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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베트남, 사이공 탐방기

베트남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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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의 역사적 배경 개괄

베트남은 1975년 이전에는  전선 없는 전쟁을 치루며 몸살 하던 나라로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배경이 너무나도 닮은 나라이다.

고대부터 외세 열강의 각축장이며 한때는 침략자의 속국의 신세로 전락했다가 독립을 찾았었던 나라, 남 과 북으로 분단되어 동족간의 피 비린내 나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던 나라였다는 것을 비롯하여 생활 풍습 까지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달리 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기후가 좋아 농산물과 지하자원 등 각종 자원의 풍부 하지만 오늘날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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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지도

이 나라는 지형적으로 동남아시아 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국토의 해안선 길이가 3,260Km에 달하며,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직선거리는 1,650Km에 달한다. 반면 베트남 중부의 꽝빈(Quang Binh) 지역은 48Km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좁다.

1975년 사회주의로 통일 이후 세대 교차를 이룬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1986년 12월 제 6차 전당대회에서 소위 도이머이(Doi Moi)란 쇄신 정책을 채택하고 과감한 개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정책에 따라 베트남은 1989년 캄보디아의 무력점령 군을 철군하고, 1991년에는 전쟁을 치렀던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며, 더 나아가서 월남전에서 총부리를 마주 하고 있던 한국(1992년 12월 22일)과 미국(1995년)에 까지 손을 뻗어 수교하는 등 발 빠른 변신을 추구 하고 있다.

지금 이 곳엔 한국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뛰어 들어 현재 이곳에 한인들이 7만 이상이 몰려 각종 기업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 고대왕조는 BC111년 남진해온 중국의 한나라에 의해 멸망당한이후 1,000여 년 동안(AD938년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이다. 그 후 다시 통일이 되는듯하였으나 베트남이 남진정책을 마무리하기 전인 1692년부터 권문세가에 의해 최초의 남북 분단시대가 다시 만들어 졌다. 이때 북부, 중부, 남부 등 3개 지역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같은 분할을 고착화 시킨 계기는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다.

1862년, 베트남 남부에 진출한 프랑스는 그 세를 넓혀 베트남은 물론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킹(Ton Kin: 북부), 안남(An Nam: 중부), 코친차이나(Co Chin China: 남부)등 3개 지역으로 분할시켜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5개 지역을 인도차이나 총독이 통치했었다.

이 같은 프랑스의 분할통치 방식에 따라 베트남의 3개 지역은 점차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같은 수준의 독자적인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을 북부, 중부, 남부로 구분하는 기초가 되었다.

한편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으로 분할해, 북쪽은 중국군이, 남쪽은 월남 바오디아 황제로 통치케 하고 영국군이 점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기득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베트남에 재 진주함에 따라 베트남은 또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게 세계열강의 각축 장이된 베트남은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한 ‘호찌민’이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진주할 무렵의 권력 공백기를 이용해 하노이를 점령하고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 수립을 선포하고 민심을 추수 리며 프랑스에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호찌민 정부의 등장으로 베트남은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제 1차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주민들의 호응 속에서 게릴라 전술로 끈질긴 투쟁을 계속한 결과 1954년 5월 7일, 베트남 북서부의 전략적 요충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평화협정의 내용은 “베트남을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분할해 북쪽은 호찌민 정부가 점령하고, 남쪽은 프랑스가 점령하되, 2년 후인 1956년 7월 20일까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약속을 이행하기 전인 1954년부터 일방적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프랑스가 철수를 시작하자,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남베트남에서 미국이 지원하는 ‘고딘 디엠(Ngo Dinh Diem)’이 1955년 10월 26일 대통령에 당선 취임되면서,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 Nam)’을 선포한다.

