있는 무기로는 사거리 47Km인 박격포가 대부분(157Km 사정거리의 박격포도 있다함)이어서 예루살렘까지 미치지 못하여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가자지구는 주로 이집트로 통하는 땅굴보급로를 통해 무기와 군수품을 공급 받았는데.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 봉쇄 되어 있는 형편이라 그들은 완전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엠마오 교회”에 도착했다.

당시 엠마오 교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3-4 지역 설이 있다는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의 부연 설명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가장 유력한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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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엠마오 교회 내부흔적


옛 믿음의 선배들이 예배 보던 교회당 돌담과 돌기둥이 당그랗게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세월의 상처가 이런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예배 보던 앞쪽이 둥그렇게 원형을 이루고 있는 벽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교회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당시 건축 양식에 의하면 “교회”가 앞면 벽이 둥글게 되어 있는 반면에, “회당”의 특징은 앞 벽이 직선으로 막혀 있는데, 이곳은 둥그렇게 원형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교회라는 것이다. 이곳엔 1600년 전 십자군이 머물기도 했었다는 부언 설명을 들으면서, 거의 폐허가 되어 있는 교회의 흔적들은 살피다보니 교회 뒤 모퉁이에 서민들의 돌무덤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만큼 흘러간 세월의 중간 마다 스스로 폐허된 교회 터에 뿌리를 내린 벗 꽃 나무가 군데군데 꽃을 피우며 강한 생명력으로 엠마오의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자 해가 서산에 기울며 이곳 예루살렘에도 어두움이 서서히 찾아 들기 시작 했다. 해가 지기 전에 히브리 대학 전망대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을 내려 보아야 한다며 안내 목사는 서두른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찾아오신 이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담임 목사님께서 기도를 드린 후, 우리는 히브리 대학 전망대로 향 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전망대

1925년 미국의 이스라엘 민족의 모금으로 건설되었다는 이 대학은 아인슈타인이 초대 이사장이었다고 한다. 대학 모퉁이 전망대에 오르니 예루살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흐린 탓에 시계에 지장은 있는 편이었으나, 그런대로 감상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시가지는 성경에서 나오는 옛 모습은 현대 문명에 밀려 사라지고 현대건물이 멀게 또는 가깝게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가깝게는 예루살렘의 황금의 교회, 그리고 멀리 우리가 앞으로 돌아볼 주기도문교회, 눈물의 교회, 겟세마네 동산, 기드론 골짜기, 십자가의 길, 통곡의 벽 등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잠간 저녁 6시가 되자 예루살렘의시가지가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전등불이 여기저기 반짝이면서 또 다른 도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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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히부리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 시가지.


아! 불빛 찬란한 아름다운 예루살렘의 밤이여 !

불빛이 빛나는 밤의 도시는 추함도 혼잡함도 모든 오염도 아름답게 변화 시켜 놓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어두움이 깃들기 전에 전망대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어두움을 맞이하여 불빛으로 바뀌고 있는 야경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운이 좋다고 생각 되었다.

아름다운 불빛을 보는 순간 항공기에서 긴 시간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가신다.

모두들 감탄을 연발하며 예루살렘의 야경을 사진에 담는 사이, 잔득 흐렸던 날씨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려 비를 뿌리며 심술을 부리고 만다.

이쯤 되면 옷이 젖기 전에 이 전망대를 떠나 긴 여로의 피로를 풀기위해 호텔로 가야 했다.

저녁 7시 30분 Grand Court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찾아서

어제 저녁 히브리대학 전망대에서 예루살렘시가지를 개략적으로 둘러본 것이 성지 순례의 총론 이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는 순례의 각론이 시작 된 것이다.

예루살렘은 전체의 둘레가 4,018Km로  남쪽으로 시온 산을 중심으로 아르미니움, 북쪽에 기독교, 동쪽으로 쥬시, 서쪽으로 무슬림 등 4개의 Court로 나누어 져 있으며, 시온 문, 책임 문, 황금의 문, 쓰레기(분) 문 등등 8개의 문이 있다고 했다.

이 도시는 원래 정착민과 유목민(베두민=사막의 사람)이 함께 거주하며 발전해 왔다는 도시로서 헤롯왕이 46년 걸려 건축했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행위와 타락이 만연하는 것을 예수께서 직접 목격하시고 일갈하시며, “당장 그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3일 만에 당신께서 직접 재건하리라”고 호통을 치셨다는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감난 산(Mount of Olives)쪽 기드론 골짜기와 유대인들의 무덤(Absalom's Tomb) 에 도착하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를 따라 예루살렘을 길게 가로 막고 있는 예루살렘 석조성벽 너머에 어제 저녁에 본적이 있는 황금 교회와 예루살렘 시가지를 바라보니 성곽중앙에 돌로 꽉 막혀 있는 황금의 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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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감난산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예루살렘이 안개 속에 아련히 보인다.


날씨가 흐렸음에도 비교적 멀리 예루살렘 시가지 좌측부터 우측으로 최후의 만찬 교회(=마가의 다락발), 무슬림교회, 교회 뾰족탑, 루터교회(Lutheran Church), 영적 무덤교회, Dome of the Rock, 황금 문(Golden Gate), 성 스테판의 문, Rockfeller Museum, Garden Tomb등이 시야에 들어 왔다.  예루살렘 들판은 낮과 밤, 겨울, 여름 계절마다 분위기가 달라 광야의 모래산과 푸름이 교차된다고 하며, 유대교, 기독교, 모슬람교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AD 132년 자칭 별의아들(=메시아의 아들)이라 칭하는 로마의 바르코코바가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파레스티나로 바뀌어 표기 해 놓았기 때문에 한때 예루살렘이 로마 지도상에 없어지기도 했다.


예루살렘, 승천교회

오늘부터 성지를 직접 답사하며 사실상의 순례가 시작 된다.

아침 8시 30분, 오늘하루의 안전한 여행일정을 간구하는 담임 목사님의 기도를 시작으로 호텔을 떠난 우리는 감난산(올리브 산) 성지로 향했다.

유난히 올리브(=감난나무) 나무가 많아 제 2성전 시대에는 올리브 산 과 성전의 언덕을 나무다리로 연결 되었다는 설이 있어 감난산이란 이름 했다는 이곳엔 승천교회, 주기도문 교회, 눈물의 교회, 기드른골짜기, 게세만의 교회, 스데반 순교 교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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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지점(승천기념 교회)


오늘 제일 처음 방문지가 “승천 교회”였는데 호텔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 해있었다..

이곳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이곳에서 승천 하셨다는 장소로서, 그곳엔 작고 둥근 돌 벽 교회를 건축 해있었고, 그 옆으로 석조로 건축되었던 교회모습이 남아 있었다.

원래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위 지붕을 가리지 않고 열어 놓았는데, 무슬림들이 지붕을 그들 스타일로 둥그렇게 콘크리트로 막고 작은 창문 몇 개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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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수님 승천 하신 지점,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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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승천교회 내부 창문 옆, 비둘기 한 마리가 졸고 있다


세멘 바닥 중앙에는 작은 바위 돌이 돌출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발자국 모양의 형태가 크게 남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안내는 이것을 예수님 발자국이란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밟았던 발자국 이라는 이야긴데, 왼지 감격스럽기보다는 성지가 상품화 되고 있는 기분에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작은 창문 옆 모퉁이엔 길 잃은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졸고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다.


예루살렘, 주기도문 교회

교회 입구에 들어서니 하늘이 그대로 보이도록 열린 공간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넓은 벽에 연이어 6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언어를 구사 하셨을까? 단정할 수는 없어도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 그분은 아랍어, 히부리어, 헬라어, 로마어등을 사용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교회가 지붕 없이 벽들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이라 처음에는 무슨 건물을 짓다 말았나 생각했으나 이 교회는 원래 3면 만 벽으로 건축된 건물구조로 수도사들이 밖의 세계와 차단하고 오직 하늘을 우러러 신앙생활에 정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건물모퉁이에는 프랑스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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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주기도문교회 프랑스 깃발과 벽에 60여개국어로 번역 된

주기도문이 벽으로 연하여 부착 되어있다.


