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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집트-편(3)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집트 편

아래 슬라이드 쇼는 이집트 박물관에 진영되어있는 중요 자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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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박물관 중요 소장품


이집트를 찾아서

2009년 2월 15일, 8일간의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마치고 이제부터 이집트 관광길에 오른다.

이집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나라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 보았다.


이 나라의 기원을 구석기 시대로부터 찾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약 BC3200년 전 부터 고대 이집트 가 시작 된다는 것이 정설로 이 시대에 남 이집트 20개 북 이집트 22개로 나뉘어 이집트의 문명을 탄생시킨 신의 시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시대에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불가사이 한 피라미드를 만들고, BC1580년경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여 파라오를 정점으로 군사,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들의 유적에서 수많은 신들을 묘사한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이들 신들은 현인과 사제들에 의해 숭배되었고, 이집트의 신전(판테온)의 중심에는 영구적이고 유일하며 창조 되어 있지 않은 무엇인가 존재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신의 가장 정확한 영상은 태양이었고, 그의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은 형태, 빛, 열정이라 보고 있다. 태양의 혼을 “아몬이나, 아몬라라”고 불렀고, 그 뜻은 “숨겨진 태양” 그리고 “인생의 아버지”란 뜻이기도 하다. 이집트는 이렇게 전설과 현실이 함께 공존 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들의 유적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파라오가 지금도 다스리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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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지도


이 나라의 면적은 1,001,000 Km2 국토의 95%가 사막이며, 단지 5%만이 경작지로서 나일 강 연변과 서부 사막 오아시스 주변이다.

이집트는 남과 북으로 길게 연결된 나일 강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나일강 연안의남에서 북으로 아스완, 룩소르, 마로우, 기자 그리고 카이로와 지중해연안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고대 유적과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스에즈 운하로 유명하다.

강우량은 0로, 수로를 이용하여 나일 강의 물을 활용하고 있는 나라다.

인구는 4,830만 명, 인종은 이집트인 86.4% 아랍인 6.3% 루비아인 3% 베두인 2% 베베르 2% 기타 0.3%. 공용어는 아랍어, 성경번역성경전체 2개 언어, 신약 1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수도는 ‘카이로’(인구 8,692,000명), 경제는 국민 소득 $1,000내외로 빈곤, 높은 출생 율, 농경지의 부족 등으로 침체된 상태이다.

현재 이집트는 산유국이지만 빈부의 차가 극심한 나라로 20년째 계엄령 하에 독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나라는 46%가 문맹이라고 하니 장기간의 계엄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날 카이로 시내엔 승용차와 많은 봉고차가 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버스가 문이 열린 채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 나라이다.

이집트는 미국의 많은 지원과 180만 명의 해외 거주하는 이집트인들의 성금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정치는 사다트대통령(1970-81)이 소련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의 유전지역을 획득 했다.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많은 아랍 국가들이 극렬하게 반대하고 또한 국내의 회교 근본주의자들까지 그 조약을 반대하여 애급은 중동에서 고립 되고 사다트는 암살되기에 이른다.

현재의 무바락(Mubalak)대통령 정부는 조심스럽게 정치 자유화를 도입하여 다른 나라들과의 관 계 개선을 꾀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는 이슬람이 국교로서 근본주의 회교도들은 사회의 완전 이슬람 화를 꾀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예배드릴 자유는 가지나 회교도들에게 공적으로 전도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종교 분포도는 회교도 82.4%, 무종교/무신론 0.4%, 기독교 17.4%(복음화율/0.69%)로 그중에서 콥픽교회가 15,7%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재외국선교사 27단체에서 150명, 자국파송선교사 3단체에서 25명으로 파악 되고 있다.

기후는 4-10월은 더운 계절, 추운 계절은 11-3월까지인데, 계절의 구분은 겨울(Chetoui), 여름(Sefi) 그리고 나일 강이 높아지는 시기(Nili)로 구분 하고 있다.

특히 사하라사막기후로 낮과 밤의 심한 기온 차가 심하다.

이집트의 관광객은 년 간 1,000만 명이 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6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이제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가기위해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야 했다.


이집트를 가는 길에 이스라엘 국경에서 생긴 일

요르단의 페트라 관광 후, 이집트로 가기위해 요르단 국경에서 안내와 작별하고 모두들 이민자처럼 각자의 짐을 메고 끌면서 이스라엘 국경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다행히 몇 명의 유럽인을 제외하고는 입국수속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두 줄로 입국 수속과 짐 보안검열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여성 검열관이 빠를 거라 생각이 들어 그 줄에 섰다.

그런데 2대의 짐 보안 검열 대는 번갈아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검열관들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도대체 저런 속도로 입국수속을 진행 하다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걱정스럽고 짜증스러웠으나 내색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속도중에 비상이 걸렸다.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2-3명이 겨우 짐 보안 검열을 마치고 통과했을 때 이었다. 앞에 있던 여 검열관이 돌연 입국 수속을 중단하고, 우리에게 각자의 짐을 끌고 밖으로 나가라고 지시를 한다. 말 그대로 비상 이였다.

이유를 물으니 들은 척도 아니하고 서두르란다. 우리는 짐을 끌고 묵묵히 그녀를 따라 나설 수밖에 ---. 

검열관은 철조망 울타리가 쳐있는 광장으로 우리를 몰고 가다시피 안내했다.

이제 철조망 문을 닫으면 철조망 울타리 속에 갇히게 되어 있는 신세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엔 우리와 함께 수속을 받던 외국인이 4-5명 섞여 있었다.

그 순간 제트기 한대가 요란하게 폭음 소리를 내며 국경검문소 옆 활주로로 내려앉으며 위기  의식을 고조 시켰다. 곧이어 M16 소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한사람이 나타나 철조망 정문 앞에서 경계의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영락없이 감금된 기분이었다.

강금이 별건가 자의에 반하여 일정 장소에 유치 시켜 놓은 상태가 바로 강금이 아닌가--.

혹시 이 국경근처에 하마스로부터 공격을 받은 걸까? 아니면 우리들이 수상하여 별도 격리시키기 위해 비상이 걸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의심은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언제 비상이 해제 되는 것인가?

나는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있는 여 검열관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하고 가능한 부드럽게 물었다. “비밀”이라고 짤막한 대답을 할뿐 곁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나의 따지듯 계속되는 질문에 “나도 모르니 기다려”하는 짜증 섞인 대답뿐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무척 냉정했다. 화가 났지만 감정을 죽이고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도 모른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나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버린다. 여행사의 Mr. 조는 나에게 다가와 더 묻지 말란다.

그들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불친절에 기분은 언짢았지만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그로부터 30분이 지났을까(느낌은 두어 시간 지난 것 같음) 출입 관리소 건물로부터 싸이렌 소리가 울리며 검열관이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울려 나왔다.

무전기를 받던 검열관은 우리들 앞으로 다가와 출입 관리소로 원위치 하란다.

지금까지 지체한 이유는커녕 미안 하다는 말도 없이----. 

그렇다고 지체한데 대한 미안함으로 서둘러 검문 하는 것도 아니다.

꾸물꾸물 짐이 검열 대를 통과 하고 입국 수속이 끝나기까지 장장 3시간이나 걸려야 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일행 중 앞서 나간 분의 작은 손가방이 외국인여자의 손가방과 동시에 검열 대를 통과하면서 모니터에 이상 물질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전문인이 현장에 출동하여 확인할 때 까지 일단 폭발물로 간주 하여 입국 수속을 중지시키고, 우리를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하더라도 너무 예의 없는 태도가 못마땅한 일이지만,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니 이해 할 수밖에--. 이렇게 어렵게 이스라엘을 입국, 시가지를 가로 질러 이집트와 접하고 있는 국경에서 다시 출국 수속을 하고, 이집트로 입국하니 마치 이스라엘에 감금되었다 탈출한 기분이 들었다.


이스라엘을 한쪽으로 입국하여 다른 쪽으로 출국하기 까지 짧은 거리를 몇 시간씩 걸렸으니 모두들 다시는 이스라엘에 다시 올 일이 없을 거라며 불평 섞인 말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집트 타바국경’의 입국 수속은 여권 확인 후 입국비 $15씩 내고 쉽게 통과 할 수 있었다. 국경의 출입 관리소의 규모나 친절이 이스라엘에 비해 이집트가 훨씬 앞서 있었다.


이집트 출입국 관리소를 나오니 이집트에서 우리를 안내할 이미영이란 여성 안내가 나와 있었다. 모두들 이스라엘의 번거로운 수속에 피로하고 짜증이 났지만 먼 훗날 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 하며 껄껄거렸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시내산 입구의 방카 로 형식의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되었다. 특별히 호텔 식당에서 늦게 까지 우리의 저녁식사를 준비해 준 덕분에 저녁은 굶지 않았지만 저녁을 하고 나니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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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내 산 입구 모텔 앞


각자 배당받은 방으로 들어가 각자 1-2시간 쉬고 남 후 새벽 2시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내 산”을 등정하게 된다.


이집트 국경지대 시내산

성경 말씀에 의하면, 시내산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히 불러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계 중에 택함을 받은 거룩한 제사장 민족으로서 앞으로 지켜야 할 율법과 계명을 말씀하시며, 친히 두 돌 판의 양면에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삶 가운데서 지켜야 할 각종 법규와 절기, 하나님께서 임하실 성소와 성막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제사장으로 삼았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집도해야 할 각종 제사의 방법들을 말씀해주신 곳이다.


시내 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도보로 왕복 5시간 30분이나 걸린다는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길이다. 특히 시내산 등정은 모든 여행객들이 새벽 2시경에 등정을 선호하고 있단다.

이유는 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함도 있겠지만, 늦게 출발하면 기온이 올라 더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들 연로한 나이에 어제 밤을 꼬박새운 상태에서 6시간여 험한 산을 등정하고 내려온다는 것은 무리한 여행스케줄임에 틀림없다.

안내양은 올라가는 데 입구에서 낙타를 타고 일정 지점까지 올라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새벽 2시 깜깜한 밤이라 사고가 빈번한 관계로 낙타 타는 것을 권 하지 않는 단다.

그렇다면 잠 한숨 못자고 걸어야하는데 앞으로 남은 8-9일의 계속되는 여행을 위해 무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희망자만 등산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아침 7시 30분 산중턱인 해발 1,500m에 있는 St. Catherine Monastery(성 개더린 수도원)에서 합류하여 예배를 보기로 했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사람은 아예 등정을 포기 하라는 안내양의 친절한 경고를 받아 드려 우리 부부는 아침에 성 개더린 수도원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곳은 모세가 덤불속의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수도원을 지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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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내산 중턱의 성 개더린 수도원


이 수도원은 1859년에 독일 학자 “티센도르프”가 신약을 기록한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을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사본은 주후 4세기 후반에 필사된 것이지만 신약 전체가 수록된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사본은 지금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했다.

“티센도르프”가 그것을 제정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했는데, 나중에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에 팔아넘기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란다.

그런 줄 알았다면 필자가 지난번 런던 대영박물관에 들렸을 때 눈여겨보아 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날 밤 2시, 목사님을 비롯한 용감한 일행들은 밤을 꼬박 샌 피로한 몸으로 시내 산을 향해 숙소를 떠났고, 잔류 인원들은 그들보다 4시간 후인 6시에 해발 1,500m 시내 산 길목에 위치한 Catherine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은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아랍인들로 보이는 한 무리와 시내 산에 등정하겠다고 호기 있게 떠난 우리일행 중 몇 명이 벌써 돌아왔는지(?) 돌담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벌써 등정을 마치고 돌아 온 것으로 알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벌써 다녀왔다는 농담의 말을 진담으로 믿고, 그 정도의 거리였으면 무릎이 불편했지만 따라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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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내 산 등정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기하는 산중턱 수도원 앞


그러나 알고 보니 일행 중 연로하신 권사님 한분이 용감하게도 낙타를 타고 산을 오르다가 낙타가 헛발을 디디어 휘청하는 바람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도중에서 부측을 받고 돌아 왔다는 것이다. 중상이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로 했다.


거의 8시가 되자 목사님을 위시한 등정대가 땀을 흘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그 고생을 하며 산 정상에 오를 가치가 없었다고 말들을 하면서도 그분들의 얼굴엔 산 정상을 정복했다는 승리감이 가득했다. 일행들은 이분들을 힘찬 환영의 박수로 맞이했다.

마치 이산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게 악 수를 나누며, 우리는 수도원 앞 넓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목사님의 집도로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 시간 수도원 앞에는 다른 민족의 무리들도 찬송을 부르며 열심히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다음 목적지인 “르비딤”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두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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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르비듬 지역, 모세가 손을 들고 아멜렉 족속을 물리친 곳

(좌측 정상에 작은 구멍이 보이는 위치가 모세가 서있던 자리)

르비딤(Rephidim)


알루스에서 시나이 광야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숙지로 예전엔 매우 기름진 평야와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겨날 수 있다. 현재는 와디 파이란(Wd. Feiran) 혹은 와디 레파이드(Wd. Refayid) 근처로 추정한다.  이곳에 마실 물이 귀하다는 기록이 있다

르비듬은 해발 1,000m의 고원지대로서, 3,400년 전 200만 명이 살았다는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인 페란 오아시스(Oasis of Feiran) 가 있으며,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과 더불어 싸웠던 곳이라는 것과 물이 귀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아말렉 족속은 피곤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었고, 모세가 아론의 도움에 힘입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위로 들고 있자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모세는 그 승리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그 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다.


