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요르단 - 편(2)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여행기, 요르단-편

이스라엘-편(1)에 이어 요르단-편(2) 입니다.
다음 슬라이드 사진 다음에 기행문이 있습니다.

슬라이드
01234567891011121314151617


요르단으로 가는 길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마치고 요르단으로 가기위해 이스라엘의 벳산 국경을 넘어야 한다. 이곳에서 출국 수속은 각자 $27의 출국요금을 지불 하는 수순으로 간단히 마칠 수 있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여성 안내가 우리를 요르단 국경 출입국 관리소 대기실로 안내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르단 국경, 출입국관리소


이번에는 요르단 입국 수속을 위해서다.

출입국 관리소 대기실은 작은 규모로 깨끗한 편이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는 여권을 점검하는 유리 창구를 통하여 한두 명의 직원이 의자에 길게 앉아 쉬고 있는 것이 보였으나 우리가 들어섰는데도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날이 이들에게 안식일(금 &일)일 뿐더러 마침 기도 시간이라 업무를 임시 중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르단의  사막길

우리는 창구 직원들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 올 때 까지 대기실에 앉아 40여분 기다려야 했다. 무슬림은 하루에 5번, 해뜨기 직전에, 정오를 기해서 저녁해가지기 한 시간 30분전에, 해지는 시간에, 해가 진후 다시 1시간 30분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일손을 놓고 기도를 해야 한단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이들의 빈곤한 삶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 15분이 되자 직원들이 웃는 얼굴로 창구에 나타나 자연스럽게 일을 시작한다.

이곳 입국 수속도 여권을 확인 하는 수준에서 쉽게 국경을 통과 할 수 있었고, 우리는  안내양이 준비해온 요르단의 전용관광 버스로 계속해서 ‘느보산’을 가기위해 25번 도로 남쪽으로 들어섰다.


요르단은 194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 후쎄인 왕이 집행권을 갖는 입헌군주국이다. 국명 요르단(Jordan), 면 적 97,740 sq km (37,738sq miles),수도 암만(Amman),

인구4,936,000명(1993년기준), 인구밀도 50.5 per sq km, 종교상황 90%가 수니파 무슬림(Sunni Muslim)이며, 크리스챤은 3%로 극소수로 언어는 주로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며 그 외 영어, 프랑스어가 쓰인다.

요르단”은 국왕 제도의 군주 정치 체제로 국회는 형식상 상하원 제도가 있으나, 상원은 명예직으로 전직 각료로 구성되어 있고, 하원의원은 80석으로 4년마다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는데 그중 2석은 기독교인에게 할애하고 있단다.

이 나라는 공무원을 선호 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연금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성경의 창세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도시로, 지진으로 1,000년을 방치해 두었다가 재건축한 도시이며, A.B지구는 비교적 부촌이, C.D지구는 빈곤층이 분포 하여 살고 있다. 특히 극소수의 기독교인 중 7%가 이곳 암만에 있다한다.

이 나라의 GNP는 $3,000-3,500으로 낮은 편이며, 실업률이 50%에 달하나 학생신분이 40%에 해당할 정도로 교육열이 중동 22개국 중 최고로 높은 편이라 한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역시 암반의 보석이라 불리는 “페트라”다.

요르단은 해발 900m의 고원 지대이지만, “페트라”는 해발 1,200m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이 고원 지대니 만큼 사막이 75%에 해당하며,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으나 넉넉지 못하여 목요일에 한번 물을 일률적으로 전 국민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가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기후는 사막성과 지중해성 기후로 밤낮의 차이가 심한 편으로 강우량은 400mm에 달한다. 달리던 버스가 검문을 위해 약곱강 근처에 있는 검문소에서 잠간 정지 했다.

중동지역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인접국가 모두 중요지역마다 검문소가 있어 통행 차량을 검문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3-5공화국 시절에 전방으로 통하는 요소요소에 설치된 검문소를 연상하게 했다.