알고 보니 이 교회는 프랑스의 갈멘 수도원의 소유이며, 현재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은 입구로 통하는 오른쪽 벽면에는 한글로 된 대형 “주기도문”판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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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주기도문교회, 한국어 주기도문 앞에서 필자 부부


예루살렘 성지에서 한글로 된 주기도문을 보니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현지에 계시는 한인 목사님이 수도원 주교를 설득하여 국위를 선양하신 것이다. 모두들 그 목사님의 노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 주기도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령하고 난 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토씨한자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이 한글 주기도문은 여기 이 자리에서 많은 한인 순례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 하게 할 것이다.

예루살렘, 기드론(Kidron) 골짜기

이 골짜기는 우리가 위치해 있는 감난 산 중턱에 자리하는 눈물의 교회, 겟세마네 동산과 마주하는 황금의 문을 사이에 두고 깊이 파인 골짜기를 일컫는 것으로 동쪽 성벽 골짜기란 뜻으로, 판결의 골짜기 또는 여호사담 골짜기라고도 불리나 무슬림들은 이 골짜기를 죽음의 골짜기, 저주의 골짜기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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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유대인의 무덤


이 골짜기 한쪽 언덕 위엔 돌 관을 전시해 놓은 듯 유대인들의 무덤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각자의 돌관 위엔 사자의 인적사항을 적어놓았는데, 그 돌관 속에는 시체가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돌은 여호와를 상징하기도하며, 무덤위의 돌은 제사를 지내는 제사상과 기도용이라는 것이다. 이곳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재림시 이곳에 제일먼저 오실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제일먼저 만날 수 있는 명당자리라는 기대로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고 있어 묘 자리로는 땅값이 높은 편이란다.


무슬림들도 때가 되면 그들이 믿는 알라신이 이곳에 나타난다고 믿고 있는데, 그 때 앞에 돌로 굳게 봉해있는 ‘황금의 문’이 스스로 열리고, 죽은 자 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알라신과 함께 황금 문을 통하여 영생의 길로 입문한다는 신앙관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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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황금의 문(굳게 코크리트로 봉해져 있는 성곽문)


인위적으로 부수기 전에는 결코 쉽게 열리지 않게 생긴 돌 벽의 ‘황금의 문’이 알라신이 오시면 스스로 열린다니 의아할 따름이다.


예루살렘, 눈물의 교회 & 게세만의 교회,

좁은 골목길로 올라가면 ‘게세만의 교회와 눈물의 교회’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가 다가간 교회 지붕 양쪽에 각기 단지가 부착되어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것이 눈물단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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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눈물의 교회


예수님이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던 곳으로 방문 시간에 교회가 예배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교회 정면의 벽이 유리로 되어있어 이 교회 안에서 내다보면 예루살렘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우리는 눈물의 교회 근처 게세만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로 자리를 옯겼다.

올리브 나무 밭(일명 감난나무)으로 가꾸어 놓은 정원 앞에서 안내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 하신 후 잡히셨다는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여러 나라의 헌금으로 세워 진 교회가 지금 보이는 “게세만의 교회, 일명 만국교회(All Nation of Church)”이다. 현재의 교회건물은 1919년 재건축시 4세기 중반에 세워진 바실리카 모양을 그대로 재현했던 모습을 유지 하고 있으며, 교회를 장식한 모자이크도 비잔틴 시대의 수법을 모방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교회 앞 바위위엔 예수님이 엎드려 기도하시는 모형 앞엔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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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게세만의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올리브 나무 밭엔, 2,000년 전 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등치 큰 고목나무를 중심으로 10여 구루의 감난 나무 들이 흘러간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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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00년 되었다(?)는 올리부 나무


나이가 2,000년이나 되었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를 떠나,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을법한 고목이 된 아름드리 올리브나무가 나의 발길을 잡시 멈추게 했다.

몇 명의 장정들이 팔을 연결해도 미치지 않을 나무 둥치의 크기를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굵게 자란 올리브 나무, 늘어진 가지를 보조 기둥에 의지하여 힘겹게 지탱하며 주름투성이의 노티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쇠한 몸통에서 뻗어나간 새로운 가지들에 파란 잎들은 세월을 초월한 힘찬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올리브나무의 특징은 원 줄기가 고목이 되어도 새로운 가지로 접목하면 죽지 않고 계속 새롭게 살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는 식물이다.


예루살렘, 시온성과 마가의 다락방(=최후의 만찬 교회)

아침 11시경, 감난산을 뒤로 하고 제 2의 성전시대의 예루살렘 위쪽도시 남단에 위치하는 시온성과 시온 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지역은 최초로 다윗이 점령한 곳으로 ‘다윗산성 또는 시온 산성’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방금 돌아보고 나온 돌무덤이 가득한 기드론 골짜기의 공동묘지, 눈물의 교회, 게세만의 교회가 있는 골짜기를 좌측으로 돌아서 시온성벽을 끼고 있는 시온성(다윗성)과 마가의 다락방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온성에 다다르니 돌 벽엔 이스라엘 탈환시 총탄의 흔적이 성벽 군데군데에 상처로 남아있었으나 이를 수리 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것은 민족의 뿌리 교육을 중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 때문이라 했다. 현재 유대인들은 민족 뿌리와 정체성을 찾자는 ‘시온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16-24세까지의 이스라엘 청소년들에게 이곳을 방문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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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예루살렘 시온성 입구, 탄환으로 상처 입은 흔적이 보인다.


비용은 미주에 있는 후원재단에서 전액 보조를 하고 있다고 하며, 이곳에 5번 이상 참가한 청소년들에게는 어느 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시민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그들은 고리대금업을 많이 하는 편이나 동족에게는 무이자로 대출하고 이방인에게 이자를 부쳐 이의 수익금을 그들 민족의 구제 사업에 사용하면서 고리대금업을 발전시켜 후에 그들의 은행 모체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강한 뿌리교육인가 !?,

우리민족이 한번쯤 이들의 뿌리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온성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계속해서 인접 해있는 다윗의 탑과 다윗의 가묘가 있다는 마가의 다락방 기념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오스만 터키 제국당시 건축되었다는 “마가의 다락방”자리엔 현재 1946년 건축되었다는 ‘프렌체스코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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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마가의 다락방 교회


어두컴컴한 다락을 연상했던 “마가의 다락방”이 지금은 거대한 건축물의 교회로 변해 있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이곳은 마가가 기독교 복음을 전하던 출발을 의미하는 곳임은 물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하던 장소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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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마가의 다락방기념교회 앞에 세운 다윗의 동상,

코가 깨지고 전신에 파란 페인트가 뿌려져 있었다.


이 교회 입구에는 다윗이 하프를 켜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는 하프 줄이 망가지고, 다윗의 코가 잘려져 나가있었으며, 누군가가 다윗의 안면에서부터 몸체까지 페인트를 뿌려 놓았다. 문화재 관리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이 지역엔 아직도 종교 간의 적개심이 크게 상존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윗왕의 무덤(가묘)은 마가의 다락방 기념교회 밑에 있다고 하여 속을 들여다보니, 묘석 덮개와 관 그리고 종교적인 사제 도구 등이 비로드 천으로 덮여 있었다.

예수님 탄생 교회를 찾아서(베들레헴으로)

마가의 다락방을 나와 내일 보기로 되어 있는 아기 예수가 탄생한 구유 간을 보기위해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통제에서 벗어난, 파레스타인의 자치지구로서 특성 보다는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본향으로 세상에 알려진 곳이다.


베들레헴과 가자지구는 모두 같은 파레스타인으로 자치지구지만, 국경선은 이스라엘이 쌓아 놓은 높은 장벽으로 차단되어 상호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고 고립되어 있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나가는 것은 쉬우나, 이곳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은 까다로운 검문절차를 거쳐야 했다. 따라서 이곳 파레스타인 자치지구 주민들은 철저하게 고립 되어 난민과 같이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히틀러로부터 무참히 학살당한 억울한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 민족이 오늘날 파레스타인을 이렇게 고립시키며 옥죄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로에는 흰색과 노란색의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이 보였다.