“르비딤”에서 “마라”를 향해 가는 길에 긴 “신 광야”를 거치게 되었는데, 사막을 연하는 도로변 곳곳에는 법궤(출 25:10)와 분향 단(출 30:1)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싯딤나무(=아까시아나무 과)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의 이곳  저곳에 제법 크게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뿌리가 20m나 길게 자라고 가시가 많은 나무로 사막에서 유일하게 생존 할 수 있다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조각 목’으로도 불리는 데 그 이유는, 여러 개의 줄기들이 자라면서 서로 꼬이게 되어, 결국에는 조각을 내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무는 흡수력이 강하여 같은 종류의 나무는 물론이고, 어떤 다른 수종도 곁에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싯딤나무는 여러 그루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법이 없었다.   이 나무는 한결같이 한 그루씩 떨어져서 자라고 있었다. 생명력이 얼마나 강하기에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저렇게 자랄 수 있을까 신기한 마음에 우리는 잠간 버스를 세워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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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 광야에 싯딤나무 한 구루


한참을 버스로 신 광야를 달리다 보니 여기저기 수로로 보이는 파이프가 길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막에서 인간이 살라갈 수 있는 젖줄임으로 농작물이나 사람이 살아갈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로 연결이 필수 인 것이다.

시나이 반도 쪽엔 제법 푸름이 짙어 있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로 보다 송유관으로 보이는 굵은 파이프도 홍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버스 창문을 통하여 굵은 파이프를 계속 따라가 보니 홍해 옆에는 석유 원유 생산시설이 있었고, 그 파이프는 그 시설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유전 지대란다. 이집트는 널리 알려진 석유 수출국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전기가 풍부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일반인에게 공급되고 있어, 이들에게는 전기를 낭비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아직도 사막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천연자원들이 무진장한 이집트, 옛 나일 문명의 기적을 다시 일으키면 세계 경제 대국으로도 발 돋음 할 수 있는 나라, 그러나 이집트 경제의 99%중 5%가 상류층이란 구조적인 경제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집트 문명의 21세기 르네상스는 요원할 것이다.


신 광야를 지나면서 알게 된 상식이 또 하나 있다.

통상 코 시혐을 기른 아랍인은 기혼자, 그렇지 않은 자는 미혼자라는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상투를 한사람은 기혼자, 머리를 뒤로 역어 딴 자는 미혼 총각이었던 우리의 문화 풍습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출 애급에 나오는 광야는, 40일 동안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다는 바란 광야, 40년 동안 만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한 신(수루)광야, 시내광야 등등 5개 광야가 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모든 수원을 제공하는 젖줄임은 누차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이곳 하늘에서 구름을 보기란 아주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처럼 푸른 하늘의 연속이었다. 어쩌다가 나일 강이 범람하여 도로가 유실될 경우도 있다고 하나 이집트는 문자 그대로 항상 작열하는 태양의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집트는 태양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안내로부터 이집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아부데미나’란 지역에 도착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광야를 달려 “홍해의 천연 온천장과 마라의 우물”을 보기로 했다.


홍해, 천연 온천

“마라”에 도착하기 전에 바닷가에 있는 홍해의 천연 유황온천을 지나게 된다.

수 천 년을 홍해 바다 해안 동굴 안에서 뜨거운 유황온천물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들어 지금쯤 식을 때가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여전히 변함없는 뜨거운 천연온천수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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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해, 온천이 나오는 동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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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굴속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가---, 앗! 뜨거워--!?

(바다를 데우고 있다.)



너무도 아까운 천연자원이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부담 없이 온천물로 뜨거워진 모래사장에 맨발로 수온의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스팀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동굴 속을 기어 들어가 보았다.

벌써 몇 사람의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행객들(중국인?)이 굴속에 쭈그리고 앉아 굴속 깊은 곳으로부터 피어나고 있는 천연 스팀 사우나를 즐기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굴속에 기어 들 어간지 2-3분도 안되어 이마에 땀이 흐르며 옷이 적셔 오는 느낌이다.

생각 같아서는 더 오래 앉아 땀을 흘리고 싶었으나 옷이 땀에 젖으면 갈아입을 옷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 밖으로 기어 나오고야 말았다.

대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그 굴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온천물이 흐르는 바다가로 들어 가보았다. 싸늘한 기온에 차가워진 발바닥이 따스하게 느껴지다가 이내 뜨거워지기 때문에 한자리에 오래 서있을 수 없어 자리를 자주 옮겨야 했다.

이 지역에서는 이 온천수와 함께 바닷가로 흘러나온 머드를 이용하여 피부 미용 화장품을 만드는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잠간 장난기가 발동하여 봉이 김선달 같은 상술(?)을 발휘 하려 하였으나, 모두들 “껄껄, 깔깔” 거리기만 했지 아무도 이 거래에 응하려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서 이색 경험을 즐기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이제 “마라”를 향했다.


마라의 우물(Well of Marah)

“마라”에 도착해보니 아랍어로 ‘Oyuon Musa=모세의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보였으며, 주위를 돌아보니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어 그 우물을 마라라고 불렀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간구하자 한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라고 응답하시어 그대로 행 했더니 물이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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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라의 샘(Well of Marah)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율법을 정하고 그들을 시험하여 말씀하시길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따르고, 옳은 것을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율법을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너희에게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열두개의 우물과 70개의 야자수 나무가 있어 그 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우물은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더 이상 사람이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 보였다.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발생한 곳이라는 성경적 의미가 있을 뿐이다.

“마라”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로 가기 위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를 건너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

마라에서 30여분 정도 달리면 버스 창문 좌측으로 소련과 독일 그리고 이집트의 합작으로 구축했다는 “수에즈 운하”에 도착할 수 있다.

이운하는 173Km에 달하는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뚫은 것으로 폭 200m, 수심 20m이라고 한다. 처음 완성된 이후 이집트가 이 운하를 자국 소유를 선언함으로 시나이 반도가 한동안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의 이익이 충돌하는 국제 분쟁의 중심지로 변했으나,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의 체결로 됨으로서 완전히 이집트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육로를 통하여 카이로에 가려면 반드시 이 운하를 가로 질러 통과해야 하는데, 운하를 이용할 수 있는 선착장이 4곳에 있다. 우리는 카이로로 가기위해 수에즈 운하의 해저 터널을 이용하기로 했는데 통과비는 한화 900원 정도라고 하며, 그 길이는 4.6km나 된다고 했다. 문득 뉴욕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각종 터널을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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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에즈운하 턴엘 입구(버스 안에서 촬영)


해저 터널을 지나는 덕분에 수에즈 운하의 전체적인 아름다운 전경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수에즈 운하의 밑을 통과하여 지나갔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이운하는 ‘주렙셋타’라는 불란서 영사가 사업가로 변신 후, 10년 6개월에 걸친 1869년에 건설했다고 알려 져 있다. 원래는 나폴레옹이 관심을 갔었으나 지중해가 홍해 보다 높다고 판단하여 운하구축이 불가하다고 판정하여 운하구축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수에즈 운하는 일방통행으로 운행하도록 통제되고 있으며, 운하를 통과 하는 데 걸리는 소요 시간은 14시간이나 되는데, 통행료는 1회에 한화 1억 2천만 원(?)이며, 이를 통하여 이집트의 연간 수입은 30억불에 달한다고 한다.

이 운하엔 한국의 해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장교들이 “이순신 함 과 대조영 함”으로 이곳을 시항한곳이기도 하다. 수에즈 운하를 터널을 통과하여 1시간 정도 더 이동한 끝에 마침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아스완’으로 가기위해 ‘카이로’공항으로 향했다.



이집트, 아스완(Aswān)

아스완은 이집트 카이로 남동부로 약 900Km, 룩소르의 남쪽 약 250Km동쪽 해안에 위치했으며, 한때 알랙산더 대왕이 아스완에 폭포를 발견 한 이후 겨울 피한지로 삼은 곳으로도 유명하한 곳으로 현재 약 21만 9,000명(1996년)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아스완”은 고대에 스웨넷(영어:swenet)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 뜻은 "무역"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이집트. 누비아 지방의 교역의 중심으로서 번영 한 곳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강암의 채굴장으로 유명하지만, 나일 강의 물을 조절하기 위해 1902년에 완공한 “하이 댐”이 또한 유명 하다.


이곳의 명소로는 아부심벨, 아스완 하이 댐 (Aswan High Dam), 에레판틴섬 (Island of Elephantine),아가 칸 묘 (Aga Khan Mauoleum), 필레 섬 (Philae Island), 미완성의 오베리스크 (The Unfinished Obelisk) 등이 있다고 하나 우리는 에레판틴 섬과 아가칸 묘는 짧은 여행일정으로 볼 수가 없어 이번 일정에서 제외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스완에서 아부심벨을 관광한 후, 3박 4일간 ‘나일강 쿠르스’ 여행으로 스케줄을 바꿔 나일 강과 해안 지역의 명소 관광을 즐긴 후, 룩소에서 다시 항공기 편으로 카이로로 돌아와 카이로 인근 기자지역의 왕들의 피라미드및 스핑크스, 그리고 구 카이로로 이동 예수님 피난 교회, 칸엘칼릴리 전통시장, 모카탐 동굴 교회 등을 돌아보고, 제 1진은 필라로 돌아가고, 다섯 부부 10명만 제 2진으로 남아 알렉산드리아 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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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막의 오아시스


사막을 한 시간 정도 달려 시간이 5시 30분이 지나자 어느덧 낮 시간 동안 작열하던 햇살도 한풀 꺾였는지 그 위력을 잃고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피로의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길옆으로 늘어선 전봇대는 저녁 햇살에 가늘고 긴 그림자를 사막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카이로 공항 길은 교통이 혼잡했다.

이집트는 1400년 전엔 카이로와 225Km거리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시작으로, 현재 카이로에 까지 수도를 옮겨 오기 까지 룩소, 멤피스등지로 옮겨 다녔다.

이집트의 전체 인구 7200만 명 중, 현재 1700만 명 이상이 카이로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어 카이로 도심의 복잡성은 짐작이 갔지만, 우리가 카이로 시가지를 진입하자 교통은 점점 복잡 해 지고 있었는데, 도심지의 많은 차량과 러시아워가 맞물린 시간이라 그러하다고 했다.

게다가 나귀가 끄는 마차도 차량 대열에 함께 끼어 교통 체증을 증가 시키고 있었다.

이러다간 공항까지 제시간에 들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염려가 생긴다.


카이로 시가지는 대도시답지 않게 차도가 분명하지 않고, 신호등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도로가 일방로를 운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신호등이 없으니 무질서한 운행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마치 중국에서 불어오는 서울의 황사 같이, 리비아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덕분에 호흡이 불편하고 시계가 차단되어 멀리 보이지도 않는다.

차선이나 신호등이 없는 거리는 누구나 차량 머리를 차량 앞으로 먼저 집어넣는 자가 우선권을 갖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바쁘게 달리고 있는 봉고차는 자기 등치보다 더 높게 짐을 올려 싣고 속력을 내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아슬아슬하기 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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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차창문을 통하여 본 카이로 시가지


마치 그 옛날 우리나라의 사변이 후 무질서 했던 서울거리의 차량 통행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집트는 생각 보다 교통사고가 없는 편이지만, 사고가 난다 하더라도 웬만한 사고엔 눈도 꿈적하지 않는 단다. “인 스왈라”(하나님의 뜻).  “마리쉬”(그만하길 다행)는 말과 함께 어께를 들썩이면 그만 이란다. 날 잡아 잡수 식이란다.


교통 혼잡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실은 전용버스는 운전기사는 요리저리 잘도 피해 복잡한 교통망을 뚫고 저녁 7시쯤 ‘카이로 공항’에 도착 했다.

아스완을 가기위해 서둘러 수속을 마치고 부지런히 출구에 다가가니, 항공기 출발이 30분 지연이란다. 아직 저녁전이라 일행들은 공항 내 음식점에서 Fast Food으로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여유가 생겼다며 느긋해했다. 밤 10시가 되어서 항공기에 올라 밤11시가 되어 아스완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3-4시간 쉬고 나면 “아부심벨”을 가기위해 내일 새벽 3시에 기상해야하는 날이다.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Temples of Abu Simbel)을 찾아서

어제 밤늦게 아스완 호텔에 도착한 관계로 비몽사몽 중에서 아침 3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아부심벨로 가는 버스 집결지에 도착해야 했다.

마치 군 작전을 방불케 할 여행스케줄이라 모두들 밤새 잠을 설쳤지만 한사람의 불평도 없었다. 아침식사는 빵과 쥬스 1병이든 Box하나씩 배급받아 들고 버스에 올랐으나 단 빵, 오렌지 주스, 요구릇 그리고 바나나 한 개가 전부였다.

우리가 서둘러 도착한 집결지엔 이미 많은 관광버스가 도착하여 대열을 이루고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여행객들이 모인 집결지가 마치 전지로 출정하는 군의 집결지처럼 그곳에는 무장 군인이 요소요소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 하고 있었다.