이 지역은 약곱강을 중심으로 길리앗, 알몬 ,모압, 예돈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현재 약곱 강은 말이 강이지 늪지대처럼 말라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버스창문을 통하여 촬영한 약곱강 “와디”가 보인다.


이렇게 말라 있는 강이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선 이렇게 말라있는 강은 ‘와디’라하고, 물이 흐르는 강은 ‘잘 카나풀’로 표현 하고 있었다.

요르단으로 가는 도중 안내는 해박한 실력으로 ‘십자군’에 대한 설명을 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십자군은

십자군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키스타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1187년(88년) 및 1229년~1244년(15년)뿐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은 의로운 군대로 이 전투는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였던 동방 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인 셈이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등 서유럽의 대표적인 세 나라의 군주들이 함께 참가한 제 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 4차 십자군이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한바 있었다.


요르단, 느보산을 향하여

버스가 25번 도로 남쪽으로 11시 방향 쪽에 아득히 보이는 높은 산 능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모세가 200만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로 40년 광야의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27Km의 거리의 목전에 두고, 산위에서 가나안을 내려다보는 감격을 맛보았으나 가나안땅을 밟지 못하고 모세는 이곳에서 육신의 명을 다하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는 바로 “느보산”을 찾기 위해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르단 입구, 산악도시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그러나 가까이 가 보면 잔디가 살아있어 여름이 되면 파랗게 황야가 들판으로 변한다함) 드넓은 광야엔 이따금씩 베드인 유목민들의 천막이 보였으며, 무리진 양 떼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는 모습이 그나마 광야가 모래만 휘날리는 죽은 사막이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양떼들은 근시로서 앞에 가는 양들을 따라가는 속성이 있는데, Leader격인 양의 목에 방울을 달아 앞세우면, 나머지 양들은 앞에 가는 양의 목에서 짤랑거리는 종소리를 듣고 따라가기 때문에 목동들은 Leader양만 몰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광야엔 군데군데 푸른 올리브 밭이 보였고 그 근처엔 예외 없이 물파이프가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지하수 물을 끌어 올려 물파이프를 연결하여 마치 사막 속에 현대판 오아시스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그리고 어느 지역을 통과하다보니 길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 사람들이 복잡 거리고 있어 이유를 물으니 5일장이 서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을 잠간 벗어나자 나무 한그루 없는 들판에 자리를 펴놓고 바베퀴를 즐기고 있는 주민들도 보였다. 안식일이라 양고기 바베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는 중에 버스는 어느덧 해발 800m에 위치한 “느보산” 입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입구 도로변엔 양쪽으로 소나무가 늘어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우측편의 소나무들이 도로를 향하여 하나같이 비스듬히 기우러져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로수의 소나무 한쪽이 비스듬히 쓸어져있는 모습


서쪽에서 지속적인 바람이 심하게 불어와 생긴 현상일까, 아니면 지반이 약해 뿌리가 한쪽으로 뻗은 이유일까 일행은 물론 안내양은 관심조차 없다. 일행은 느보산을 지나 마다바(Medva)에 들려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곳 마을은 고원지대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주위엔 철근이 위로 삐쭉삐쭉 솟아 추한 모습의 미완성 콩크릿트 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보였다. 미완성 건물은 재정상의 이유로 수입이 생기는 대로 증축해 나가기 위해 방치해 둔 상태인 것도 있겠지만, 미완성 건물에 대해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세금을 피해 가기위해 그런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창에 스치는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사막의 광야를 달려 도착한곳이 마다바의 한 뷔페식당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여시서 점심을 하고 다시 ‘느보산’을 찾기로 했다.


요르단, 느보산의 모세 기념교회

여리고 맞은편에 위치한 느보산은 “비스가산(히브리어로 꼭대기)”으로 불리고 있으며, 1933년 불란서의 프란체스코에 의해  발굴하여 소유 관리 하고 있었다.