노란색은 예루살렘지역 차량으로 비교적 통행에 제약을 받지 않는 편이지만, 흰색은 베들레헴 자치지구차량으로 비교적 통제를 많이 당하고 있는 편이다. 베들레헴의 인구는 45,000명으로 종교는 대부분 무술 렘이 차지하고 있는데 비하여 동방 카톨릭 교인은 3%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올리브 농사와 양치기 등의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으나, 성지 순례관광수입 및 미국 유럽의 구호 지원 등에 의지하는 열악한 생계를 유지 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이스라엘의 GNP는 미화 30,000불인데 반하여, 자치지구인 베들레헴지역은 3,000불로 빈부의 차가 10배나 된다.  이 자치지구의 정치체제는 총리중심제로 두 개의 정당, “하마스당(극우주의)과 아라파트 당”(1965년 창립/미국에 우호적)이 있는데 현재 “하마스당”이 집권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파레스타인이 직접 다스리는
자치지구로서는 가자지구, 헤브론, 베들레헴, 여리고,  라마라 등의 도시이다. 안내는 그날 점심을 베들레헴 현지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 했다.

식당의 질은 예루살렘 쪽 보다 못한 편이지만, 베들레헴의 현지경험도 할 겸 현지 기독교 신자를 돕자는 의미에서 안내의 특별 배려가 있었던 것 같았다. 예상대로 식사의 질도 문제려니와  물도 사서 마셔야 했다. 그런대로 체험이려니 하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구유(탄생교회)간은 식당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카드나 서적에서만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천한 구유에서 인성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탄생 하신 곳, 지금은 교회로 바뀌었지만, 예수님이 탄생하던 시간에는 하늘에서 찬란한 별빛으로 동방박사들을 안내했던 곳이다.

교회 앞엔 ‘말구유 광장’이라 불리는 돌로 포장된 작은 광장이 있었고, 끝에 마치 요새화되어 외부에서 보기엔 군부대와 같은 교회가 서있었다.

이교회는 AD 325년 비잔틴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의 어머니인 ‘헬레나 황후’ 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마구간자리에 ‘탄생 기념 교회’를 건축 했었는데, 그 후 200년 지난 후 유스티니우스 황제가 이를 다시 개축 했다. 많은 교회가 몇 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 시 수난을 받고 파괴 되는데 이교회도 페르시아(지금의 이집트)의 점령으로 한때 위기를 맞이했으나, 교회 안에 아랍 복장을 하고 있는 동방박사 그림이 있었던 덕분에 파괴를 면하고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전 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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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예수탄생교회, 앞 구유 광장과 교회 전경,

사진 중앙 건물 입구에 작은문, ‘겸손의 문’이 보인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크리스트가 탄생하신 기념 교회의 겉모습은 튼튼히 구축된 돌 성곽같이 보였다.

물론 외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출입구를 요새화 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 전면에는 3개의 문이 있었으나, 외세 침입을 막기 위해 비잔틴시대에 설치했다는 큰문과 십자군시대에 설치되었다는 중간문은 폐쇄되어 사용할 수 없었고, 교회 건물 중앙 아래로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입구만 남겨 놓았다.

누구나 이문을 통과할 때는 머리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겸손의 문”이라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다. 나도 모자를 벗어들고 일행을 따라 허리를 굽혀 ‘겸손의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교회 안은 14개의 돌기둥이 받히고 있는 넓은 Hall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있었다. 벽화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베드로가 그물로 물고기(152마리)를 잡아 올리는 장면, 정면에는 아로메니아, 그리스, 가톨릭 등 3개 종파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었다. 그 안에는 제롬의 방도 있었다.

제롬(Jerome 일명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은 이름 있는 성서학자로 이곳에서 35년간 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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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 케터린 교회 입구의 제롬의 동상


그가 번역한 라틴어의 성경은 그 후 100년 이상 사용되다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것을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제롬은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으나 “치아의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치아의 은사를 받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이곳을 찾아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쪽 등불로 밝혀진 동굴 속을 들여다보니, 말구유 형상이 보였고 대리석바닥엔 14가닥으로 된 은별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한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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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예수 탄생교회 내부, 예수님이 탄생하신 자리


옆방으로 들어서니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이 많은 순례자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도 진지하게 예배드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교회가 있기 전엔 마구간이었을 이곳---,

이곳 마구간에서 천하게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바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 된 몸으로 이렇게 설 수 있는 은혜를 감사드리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이 하루 속히 이루게 하소서”

잠시 기도를 올리고, 오후 2시 40분경 밖으로 나왔다.

들어 갈 때는 무심코 스쳤던 문간방에는 말을 탄 용사가 창으로 용을 찔러 잡는 동상이 밖으로 나오는 길에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말을 타고 창으로 용을 찌르고 있는 장군은 ST. Gorge로 정의를 상징하고 있으며, 용은 악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던 겸손의 문을 통하여 똑 같은 방법으로 밖으로 나오니 바람의 강도가 아침보다 심하게 변해있었고, 잔득 찌푸렸던 날씨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소낙비를 쏟아내기 시작 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다.


베들레헴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베들레헴 과 예루살렘 경계지역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건너올 때는 무장한 군인이 버스를 형식적으로 한번 둘러보고 통과 시키더니, 다시 예루살렘 입국을 위해 검문소에 도착하니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차량하나하나 마다 승객들의 입국 검문을 위해 여권 조사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있었던 가자전투이후엔 이스라엘은 이렇게 전례 없는 철저한 검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용 버스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안내로 부터 각자 여권을 꺼내 들고 있으란 당부가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여권 불 소지자가 4명(두 가정)이나 있어 걱정이 생겼다.

이스라엘 안에서 관광버스로 다니는데 여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호텔 금고에 보관해두고 그냥 홀가분하게 나왔던 것이 탈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에게 여권은 금고에 두고 간단하게 나가자고 당부했기 때문에 걱정을 했으나 아내가 여권을 휴대 가방에 챙겨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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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스라엘 국경


전 같으면 구릅인 경우 버스 앞좌석 사람만 여권을 확인하고 통과 될 수 있어 이번에도 문제가 없기를 기대해보았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며 안내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만약 이 두 가정(4명)이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검문소 앞으로 서서히 닦아 섰다.

이제 우리 32명은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개별적으로 건물 안을 통과하고 버스는 별도로 검문을 받고 우리가 나가는 반대편 길목에 대기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여권 문제로 검문소 통과에 문제가 생기면, 그곳에서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음으로 최악의 경우 여권 불소지자는 검문소에서 기다리게 하고 여권소지자가 우선 통과하여 여권을 가지고 다시 오는 방법도 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례대로 검문 대를 지나쳤다. 다행인지 건물 안의 입국 검문 자는 유리박스 속에 앉아 지나가는 우리가 여권을 펴 보이는 것을 멀리서 대충 확인하는 정도였다.

덕분에 여권 불소지자는 대열 속에서 적당히 묻어 무사히 그곳을 통과 할 수 있었다.

휴우---.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오니 검문소 밖은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가 통과한 국경 출입국 사무실과 출구로 연결되는 통로의 푸라스틱 지붕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흡사 적진을 향해 달리는 기병들의 말 발급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들려 왔다.

우리를 태우고 온 전용버스는 별도 검열이 늦었는지 우리가 검문소 밖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 야 급하게 나타냈다.

우리는 다시 “골고다의 언덕”으로 향 했다.


골고다의 언덕, 일명 십자가의 길

골고다로 향하는 길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비를 맞으며 골고다의 길을 걷기로 했다. 험한 산길로 예상했던 골고다의 언덕길은 현재 상가들로 변해 있어 순례 길을 찾는 경건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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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골고다 교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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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골고다 교회 내부(제2처 십자가를 메기 시작한 자리)


옛날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처소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은 후(제 1처), 십자가를 등에 메고(제 2처), 채찍을 맞으며 쓰러지고(제 3처 첫 번째 넘어 지심) 또 쓰러지며(제 7처: 두 번째 넘어짐, 제 8처 세 번째 넘어짐) 골고다를 오르시며 마리아를 만나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던 지점을 지나(제5처),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던 장소(제6처)를 거쳐, 당시 신실한 여인들이 주님을 애도했다는 지점(제8처)을 거쳐, 예수님이 옷 벗김을 당한 후(제10처), 십자가게 못 박히시고(제11처)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제12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리지신 후(제13처), 무덤에 묻히시기(제14처) 까지 그 혹독했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는 지금 이렇게 순례 여행자로서 편하게 오르고 있는 것이다.