정확히 새벽 4시가 되자, 버스 들은 행렬 앞뒤에서 무장군인들의 차량 경호 하에 280Km 거리의 아부심벨을 향해 서서히 어둠을 뚫고 3시간의 사막을 횡단하는 여정을 시작 했다.

통상적으로 모든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하루에 두 번, 새벽 4시와 오전 11시 동일 집결지에서 아부심벨을 오가는데 이와 같이 차량 경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전용 버스에는 사복 경찰이 한명 더 앞자리에 배석했다.

미 시민권 자에게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이와 같이 특수 경호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았으나, 생각해보면 미국시민은 테러들의 특별 공격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새벽 4시 출발한 버스는 어둠속에 휩싸여 정확히 그 숫자를 파악 할 수 없으나 사막의 굽이치는 커브 길로 비치는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추산하여 30여대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2-3시간은 더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밖을 내다 볼 수 없자, 모두들 부족한잠을 청하거나 나누어준 아침을 먹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새벽 6시가 지나자 구름사이를 뚫고 찬란한 아침 태양이 어둠을 밀어 내고 사막을 뚫고 솟아나면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막의 지평선 끝에서 떠오르는 태양-,

바다를 헤치고 떠오르는 태양- ,

틀림없이 같은 태양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끝없이 전개되는 사막--, 그곳의 태양열은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진다.

그곳 사막에는 부시덩굴이 여기저기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모세가 부시덩굴 속에 서 일고 있는 불꽃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그 덩굴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버스 창문을 통하여 이따금씩 시야에 들어오는 인공 피라미드같이 거대한 모래동산들은 영겁의 세월 동안 모래바람이 쉬어가는 쉼터로 만들어 놓은 듯 했다.

그리고 아스완에서부터 뜨거운 사막 위에 끝없이 세워진 철근 고압전선대는 사막을 횡단하여 어디론가 끝없이 연결되고 있음을 보면서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힘도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부심벨’이 가까워 오자 오아시스 같은 마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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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새벽 시간의 사막, 부시덩굴 만 딩굴고 있다


그 마을입구를 들어서니 나일 강으로부터 긴 수로를 연결하여 이룩된 농촌 마을이란 인상이 들었는데 땅을 파내는 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 자본을 들여와 새로운 운하를 개발하고 있다는 안내의 말이다.

드디어 아침 7시경에 우리는 3시간여를 달린 끝에 여러 종류의 꽃들과 종려나무, ‘이띡(벤자민 츠리)’ 등으로 아름답게 단장 되어있는 ‘아부심벨’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검문소를 통과 하고 있었다.


아스완, 아부심불

아부심벨의 원뜻은 “새롭게 태어난다.” 이다. 그곳에는 람세스 2세의 대신전과 그의 첫 번째 왕비의 소 신전인 하토르(Hathor)신전이 인접 해 있었다.

이신전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이며 태양의 아들로 자처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다. 그곳에는 3200년 전에 만든 석조 신전 앞에는 람세스 2세가 4개의 석상이 앉아 20세기의 인조 ‘호수 낫세르(Lake Nasser)’를 응시하고 있다. 이 신전과 석상이 아직까지 현대인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위대한 파라오라는 사실이외에도,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창했던 초인간적인 신전 이전 공사의 덕택이다. 원래 신전의 위치는 90m 아래쪽의 나세르 호수(Lake Nasser)가에 있었는데, 나일 강의 범람을 조정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하이 댐’의 건축으로 호수의 수위가 높아져 신전이 잠수 하게 되자 1964-68년에 유네스코의 주관 하에 스웨덴과 독일의 지원을 받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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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람세스 2세가 건축한 아부심벨 신전전경


안내를 따라 아부심벨의 상징인 일명“람세스 2세 빛의 신전(대신전)”으로 불리는 신전 앞으로 다가갔다.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받아 람세스 2세 대 신전 앞에 서있는 4개의 석상(석상하나는 안면과 상체 부분이 망가짐)이 황금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파라오(왕=원래의 뜻은 큰집에 거하는 사람)의 영생의 삶을 중요시 여겼던 고대 파라오들은, 그들의 영생을 위해 사암과 화강암으로 무덤을 호화롭게 꾸며놓았다. 특히 스스로 파라오라 부르는 왕들은 자기들만의 내세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무고한 백성과 전쟁 노예들을 무자비하게 혹사했음을 한눈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파라오들의 군주 국가 운영을 하던 그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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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람세스 2세 좌상, 다리 밑에 여왕의 상이 보인다.


그럼으로 그들이 맡은 임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그중에서 람세스 2세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 통했던 파라오로서, 성스러운 신전 건축을 지휘하는 건축가, 메마른 사막 한복판에서 생명수와도 같은 소중한 물을 찾아내주는 수맥 탐사가, 도시의 창건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평화주의자, 위기일발의 전투를 대승리로 이끄는 용감무쌍한 대장, 상형문자의 심오한 뜻을 익히고 삶의 지혜를 습득하는 현인, 가족과 백성을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남편, 아버지, 그리고 군주로서 위엄을 지키며 각가지 역경을 헤쳐 나가는 수많은 임무를 완수하면서 삶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인물 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사실은, 이 신전의 이전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1960-64년 사이에 전 세계에 걸쳐 모금활동을 위하여 X-Mas 실을 판바 있다는데, 나도 대학 시절 이를 한두 장 구입했던 기억이 있음으로 신전 이전에 일조 했는지 모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을 이은 흔적이 보였으나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옮겨 놓았다. 매년 람세스 2세의 생일(2월 20일)과 즉위일(10월20일)에는 추모객들로 이일대가 번잡을 이룬다고 했다.


신전 입구를 들어서면, 크게 3개의 방을 중심으로 군데군데 창고로 사용하는 공간들이 있었다.

첫 번째 홀은 열주 실이 이었는데, 앞 벽에는 람세스 2세가 이문라신 면전에서 리비아인을 죽이고 있었고, 우측 앞 벽은 라하라크 면전에서 누비아인을 죽이는 장면을 비롯하여, 좌우측엔 카데쉬 전쟁에서 수천 명의 히타아치 병사들을 평소 훈련하여 데리고 다니던 사자의 도움을 받아 홀로 물리치고 승리 하는 용감무쌍한 람세스 2세와 그가 신에게 봉헌하는 장면 들이 온벽에 가득 조각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좌우에는 각각 4개의 석상이 서 있었는데, 이시스 여인의 남편인 오시리스신의 모습을 한 람세스의 상이 자리 잡고, 두 번째 홀 좌우엔 아문라신의 배와 태양신 라하라크르의 배 모형이, 세 번째 홀은 입구에서 47m거리에 지성소가 있었는데 어둠의 신 푸라, 아문신, 람세스 2세, 그리고 태양신인 라하라크의 석상이 나란히 서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전에 자신의 석상을 신들의 석상 옆에 세워 놓음으로서 자신을 신과 동일한 반열로 승격 시켜 놓은 셈이다. 람세스 2세는 1년에 2번씩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스스로 자기 석상 앞에서 제사를 지낸 셈이다.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람세스 2세가 사랑하는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축했다는 평화의 신 “하토르 신”을 모신 “소신전”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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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람세스 2세 왕비를 위한 “하토르 신전”


‘람세스 2세’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면, ‘네페르타티리’는 당대에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왕비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람세스 2세의 위대한 힘은 바로 이 왕비의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상형문자를 통해 예찬했다. 하토르 신전 전면 벽에는 람세스 2세의 상 4개와 왕비 네페르타리의 상 2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집트 역사상 이와 같이 왕비에게 신전을 지어주고 그 신전 전면을 왕비의 상으로 장식한 파라오는 람세스 2세뿐이다.

파라오면서 태양이 되고자 했던 사나이 람세스 2세,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했던 네페르타리 왕비와의 사랑, 그 사랑의 힘은 바로 아부심벨의 신전을 탄생시킨 것이다. 왕비 네파르타리는 람세스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시어머니인 파라오 셋티의 왕비와 함께 국정을 돌보는데 크게 기여한 왕비로서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이집트의 남북을 통일 하고 위상을 떨칠 수 있도록 내조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왕비이기도 했다.


“소신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역시 크게 3개의 방으로 구분 되었다.

첫 번째 홀엔, 좌우앞면 벽에 람세스가 아문라신과 라하라크 신 앞에서 리비아인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으며, 그의 뒤편에서 네페르타리가 람세스 2세에게 속삭이고 있는 장면이 조각 되어 있었고, 좌우로 각각 3개씩 6개의 풍유를 상징하는 “하토르 신상”이 새겨진 기둥이 있었다.

두 번째 홀 벽에는, 좌우로 네페르타리가 하토르 여신 과 무르 신에게 봉헌하고 있는 장면이, 또 뒤쪽 벽에는 그녀와 하토르 여신과 이시스 여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네파르타리가 여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모습이란다.

세 번째 성소는, 람세스 2세의 성소와는 달리 비어 있었지만 상형문자가 온신전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집트의 생명의 젓줄 나일 강

고대 이집트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은 삶의 중심지에 있었으며 파라오들은 그들의 조상의 기원을 이집트 판테온 신전의 신들에게서 찾았다.

파라오들은 각기 다른 숭배대상을 설정 신전을 구축하며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정교하게 도장한 벽, 거대한 열주들로 둘러싸인 궁정, 그리고 많은 숫자의 아름드리 기둥으로 이루어진 홀들로 꾸며진 이집트의 신전들은 지금 위대한 문화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나일 강 주변에는 많은 신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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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일 강 전경


‘나일 강’은 이집트 동서를 가르고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는 강으로 전국토의 95%가 사막이요, 강우량이 거의 0인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우게 한 생명의 젖줄이자, 인력과 재화의 수송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수로로서 농작물경영을 위해 적절한 범람을 조정하고 관계용 수로를 이용하는 측량과 기하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현대 이집트는 이 범람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수해를 막기 위해 구 아스완 댐, 아스완 하이 댐 등을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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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일 강의 석양


중앙아프리카 까지 연결되어 있는 이강은 아마존 강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그 수원이 키르만제로의 빙하에서 녹아내리는 물과 빅토리아 호수 일대에서 흘러내리는 물로서 평균 수심 20m 총길이 6,650km, 유역면적 3,349,900㎢, 배수량 3,100㎥/sec.나 된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번 여행기간 동안 크루즈를 타고 이 강을 중심으로 주위에 많은 유적들을 돌아보며 여유를 즐기며 많은 것을 경험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아스완, 하이댐을 찾아서

이집트에서 나일 강의 강물을 관개용수로 처음 이용한 것은 강물의 주기적인 범람이 가라앉은 후, 거기에 남겨진 진흙에 씨앗을 심었을 때부터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나일 강의 범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위하여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 많은 댐과 급수시설이 완공되어 영구적인 관개농업이 가능해졌으며, 20세기 초엽에는 운하가 개축되었고, 1901년에 완공된 아스완 Old 댐을 구축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자 6.5Km아래에 아스완 하이댐을 다시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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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하이 댐 위에서


하이 댐은 1959년에 착공, 1970년에 완공되었으며, 강폭이 550m이고 강의 양 옆에 험준한 화강암 둔덕이 있는 지점에 건설되었다.

이 댐을 통해 이집트는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가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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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하이댐 구조 약도


이 저수지는 댐의 상류 쪽으로 500km 이상 뻗어 있으며, 멀리 북부 수단까지 이어져 있다.

아스완 하이 댐은 연례적인 대홍수로부터 주민과 작물을 보호할 뿐 아니라 엄청난 전력도 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댐의 건설로 인하여 누비아의 45개 지역이 물에 잠기는 소동이 일어나 기도했었다. 만약 하이 댐이 붕괴될 경우1,100Km에 해당하는 지역 전체가 물에 잠기는 소동이 일어나 군사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시되고 있어 무장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 하여, 일부만 관광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하이 댐을 건설함으로서 이집트 전 전기 생산량의 35%의 전력을 더 얻게 되어 이집트의 전기는 넘치게 되었다고 하며, 이 댐으로 인하여 아스완에 기후 변화 까지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2시 20분경, 우리는 “하이 댐”을 돌아보고 나일의 진주라 일컫는 “필래 신전(Philae)”으로 이동했다.


필래신전(Philae)을 찾아서

피래 신전은 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필래 섬(Philae Island)에 위치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와 유사한 이름을 하고 있어 관심을 같고 보트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짙푸른 종려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로 그늘져 있는 연안에 작은 보트들이 한가롭게 정박해 있었으며, 벼랑 위 약간 높은 위치에 ‘이시스(Isis)’ 여신의 신전과 우아한 ‘트라잔의 키오스크(Kiosk)’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시스 여신을 위해 잘 건축된 신도(시의 섬)가 바로 “필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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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보트위에서본 필래신전 전경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필래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의 가장 잘 보존된 3개의 신전중 하나이고, 나머지 둘은 에드후(Edfu)와 덴데라(Dendera)에 있다고 한다.

필래는 길이 400m, 폭 135m인 제 1폭포 남쪽 하단의 세 섬들 가장 큰 섬이며, 그 이름 자체가 독특한 지리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 원문에서 필락(Pilak)은 '모퉁이 섬' 또는 '마지막 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래 필래는 나일 강 동쪽 둑 위의 작은 만의 구석인 제 1폭포의 최남단 끝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개의 섬 중 하나인 비게(Bigeh; 현재는 부분적으로 침수됨) 섬은 이시스 여신의 남편인 오시리스(Osiris)의 영면 장소였기에 모든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신성한 장소로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배를 타고 온 성직자들만이 오시리스가 묻힌 이곳에서 360개의 제단위에서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한다.