모세는 살아서 승천하셨는지 아니면 죽은 후에 하나님 곁으로 가셨는지 그의 시체를 찾을 수 없어 단정 지을 수 없으나 현재 그곳엔 가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모세가 마지막 기착지로 가나안을 내려다보았다는 그 장소에는 현재 “모세의 기념 교회와 수도원”이 건축되어있고, 모세가 숨진 곳으로 알려진 산 정상엔 놋쇠로 만든 뱀 지팡이의 조각상이 서있었다. 이 조각은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세의 기념교회 위 정상에 세워진 뱀 지팡이


이것은 모세가 시내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 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놋뱀 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으로, 모세를 거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로 인해 물뱀에 물려 죽은 사건의 상징물이다.

모세 기념교회 입구 정원에는 교회 창립 기념을 위해 식수했다는 어린 ‘백양나무’ 한구루가 일반 정원수 사이에 아직은 작은 나무로 자리하고 있지만, 앞으로 흘러갈 세월을 지키고 있어 내가 죽은  후 나의 후세가 이곳을 방문하게 될 때에는 거목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도원 앞에는 12제자 상과 입구를 막았던 둥근 돌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세기념교회 앞 12제자 조각상


기념 교회 바닥은 모자크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오병이어교회의 모자이크를 생각나게 했다.

벽면에는 전 인류의 구원을 의미하는 백인과 흑인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의 그림이 있었고, 교회 안 전망대에는 로마 “전 교황 존 폴 2세”가 이곳을 방문하여 가나안쪽을 바라보며 모세를 생각하는 사진이 전시 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던 느보산 정상(교황 존 폴2세)


바로 그 전망대에서 광야를 살펴보니 광활한 광야를 건너 멀리 사해와 여리고 그리고 가나안까지 보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예루살렘의 감란산 까지도 식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거리를 3,500년 전의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의 척박한 길을 40년이란 긴 세월을 방황하다가 이곳에 도착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돌연히 하나님 앞으로 부르신 이유를 우리 같은 부족한 믿음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당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모세를 생각하며 우리는 오후 5시 하산하여 “암만”으로 이동 했다. 35분정도 왕의 도로를 통하여 암만을 향하여 달리자 일행들이 머물 지정호텔(Meridian Hotel)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일 ‘페트라’를 가기위하여 아침 5시 30분 기상하여 7시에 호텔을 출발 할 수 있도록 로비에 집결해 달라는 안내를 받고 하루 밤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이지만 깊은 숙면을 위하여 그대로 잠자리에 드는 것 보다 어느 정도 걸어야 할 것 같아서 일행 몇 명과 주위 산책에 나섰다.

그러나 호텔이 복잡한 시내에 있어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낮선 나라의 거리를 활보하기가 안전상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 되어 호텔 주의를 30여분 서성이다 들어와 잠을 청했다.


요르단, 암만을 찾아서

암만은 BC 218년 시리아가 점령했던 곳으로 현재 암몬족속이 살고 있으며, 땅값은 타 지역에 비해 비싼 편이며, 예전 헬라가 지배 할 때는 Philadelphia로 불리는 곳으로 현재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다. 이곳은 다윗 왕이 충복 부하였던 ‘우리아’의 부인 ‘밧세바’의 미모에 흑심을 품고 남편을 ‘요합 장군’에게 보내 암만전투 최전방에 배치케 하여 사망시킨 후, 그의 부인을 취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 사이에 솔로몬을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부하의 부인을 탐한 다윗은 생전에 피를 많이 흘린 자로 성전 짓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 도시엔 한국대사관이 있으며 한인들이 350여명 정도 살고 있다. 구성 분포도는 대부분 목회자 가족과 공관가족 그리고 약간의 Business에 관계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국제공항은 80년 초에 금호 건설에서 적자를 감수 하고 건축했다고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우리는 암만을 출발하여 다시 왕의 도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출 애급 당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양떼를 몰며 40여년이나 걸려 이동하던 삭막한 광야 길을 지금 우리는 버스로 3시간여 만에 횡단하여 요르단의 국보 1호인 “페트라”에 도착하게 된다.