마침 내리는 보슬비가 소낙비로 바뀌어 옷을 적시는 바람에 그런대로 순례자의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거처가신 처소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당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상해보며, 그분의 고통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메시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일행들이 대부분 연로한 연세에 시차와 강행되는 일정으로 고단한 몸에다가 둘이 받쳐 든 작은 우산으로 들이치는 소낙비에 옷자락이 흠 뿍 젖어 한기마저 느꼈지만 모두들 불평 없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교회 입구는 아취에다 큰 별로 장식되어 있었고, 안에 들어서자 그곳엔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많은 순례 객들로 꽉차있었지만, 모두들 질서를 지켜가며 그곳에서 무엇인가 체험하려는 경건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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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최초로 십자가에서 내려놓았던 바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신 후 시체를 받아 내려 놓으셨다는 넓은 돌판 위엔 많은 순례 객들이 엎드려 손을 대거나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어떤 순례자는 선물을 올려놓고 진지하게 기도 하고 있었다. 예수님 옆에 달려, 죽음 직전에 회계하던 강도 자리도 그곳에 보전 되어 있었는데. 순례 객들은 그곳엔 간단한 목례를 드리고 주로 예수님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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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골고다의 언덕,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리


그 교회는 동방, 시리아, 아르메니안, 콥픽, 에티오피아, 그리고 서방의 로마 가톨릭 등 6개의 종교회가 함께 관리 하면서, 나름대로 그들 교파들의 심벌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가끔 이들 간에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면서 종파로 나뉘어져 이렇게 자리다툼이 멈추지 않는 한 세계평화는 더욱 요원할 것 같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수님의 외조모 이신 “마리아의 모친이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 놓은 “성안나 교회”까지도 볼 수 있었다.

흔히들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만, 성모 마리아의 생모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하여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되어 감사 했다.

목사님의 기도를 끝으로 우리는 교회를 나와 아직도 계속되는 비를 맞으며 언덕을 내려왔다.

‘통곡의 벽’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어 그만 호텔로 돌아가자고 누군가가 제의를 할 법도 한데, 모두들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순례자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곳을 지나치면 언제 이곳을 다시 올 수 있겠느냐며 비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스케줄을 강행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위기 였다.


통곡의 벽

2,000년 전 헤롯 성전 바로 옆에 있는 돌로 구축된 성벽으로 높이가 21m, 아래에서 7단까지의 큰 돌들은 제 2성전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3단은 로마 시대에 덧붙인 것이며 또 그 위는 오스만 터키 시대의 증축된 것이다.

한때는 아름다웠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티토스 장군’에 의해 거의 붕괴되어 그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일부가 60m 정도 지금 남아 있다.

유태인들은 성전이 붕괴되었던 날을 잊지 않고, 이곳에 찾아 와서 메시아의 강림과 성전의 재건을 외치거나 개인의 소원을 통곡하며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기도 장소는 성벽 중간을 좌우로 칸막이를 하여 남녀가 나뉘어 접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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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통곡의 벽


이 성벽이 “통곡의 벽”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언제 부터인가 새벽이 되면 벽 돌 사이로 눈물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데, 유대인이 눈물의 기도가 있어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믿어 ‘통곡의 벽’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밤이슬이 성벽에 모여 흐르는 자연 현상이라 했다. 필자가 접근했을 때는 소낙비가 성곽을 타고 정말 통곡하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통곡의 벽 앞은 남녀가 좌우로 갈라져야 하기 때문에, 통곡의 벽을 손으로 느껴 보기 위해서는 남성들은 우산을 부인들에게 주고 소낙비를 맞아야 했다.

통곡의 벽 앞에서 간구 하는 기도가 평소의 기도 보다 얼마만큼 하나님께 상달 될지 모르겠으나 소낙비를 맞으며 기도하는 순례 객들의 모습은 진지하게만 보였다.

우리가 이곳에 접근했을 때는, 너무 심하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리는 성벽의 접촉을 포기하거나 성벽 가까이 다가섰다가도 이내 비를 피해 버스로 급하게 뛰어야 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 때문인지 보통 때 보다 어두움이 더 빨리 드리우자 주변의 가로등 불이 들어오기 시작 했다.


모두들 소낙비에 흠 뿍 젖어 차갑게 식은 몸들을 버스안의 히터로 녹이면서 호텔로 가는 도중, 안내(목사님)는 어제 실시된 이스라엘의 선거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이 나라도 비가 내리면 투표율이 저조한편이어서 여야 모두 신경을 쓴다고 하며, 이스라엘의 의회는 의석이 총 120석으로, 두 개의 정당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데 수상이 되기 위해서는 61석이 필요한바, 어제밤 시간으로 제 1당인 카디마당에서 30석, 제 2당인 리쿠당에서 29석이 당선 확정되고, 나머지 한 석이 미확정이어서 이들 두당에서 한 석을 추가 하지 못하게 되면 연립 내각으로 수상을 세우기도 힘들어 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안한 정국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선거에 대한 파레스타인 지역 하마스의 선거 총 평은 다음과 같이 냉소적 이였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협상의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선거 결과를 듣고 있는 동안 어느 듯 우리를 실은 전용버스는 호텔에 도착했다.

이제 각자 방에서 젖은 옷을 말리고 내일 일정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내일 아침은 6시에 기상하여 8시 호텔을 출발, 승천교회와 34큐빗 거리(낙타의 하룻길)에 있다는 “선한 사마리아의 집터와 오스만 터키 시대에 주막”“유다 광야”를 잠간 조망한 후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이었던 “마사다”로 가기로 되어있다.


마사다로 가는 유대 광야

어제 밤새도록 천둥번개를 치며 손가락 마디만한 우박 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비가 오락가락 했다. 예정대로 아침 일찍부터 우리가 전용버스로 달리고 있는 이 아스팔트길은 마사다로 가는 길로 그 옛날 믿음의 선배들이 샌들을 끌며 걸어서 어렵게 횡단해야 했던 넓고 험한 광야의 길이었다. 마사다로 가기 전에 중간 중간 중요 지점을 돌아보기로 했다.

광야에 가기 전 우리가 도착한 사마리아인의 집터와 주막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공사 중이어서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본 다음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했다.

이곳 현지인들은 무화과나무를 사울로 비유하여 좋지 않은 의미로 쓰는 반면에, 올리브 나무를 다윗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또 14라는 숫자는 탄생을 의미하고, 152라는 숫자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잡아 올린 고기 숫자로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이 다니던 길을 의의 길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버스는 빗속을 뚫고 유다광야 입구로 접어들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잠시 멈추며 햇볕이 반짝 비추는 듯 했으나 언제 다시 쏟아질지 모를 정도로 하늘의 먹구름은 하늘모퉁이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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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유다광야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순례자 일동)


유다광야입구엔 아침부터 관광객들의 촬영 모델용으로 낙타를 대기 시켜 놓고 있는 사람, 간단한 기념품을 팔기위하여 현지 영세민들이 목로 점을 차리고 있었다.

제법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니, 언덕 뒤에는 낭떠러지 절벽이 있었다.

낭떠러지와 연하는 끝없이 굽이치며 연결된 아골 골짜기(아골=괴로움)는 해가 그곳에서 뜨고 진다는 말이 실감이 날 만큼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모래와 석회석 광야로 보였다.

광야에는 아련히 광야의 계곡에는 허리를 가로 질러 양이 다니며 만들어 놓은 ‘의의 길’이 보였으며, 당일 날씨가 흐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광야 끝 저 멀리 좌측에는 우리가 떠나온 예루살렘 과 예레미아 선지자의 고향 “아나”라는 도시와 그리고 우측으론 요단강과 해발 1,000m의 요르단이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험한 계곡 들이었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40일간 단식하며 고행 하시던 광야다.

당시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예수님이 40일간이나 단식기도 생활을 하시고 살아 나셨다는 것을 믿기엔 좀 더 깊은 믿음과 기도가 필요할 것 같았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광야 언덕을 내려와 ‘사해’로 이동했다.


이스라엘, 사 해

이곳에 와서 “사해(죽은 바다)”를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비온 뒤의 기후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 바닷가를 찾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주어

진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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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해, 파도 앞에서”


사해의 길이는 남북으로 77m, 폭 22m, 표면적 950Km2, 여리고가 해저 250m 인데 비하여 사해는 해저 400m 이다.