필래 섬의 신전들은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의 사랑의 힘으로 흩어진 그의 부하들을 재집결하여 오시리스를 부활시켰던 것을 감사하여 오시리스가 부인 이시스를 위하여 헌납된 것이다.

필래 섬의 여신에 대한 제사는 고대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이집트인들은 1년에 한 번은 이렇듯 신성한 섬에 순례 여행을 떠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유스티아누스 1세가 지배하던 A.D. 535년 제사에 종사하던 성직자들이 제거됨으로써 사라졌다고 한다.


필레 신전의 또 다른 가치는 이곳 ‘아길키아(Agilkia)’로 부터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유적들을 원형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신성한 섬은 1898년까지는 연중 내내 물위에 있었지만, 아스완의 구 댐의 건설로 인공 호수에 잠기게 되었다. 단지 8-9월에만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댐의 작은 문이 열려질 때, 물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낼 때만 우리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신비의 섬이었다.

더욱이 아스완 댐의 건설은 필래 섬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고, 신전의 기초들은 부식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972-80년 기간에 필래의 지형이 재창조된 현재의 위치로 신전이 37,363 조각으로 분해 해체되어 정교하게 복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트를 타고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필래 신전에 도착해보니 관광 기념품을 파는 누비아인 들의 외침으로 시끌시끌했지만 신전과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말없이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이거대한 문화재를 보전하기위해서 근 4만 조각여로 분해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인간들의 위대한 노력을 감명 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 ‘피에르 로티’가 이 신전을 ‘나일의 진주’라 일컬었던가―--?

그리고 피래 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상 낙원처럼 매력적이고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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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필래 신전에서


이 신전을 크게 나누어 보면 넥타네보(Nectanebo) 유적, 트라잔(Trajan) 유적을 부속 건물로 갖는 불멸의 ‘이시스 신전’ 그리고 작은 ‘하도르(Hathor)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신전에 새겨진 장식물의 특징은 대부분 신성한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대부분 신에게 헌납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그 실체에서 그들의 창의력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하드리(Hadrian)의 문과 요새'이며, 이는 안토니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시스 신전의 서쪽 날개 부분에 있는 부조로서 나일 강의 근원을 설명해주고 있다.

나일 강의 신성함을 의미하는 하피(Hapy)는 신과 인간의 동형동성설과 양성의 형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신은 뱀에 둘러싸인 동굴 속에서 물이 흐르는 두 개의 물병을 쥐고 있었다.


사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의 근원이 하피의 물을 의미하는 무 하피(Mu Hapi)라 불리는 산 가까이에 있는 제 1폭포에 이웃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연례 의식은 파라오 자신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소티스(Sortis) 별로 대표되는 나일 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6월 중순에 시작된다고 한다.

또한 필래의 건축과 디자인은 이집트, 그리스 및 로마 문명의 완전한 종합 축소판처럼 보였다.

과거 Old 댐의 물이 잠기기 이전엔 모든 문자들은 파랑, 빨강, 노랑 및 녹색의 찬란한 색깔들로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물에 잠겨 퇴색한 것을 영국의 ‘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 1796-1864)라는 유명한 화가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본래의 색깔대로 섬세하게 그려 놓아 그 당시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곳은 색깔의 변화와 장소의 이전이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탱해온 인류 문화의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이집트, 오벨리스크(Obeliskos, Obelos= "바늘")와 콤 옴보 신전을 찾아서

오후 2시 30분경, “필래 신전”을 떠나 고대 이집트가 오벨리스크(그리스어로 obeliskos, obelos= "바늘")를 제작했다는 채석장(제작 후 나일 강을 이용하여 신전으로 운반)에 참간 멈추었다. 오벨리스크는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인데 특징은 한 덩어리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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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카르낙 신전의 오벨리스크(Obeliskos, Obelos)


오벨리스크에는 주로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는데, 태양 숭배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 18왕조 “핫솁수트 여왕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29.45m이라 한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바깥에 있는 오벨리스크로서 원래 이집트의 사이스에 있던 한쌍의 한쪽을 이시스 사원에 놓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쪽은 우르비노에 있다한다. 우리는 채석장에서 역사를 알 수 없는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깨진 체 쓰러져 방치되어있는 고대 오벨리스크제작소(?)를 잠간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제작된 오벨리스크는 나일 강을 이용하여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3박 4일의 ‘나일 강 크루즈’의 여행을 위하여 선창가로 이동해야 했다.


나일강, 크루스 여행

크루스를 승선 하는 데도 철저한 보안 검열을 거쳐야 했다.

크루스 승선시의 보안 검열은 9.11테러 집단의 미국 공격이후 세상은 경계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승선을 마치자 배는 고동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이제부터 3박4일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 강의 물결을 따라 나일 강 중부의 룩소르 까지 이동하면서 나일 강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여유를 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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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나일강, 크루즈 선상위에서 여유


선상에서 어두움이 깃드는 저녁시간에, “ 옴보”라는 지역에 도착하여, 야간 불빛으로 단장된 “콤 옴보”신전을 방문 하고 난후 다시 “에드푸”로 밤새 이동하여 다음날 새벽 “에드푸신전과 호루스신전”을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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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콤옴보, 콤옴보 신전의 야경


필자 부부는 나일 강을 항해 하는 크루스에 정해진 방에 짐을 풀어 놓고 선상 갑판에 올랐다.

방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있어 전망이 좋았다.

그러나 강바람이 심하여 오랫동안 갑판에 서있을 수가 없어서 선실 앞에 위치한 Bar로 들어갔으나 시간이 일러서 그러한지 바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전망이 좋은 선실 앞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나일 강의 주위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시간이 어느덧 황혼이 지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디서나 늘 지고 뜨는 태양이지만 나일 강을 온통 붉게 무들이며 지는 해의 광경을 보며 인생의 또 다른 감회가 서린다.


에드프 신전(Edfu Temple)을 찾아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 깊은 기지개를 키며 창 커튼을 여니 눈부신 태양이 창문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 왔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것으로 보아 오늘도 날씨는 쾌청할 것이라 생각 되었다.  어제 일행들이 헤어지기 전에 아침 일찍 “에드프 신전”과 “호루스 신전”엘 다녀오기 위해 아침 7시에 선실 로비에서 만나기로 되어 서둘러 나가보니 벌써 모두 나와 있었다.

아침식사는 다녀와서 하기로 하고 선실 출입구에서 나중에 돌아 올 때 사용할 출입카드를 하나씩 받아 들고 선창가로 나왔다. 밖의 새벽공기는 약간의 한기를 느낄 정도로 내려가 있었지만 마차를 타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선실 밖에 대기 하고 있던 8대의 마차에 4명씩 조를 짜서 오르니 제법 긴 행렬이 되었는데 마부들은 서로가 경쟁하듯 에드프 시가지를 가로 질러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비록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대신 마차를 타고 가는 이색적인 경험에 모두들 어린애같이 즐거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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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새벽 마차를 타고, 에드프와 호루스 신전을 찾아서


우리가 탄 마차의 마부는 비교적 친절 했다. 기념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사진기를 달라고 하여 사진기를 주니 우리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나서 1달러를 달란다. Service Charge라 했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면 서비스 Charge가 되고, 그들을 찍으면 모델료가 되는 것이니 어느 의미에선 정확한 경제 원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차의 기본요금은 이미 지불된 것이나 관광객이 마부를 찍던가. 찍히던가. 조심해야하며, 신전에 도착하여 내릴 때는 팁을 나중에 준다고 하고, 타고 온 마차와 마부를 잘 기억해 두라는 안내양의 귀띔이 있었다. 팁을 미리주면 볼일 다 보았다고 기다리지 않고 가버리는 바람에 돌아오는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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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에드프신전 전경


얼추 18분정도 달렸을까 “Edfu Temple"가 나타났다.

돈을 달라며 손을 내미는 마부에게 안내가 일러 준대로 나중 돌아갈 때 주겠다고 하고 1불을 주면서 아까 사진 찍어준 Tip이라고 하니 ”슈크란(Shukran=감사)"하단다.


호로스 신전

호로스신(독수리=아시스여신의 아들)은 독수리 상을 하고 있었다. 이 신전은 2230년 전에 포틀릴리오스 3세가 건축한 것으로, 오페라 아이다를 작사한 불란서의 미레이트라는 교수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 불란서의 루브르 박물관에 취직 하여 연구 끝에 발굴한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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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호르스 신전 입구에서


사학자들은 이신전이 “카르낙”신전 다음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평하고 있다. 신전 부조 물엔 호로스 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하마(삼촌)를 무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었다.

따라서 하마는 악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신전 안은 호르스가 악의 상징인 삼촌 하마를 물리치는 형상을 설명하는 상형 문자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전의 구조는 뜰, 지성소, 약 조제실, 도서관, 창고 등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부조 물 가운데는 대관식 장면이 있었는데 호로스 신에게 머리를 세척하고 왕관을 씌워 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내부는 그리스양식으로 32개의 봉헌장면이 새겨진 기둥이 장엄하게 서있었다. 30분가량 신전을 돌아보고 우리는 다시 마차를 타고 크루스로 돌아와 선실에서 우리를 위해별도 준비해둔 음식으로 늦은 아침을 들었다.

아침을 드는 동안 정박해있던 크루스는 “룩소”를 향해 서서히 항해하기 시작 한다.


룩소, 명승지를 찾아서

이제 필라를 떠나온 지 10일이 되는 날이다.

여행기간동안 일정은 바빴지만 날씨는 좋은 편이었으며, 필라델피아를 떠나온 다음날인 예루살렘의 감난산 언덕길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발을 다친 일행 중 연로하신 여 성도 한사람이 다음날 여행을 중단 하고 긴급히 필라로 돌아가야 했고, 연로하신 곤사 한분이 시내 산을 낙타로 등정하다. 떨어져 갈비뼈를 약간 다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연로하신 분이 많았던 일행임을 고려 할 때 그런대로 모두들 일정을 잘 소화 해내고 있었다. 아랍어로 “말리쉬(Malish=그나마 다행)다. 크루스는 룩소에 정박하여 다음날 일찍 ‘열기구’도 타고, 고대 이집트의 불가 사이의 하나인 파라오들이 죽은 후의 이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놓은 ‘왕들의 계곡’등을 찾아 고대 파라오들의 허망 된 욕심의 결정체를 돌아보기로 했다. 왕들의 호화판 무덤이 비록 파라오들의 허망한 욕심의 결정체일지라도 이제는 세계문화 유산으로 그들의 후세에게 값진 유산으로 남겨준 그들의 발자치를 둘러보는 날이다.


룩소, 열기구(고무풍선)을 타고 하늘로

어제 저녁 내일 예정된 관광코스이외에 Option으로 새벽에 열기구(고무풍선)을 타고 하늘에 올라 “나일강과 왕의 계곡과 합셋수트 여왕 장제전” 일대를 내려 보는 경험을 위해 희망자를 파악하기에 우리 부부도 신청해놓았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보트를 타는 부두 까지 현지 밴을 타고, 보트로 나일 강을 건너 열기구를 타는 장소까지 이동,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라보는 경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늘에 올라 태양이 뜨는 모습, 고공에서 내려다보이는 나일 강과 농촌 그리고 끝없이 전개되는 사막--, 생각만 해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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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둥둥


새벽같이 버스로 보트로 달려왔건만 하필이면 우리가 탄 열기구는 다른 사람들이 탄 모든 열기구가 하늘로 높이 오를 때 까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간 뜨지도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열기구를 다루는 기사가 이리저리 두들기며 만지더니 불꽃이 오르면서 열기구는 뒤뚱 거리며 서서히 지상을 이륙하여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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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타고온 열기구가 지상에 안착하고 나서



열기구는 파이롯트(기사?)가 스위치의 줄을 당기면 불꽃과 함께 수소가 발생하여 기구에 차게 되면 위로 나르게 되어 있는데, 상하는 물론 전후좌우로 운행 될 수 있도록 조정 장치가 되어 있었다. 새벽하늘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열기구에서 내품는 열기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바구니 안에 제법 훈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열기구가 어느 정도 하늘에 높이 오르니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 남에서 북으로 도도히 흐르는 나일 강이 나의 발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나이조차 잊은 채 영겁의 세월을 한결 같이 흐르고 있는 나일 강, 고대 이집트인들의 찬란한  문명을 탄생시키고 그들 어머니처럼 영원한 생명의 젖줄이 되어 흐르고 있는 나일 강이 더없이 신비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고대 파라오들의 무덤인 “왕의 계곡과 합셋수트 여왕 장제전”이 방금 떠오르는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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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집트, 열기구에서 내려다본 합셋수트 여왕 장제전


발아래 전개되는 들판에는 이른 새벽부터 농부들이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병충해를 없애기 위해 찌꺼기를 태우는 하얀 연기가 밭모퉁이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광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고 일행들이 타고 있는 열기구가 우리 옆으로 스쳐 갈 때마다 몇 년 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들처럼 손짓을 하며 깔깔(or 껄껄)대기도 하며, 열기구를 조정하는 기사의 땅을 스칠 듯 내렸다가 고공으로 수직 상승하는 기교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며 한 것 웃고 즐겼다.