요르단의 주산업은 비료원료로 쓰이는 인을 채취하는 광산산업, 사해 진흙을 원료로 하는 화장품, 농산물, 천연가스와 석유를 생산하고 있으나 GNP는 3,500불 정도라 한다.

농경지는 올리브 밭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정부가 운영하고 있다.

마을엔 빈집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유목민인 베두인들의 집으로 양을 목축 하기위하여 양떼를 몰고 유목생활을 떠나며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광야는 일반 모래로 덮인 사막이 아니라 모래와 자갈이 혼합된 것으로 “바디아 사막”으로 불리우고. 때로는 모래바람이 불어와 불편을 주기도 한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르단, 사막위의 베두인의 천막


요르단의 베두인(유목민)은 전체 인구의 35%라고 한다.

이들 유목민은 인심이 좋아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지 않고 극진히 접대하는 편이며, 인사는 악수와 볼 접촉을 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민족이다.

이들의 텐트 속엔 거실, 주방, 침실 등 2-3칸의 칸막이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그중에 거실은 손님을 위해 미리 예비해 두는 것이란다.

커피는 아랍 식으로 진한 커피(=까와)와 네스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홍차를 주로 마시는데 홍차는 황사를 몸에서 씻어내는데 좋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기 전에 주인이 시음을 한 후에 손님에게 내 놓으며, 음식이나 차를 대접 받을 때는 식사를 마치기전에 조금씩 남기는 것이 예의라 한다.

이들의 음식 중 양고기 요리로 “멘샵”이라는 게 유명하단다.


요르단의 유목민은 근심 걱정이 없고 약초를 많이 먹는 편이라 일반인에 비해 장수하는 편이며, 시력이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상 이들의 수명은 65-70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엔 두 개의 강으로 구분되는데, 물이 흐르는 “압목강”, 와디로 되어 말라 있는 “아르논 강”으로 나뉘고 있다.

우리가 달리는 광야 멀리 요르단과 시리아의 수송을 감당하기 위하여 1900년도에 개통되었다는 히자드(=협괴철도)라 불리는 좁은 철로가 사막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뻗어있었고, 우리가 버스로 그곳을 지나고 있을 때 그 철로 위로 화물열차는 더위에 지쳤는지 서서히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의 대로를 따라 광야를 달려온 우리는 아침 9시 20분경, 목적지 페트라까지 1시간여 정도 거리인 “타필레”란 마을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가기위해 멈추었다. 버스를 내리니 아침 시간인데도 기온은 급상승하여 후끈거린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광야 길을 다시 달리기를 계속하여 압목강, 아르논강, 요단강 그리고 세렛강을 건너 오전 11시경, 소나무와 상 나무가 줄지어 있는 도로 사이를 지나 ‘페트라’ 근처의 ‘모리바 샘물’이 있는 근처 식당에 도착했다.


모리바 샘물”(모세의 샘)

우리는 “모리바 샘물”(모세의 샘) 근처의 현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 길 건너에 위치하고 있는 샘물을 볼 수 있었다.

모리바의 샘물은 모세가 바위를 치니 물이 솟아 나왔다는 곳으로 그물은 몇 천 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샘물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 건물처럼 작은 돔이 3개나 있는 건물을 지어 놓았는데 그 건물 앞에는 일반 상점이 여행객을 상대로 기념품등을 파는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샘물터는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리바의 우물을 보호하기위한 건축물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리바의 샘물을 뜨고 있는 지역 주민들