이 바다의 염분은 25-30%로 보통 바다 물의 5배가 넘는 염도로서, 김치를 담기 위해 소금에 절이는 염도가 25% 와 비교하면 가히 염분의 강도를 상상할 수 있다

생물이 전혀 살지 못하며, 사람이 물에 누우면 몸이 둥둥 떠 가라앉지 않는 정도다.

그날 기후가 쌀쌀 한 편이라 그런지 다른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도착하자 뒤를 이어 역시 한인 한 구릅이 도착했는데,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보니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바람이 심한 편이라 높고 거친 파도가 치고 있었으나 실상 바닷바람은 예상보다 훈훈한 편이어서  수영대신 신을 벗고 ‘사해 바다’에 발을 담그며 즐기기엔 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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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해에서, 파도 조심---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두들 발을 걷어 부치고 바닷가에 뛰어 든다.

거친 파도가 해변에 서성이는 일행들을 향해 밀려오면, 바짓가랑이가 젖을 세라 환호성을 내며 이리저리 파도를 피해 어린아이들 같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일행 중 용감한 모 장로가 어느새 바다로 뛰어들어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 는 수영을 하려 애쓰고 있으나, 몸이 자꾸 뒤집혀 수영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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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해” 바닷물에 둥둥 떠 있는 모습


필자가 중학시절 지리시간에 사해에 관해 배울 때 뭐 그런 히얀 한 곳이 다 있을까?

그때부터 평생 궁금했는데 이렇게 인생의 후반기에 그 히얀 한 곳을 직접 찾아오다니 꿈만 같았다. 염분으로 사람의 몸이 둥둥 뜬다는 그 사해에 한번 대자로 누워 보겠다는 소원이 당일 심한 바람으로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겁을 내어 겨우 발과 손만 담그고 말았으니 이제 필자도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서 몸 전체를 바닷물에 던져 볼는지----.

아쉬움을 남긴 체 우리는 다시 공동 신앙생활의 근원지였던 “쿰란”으로 향했다.


쿰 란

쿰란은 유대인 제사장의 장악 하에 공동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AD 70년경 로마가 공격하여 원래 건물들이 파괴되고, 현재는 당시 공동생활의 유적이 발굴되어 잔재만 남아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BC 8세기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유적마다 발굴 년대가 잘 표시 되어 있었고 아직도 발굴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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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947년, 베두인 목동이 발견한 성서 두루마기


이곳 경건 주의자들은 로마가 공격해올 당시 성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손으로 카피한 성서 두루마리를 어느 계곡 굴속에 숨겨 놓았다는데, 1947년경 양치는 베두인 목동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이 두루마기 성서는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성서는 히부리어에 능통한 히부리 대학 교수에게 읽게 한 결과 성경구약과 동일한 내용임이 확인 되어 성경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이세상 모든 남녀에게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음에도 쿰란의 공동 생활하는 이들은 가족 없이 남자들만 이곳에서 집단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독신주의자였는지 아니면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남자들만 이곳에서 평생 공동신앙생활만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은데,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그러한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의문을 가진 체 이곳을 나와 왕의 대로를 따라 “마사다”로 이동해 갔다.


이스라엘, 마사다

마사다는 90번 도로(왕의 도로)를 한참을 달려 갈릴리 호수 왼쪽 끝의 헐몬산을 지나 60번 족장 로로 방향을 바꾸어 해안 도로라 불리는 6번 도로에서 다시 65번 도로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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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마사다 입구 및 모형


“마사다”는 BC 100년 무렵에 대사제가 900m의 높이의 절벽 산위에 요새를 만들었던 것으로, 그 후 헤롯왕이 이를 증축하여 호화로운 겨울 궁전으로 만들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괴 되어 흔적만 남아 역사의 무상함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이스라엘민족의 혼을 그린 “마사다”란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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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산 높이 900m에 건축했던 “마사다” 성벽과 마을의 흔적


안내가 입구에서 단체로 케이블카 표를 구입하기를 기다려 마사다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까지의 소요시간은 3-4분 정도, 급경사라 케이블카가 움직일 때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듯 수직 상승의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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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마사다, 빗물을 모으기 위한 수로가

왼쪽 산기슭의 거미줄 같이 연결되어있다.


“마사다”를 이스라엘 민족들이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헤롯왕의 궁전’으로서가 아니라, AD 70년에 유대인이 이곳에서 로마 ‘훌라디오스 실바 장군’이 이끄는 10군단의 병력 6천여 명의 총공격을 2년 간 막아내며 버티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 정복자들에게 수치스러운 모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여 민족의 긍지를 지키자며, AD 73년 당시 잔류 인원(900여명) 모두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결하여 민족의 긍지를 지키며 멸망의 길을 택한데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패인의 원인은 로마의 실바 장군이 장기간 이 산을 고립시킨 후 맹공격을 감행한 이유도 있겠지만, 이들 공격군인 로마 군인들도 마사다가 지형적으로 워낙 높고 험한 요새로 함락시키기가 그리 쉽지 않자 평지부터 마사다의 성벽으로 토성을 쌓아 올려가며 접근하게 되는데 이들은 토성을 쌓는 인부들을 종족인 이스라엘 포로들을 앞장세워 방패 마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로마군은 이스라엘 민족이 같은 민족에게는 절대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 그들 민족성을 악용한 것이다.

결국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앞세워 접근하는 로마군을 빤히 내려다보며 속수무책이었던 그들은 결국 이 상태로는 로마군이 성을 넘어들어 성벽을 함락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집단 자살을 결심 했다는 것이다.

그때 저항군인 그들의 착잡했던 심정을 상기해보며, 마사다 성위에서 로마군이 진입했다는 쪽을 내려다보니 평지에서부터 요새 정문까지 150m 이상 대 부대가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토담을 쌓아놓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마사다에서 물과 음식은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엔게디”란 도시에서 조달했다. 이 도시는 옛 부터 오아시스로 폭포와 샘물 등이 풍부하여 번영했던 도시였으며,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몸을 숨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엔게디도 쿰란과 비슷한 시기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발굴된 마사다의 성곽 크기는 영화에서 보던 것 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병영의 돌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생활하던 집터 및 소품 그리고 밖으로부터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도록 거미줄 같이 연결해 놓은 수로 등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그들의 어려운 여건을 혜쳐나간 지혜로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수로는 당시의 과학적인 수준을 실감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지막 시간에 필자를 비롯한 일행 3명이 사진을 찍느라 잠시 대열에서 이탈되었다가 하산하는 케이블카 대기실에서 힘들게 일행과 조인하는 바람에 반가움과 핀잔이 섞인 박수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마사다를 출발하여 여리고로 향했다. 이번여행은 광야 길을 한없이 달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드넓은 광야를 가로 질러 요르단과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의 왕의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해 달려가노라니 모세가 40년의 광야생활 끝에 하나님이 계시한 가나안땅을 밟기 전에 그곳에서 가나안을 내려다보았다는 ‘느보산’(=태양이 떠오른 곳=비스가산=높은 산))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것을 잠시 외면하고 맞은편의 족장 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이르니 소위 젖과 꿀이 흐른다는 ‘여리고’ 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리고(Jericho)

2월 12일 아침이 밝아 왔다.

중동지역에서 비교적 시설이 가장 좋았던 여리고 호텔, 그러나 손님이 없었다.

이곳 자치지구들은 예외 없이 모든 Business가 한가하단다.

여리고는 해발 250m 낮은 지역으로 예전엔 오아시스로 인류가 가장먼저 촌락을 이루며 살아가던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농작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 옛날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오직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며 성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6일간 돌고난 후, 마지막 주일엔 7바퀴를 돌고 고함을 치자 성곽이 무너져 내려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는 ‘성서에 나오는 여리고’가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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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젖과 꿀이 흐르는 여리고 전경


“갖은 것은 없어도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 한다”는 곳, 한때는 오아시스의 도시로 풍부한 물과 따뜻한 기후 덕분에 과일과 농작물이 풍요로웠던 도시로 BC 8,000년 전 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리 사께오와 뽕나무

우리는 여리고 마을 어귀의 뽕나무(=돌 무화과나무) 앞에서 내렸다.

그 나무는 얼마나 긴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는지 제법고목이 되어 있었다.


35) 사께오가 올라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다는 뽕나무


성경에 나오는 세리 사께오가 대중의 눈을 피해 이 나무에 올라 회심의 눈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뽕나무 옆에 있었다.