32) 룩소, 멤놈의 돌상

우리는 열기구타기를 끝내고 쿠르즈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지상의 유적들을 찾아 나섰다.

룩소는,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도시로 세계최대의 야외 박물관이라 일컬을 만큼 고대 이집트의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곳이다.

신왕국 시대(1567-1085) 이집트의 수도는 “위세트”였으나 후에 지명이 “테베(Thebes)”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지명 “엘 오크소르”는 궁전의 도시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는 이도시를 “100개의 문이 있는 도시”라 칭 했다.

당시 이집트는 남쪽에 20개 북쪽에 22개 등 42개의 소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을 나르메가 통일하여 561명이 왕통을 이어 가며 오늘의 이집트가 된 것이다.

안내는 우리를 왕의 계곡으로 안내하기 전에, 돌을 쌓아 만든 거대한 “멤놈의 거상” 앞으로 안내 했다. 돌상은 두 개의 거대한 조형물로 되어 있는데 높이 20m, 다리의 길이 2m, 두께는 1m의 사암 덩어리로 조각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는 옥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는 “아멘헤테프 3세”이다.

그는 신왕국 시대 번영의 절정기에 왕위에 즉위,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누렸으며 룩소르 신전 등 대형 건축물 제작한 파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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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멤논 거상(COLOSSI OF MUMNON) 앞에서 필자


이거상이 심하게 손상되어있는 것은 화산 때문이라는 설과 캄비 제왕의 야만적인 행동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집트는 지진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후자의 주장이 신빈성이 있다고 한다.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동상은 우아하고 길게 지속적인 소리를 내고 있다는데 이래서“노래하는 돌”로 불리기도 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극심한 기온 변화로 인해 신음소리와 같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룩소, 왕들의 계곡

이집트에서 유명한 곳은 피라미드다음에 왕들의 계곡인 것 같았다.

왕들의 계곡은 년 간 95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으로, 고대 파라오들이 저승에서의 영원한 삶을 꿈꾸며 무덤을 설계하고 자기의 소중한 물건들을 무덤 속에 보관하고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안치 해 놓고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1717년 “시카라”는 공학자가 이곳을 발견 했으나, 나포레옹이 오기 까지 이곳의 상형 문자를 해득하지 못해 무덤의 규모와 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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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집트, 왕들의 계곡 입구


우리가 타고 온 전용 버스 정류장에서 계곡입구 까지는 코끼리차라고 불리는 트렐라를 이용하여 왕복할 수 있었다.

그곳엔 순애보의 상징인 이집트 제 18왕조의 “투탕카문(Tutankhamun)”의 무덤이 유명했다.

그는 9세의 어린나이로 6세의 어린 여왕을 맞아 18세(19세?)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데 이때 여왕의 나이 15세 그들은 금실이 남달리 좋았었는데 왕이 어린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는다.


이 어린 파라오의 무덤은 영국의 “하워드 캇트”(화가/고고학자)가 61개의 무덤을 발굴하고, 이제 발굴을 마쳤다며 허리를 펴다가 무덤 주위에서 투탕카문을 상징하는 로고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아직 미 발굴된 곳이 있다고 믿고, 무덤 발굴 팀의 후원자인 “캐나번”(영국의 귀족)의 지원으로 7년간을 더 찾아 헤맸으나 실패하자 캐나번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발굴 팀을 철 수 시키려 하자 ‘하워드’는 일주일간 시간을 더 연장 해줄 것을 사정하여 발굴 작업 을 7일 연장할 수 있었는데, 7일이 되는 날, 1922년 10월 22일 람세스 6세의 무덤 밑에서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굴하기에 이른다.

그 무덤엔 황금 관, 목관과 그 황금 관속에 잠들어 있는 투탕카문의 미라, 그리고 목관위에 어린 왕비가 바친 꽃다발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유물들은 무려 3500여점으로 그중 1700여점이 현재 왕의 미라와 함께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왕들의 계곡 무덤에서 “투탕카문”만이 유일하게 도굴을 면했던 곳이라 했다.

하워드는 무덤 발굴소감에서 숨겨 있던 무덤 발견의 기쁨보다는, 그 속에 숨겨 있는 순애보에 매력을 느꼈다 했다.

16세의 어린 왕비가 19세인 남편 파라오 투탕카문이 죽어 무덤 속에 안치하게 되자 혼자 두고 나가면 무서워서 어떻게 하느냐며 자기가 남아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자리를 뜨지 않으려 하자주위의 만류로 한 다발의 꽃을 잠들어 있는 파라오에게 바치며, 겨우 무덤을 떠나면서 오열하던 3000년 전의 그 어린 왕비의 순애보적인 사랑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된 세월동안 관이나 꽃 그리고 시체의 미라들이 원형대로 오늘날 까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신기하고도 궁금했다.

그것은 묘가 석회질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체에서 심장과 내장을 꺼내 별도 보관하고 특수 미라 처리되었기 때문에 강우량이 없는 건조한 기후 조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파라오가 영면하던 무덤 속을 기어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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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투탕카문 무덤 안, 계단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깊고 넓다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지하 20m 정도 굴속 비탈길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간이 계단을 만들어 놓은 나무판을 밟으며 머리를 숙이고 내려갈 수 있었다.

공기가 탁할 거라 예상했는데 자연적인 통풍이 잘되고 있어서 호흡에 불편이 없었다.

어쨌든 1922년 18세에 사망한 어린 파라오, 투탕카문의 무덤을 발견한 이후에도 하바드 공학 팀들이 3개의 무덤을 더 발견했다고 했다.


“파라오의 잠을 방해한자는 저주를 받는다.”라 언명하고 세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사막의 골짜기에 무덤들을 만들어 놓은 파라오들----,

그리고 개인의 영세만을 위해 백성들의 현세 까지도 혹사하던 이들--.

그러나 그들의 무덤이 영원히 보전되지 못하고 도굴범에 의해 도굴되고 현대인에 의해 발굴되어 파라오들의 무덤의 베일이 속속 벗겨지고 있으나 아직도 미지의 무덤이 이 골짜기에 더 있는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우리는 람세스1세, 람세스2세, 람세스 4세, 람세스9세의 무덤을 볼 수 있었으나 람세스 2세의 무덤은 거의 회손 되어 개방하지 않고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특히 람세스 4세의 무덤에서는 콥픽 기독교 상징인 벽화가 보였으며, 십자가가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발굴 전에 이미 무덤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하며 무덤의 벽화는 제작당시의 것으로 보기에 의문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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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지금도 새로운 파라오오의 무덤을 찾는 발굴 팀들


여하튼 아직도 왕의 골짜기 이곳저곳엔 삽괭이를 든 발굴 팀 들이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나 귀족들의 무덤을 찾아 땅을 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12시가 되어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왕의 계곡을 나와 인근의 “합셋수트 여왕의 장제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룩소, 합셋수트 여왕의 장제전

이집트의 수많은 파라오중 유일하게 여인의 신분으로 20년간 왕위를 지켰던 파라오로 항상 남자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여왕이 바로 “합셋수트 여왕”이다.

그녀는 BC 1504년, 이복아들인 “투트모스 3세”가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 섭정을 하다가 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본인을 위하여 장제전이란 신전을 짓게 했다.

이 신전은 당시 이름난 건축가 “세넴무트”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신전 뒤쪽의 수직 절벽의 암석 절벽을 깎아 3층의 테라스 모양으로 신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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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합셋수트 여왕의 제장전 앞에서


이 신전을 세운 이유는 그녀가 여자이고 또 왕이 투트모스 3세가 있는데도 굳이 자기가 파라오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과 그녀의 보모를 신성시하여 경배하도록 하고, 아몬신을 경배하기 위하여 지었다.


후일 투투모스 3세가 왕위에 오르자 어린 시절 왕위를 빼앗아간 계모에게 원한을 품고 7일 동안 신전을 완전히 파괴하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신전의 벽면에 합셋수트 여왕의 이름표(카르투쉬)를 지우고 얼굴을 쪼아버렸다. 이 쪼아 버린 부분을 지금으로부터 40년간 폴랜드 고고학자에 의하여 재 복원 되었으나 파괴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복원은 파괴된 돌조각의 그림을 다시 꾀 마치는 방법으로 했다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층의 테라스기둥에 합셋수트 여왕이 오시리스모양으로 조각된 것이 남아 있었다.


제장전 2층 벽면에는 합셋수트여왕이 신하들과 병사들을 데리고 푼트지역(지금의 소말리아)을 방문하여, 서로 인사하고 교역하고 그 곳의 헨나나무(향유나무)의 묘목을 배로 실어와 이집트 땅에 심어 키운 후 향유를 신에게 바치는 여행기록문이 상형문자로 새겨 놓았고, 이 신전 2층의 좌우편에는 하토르여신과 아누비스 신을 위한 신전이 증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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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합셋수트 여왕 석상 앞


신전의 동쪽은 나일 강과 주변의 녹지대가 보이고, 멀리 정면으로 “카르낙 신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신전의 뒤쪽은 약 100m 높이의 수직절벽이 신전을 감싸듯이 보호하고 있다.

지형 특성상 이집트 최고 명당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곳에 1997(1970년도?)년 11월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자살폭탄 공격이 있어 관광객 60명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새벽에 열기구에서 내려다볼 때는 아무도 없었던 유적지 주변에 관광객이 모여드는 시간에 무장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룩소, 카르낙 신전(GREAT KARNAK TEMPLE)을 찾아서

우리일행은 오후 3시 20분경, 합셋수트 장제 전을 떠나 아몬신이 모셔 있다는 “카르낙 신전”으로 이동했다. 신전 전체의 크기가 18만평에 달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신전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의 수도는 멤피스, 룩소, 라모세스에서 다시 룩소, 알랙산드리아에서 현재는 카이로로 옮겨 왔다는 데, 특이한 것은 룩소 마을은 2000년 전에도 인구가 50만 명 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인구도 이와 동일하다고 한다.

강우량은 0이며, 4-10월 까지는 기온이 섭씨 40도로 매우 더운 날씨가 지속되나 건조하여 관절염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기후란다.


이집트인들은 일부다처제가 용인 되어 후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용버스는 이따금씩 푸른 들판을 지나치며  카르낙 신전을 향해 한없이 달렸다. 도로 양쪽에는 종려나무와 이름 모를 정원수가 늘어져 사막 속에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었다.

나일강변은 정비 되어 있는 편이나, 교통신호등이 보이지 않는 시가지 도로에는 자동차와 말 마차가 함께 붐비고 있었다. 당나귀의 값은 한화 30만 원 정도로, 웬만한 가정 형편이면 장남이 16세가 되면 말 한 마리를 사 준단다. 장남에게 자가용으로 차량대신 말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지 시골길엔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아이들이 제법 신나게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카르낙 신전(GREAT KARNAK TEMPLE) 은, 테베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숭배의 장소로 룩소르 신전에서 3Km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을 그리스인들은 헤르몬딧(Hermonthis)라 불렀고, 이유적은 거친 돌로 세부분으로 나눠진다.

카르낙 신전 입구는 장엄한 숫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가 줄지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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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카르낙신전 입구, 숫양머리를 한 스핑크스가 줄지어 있다.


이 신전은 중세 왕국 시대 소 아몬 신전을 기초로 신왕국시대의 역대 파라오가 계속 증축한 결과 현재와 같은 세계 최대의 신전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탑문, 중정, 태열주실, 지성소가 1열종대로 있었고, 남쪽으로는 배출항식 제전에 사용됐던 대형연못, 콘스신전, 4개의 탑문과 오벨리스크가 들어서 있는 마치 복합 단지를 방불케 했다.

건축 부지는 길이 800m, 폭 1.5Km로 거대한 규모였다.

이곳에서 야간에는 관광객을 위하여 신전을 무대로 “소리와 빛의 쇼”가 열린다.

안내는 어제저녁 신전을 무대로 소리와 빛(조명)의 대향연에 초대한다고 의사를 물었으나 모두들 내일 광광코스에 들어 있는 것을 두 번 볼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했던 곳이다.


룩소, 룩소 신전(LUXOR TEMPLE)

카르낙 신전을 보고 있는 동안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시간에 우리는 버스로 인근 장소로 옮겨 ‘룩소 신전’으로 갔다. 어둠이 깔린 저녁 조명이 찬란하게 비취는 것을 보는 것이 경이롭다고 하여 시간을 조절 한 것이다. 조명이 아름답게 비치는 신전건물은 동화 백설 공주에 나오는 성곽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 신전은 카르낙 신전의 부속 신전으로 건립됐기 때문에 카르낙 신전과 참배길이 숫 양의머리를 한 스핑크스가 장엄하게 연결돼 있어 왕조 시대에는 매년 신년이 되면 배의 출영식이 성대히 행해졌던 곳이다.


그리고 원래 ‘암모니아’라는 말은 아몬신에서 유래된다고 하는데, 한때 이곳에 알랙산더 대왕이 방문하게 되었는데 신전에서 그를 환영하기위해 특별히 피울 향이 없어 동물들의 배설물을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아몬신의 냄새라고 소개한데서부터 암모니아라는 말이 유래 했다는 비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입증여부는 확인 되지 않았지만 당일 관광 안내의 말임을 밝혀 둔다.