착실한 캐돌릭 신자인 고딘디엠 대통령은 바오디아 정권 때 뇌물을 주고 경찰권을 얻어 전횡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부패악의 수장인 ‘레반디움’을 체포 처형하면서 뇌물, 도박, 매춘 등 온갖 사회악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고, 월맹에서 내려온 100만의 실향민을 정착시키고, 쌀의 생산량을 180만 톤에서 300만 톤으로 늘이며, 고무공장을 325개에서 4775개로 확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기었으나 장기 집권으로 독재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압도적으로 또다시 당선 되었으나 취임 후 6일 만에 불교계통의 ‘정반민’이 주도하는 구테타로 무너져 버리고 ‘고딘디엠‘ 대통령은 혁명사령관 지시에 의해 연행 도중 사살 당한다. 그 후 3개월 만에 다른 불교파의 수장인 ‘웬칸’장군에 의해 제 2차 쿠데타가 일어나 ‘정반민’ 이 실각 했으나, 1964년 1월 30일 이번에는 캐돌릭 계통의 ‘람반활’ 장군에 의해 3차 구테타가 일어나고, 그 후 크고 작은 구테타가 3차례나 더 일어 나 베트남의 사회질서와 안보상황은 엉망이 되었다. 특히 정권교체 때마다 반공 주의자들이 강제로 밀려 나면서 안보 분야는 완전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964년 베트남 정규군 46만 3천여 명 중 15만 명의 탈영병이 생기고 그 탈영병중 지휘관들의 설득으로 12만 여명은 귀대 했으나, 3만 8천6백여 명은 영원히 탈출하여 국방 기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월남 정부는 미국과 자유 우방에 전투 부대 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1965년 2월 3일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 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사태에 개입하게 되고 이어서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립핀 등이 연합군의 이름으로 참전 하게 된다.

1965년 당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야당을 비롯한 재야계의 극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월남 파병이란 결단을 내림으로서 당시 어려웠던 한국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사회에 세계 자유 평화 수호의 우방국으로서의 신용과 자존심을 세우는데 기여한 셈이다.

이 때 부터 ‘북베트남과 남부의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면서 제 2차 베트남전쟁으로 연결되게 된다.

당시 베트남은 최신장비로 무장된 5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을 포함하여 한국(한국5만), 호주, 뉴지랜드, 태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비전투원 파견국 까지 8개국에서 60만 명이 넘는 연합군이 참전 했었다 . 한국의 6.25사변 때 유엔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전 했던 국가 수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수에 불과 했다.

그러나 미국 존슨 대통령은 오랜 월남 전쟁에 지친 미국본토 국민의 여론의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월남 티우 대통령을 배제한 체 키신저 국무 장관을 앞세워 1968년5월10일 월맹과 파리에서 비밀리에 평화협상을 시작하여 1969년1월15일 ‘웬반 티우’ 월남 대통령이 협상 대표를 참여 시키는 형식으로 4년 8개월 만에 억지로 “북베트남 및 NLF”와 평화협정을 체결을 성립 시키고 전면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북 월맹공산군은 이렇게 평화 협상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론 적화 통일의 야욕을 결코 포기치 않고 이중성을 띠고 있다가 연합군의 철수를 기회로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를 기해 남베트남으로 총공격을 감행한다. 4월 21일 티우대통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 나고 ‘등반민’이 대통령에 취임하지마는 4월 30일 등방민 대통령의 항복으로 이어 진다.

비록 북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마치 6.25전쟁과 흡사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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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
1975년 4월30일, 당시 월맹 정규군 제 3군단 탱크가 최초로 대통령궁을 점령 하고 있는 장면


결국 적화통일의 기회를 얻기 위해 성립된 사기 평화 협상을 믿고 방심한 남베트남은 미군이 넘겨준 강력한 무기를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폐타이어에 끈을 달고 질질 끌고 다닐 정도의 보잘 것없는 ‘북월맹군&NLF’에게 어이없게 1975년 4월 30일 패망 하고 만다.

베트남 패망은 시사 하는바가 크다. 우리는 한국과 흡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베트남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온 국민 모두가 각성해야 한다.

"역사의 교훈을 방심하고 지나치는 민족은 저주받은 역사를 되풀이하며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8년만에 만에 만난 친구와 베트남을 가다

지난 8월 필자에겐 반가운 소식이 날라 들었다.

헤어진 지 38년 만인 2010년도 9월, 필자가 미국으로 온 이후 소식이 두절 되었던 대학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백종결이란 사람이 나를 찾는 다는 소식이 한인회 문창민 수석부회장을 통하여 들어왔다.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필라에 있을 것이다”라는 사족을 달아서 한인회에 의뢰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즉시 한인회에 남겨놓은 E-MAIL로 그에게 회신을 보냈다.
이름 끝자가 다르지만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아 종길이가 많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는 사람이 백종결이가 아니고 백종길이가 맞다면 내친구 맞으니 즉시 회신하라"는 내용으로---- "나 백종길 맞다"는 회신이 왔다.