혹자는 현재 뽕나무가 예수님 당시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뽕나무의 수명이 600년인 것임을 감안 할 때 이 주장은 과장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시대에 세인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 사께오를 예수님은 중히 쓰시기로 하고 그를 감화시켜 주를 영접 하게 했다는 바로 그 자리에 필자도 와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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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뽕나무 옆, 세리 사께오가 뽕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예수님 말씀을 경청했다는 그림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멈추지 않았지만, “키 작은 사께오를 너무 크게 그린 게 아냐?”누군가 의 농담에 한바탕 웃으며, 나무 옆 돌 판에 그려놓은 뽕나무 가지위의 등치 큰 사께오를 감상했다. 사께오가 나무에 올라가있는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몸이 아파서, 키가 작았던 사람이기 때문, 또는 당시 세리는 사회에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구구하다.


여리고의 샘물

계속해서 우리는 이곳을 떠나 옛 부터 지금까지 그 마을 전체가 마실 수 있도록 많은 량의 ‘샘물이 솟아  오른다는 이고장의 우물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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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샘터 건물 앞에서 관리인을 기다리고 있다.


뽕나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샘터는 창고 같은 건축물과 주위의 철조망으로 보호 되어 있었다. 철조망 문이 쇄사슬로 굳게 잠겨 있는 문 앞을 잠시 서성이고 있노라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사람이 나타나 문을 열어 주었다. 안내와는 평소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안내가 자주 많은 관광객을 데리고 오다보니 친분이 생겼나보다.

관리인이 열어주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콩크릿트로 만든 널찍한 우물바닥에 물의 수위가 어느 정도 차있는 상태에서 샘물은 계속 솟아 밖으로 흘러 나가고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계속 이렇게 맑은 샘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어찌 달리 해석할 방법이 있으랴.

샘물을 보호하기위하여 만들어놓은 시멘 콘크리트 주위는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마을 전체가 마시는 수원의 공급지 치고는 위생 관리가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관리를 철저히 하려면 관광객의 출입도 통제해야할 것 같은데---.

이곳을 나와 우리는 아침시간에 ‘시험 산’을 전망할 수 있는 ‘여리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여리고, 시험산과 구 여리고 성터

여리고 전망대에서는 좌측 앞 건너편으로 깎아 세운 듯 한 지상 800m 높이의 가파른 절벽을 따라 절묘하게 세워놓은 돌 건축물(사스모니아 왕조당시 건축)이 마치 절벽 위를 가로 질러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기차처럼 길게 늘어선 건축물이 그리고 절벽 군데군데 수도장소로 이용된다는 동굴 구멍들이 보였다.


이곳은 예수님이 단식기도 후에 마귀들에게 시험받은 곳이라 “시험 산”이라 부르며, 현재 수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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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시험 산, 예수님이 단식기도 중에 마귀에게 시험받았던 곳 ,

현재는 수도원이 건축되어 있다.


이 수도원의 수도 목적은 “라우라 운동”이란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수련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교통수단은 케이블카를 이용하고 있었다.

잠시 시험 산을 바라본 후 계속해서 인근에 있는 구 여리고의 유적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 높지 않은 넓은 평지에 옛날 여리고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었던 지역성터, 넓은 집터의 흔적 이외엔 여호수아가 무너뜨렸다는 성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산 중턱위에 남아 있는 성터가 있었는데 이것 당시 성의 일부분이 아닌가? 추정 할 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고증으로 이곳이 구 여리고 성터임을 확신하고 현재까지 이곳저곳 땅을 뒤집

어 발굴 작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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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구여리고, 옛 성의 일부(?)


몇 년 전 발굴 팀이 가능성을 갖고 열심히 파 들어가다 찌그러진 코가 콜라 캔을 발견하고 허탈해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땅속의 코카콜라 캔은 이미 다른 발굴 팀이 발굴에 실패한 곳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 여리고 성터 입구에는 간이상점이 몇 가지 작은 기념품들을 팔고 있어 잠간 들렸다.

예루살렘 전경 사진이 눈에 띄었다. 교회 여호수아 임원들에게 성지 순례 기념으로 좋을 거란 생각에서 몇 장을 구입했다. 계산을 하느라 지체되어 사진뭉치를 들고 달려 가보니 버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9시경 전용버스는 다시 90번 도로를 따라 “무기도 와 갈멘산”으로 향했다.

우선 90번 도로에서 65번 도로로 진입하여, 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이집트까지 연결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솔로몬이 철병 성을 쌓고 궁전을 만들었다는 “무기도”에 도착했다.


무기도(Megido)

우리를 실은 전용버스는 65번 도로로 접어들어 우측에 보이는 변화 산을 차창 밖으로 스치고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내려가니 우측 능선이 보였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산기슭에 ‘Megido’란 글씨가 선명하게 쓰인 노란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바로 이곳이 BC 4천 년 전 세워진 역사 속의 한 도시 “무기도” 라는 곳이다.

무기도는 솔로몬이 평정한 곳으로 철병 성을 만들고, 마사 다와 같이 2중벽으로 요새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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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무기도


궁전을 건축한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화려 했다는 솔로몬의 궁전은 간데없고, 발굴 팀들에 의해 들어난 부서진 벽들과 돌덩어리의 어지러운 흔적들만 남아 옛날을 회상하게 하고 있었다.

이곳은 ‘핏케슈타인’이란 고고학자가 발굴하였으나 솔로몬의 구체적인 흔적을 찾지 못하자 “소로몬과 다윗시대”는 실제 역사상 없었던 것이라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 후 히부리 대학 하소교수가 솔로몬의 유적을 발견 하여 다시 반론을 제기 함으로 솔로몬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BC 3,000년 전에 열강들이 오고가는 길목으로 침략이 잦았던 곳이다. 이곳 박물관엔 솔로몬 시대의 모형도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 성 밖의 물을 공급했던 물길을 보기 위하여,  257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 지하 25m 밑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니 우리의 전용버스가 대기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 ‘갈멜 산’으로 이동했다.


갈멘산(Mt. Carmel)

우리가 무기도를 떠난 시간이 12시 30분경, 무기도에서 20여분 거리에 갈멘산이 있다.

점심은 갈멘산 입구에서 현지 한인이 준비한 도시락으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일단은 갈멘산을 지나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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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갈멘산 정상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 목사님


갈멘산으로 이동도중 다음과 같은 상식을 안내에게 들었다.

이스라엘은 의무적으로 남녀 공히 군 복무를 해야 하는데 현재 남자는 34개월, 여자는 26개월이 복무 기간이란 것 과 이스라엘의 군기피자는 이스라엘에 출입국을 금지 하고 있으며, 현재 이스라엘 수상이 육군 참모 총장 출신으로 군 출신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

점심을 위해 우리가 안내된 곳은 나무가 적당하게 엉클어져 있는 빈 공간(작은 공원)에 여행자를 위한 간이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한식 도시락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들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 들고 나무 밑에 흩어져 앉았는데 오랜만에 김치를 보고 환호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현지 영세민이 유리병에 든 이름 모를 기름들을 들고 우리에게 접근 하고 있었다.

점심을 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공원을 둘러보니 잡목사이사이에 이상한 소나무가 보였다.

침엽수인 소나무 잎이 마치 수양버들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모두들 별 감정 없이 지나치고 있었지만, 나의 눈엔 이상하게 느껴져 주위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후 관계려니 생각한 체 그곳을 출발하여 갈멘산으로 가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도로 좌우들판에는 “아네모네”란 빨간 야생화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여성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또한 도로 쪽으로 늘어선 벚꽃나무의 아름다운 꽃들이 광야의 도시임을 잠시 잊게 했다. 갈멘산에 오르니 우측으로 상수리나무가 줄지어져있었으며, 산 아래로 샤론 평야와 바울 사도가 배를 타고 로마로 출발했다는 ‘카이사르 항구’가 아련히 보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평야 끝에 “욕느암”이란 마을이 내려 보이기도 했다.

곧이어 좌측으로 멀리 능선 위로 하얀 건물이 줄지어 있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곳이 ‘갈멘 산’이란다.