신전 앞으로 다가가니 룩소르 신전 입구를 용맹스러운 람세스 2세의 쌍둥이 석상이 우뚝 서서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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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룩소 신전 내부 돌기둥

그러나 이 신전을 건립한 것은 람세스 2세가 아니라 제 18대 왕조 아멘헤테프 3세였는데 그가 죽은 후 3200년경 람세스 2세가 이 신전의 탑문을 부설하면서 둘레 8m, 높이 21m 아름드리 돌기둥 134개를 세워 신전의 위엄을 더하게 하고, 입구 좌측에 자기의 쌍둥이 조각상을 신전 앞에 세워 스스로 권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이유는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스스로 절기마다 신전에 직접 참여 할 수 없기 때문에 석상이 대신 파라오를 대신 하게 한다는 뜻에서란다.


돌기둥은 지금은 퇴색하였으나 원래에는 아름다운 색깔이 있었으며, 어떤 기둥위엔 파피루스가 봉오리지어 있었고 또 다른 기둥 위에는 파피루스가 활짝 핀 모양으로 기둥과 기둥을 위에서 콘크리트로 연결 시켜 놓았다. 기둥에는 만년의 영생을 상징한다는 무화과나무, 자식의 번성을 상징한다는 아몬신등이 조각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몬신전에는 고대 이집트가 농사의 풍⦁흉작을 가늠하는 나일 강 범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그 벽 주위엔 한때 물에 잠겨 있던 흔적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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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카르낙 신전의 오벨리스크

신전 뒤쪽, 2개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우뚝 서있다.


카르낙신전의 오베르스크

왕의 전승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 덩어리의 화강암을 쪼아 만들었다는 오벨리스크는 현재

로마에 13개, 그리스에 1개, 이곳 카르낙 신전 좌측(높이 29.25m) 2개가 원형대로 우뚝 서있었다. 이것은 여걸 파라오 합셋수트가 7개월에 걸려 만들어 아몬 신에게 바친 것이란다.

원래는 한 쌍의 오벨리스크가 좌우에 1개씩 서있었는데 불란서에서 이집트에 캐톨릭 성전에 시계탑을 만들어 준 대가로 기증하여 지금은 한쪽이 불란서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옮겨져 있다.(필자가 파리 기행문에서 소개한바 있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란서에서 만들어준 시계탑이 만든 당시에도 제대로 시간이 맞지 않았고, 지금도 고장 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많은 방을 옮겨 파라오 투투모스 3세가 체력장으로 만들어 달리기 운동에 사용 사용했다는 방으로 옮겨가니, 굵은 돌기둥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계모인 파라오 합셋수트가 세워 놓은 신방을 투투모스 3가 체력 단련 장으로 개조 하면서 행동공간을 넓히기 위해 기둥을 반쪽으로 잘라 길을 넓힌 것이다.

아마도 원형 기둥이 달리기 운동을 하는 투투모스 3세에게 방해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일 강 쿠르스 투어를 마치고,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 ---

2월 19일 아침 8시, 3박 4일의 나일강 쿠르즈 여행을 마치고,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가기위해 ‘룩소 공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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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룩소 공항


공항으로 가는 도중 도로 좌우에는 사막에 일구어 놓은 농토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지상위로 연결 되어 나일 강이 생명의 원천임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이동 중에 안내의 몇 가지 상식 설명이 있었다.

이 나라의 홍차와 녹차는 네덜란드 상인이 중국에서 들여왔고, 커피(까페-아랍어로 까우라)는 수도사들에 의해 유럽에서 들여왔다고 했다. 그리고 인생은 “쓴 커피 한잔과 같다.” 면서 “나 같은 사람이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라며 경상도 사투리로 부모 같은 사람들 앞에서 익살과 능청을 떨고 있던 안내양, 잠간 동안 설명 하는 안내양의 인생관에 나이 많은 일행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의 의미는 모두들 인생은 달콤한 향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넘겨야 할 쓰디쓴 고비도 있다는 평범한 삶의 철학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쩌면 각박한 세상인심이 그녀를 그렇게 성숙 시키고 있구나 싶었다.

인생의 ‘희로애락’ 과 ‘젊음과 늙음’은 세월 따라 환경과 더불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모두들 잠시 힘들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이집트, 카이로에 가다.

카이로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을 빠져 나와 시내에 있는 아리랑 식당으로 직행, 한식으로 점심을 했다. 오랜만에 제육복음, 김치, 된장찌개 등으로 얼큰한 점심을 하고 나니 모두들 생기가 도는 얼굴들로 변했다. 이제 부턴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를 데리고 애급(이집트)일대로 피신했던 곳에 세워진 “피난 교회”를 찾아 돌아 볼 예정이다.

헤롯왕의 무차별 어린이 학살을 피해 마리와 요셉은 2살짜리 어린 예수를 데리고 애급(구 카이로)으로 피난하여 3년 반 동안 머물다가 이곳에서 하나님이 요셉에 꿈에 나타나셔 ‘나사렛’으로 가라는 계시가 있을 때 까지 머물던 곳이다.


피난교회를 찾아 나선 그 시간, 사막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모래 바람으로 시계가 막혀 전용버스 창문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리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흙먼지란다. 마치 중국에서 불어오는 서울의 황사를 생각나게 했다.

버스 창문을 스치며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변두리 마을은 시멘건축물 지붕에 아나로그식 TV 안테나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군데군데 세금을 피해갈 목적으로 철근이 삐죽 삐죽 하늘로 노출 된 미완성 상태의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현장을 목격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아랍지역의 맹주 국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라이다.


모카탐, 동굴 교회(The coptic orthodox church)

예수님 피난 교회와 우물교회를 둘러보고, 우리는 콥픽 교회의 근원지인 모카탐 언덕 위의 동굴 교회를 찾았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태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에 근거 하여, AD979년 앞에 있던 돌산을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는 이곳---.


무희스 이슬람 황제는 62대 앗스문 총 대주교를 초청하여, 성경토론을 벌인 끝에 지게 되자 화가 난 무희스 황제는 “당신이 믿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태산을 옮길 수 있다”는 성경말씀을 증명해보라며 대주교를 압력하게 된다. 총 대주교는 고민 속에 3일간 금식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다. “하만(구두 수선공)을 만나보라”는 계시었다.

하만은 일찍이 마음의 간음을 했다며 속죄의 뜻으로 자기의 한 눈을 빼 버려 외눈이 된 사람이다. 결국 ‘하만’이 태산을 옮기는 기적을 행사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의 동상을 동굴 교회 앞에 세워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애써 의심하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나의 믿음이 아주 작은 겨자씨 만큼에도 미치지 못함일 게다---.


그곳에는 돌 벽을 깎아 4-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굴 속의 강대상과 밖으로 노출 되어 있는 예배석이 조화를 이루어 이 교회의 예술적 가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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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모카탐 언덕위의 돌산을 깎아 만든 동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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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돌로된 모카탐 교회 주위엔 석공들이 요샙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데리고 피난 생활하는 모습을 조각 하고 있었다.


주위는 돌 벽은 여기 저기 천사들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고 중간 바위산 절벽 중턱에는 아직도 석공이 매달려 또 다른 천사들을 조각 하고 있어 관광지로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콥픽 교회의 교리가 궁금했다.

철학가 프라톤은 “영은 거룩한 것이요, 육신은 타락 하여 영혼의 감옥이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콥픽 교리는 “영지 주의”를 중시여기고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예수님의 기적과 신비를 중시 여기는 종파”이다. “마가”는 이 교리에 입각하여 이곳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문제는 이 교리에 지나치게 치우치다보면 이단으로 빠지기가 쉽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콥픽 교리를 부정하거나 나의 종교관과 관계없이 현지에서 들은 내용을 독자들이 참고 하도록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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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모카탐언덕 교회 부조물 앞에서


그런데, 이 “동굴 교회”를 설명하면서 “모카탐 언덕”의 ‘쓰레기 마을’에 대해 언급 하지 않을 수 없다. 쓰레기 마을은 카이로 곳곳에서 쓰레기를 수거해와 분리 하여 경제 가치를 창출하여 생활하고 있는 영세 마을이다. 동굴교회로 가기위해선 도보로 쓰레기 마을을 통과 하는 방법과 자동차를 이용하여 우회 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안내는 우리를 도보로 쓰레기 마을을 통과 하도록 안내했다. 쓰레기 마을에 대해 보다 큰 인상을 남겨 주기 위해서란다.


우리가 모카탐 언덕 동굴 교회로 가는 길목에 접어든 시간은 오후 3시 35분경이었다.

조국이 6.25이후 한참 어려웠을 때 쓰레기로 생활하던 넝마주위마을을 상상하며 비포장인 마을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입구부터 악취가 풍겨 나왔다. 예상은 했었지만 마을 속으로 들어 갈 수 록 악취가 심하여 제대로 호흡을 할 수가 없을 정도 이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시간에는 아침부터 쓰레기를 수거하러 나갔던 쓰레기 봉고차 마차 등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골목 곳곳에선 쓰레기 분류작업이 한창이었다.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위생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없거나 활짝 열려 있는 집 앞을 지나칠 때는 집안에 가득 싸여있는 쓰레기와 쓰레기를 분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내품는 악취는 상상을 초월 했다.

게다가 집안에 기르는 양들의 오물냄새까지 어우러져 풍기는 악취는 도저히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고약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 속에도 현지인들은 얼굴 표정하나 찡그리지 않고 생활 하고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한바 없었지만 안내 말에 의하면, 정부에서 이곳 주민들에게 보조를 약속하고 이곳을 벗어나라고 종용해도 이들은 이곳이 좋다며 떠나지 않는 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봉고차가 자기 높이 보다 더 높이 쓰레기를 실고 흙먼지와 악취를 풍기며 옆으로 넘어 질듯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모습으로 골목길을 들어오는 풍경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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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모카탐, 쓰레기 마을 골목길/집 안팎으로 쓰레기가 쌓여있다


과연 이들의 호흡기 계통의 건강은 괜찮은지, 염려 석인 눈빛으로 집 앞에 웅기종기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들은 필자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이, 반가운 손짓으로 골목길을 가로 질러 걸려있는 현수막에 그려 있는 성경구절과 예수님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지역의 주민 들이 콥픽 교회 교인들이라는데, 이들은 모카탐 동굴교회를 찾는 한인 관광객을 크리스천으로 알고 있어 모두 믿음의 형제라는 뜻으로 손 인사를 하는 것이다.


손으로 코를 막고 싶어도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 되어 억지로 참았으나 그곳을 빨리 지나야 한다는 절박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들의 발 거름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안내양이 다니는 카이로 한인교회에서 주기적으로 정성을 모아 구제하고 있는 마을 이란다. 안내양은 우리들에게 버리는 옷이나 양말 같은 것을 주면, 깨끗하게 빨아서 다음 이 마을 을 찾을 때 갖다 주고 싶다고 했다. 여행 중 필요한 옷들만 가지고 왔기 때문에 남는 옷은 없지만 모두들 그동안 입었던 속옷과 양말들을 성의 것 도네숀 했다.


“주여! 하나님께서 어찌 ale는 형제들을 이렇게 고난 속에 방치하시는지 그 깊은 뜻은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하오나, 이렇게 최악의 삶의 여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축복하여 주옵소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

2월 20일, 드디어 지금까지 사진에서만 보아 오던 이집트의 명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는 날이다. 아침의 날씨는 어제 하루 종일 사막으로 불어오는 미세 먼지가 말끔히 걷히고 쾌청한 날씨였다. 아침 9시경,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호텔을 출발 하여 고대 7대 불가 사이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기자지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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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피라미드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광장에는 관광버스가 주차 하느라 한 참 붐비고 있었다.

모든 관광버스는 이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올라가게 되는 데, 우리의 전용 버스는 경찰이 개별 경호 하는 덕분에 피라미드 입구 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고등학교 역사책과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기자지구의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나란히 사막의 중심에서 무게를 잡고 있었다. 기자지역은 고원위에 약 2,000평방미터의 펼쳐진 사막 지대이다. 세 개의 피라미드 앞에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정좌하고 있었고, 스핑크스의 안면 코 부분은 모진 세월의 비바람(?)이 엉망으로 망가트려 놓았지만(철없는 옛 이집트 기병들이 총기 타깃으로 사격 연습하는 바람에 코 부분이 부서졌다는 설도 있음) 그 위풍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피라미드는 근본적으로 당시의 신격화된 권력자 파라오들의 무덤이다.


이런 유물들을 보면서 이집트는 반만년의 역사와 세계 7대 불가 사이한 미스터리가 유난히 많은 신비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족하다고 생각 된다.

역사적인 사실에 러브스토리를 가미하여 만들어진 영화 ‘클레오파트라’와 유명한 종교영화인

십계명’도 모두 이집트가 배경이다.

뿐만 아니라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나일강의 비밀’ 등의 미스터리 소설에서도 이집트가 배경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고대 이집트문명의 역사유적을 살펴보면 크게 무덤과 신전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집트는 고대로부터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만 도시가 발달

했으며, 서쪽은 죽음과 관련된 무덤과 장례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제전 등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동쪽을 생의 도시 서쪽을 죽음의 도시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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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이집트의 피라미드, 낙타가 여행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후의 세계도, 그렇고 감히 민초들이 가까이하기도 힘든 파라오들과 사제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신전에서도 이들의 역사는 미스터리를 양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사용되었을 때와 4,000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상이 크게 달라 오늘날의 지혜로 옛날을 해석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고대이집트문명이 이만큼 밝혀진 것은 1799년 알랙산더 대왕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고 라시드에서 로제타석(Rosetta stone)을 발견한 덕분이라 말하고 있다.