마침 우리가 건물에 들어서니 지역 주민들로 보이는 몇 명의 젊은 남자들이 프라스틱 물통에 물을 퍼 담고 있었다. 물은 참으로 맑아 보이는데 흘러나오는 샘물 앞의 디딤돌을 밖에서 신고 다니던 샌들로 밟고 서서 물을 푸고 있는 것을 보니 위생상태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그 샘물은 몇 천 년의 긴 역사를 이곳 주민들의 생명수로 함께 하고 있었음에 참으로 소중한 샘물로 충분히 보전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요르단, 페트라(Petra)

이제부터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제 1호 유적 “페트라”를 관광하기 위해 페트라로 떠났다. 이곳은  BC 580년경부터 로마에 점령당하는 106년경 까지 나바테인들이 에돔 족과 혼합 상권을 이루며 나바테 문명을 꽃 피운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르단, 페트라입구


지형은 해발 950m의 산악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원전 1400-1200년 에돔 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 에돔의 셀라로 언급 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괴암절벽


“Sela”는 히부리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페트라”도 그리스어로 “바위”또는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지역은 현재 “호리족속”이 거주하고 있으며, 기원 전 312년 유목민이었던 “나바테인”들이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을 당시 피신처로 특히 음식과 가재들을 숨겨놓은 곳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1880-1950년대 발굴되었지만, 7,000년 전에 이미 농경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후 외세의 잦은 공격과 6세기경, 대지진에 의해 페트라의 원래의 모습에 많은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그리고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는 잊혀진 도시가 된다.

1812년 유럽 탐험가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도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숨겨 있다는 말을 듣고,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 잠입하여 이곳을 찾아내어  그의 여행기에 이 지역을 소개함으로 페트라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이제는 ‘7대 불가사의’인 ‘괴암 유적지’로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곳이 됐다.

지금도 발굴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고대 도시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우리 같은 당일치기 관광객은 겨우 발굴된 것의 일부를 보고 올 뿐이다.

그만큼 페트라는 신비하면서도 거대한 도시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에는 벌써 여러 민족의 많은 여행객들이 도착해 있었고, 입구에는 낙타와 당나귀 역마차 몰이꾼이 몰려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코끼리상의 괴암


연로한 사람 또는 호기심이 많은 여행객의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괴암 절벽 사이로 나있는 보행 길에 낙타와 당나귀가 무질서하게 왕래하여 보행자에게 불편을 줄 뿐 아니라 낙타와 당나귀의 오물들로 문화재 지역이 오염되고 있었다.

소중한 유적지를 이렇게 소홀이 관리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객을 이용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원주민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보면서 이 나라의 경제 수준을 가늠 할 수 있었으나 이것이 바로 삶의 현장인 듯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기암절벽 관광객 운송을 위한 낙타


안내는 사고를 우려해서인지 낙타 타는 것을 권하지 않았지만 정 피곤하면 역마차는 타되 바가지를 조심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호기심 많은 몇 사람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걸으면서 여유로움도 함께 즐겼다.

페트라협곡에 들어서자 모두들 감탄 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이 마련한 신천지 바로 이것이 다란 생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의 거대한 하나의 돌산이 양쪽으로 갈라져 붉은 괴암으로 협곡을 이루고 그 바위 중간에 왕복 4Km의 결코 짧지 않은 길이 연결되어 어느 지점엔 한쪽 굽어진 바위가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어느 곳은 좁고 높은 협곡 사이로 강렬한 태양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혼자 걸으면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움을 주고 있었다.

바위는 대체로 붉은 색깔을 띠고 있었는데 어떤 바위는 돌에 무지개 색을 방불케 할 오색찬란한 줄무늬가 있어 거대한 보석을 연상케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바위를 통채로 깎아 만든 신전 모형


산 정상에는 아론 제사장의 묘가 있다고 했으며, 거대한 협곡 절벽에 자연적으로 코끼리를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동물들의 형상에 감탄이 절로 나왔으며, 고대 나바태 족의 손길로 돌 벽을 다듬어 만들어 놓은 돌 건축물은 고대 문명의 웅장함과 섬세함 그대로였다.