갈멘산은 하나님의 성산이었는데, 바알 신을 섬기는 땅으로 변하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선지자 들을 향해 ‘영적 전쟁’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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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무크라카 안뜰에 있는 엘리야 동상

(손에 검을 든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선지자를 밟고 있다)


포도원으로 유명한 이곳, 엘리야가 기도의 힘으로 450명의 바알선지자를 무찔러 승리했다는 성산이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던 곳, 그곳엔 아직까지 엘리야 선지자의 동상이 갈멘산을 지키고 있었다. “1대 450으로 적을 완전 격파, 그리고 산채로 하늘로 승천 하셨다는 전설을 가진 선지자”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았다.

오후 2시경 우리는 갈멘산을 출발하여 예수님의 고향 ‘나세렛’ 마을로 향했다.


나사렛마을로---.

이곳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태여 나신 후 헤롯왕의 무차별 어린이 학살을 피해 애급(이집트)으로 피난생활을 하시다가 이곳으로 돌아와 목수의 아들로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현재 인구는 아랍계 7만 5천, 이스라엘계 2만 5천으로 총1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 480m의 고도에 형성된 마을로, 예수님이 건축업에 종사한 연유인지 아직도 건축업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며, 생활은 타 지역에 비해 부유한 지역으로 고급 차량과 건물들이 많은 편이다. 언어는 히부리어와 아랍어를 공용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아랍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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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예수님이 성장하신 나세렛 시가지 전경


이곳 주민들은 교육열이 강한편이며, 특별히 의대 법대 등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노벨수상자가 많이 나오는 중동의 MIT라 불리는“테크니온” 대학이 이곳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장하셨던 나세렛(Nazareth) 마을과 로마 교황청에서 건축한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를 보기로 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일러 가라사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 사실을 알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잔틴 시대에 건축한 ‘수태고지 교회’가 있는 곳이 나사렛(Nazareth)이다. “마리아 수태 고지 성당”은 현대식 건물로 아래층은 유적지로 위층은 교회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후 3시 20분경, 수태고지 성당을 훑어보고 성당을 나와 북으로 4Km 거리에 있는 ‘지포리(=세포리스)’로 향했다.


지포리라는 곳은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의 가장 큰 도시 였으며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고향이다. 십자군들은 성 안나를 기념하는 바실리카를 무너진 회당위에 세웠다.

교회의 크기는 5,0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로마식 원형극장에, 모자이크 양식의 바닥으로 전반 적으로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축방법을 택한 것이 특징이며, 그곳에는 헬라 및 고고학예술을 살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역사 자료가 있었다.

로마 형 건축과 그리스 양식의 건축형의 구별은, 그리스는 반원형 극장이 주를 이루었고, 로마는 원형 극장 양식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원형이냐 원형이냐를 놓고 구별한다는 것이다.

한쪽 공터에 훈련장 흔적이 보였다.

안내에게 물으니 오스만 터키와 십자군의 성체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우후 4시 공원 문을 닫는다고 하여 서둘러서 둘러본 후 다음 행선지인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예수님의 첫 기적, 가나안(Gana)의 포도주를---.

가나안 마을은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에서 79번 동쪽도로를 따라 20여분 거리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예수님이 초대 받은 가나의 혼인잔치 기념교회가 5개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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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가나안 잔치 기념 교회


그중에 실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고 추정되는 하나를 우리가 지금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태양이 쏟아져 뜨거워 보이는 언덕길을 우리를 실은 버스가 좌우로 굽이굽이 돌아치며 가나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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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나안 교회 건너편 포도주 상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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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교회 앞, 포도주 상점 내부


2,000년 전 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 마을은 유난히 산기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비교적 한적한 도시의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마을이 산기슭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이유는 홍수나 범죄로부터 예방을 위해서란다.

가옥들은 시멘 건축물로 구축되어 있으나 건축물이 낡아서인지 시가지가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현재 가나안 지역은 보이지 않는 곳곳에 이스라엘의 경계를 위하여 많은 군부대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옛날 예수님이 가나잔치에 초청을 받아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시고, 갈릴리 북쪽의 가보나옴으로 내려 가셨다는 이곳, 그때의 혼인 잔치 형태와 그곳을 찾은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 가?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일행이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 때, 아내와 나는 손을 잡고 천천히 대열을 따라 골목길을 7-8분정도 올라 “가나 기념교회(The Gana Catholic Wedding Church)”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회 있기 전 이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처음으로 행하신 예수님, “믿음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는 말씀을 단적으로 입증했던 현장으로 이해되는 곳이다.

지금은 교회가 들어서 당시 잔치 분위기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장소 이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으나 이스라엘의 잔치는 보통 7일간이나 지속됨으로 한번 잔치가 벌어지면 들고나는 사람이 기백명이 족히 되었을 것이니 음식과 음료수도 꽤나 필요 했을 것이다.

지금은 바로 교회 길 건너편에 “가나안 포도주”란 간판이 보이는 상점이 있다. 옛날 후한 잔치집의 주인은 간데없고, 상술이 번쩍이는 포도주 상점 주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모 장로 님이 이곳에서 오늘저녁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어 선상 성찬 예배용 포도주(?)를 구입 했다.

저녁 5시가 넘어가자 우리는 ‘티베리아스 선창가’에서 보트를 이용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 예배를 보면서 ‘키파리(Eingen Holiday Resort)’에 도착 미리 예약해둔 방카루에서 하루를 쉬고, 아침 7시 40분, 그 방카 루를 출발하여  팔복교회, 오병이어교회, 베드로 수위권교회 등을 돌아보기로 했으며 또한 ‘가보나움’에 들려 담임 목사님이 일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베드로 생선’을 시식하기로 했다.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 예배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들판 길을 한 30분간 달리니, 갈릴리호수 티베리아스(헤롯대왕의 아들에 의해 기원전 18년에 세워 졌다는 로마 황제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라고 부름) 선창가가 나타났다. 갈릴리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큰 호수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이 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22Km 길이의 호수로 모양이 하프와 비슷하다고 하여 히부리어로 키네렛(하프, 풍금)호수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갈릴리지역은 2000년이나 된 옛 도시지만 현재 인구는 5만정도로 성장속도가 늦은 도시이다. 유대인이 주로 살고 있으며 년 중 2월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40인승으로 준비된 보트에 올라 갈릴리 호수를 한 시간 예정으로 항해를 겸하여 가나안에서 구해온 포도주로 선상 성찬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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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갈릴리 호수에서 일행들의 선상예배


담임 목사님의 집례로 치러진 선상 성찬식은 참으로 기억에 남을 만 했다.

오랜만에 진짜 가나안 포도주로 성찬식을 갖는가! 했더니 맛을 보니 달콤한 포도 주스였다. 모 장로께서 최고의 포도주를 구했다고 자랑 하더니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그 옛날 예수님이 물로 만드셨다는 포도주는 아닐 지라도 바로 그 장소에서 구해온 포도 쥬스로 갈릴리 바다의 심한 풍랑을 잠재우시고, 바다 위를 걸어서 베드로에게 접근하신 후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쳐 있는 베드로에게 배 우편에 투망하게 하여 고기를 잡게 하시던 그 바다현장에서 그 날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드리는 성찬예배는 감회로 웠다.

이렇게 성찬 예배를 드리고 나니 갈릴리 바다는 서서히 어두움이 드리우기 시작 했고 해안 지역은 가물거리는 불빛으로 변하고 있어 경치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이것을 감상하며 잠시 사색에 잠기는 여유도 즐겼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갈릴리 바다에서 그렇게 해안의 경치에 심취해 있는 동안 어느새 약속된 1시간이 흘렀는지 우리를 실은 배는 출발지점 건너편 부두에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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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키파리에서 바라본 티베리아스지역,

어둠이 드리우는 시간의 전경


배에서 내려, 얼마 전 우리가 출발했던 ‘티베리아스지역’을 돌아보니, 그곳은 어느새 어둠이 드리우며 찬란한 불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키파리’부두 가에 도착하니 이곳에서 하루 우리를 안내할 손모라는 젊은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8일부터 지금(13일)까지 안내를 맡았던 최 목사님은 14일부터 다른 팀을 안내하기위하여 손 목사라는 분에게 13일 하루 우리의 안내를 맞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정이란 무엇인지 그간 최 목사님과는 정이 들었는지 모두들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갈릴리의 팔복교회

아침에 기상하니 날씨는 맑은 편이었으나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잔잔한 파도가 일뿐이었다.