로제타석판에는 “고대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리스어”가 함께 이중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프랑스의 젊은 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1822년 비로소 클레오파트라여왕의 이름을 해독한 것을 계기로 신비에 쌓였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하나하나씩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집트의 역사는 고 왕국 시절에 메네스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이집트를 통일한 약 4,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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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이집트, 기자지구의 피라미드 전경


에 시작된다.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피라미드는 카이로의 기자 바로 아래에 있는 사카라의 조세르왕(Zoser)의 피라미드이다. 조세르왕의 신하 임호텝(Imhotep)에 의해 세워진 5층 계단식 모양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는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졌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가 사이한 신비를 간직한 걸작이란 찬사를 보내기에 아낌없는 인류최초의 석조건축물로 분류된다.

조세르왕의 무덤과 부장품들은 지하 깊이 묻고 그 위로 몇 단계 덮었지만, 막대한 부장품을 노린 끈질긴 도굴꾼들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카이로 근교의 기자(Giza)지구에는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게오페, 케프렌, 미케리노” 왕의 피라미드가 구축되었다.

모든 피라미드는 가학적으로 건축 되어 각도가 51.52도를 유지 하고 있는데, 이 각도는 지진에 잘 견딜 수 있는 각도라는 것이다. 이집트는 지금 것 6.5도의 강도 지진이 46번이나 일어났었지만 이들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92년도에 카이로에 6.9도의 지진이 있었는데 당시 피라미드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를 인식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고대 이집트인들의 현명함과 건축학이 현대 기술을 능가 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이집트인들의 평균 키는 123Cm라고 하는 데 도대체 이러한 체구로 특별한 장비도 없이 이거대한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할 따름이다.

기자 지구에 세워진 피라미드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지금도 불가 사이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여러 학자들은 이런 저런 가설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도르래나 모래로 비탈길을 만들어 굴림 돌을 이용하였을 것이라는 정도다. 피라미드건설에 사용된 돌만해도 작게는 2.5톤, 큰 것은 15톤의 돌이 무려 1,300,000개나 된다고 한다. 이 돌로 미국 뉴욕의 ‘엠파이오 스테이트’ 빌딩과 같은 고층건물을 24개(?) 만들 수 있다는 분량이란다. 그 후 약 신 왕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이집트왕국의 수도는 멤피스에서 테베(지금의 룩소 Luxor)로 옮겨지고 파라오의 무덤은 지상 위의 피라미드 형태에서 지하의 계곡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 왕국 시절은 이집트역사상 가장 찬란하였던 시기이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게오페 왕’의 피라미드는 20년 동안 걸려 만든 것으로 길이 923m, 높이146m, 측면의 크기 246.26m로서 같은 높이의 4각형을 이루고 있다.

게오페의 꼭대기는 10m 넓이의 평지가 있다고 하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반이 내려 앉아 현재의 높이는 137m라 한다.


‘케오페’는 전체적인 손상을 입고 있었고, ‘케프렌’은 거의 원형대로 보전 되어 있었다.

‘미케리노’는 3개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작은 높이 66m로서, 1500년 까지는 화강암으로 입혀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화강암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옆에는 여왕들의 작은 세 피라미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세 피라미드는 서로 햇빛을 막지 않고 있도록 설계 되어 있어 당시의 우수한 설계로 예술적 감각을 들어낸 걸작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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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계단


피라미드 북쪽에 위치한 문을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대 왕국에서 쓰던 방식으로 장식 되어진 화강암으로 된 석관이 있던 자리가 나왔다.

이곳에 있던 석관은 영국으로 운반 하다가 포루투칼 해안에서 난파되어 바다에 가라안고 말았단다. 벽이 상형 문자로 가득한 그곳에는 2600년 전 백양목으로 만들어진 파라오가 내세에서 타고 즐길 길이 46m 나 되는 “태양의 나룻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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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피라미드 내부, 이승에서 파라오들이 타고 즐길 나룻배


뿐만 아니라 피라미드의 안에는 미라로 만들어진 파라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며, 도굴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부는 미로와 같이 꾸미고 여러 가지 장애물도 설치하였지만 도굴꾼 들은 늘 한수 위였다.


스핑크스

케오페 피라미드에서 350m 떨어진 곳에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길이가 73m 가 되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정좌 하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그리스어로는 “영원한 생명”이란 뜻이 있지만, 원래의 이름은 “호르엠 아케트”인데 아랍어로는 “아부 엘 홀(Abu el-hol)"로서 공포의 아버지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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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어떤 여인과 스핑크스와 뽀뽀(?)


스핑크스는 무덤의 수호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얼굴이 파라오를 닮게 조각 되었다고 한다.

스핑크스의 몸은 영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막의 모래로 덮이게 되는 데 후세 사람들이 발굴해 놓은 것이다. 얼굴의 크기가 5m나 되는 스핑크스의 머리는 모래에 덮여지지 않았었지만 몇 세기가 지나는 동안 온갖 모래 바람에 풍화되기도 했을 뿐 더러, 철없는 옛 이집트 기병들이 총기 타깃으로 사격 연습하는 바람에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코와 턱이 떨어져 나가 흉물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스핑크스의 코 조각은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파피루스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란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중요 기록문서로 종이대신 사용되었던 원료로 주로 신전의 기둥위에 파피루스가 활짝 핀 모습을 조각물에 표현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도대체 실물은 어떻게 생긴 걸 까 궁금했었는데 오늘 우리를 파피루스 상점으로 안내 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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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위, 안내양 손에 파피루스


파피루스는 통상 3-4m 크기로 자란다고 하며, 나일 강 일대에서 많이 자라던 식물이었는데 지금은 오염되어 극히 제한된 나일 강 북쪽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한다.

이것으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파피루스를 물에 불려 쪼개고 방망이로 두드려 납작하게 민 다음 지그재그로 역어서 물기를 빼고 방망이로 밀어 두면 끈끈이가 나와 서로 엉겨 붙어 훌륭한 종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안내한 안내양은 우리를 한쪽 테이블에 모이게 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종이 만드는 시범을 보였다. 이 종이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과 행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데, 지금 이 가게에는 고대 이집트 문화의 유적을 파피루스에 그림으로 담아 소개하고 이를 기념으로 팔고 있었다. 그림들은 주로 파라오들의 신전 의식이나 전투장면을 비롯하여 피라미드, 스핑크스, 그리고 신전, 상형문자 등 다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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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파피루스종이위에 그린 아부심벨 신전 앞의 람세스 좌상


우리 부부는 벽에 붙여 놓으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을 가진 파라오 “투탕카문과 왕비”의 그림 한 장을 금실 좋은 아들 부부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 했다.

그리고 이집트에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 석상” 그림 한 장을 더 구입했다.


투탕카문은 9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면서 6세 된 어린 왕비와 결혼하여 유난히도 금실이 좋았으나 불행하게도 파라오가 19세가 되면서 어린 왕비를 이 세상에 남겨둔 채 타계하게 된다.

황금 관으로 안치된 어린 남편을 왕의 계곡 땅속 깊은 곳에 홀로 두고 나올 수 없어 그렇게 안타깝게 울었다는 가슴 뭉클한 애절한 사연에 필자의 가슴도 젖어 버렸다.

일행들은 기념이 될 만한 그림들을 찾아 상점 안을 분주히 기웃거린 끝에 필요한 그림을 하나씩 사들고 ‘이집트 박물관’으로 이동 했다. 이제 박물관을 끝으로 제 1진의 여행 일정도 마감해야 한다.

이집트의 박물관

카이로에 38개의 박물관이 있다는 데 그중 최대 크기의 박물관을 지금 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는 ‘피라미드라’ 이름 하는 거리는 깨끗하게 정비 되어 있었다.

스위즈 운하 개통 때 만들었다는 이도로는 팜 Tree와 종려나무들로 도로 주변이 가꾸어 wUT으며, 이슬람교의 휴일인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 그런지 거리마져 한산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낮 12시 경, 한 시간여 달리던 버스는 휴게소에 잠간 들렸다. 잠시 휴식을 위해서다.


화장실에 들어가다 보니 모슬람 교인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화장실 모퉁이에 꿇어 엎드려 알라 신이 있다는 메카 방향으로 연실 큰 절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해가 뜰 때 한번, 정오가 되기 전에 한번, 낮 12시에 한번, 12시와 해가 지는 시간 사이에 한번, 그리고 해가 지는 시간에 한번, 이렇게 5번씩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던 일을 무조건 중지하고 알라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언제 먹고 살기위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남의 일이지만 걱정이 된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박물관에 도착하니, 파라오의 유품들이 1-2층으로 나뉘어 진열 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박물관 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전시된 사진을 소개 할수 없었으나후에 박물관내 각종 전시품의 사진을 입수 본 여행기 시작 앞에 슬라이드 쇼로 올려 놓았다.
1층에는 유물을 5000년전 부터 상형 문자, 그리고 고대 파라오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시대 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단지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던 그리스어와 상형문자를 동시에 써놓은 “로젵타의 Stone”만 카피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가 진품이란다.

이것은 1822년 프랑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후 32살의 젊은 언어학자 쌍포올리옹을 시켜 3.5년에 걸쳐 신전 벽의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었는데, 불행이도 이학자는 42세에 사망하게 된다.

이를 두고 신이 금지하고 있는 상형문자를 해독한 벌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전시실 - Old Kingdom 시대

이곳에는 4700년 전, 최초의 파로 오였던 조세르(당시 43세)의 석상이 있었고, 4000년 당시의 귀족의 묘에서 발견된 보리, 효소 등을 이용하여 빵 만드는 모습과 빵, 맥주, 가발, 최초 와인 등의 유물들을 전시 해놓았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이집트의 모습(요셉당시)을 상상할 수 있었다. 4300년 전 바구니를 들고 있는 누비아 사람도 있었다.

또한 지하 20m에서 발견했다는 이모형은 흑인의 색깔을 하고 있었으며, 한편에는 곱추 형상이 전시 되어 있었는데 당시 곱추 병이 유행했거나, 근친상간 또는 성병 등의 원인으로 희귀병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또한 피임도구로 쓰인 물건이 보였는데, 3350년대 이런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옥돌관속에는 파라오의 장기 보관용으로 사용 되었던 단지 4개, 당시 미라를 위하여 소독은 종려나무 열매로, 방부제는 송진과 몰 약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형문자를 읽고 있는 신관의 모습도 보였다. 신관의 모습은 4300년의 모습이라 하며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파피루스, 오른 손에는 펜을 들고 있었다.

눈에는 아이라인을 그린 흔적이 있어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 당시에 얼굴에 화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섬녹암 돌상으로 만들어진 “쿠푸 왕”의 아들 “케푸레 왕의 상”은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한 강철과 같은 돌로서 만들어 진 졌으나 현재는 왼팔이 깨져 나가 버렸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옆면 한구석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한데 묶여 있는 조형이 있었는데, 이집트 남과 북의 통일을 상징 하는 것이며, 건축모형 중에 벽으로 막힌 문틀 형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란다.

4300년 전의 무화과나무(암수 구별이 없음) 목상 옆에는 귀족의 묘 벽화에서 오리 6마리가 3마리씩 나뉘어 좌우를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벽화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좌측은 동쪽 나일 강을 의미하여 삶을 나타내고, 우측은 서쪽 사막으로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리관 속에는 쿠푸 모친 무덤에서 발굴한 4600년 전의 의자, 침대, 단지, 가방 등과 진열되어 있는 쿠푸의 어린 아이 모습을 통하여 당시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유리관 속에는 남녀의 미라가 있었는데 황색의 남자상은 ‘라호테 왕’이고, 흰색에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은 ‘네페루티 왕비’라 한다.

색깔은 선명했고, 우측 손을 좌 심장에다 올려놓고 있는 모습인데 심장을 보호한다는 뜻이란다.

고대 왕국의 전시실을 나와 이집트의 중 왕국 시대 전시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시실 - 중 왕국시대

이곳에 들어서니 이복 아들 투투모스로 부터 왕권을 뺏어 이집트를 통치했던 여걸파라오 ‘합셋수트 여왕’의 목상이 있었다.

두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있는 모형으로 “푸라톤의 철학을 정립”한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 옆에는 풍유의 신인 ‘황소의 상’이 3400년 전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체 서있었고, 그 아래쪽엔 합숫수트 여왕의 남편과 이스트 사이에서 출생했던 배다른 아들이란 이유 때문에 이복어머니에게 20년간 왕위를 빼앗겼던 ‘투투모스 3세’의  석상이 서있었다.

사자의 몸에 합셋수트 여왕의 얼굴의스핑크스상’ 항상 남장을 하고 태양의 딸이라 자처 하던합셋수트 여왕’의 상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람세스 2세 아들 ‘메렌프타’가 아몬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형상의 돌판 비석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조각실에서 발견 했다는 ‘아케나톤’의 모습도 있었다.

이 조각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위는 훌쭉하고 배불리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왕은 아버지의 여인을 아내로 맞은 왕이기도 하다.