이곳의 고대인들의 건축 양식이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한 나바테인 고유의 건축 양식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에 그리스, 로마식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변천에 적절히 조화 하고 있음에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어떤 시인은 페트라를 ‘장밋빛 붉은 도시(Rose-Red City)’라고 불렀다. 거대한 바위산이 자연적으로 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모세가 출 애급 시 홍해 바다를  갈라놓았을 때 일어났던 경이로움이 이만 했을까 하는 정도였다. 호기심과 감탄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체 두리번거리며 30분쯤 걸어갔을까 괴암 페트라의 하이라이트인 ‘보고(Treasury)’가 햇빛에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갈라진 바위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거대한 돌산을 조각하여 만든 보고


이 보고는 ‘신전 파사드’로서 파라오의 보물이 보관돼 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보고” 앞으로 다가 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3톤에 달하는 무게의 돌을 수없이 쌓아 올린 작품이라면, 이 절벽의 작품은 거대한 돌 절벽을 위에서부터 쪼아 건축물의 형태를 빚어내는 기법으로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불가사의한 예술적 감각을 들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돌의 재료는 잘 부서지는 사암(모래돌)이라 조각이 쉬울지는 몰라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 되지 않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고의 전체 높이는 25m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높았으며 거대한 바위 절벽이 고대 조각가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변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2층으로 된 이 보고는 여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워 그리스 양식의 신전으로(파사드) 만들고, 그 사이에는 신의 형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1층도 역시 여섯 개의 기둥을 세우고 중앙에는 출입구가 있었다.

그리스 신전 양식과 한 가지 다른 점은 2층 중앙의 두 기둥 위에는 마치 왕관처럼 원형으로 조형물이 조각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신전(보고)에서 오른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니 하나의 큰 돌 산을 통째로 깎아 만들어 놓은 야외 ‘원형 극장’ 모습이 거의 원형그대로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트라, 돌산을 깎아 만든 원형극장 앞에서 필자 부부


거대한 돌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바위산을 깎아내 3,0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원형 스탠드였다. 구조적 안전성은 물론 마이크 없이도 원형 스텐드에 앉은 사람들에게 음성을 전달할 수 있는 초 과학적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원래의 주민들은 이 장소에서 왕의 장례식이나 종교의식 등을 치렀다고 하는데, 2세기에 도시를 점령한 로마인은 스탠드 정면에 로마식 무대건물을 지어 연극용 극장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이 ‘쌓아 올린’ 장식물은 지진으로 다 무너져 내려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두께가 2mm가 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여 “계란 껍데기 토기”(Egg-Shell Pottery)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페트라 계곡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면 더 볼 것이 많이 있겠지만, 이제 페트라의 황홀했던 자연에서 벗어나 우리는 시간 관계상 요르단 국경을 향하여 출발하여 요르단의 아카바국경을 통과, 다시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한 후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거쳐 “시내산”을 등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스라엘 에일랏, 국경에서 생긴일(비상 훈련)

우리가 타고 다니는 전용 관광버스와 안내는 요르단국경에서 우리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이제부터 우리는 요르단 국경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200여 미터 떨어진 이스라엘 국경 ‘엘리앗 출입관리소’까지 마치 피난민 행렬처럼 휴대품(가방)을 끌고 이동, 이곳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거쳐 다시 이집트의 “타바 국경‘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계에서 입국 수속이 가장 까다롭다는 이스라엘국경을 이번 여행 중에 벌써 몇 번째 걸쳐 통과 하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잡시 통과만 하는데도 입출국 비를 각각 $27씩 증수 하고 있었으며, 이집트는 $15을 부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에일랏 국경’ 입국 시 문제가 발생했다.

흡사 007작전을 방불케 할 입국 수속 절차를 거처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계속되는 ‘이집트 편’에 소개 하려한다. 

                        요르단 편 끝

다음은 계속해서 “이집트편(알랙산드리아 포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