예수님이 한마디 명령으로 잠재웠다는 갈릴리 파도(풍랑)라는 것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정도였단 말인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새벽바람은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 파도가 없는 편이며, 저녁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불기 때문에 시차에 따라 파도의 차이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하루 지낸 방카 루에는 “사해”에서 만났던 한인 여행팀(한국의 모 천주교회)이 함께 투숙 하고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코스로 성지 순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가웠지만 서로가 바쁜 스케줄 때문에 “좋은 여행되시라”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7시 40분 그곳을 떠나 90번 도로 북쪽을 향해 요단강 건너 팔복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팔복 교회’를 찾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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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팔복교회


팔복 교회가 있는 이 산은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하신 곳이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하는 완만한 경사의 이산은 수천 명이 족히 앉아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 검은 자갈밭의 산등성이에 이태리의 뭇소린이가 바티칸과 관계개선을 위해 현무암으로 건축했다는 ‘팔복교회’에 도착했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지 위에 1935년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이태리 프랜시스콘 수녀회가 관리 하고 있었다. 당일 교회문은 닫혀 있어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내려와야 했는데 돔으로 된 지붕 밑에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정결한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8복을 위미하는 글귀가 8개의 동그랗게 되어있는 창문에 쓰여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요단강

요단강은 흔히 장례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에 나오는 귀에 익은 강이름으로 누구나 이강이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이 이는 강 이름이다.

그런데 현지에 와보니 이강은 엔게디와 팔 복산 중간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이다.

우리는 ‘타부가’를 가기위해 요단강위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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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요단강 (버스창문을 통하여 본
         갈대 늪이 우거진 요단강-- )


요단강을 다리 위를 지나는 동안 버스 안에서 내다본 요단강---, 나의 시야엔 갈대가 무성한 작은 개울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원래는 위용을 자랑하던 강이었지만 팔 복산 좌측의 갈릴리호수에서 나오는 물길을 막아 버려 요단강의 수위가 줄어들어 이렇게 작은 개울이 되었다는 이 강을 보는 순간 나는 찬송가에서 “요단강 건너서 만나세--”를 부르며 상상하던 한번 건너면 다시 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푸른 강물이 넘실대는 큰 강 일거라는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면 요단강 건너서 만자는 성경과 찬송가에서 나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 일가?

요단강은 예단이란 어원에서 나온 말로서 원래의 뜻은 흘러내린다는 뜻이며, “단”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을 갖고 있어 약속의 땅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강을 건너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다음은 ‘타부가, 오병이어 교회’를 찾기로 했다.


타브가, 오병이어 교회를 찾아서

아침 8시 35분 우리는 팔복산을 출발하여, 일곱 개의 샘물이란 의미를 지닌 ‘타부가’로 향했다.

갈릴리 서쪽해안, 가버나움의 남쪽에 위치한곳으로 현재 다섯 개의 우물이 흔적만 남아있었다.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달한 이적을 행하신 곳, 타부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을 기념하기위해 AD 350년경 비잔틴 시대에 “오병이어 교회”가 건축 되었으나 파괴되어 새로 건축된 교회지만, 그 당시 화려한 모자이크가 아직 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세워진 교회 기초 일부는 현재 제단 우측 유리판 밑 좌측 모자이크에 새겨진 글에 의하여 4세기경 교회가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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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오병이어 기념 교회


현재의 교회는 1982년 독일의 ‘쾰른 대주교’에 의해 재건축한 교회다. 바닥의 모자이크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와 빵을 담은 광주리가 그려져 있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사한 곳임을 생각나게 하고 있었으며, 벽화에는 부활을 의미한다는 공작새가 아직도 선명하게 보였다.

교회 안을 둘러보고, 안내목사님이 간단히 야외 예배를 인도하였다.

야외 예배이후 ‘베드로의 수제자 임명 교회’ 쪽으로 이동했다.


베드로 수제자 임명교회

처음엔 수위권 교회라고 하여 무슨 의미인지 의아했으나, 일명 수제자 임명교회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불신에서 신임이 회복된 곳이라고 부언 설명을 듣고서 이해가 갔다.

이곳은 오병이어 교회에서 2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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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베드로 수제자 임명교회 야외 설교 장에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으로부터 3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던 베드로---,

“주가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대답 하던 베드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불신은 말끔히 씻기어 지고 주님으로 부터 수제자 임명이 된 자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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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베드로 수제자 임명교회 내부


“우편에 그물을 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152마리의 고기를 잡아 올리기도 한 

베드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34년 해변 가에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4세기 후반의 교회의 벽면’과 주께서 베드로와 함께 생선을 구어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넓은 바위가 지금까지 보전 되어있었다.

교회 뜰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모양의 동상이 세워 있었다.

이곳에서 안내 목사님의 집도로 간단한 예배를 들이고, 우리는 이내 “가보나움”으로 출발했다.


갈릴리에서, 베드로 생선 시식을--

우리는 옛날 베드로가 거하던 집을 찾아 가는 길에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잡아 생활하던 생선, 일명 “베드로 생선”을 맛보는 체험을 하기 위하여 가보나움 인근 갈릴리 호숫가 한 식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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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갈릴리 호수에서 잡은 베드로 생선


이 식당에도착하니 담임 목사님께서 미리 안내 목사를 통하여 베드로 생선을 준비해 놓았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이 아침과 점심시간 사이라 현지 식당에 베드로 고기를 준비시키기 힘들었지만, 안내목사가 특별히 현지 식당 주인을 설득하여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생선은 손바닥 만 한 도미같이 생긴 것으로 기름에 튀겨 한 사람당 반 마리씩 시식할 수 있었는데 시식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옛날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잡아 올린 생선 맛을 보고 간다는 의미 때문에 모두들 기대가 컸었지만 맛은 예상한대로 별로였다.

시식을 마치고 서둘러서 가보나움 옛날 “베드로의 집”으로 이동했다.


가보나움, 베드로의 집으로

가보나움의 원래 뜻은 “편히 쉬는 곳”으로, 한때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기간 중심지가 되던 곳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많은 것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당시 가르치던 회당과 베드로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우리가 도착한시간은 아침 10시경 이었는데 벌써 많은 순례 객들이 와 있었다.

이 회당은 4세기 경, 2층으로 건축되었었으나, 6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지고 현재 남아 있는 회당의 벽은 두 가지 색깔로 아래층엔 검정색, 위쪽은 베지 색으로 구분되어 있던 흔적 들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 회당의 아래층은 남자들이, 위층은 여자들이 예배 보던 곳이란다.

베드로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은 세금이 저렴했기 때문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현재 베드로의 집터엔 8각형의 야외 원형 극장형태의 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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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베드로 생가가 있던 자리에 교회당


건축 되어 있었으나, 이 교회당은 보통 문이 닫혀 있으며, 미사를 원하는 천주교 순례 객 단체의 특별 요청이 있을 때만 열리게 된다고 했다.

이곳정원에는 베드로 동상이 있었다. 왼손에는 지팡이와 오른 손에는 2개의 열쇄를 쥐고 있었는데 하나는 천국열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또 하나는 잘 이해가 기지 않는다.

앞뜰에는 세례 터, 나무 십자가, 올리브압착과 밀가루 만드는데 사용한 맷돌, 언약 괴를 나르는 수래 등의 유물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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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베드로 동상


이제 이스라엘의 성지 순례를 여기서 마치고, 계속해서 요르단과 이집트로 건너가 그 나라에 있는 성지를 비롯하여 고대 문명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예정이다.


“이스라엘 편”을 끝내면서

지금까지 5박 6일의 이스라엘 성지 순례 일정을 마치고 기행문을 쓰면서 필자는 평소 부족하고 연약한 믿음을 재충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번만큼 여행기를 쓰면서 부담이 되었던 적도 별로 없었다. 그것은 필자의 작은 신앙의 바탕으로 몇 일간 지나치듯 다녀온 성지를 얼마만큼 성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메모해온 자료를 기초로 종교 전문가가아닌 관광객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여기 까지 썼음을 고백하며, 잘못 설명된 부분이 있다면 독자 여러분의 이해와 관용을 구한다.


“이스라엘” 편 끝,

다음은 계속해서 “요르단”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