아케나톤 왕은 오랜 왕자시절부터 이웃의 공주 ‘네페르티티’의 미모에 쏠려 흠모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아버지가 이 어린 공주를 왕비로 데리고와 크게 실망한 나머지 독신으로 지내다 아버지가 운명하자 이 여인을 자기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순애보라 할까 불륜이라 할까---?

대형 유리관 앞으로 다가가보니 3400년 전의 궁전 모형이 유리관 안에 전시 되어 있었고, 당시 사용했던 신 전대 와 와인 잔도 전시 되어 있었다.

이렇게 1층을 둘러보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1922년 11월 4일에 발견되었다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파라오 ‘투탕카문’(토오트-안크-아몬)의 무덤은 다행히 도굴들의 손에 미치지 않아 수많은 보물들이 지금 박물관에 보전 될 수 있었다. 그의 무덤 안은 비교적 평범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무덤이 급하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라 분석 하고 있다.


2층 전시실

2층에 들어서니 어린 파라오 투탕카문 무덤에서 발굴해온 “황금 마스크”가 대형 유리 상자 속에서 수 천 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지금도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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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투탕카문의 황금마스크


그리고 투탕카문의 황금 관을 2중으로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황금관이 보였다.

당시 왕의 몸은 세 개의 관에 담았다는 데 처음 것은 도금한 나무, 두 번째 것 역시 도금한 나무, 세 번째 것은 순금이란다.

이황금관은 금세공기술이 걸작으로 200Kg의 금이 사용되었고, 높이는 1.8m이며 청금석과 터키석 그리고 홍옥수로 입혀 있었다.

그 옆에는 투탕카문이 타고 다녔다는 황금 마차가 거의 원형대로 있었다.

그 외에도 권력의 상징이었던 각종보석, 목거리, 장식용 코부라 등 고가의 유품들이 영겁의 세월 속에 묻혀 있다가 현대인의 손에 의해 이곳에 진열 되어 있어 있었다.

단, 첫 번째 미라와 나무 목관은 18세의 운명한 투탕카문 대왕의 죽은 혼을 위로하기 위해 박물관대신 무덤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어린 파라오가 사용하던 장갑, 버선, 샌들과 벽지, 황금 양산, 장례용 마차, 그리고 투탕카문의 어린 왕비가 자기지아비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바친 꽃다발이 원형대로 보전 되어 있는가 하면, 파피루스와 황금으로 만든 3단의 침대, 상아 옥과 발판이 있는 황금 의자 그리고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존재 한다는 또 다른 순금의자와 파라오의 장기를 보전했다던 항아리 등을 차례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8세의 어린 투탕카멘의 상체 흉상 2개가 금관을 사이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었다.

옆방은 왕실에서 신격화했던 동물들의 미라를 전시해 놓았는데, 대형 악어, 생선, 독수리, 양 등의 거의 원형대로 미라가 남아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박물관 전시되어있는 것은 16만점 정도 이었고, 10만의 자료들은 아직도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내는 고대 이집트의 값진 문화 보전을 위해 현재 일본과 한국의 후원으로 이곳에 최대신형의 박물관이 건축 중이라 했다.

나는 박물관에서 절대 군주들이 남기고간 그들의 유물을 둘러보면서 잠시 인생과 권력의 무상을 느끼게 된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권력자들도 세월과 시대의 흐름과 변천 앞엔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어야 했던 셈이다. 고대 이집트가 나일 강을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화와 문명은 이렇게 여기 유품으로 남아 침묵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고대 이집트가 오늘날 기대 밖의 국가 수준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통치기반을 다신교의 신앙에 두고 끊임없는 전쟁과 군주들만의 지나친 내세관의 영화를 위해 수많은 신전과 무덤건설에 민초들을 착취하고 노예와 같이 학대했을 테니 어쩌면 그들의 미래는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칸엘 칼릴리, Shopping Mall

우리는 오후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대중 Shopping Mall인 “칸엘 칼릴리”라는 곳으로 이동하기 로 했다. 내일 아침이면 제 1진이 필라델피아로 돌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몇 가지 기념품을 준비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다. 어느 나라에건 여행 순서엔, 그 나라의 특산품이나 선물용 품목을 쉽게 고를 수 있는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무조건 값을 3-40% 깎아야 한다는 안내의 말을 염두에 두고, 일행들은 각자 필요한 선물을 골라서 실력 발휘(?)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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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카이로, 칸엘 칼릴리 시장

이곳이 우리가 다녀간 다음날 자살폭탄 공격 대형사고가 난 곳


여행을 할 수 있는 경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영세민의 상품 값을 깎는 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었으나, 여행객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얄팍한 상술이 근절 되지 않는 한 점원과 소비자 간에 값을 깎기 위한 기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후진국일수록 정찰 제 도입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경험에 의하면 물건 가격에 정찰제가 잘 실시되고 있는 나라는 이태리와 스페인 인 것 같았다.

여하튼 각자가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 하는 시간에 맞추어 시장 입구 집결지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어야할 전용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현지안내와 우리의 경호를 담당한 경찰이 분주히 전화를 걸더니 버스가 오는 도중에 고장이 났단다. 여행사에서 다른 버스를 보내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날씨가 봄 날씨 같아 밖에서 기다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세계 각국의 여행객을 비롯하여 이집트인들이 뒤섞여 국제 인종 전시장 같이 붐비고 있는 시장 입구에서 국제인종 관광을 즐길 수 있겠다 생각하고 서성이고 있노라니 수행 경호경찰이 우리를 시장 안에 있는 상점으로 우리를 안내 했다. 길거리에서 서성이는 것보다 상점 안에서 기다리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상점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릿세도 할 겸 차를 한잔씩 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버스가 준비 되었다고 하여 우리는 지루한 기다림을 떨치고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내일 새벽 제 1진 20여명은 내일 새벽 필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게 되었고, 제 2진 10명은 내일 아침 식후에 ‘알랙산드리아’라는 도시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호텔에서 송별회를 겸해 와인 한잔씩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필라 에서 다시 만납시다.

“아듀!” 높이든 와인 잔이 쨍그랑 허공에서 가볍게 부디 친다.



카이로, 성지 피난 교회

제1진이 필라로 돌아 가고난후 제2진으로 남아있는 다섯 카풀은 예수님의 피난 교회와 알랙산드리아 그리고 멤피스를 추가로 여행하기로 한 것이다.

아침 일찍 비교적 단출해진 일행은 1700년도에 헤롯왕을 피해 마리아와 조셉에 의해 애급 땅(구 카이로)으로 피난을 오신 아기예수가 거하던 곳에 세워진 ‘피난 교회’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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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예수님 가족 피난 순회도


 피난 교회에 게시해놓은 지도에 의하면, 예수님 가족의 피난 코스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Alarish- Alfaram- Zagazig- Musurd- Belbeas- Sammoud- Sakha- Mataria- Baylon (OldCairo)- Maadi- Bahnassa-Smalot- Gabalel-Tair- El Asmounen- Dairut- ElQussian- Meir- Gabla- Asyut- Deir- Drounka 등지를 전전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피난생활을 하던 중 요셉의 꿈을 통하여 헤롯왕이 죽었으니 베들레헴으로 가라는 주의 사자의 계시를 받게 된다. 예수님의 피난기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유아기부터 유년시절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피난 교회는 ‘쥬시 회당’으로 바뀌어 있었고 입구에는 입장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실제 예수님의 피난처로 은신했다는 석회 동굴은 교회 안에 보전되어 있었으며, 지붕은 노아 방주형으로 비잔틴 초기의 방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콥픽 교회원리를 내세우고 있는 교회였는데 900년전 ‘쥬시 회당’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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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Old Cairo, 피난교회


모세가 이 자리에서 기도 후 출 애급의 계시를 받은 곳이기도 하나, 출 애급의 정확한 년도는 불확실 하여 역사적으로 논쟁중이란다.

교회중앙에는 화강암 석관으로 되어있는 예레미아의 가묘가 있는데, 당시 예레미아가 바빌론에서 쫒 겨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난 교회를 나와 인근에 있는 예수님이 마셨다는 우물교회를 찾아갔다. 그곳엔 역사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우물이 아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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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예수님의 우물교회 뒤뜰에

어린 예수님 피난 당시 사용했다는 우물


어린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서 머무시는 동안 우물가에서 놀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며, 육신의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며 그물을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 되나, 어린 예수님이 직접 그곳 우물물을 떠 마셨다는 안내의 설명은 좀 과장인 듯싶다.


피난교회, 성모마리아 기념 기회

오늘도 아침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제 2진으로 남아 있는 일행 은 오늘 나일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는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를 찾기로 했다. 이곳은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데리고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까지 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배를 갈아타던 “Maad"라는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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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성모마리아 교회 내, 성모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사진과

나일 강에서 건저 낸 성경책(이샤야 19장에 마리아와 아기예수 상이 보인다.)


아침부터 많은 순례 객들로 교회 안이 붐비고 있었다.

이교회는 콥픽 교리를 믿고 있는 교회로서, 1976년 3월 12일 아침, 나일 강에 성경책이 흘러내려 온 것을 지나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하여 사제가 건져 보니 이사야 19장에 펼쳐 저 있었는데 이상한 흔적이 있어 사진에 담아 보니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성경책은 지금 이교회 전시해놓았다.

이 교회에서 나와 우리는 작은 나룻배를 나일 강에 띄우고 1시간정도 선상예배를 드리며 유람하기로 했다.


나일강의 선상 예배

나일강에 나룻배를 띄어 놓고 박모 장로의 사회와 엄모 장로의 설교로 30분정도의 예배를 마치고, 엄장로의 설교는 참으로 은혜 스러웠다. 예배 후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감상하는 나일 강 위에서 주변의 경치에 흠뻑 젖는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참고로, 이집트인들의 하루 일과 시간은 9.00-14.00시로 한 달 2-300불의 작은 봉급이기 때문에 2시 퇴근 이 후 다른 Job을 갖아야 생활을 영위 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람 교인들은 다음 5가지 원칙은 잘 지켜 가고 있단다.

알라신을 믿으며, 종교세금 납부, 하루에 5번 기도, 성지순례, 낮에 단식(1개월간)등이다.

또한 이집트의 결혼 풍습은 약혼식엔 분홍색 드레스, 결혼식엔 흰색 드레스를 입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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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나일강의 선상 예배 장면


사막을 걸을 때, “우리가 즐거울 때는 2개의 발자국이 모래위에 찍히지만, 괴로울 땐 하나의 발자국만 남을 뿐이다”라는 안내양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었는데, 우리가 괴로울 땐 우리 주님이 우리를 등에 업고 가기 때문에 주님 발자국 하나만 보일 뿐이라는 해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무덤 마을

멤피스에서 람세스에 관한 몇 가지 부조물들이 있어 둘러보고 다시 카이로로 돌아오니 오후 5시경이 되었다. 일부 여성들은 몇 가지 선물을 더 살 것이 있다며, 2일전에 들렸던 “칸엘 칼릴리”전통시장에 가자고 했지만, 그 보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시장에서 보낼것이 아니라 “무덤마을”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다수 여론에 의해 안내는 우리를 “무덤마을”로 안내했다.

이곳은 이지구상에 유일하게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사는 곳이다.


이집트는 지금도 죽은 파라오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영이 다시 살아나서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시체는 지하에 묻지만 지상에는 죽은 영혼들이 살 수 있는 건축물을 지어 놓는다는데 사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건축물의 규모도 다르지만, 현재 그 건축물에서  Homeless People들이 살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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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집트,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공존 하고 있는 무덤 마을 전경


그곳에 사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나서 현재 30만에 이르는 대 집단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곳에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전기시설과 수도 물을 공급함은 물론 생활 편의를 위해 대중 교통수단 까지 지원해주고 있는 형편이다.

별난 세상도 다 있다고 한마디씩 하고는 우리는 그곳을 떠나 호텔로 돌아옴으로 그간 16박 17일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내일 아침 필라로 돌아 가기위해 짐을 꾸려야 했다.


카이로에서 살고 있다는 안내양이 새벽 6시경에 호텔에 도착했다.

아침 9시 항공기를 타기 위해 7시 까지는 카이로 공항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내양은 버스에 오르는 우리에게 깜짝 놀랄 뉴스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제 전통시장에 가자는 일부 의견 대신 무덤마을로 방향을 돌린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일 우리가 무덤 마을에 도착한 바로 그 시간(오후 7시경)에 우리 일행이 다시 찾아 갈 번했던 “칸엘 칼릴리”전통시장 입구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자살폭탄 공격이 있어 21명의 프랑스 여행객중 6명이 부상하고 3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만약 어제 우리가 그 시간에 무덤마을대신 전통시장으로 갔다면, 저녁 7시경에 그 시장에 도착했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버스에서 하차할 시간에 자살폭탄 공격을 받았을 것이란 이야기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왔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이 났다. 비교적 안전하다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아직도 이러한 공격이 있는 것을 보면 중동은 아직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뜨거운 화약고임에 틀림없다.

피해를 입은 프랑스 여행객들에게는 미안하고 안 된 일이지만, 우리로서는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카이로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그간 정들었던 안내양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필라 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기가 카이로 공항을 이륙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땅에 하루 속시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고, 전통시장에서 희생당한 프랑스 여행객들과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속한 치유를 기원 하면서---, 

이집트여, 카이로여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