고생했던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사업에 성공하여 여유가 생기자 마음속에 그리던 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여 38년 전 필라 쪽으로 이민을 떠난 기억을 더듬어 필라 한인회로 연락을 했다는 친구. 이름 끝자는 호적상 착오로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전화를 통하고 빠른 시일 안에 만나기로 약속 했다.

마침 그 친구가 베트남에 사업체가 있다며 재회의 기념으로 함께 3박 4일 정도 간단히 월남 여행을 하면서 그간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자며 필자 부부의 월남 항공 티켓을 구해 놓고 서둘러 서울에 나오라는 재촉 전화가 왔다. 마침 10월 중에 방한하려던 계획을 앞당겨 추석을 맞추어 귀국하기로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1석 4조라 했던 가---?!.

이번 기회에 “부모님께 성묘하고, 반가운 친구 만나고, 향수에 젖었던 옛 월남 근무지역도 방문 하고, 10월 4일 한인의 날을 기해 워커힐에서 실시되는 재외 동포 정책 세미나에도 참석" 하는 등 4가지 일을 한 번의 서울행으로 다 카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드디어 22일 오후 3시 30분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친구가 어떻게 변해 있을 가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 공항 문을 나오니, 젊은 시절 젊음으로 팽팽했던 얼굴엔 이마에 주름이 깊어지고, 정글 숲의 검은 머리털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옆머리를 길러 윗부분을 가릴 정도로 변해 버린 서로의 모습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어 반가움에 서로 굳은 악수와 포옹을 하며 “반갑다 친구야”란 외마디 소리 외에 다른 말은 더 필요가 없었다.
비록 우리들의 외모는 이렇게 변해 있지만 가슴속에 우정은 옛날과 한 치의 변함도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 공항까지 멀리 마중 나올 필요 없이 서울에서 만나자는 나의 간곡한 제의를 뿌리치고 친구는 인천공항까지 장성한 아들을 데리고 우리 부부를 마중 나온 것이다. 38년 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않고 필자를 찾아 준 친구의 우정, 대학 2학년 시절 필자가 폐결핵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방황하고 있을 때 옆에서 붙들어 주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런 남다른 우정을 나누던 친구였기에 필자는 이친구가 더욱 고맙고 소중한 것이다.

필자가 미국으로 떠나고 친구가 사업에 실패 하여 주소지를 옮기는 바람에 서울과 필라 라는 지척에 두고 연락이 두절된 체 젊은 시절 삶의 현장에서 바삐 뛰느라 38년이란 세월을 훌쩍 보낸 후에야 가슴에 사무치는 친구를 찾고싶은 마음이 파도가 일자 이렇게 한편의 드라마 같이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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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년 만에 필자와 재회한 친구와 함께

그날 저녁 친구는 그의 형제 까지 동원하여 우리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 했다.
밤늦도록 식사를 나누고 한잔을 기우리며 끝없는 대화가 이어 져갔다.
그러나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쉬운 대로 그날은 그렇게 헤어지기로 하고 각자 성묘를 마치고 9월 25일 오후 1시, 3박 4일 일정으로 베트남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번 월남 여행은 양쪽 부부 4명과 친구의 12살짜리 귀여운 외손녀까지 5명이 함께 하기로 했다.
9월 25일, 친구는 동부 이촌동에 머물고 있는 필자 부부를 픽업하여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한 항공을 이용 사이공으로 출발하여 현지 시간으로 오후 8시 사이공의 탄산누트 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과 한국의 시차인 2시간을 고려할 때 인천에서 5시간 정도 비행시간이 되는 셈이다.

그 옛날 파월당시 군 병력 수송선으로 푸른 파도를 헤치고 일주 이상 걸렸던 거리를 단 5시간 만에 간 것이다. 예정 시간대로 항공기가 탄산누트 국제 공항활주로에 내리고 곧이어 열려진 항공기 문과 공항 대합실로 연결되는 통로로 나서자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후끈한 아열대 성 습한 기온이 나의 몸을 스치며 숨통이 막히는듯했다.

그 옛날 민간항공기가 한 대가 있었을 뿐, 전쟁 군수 물자와 군 병력을 실어 나르던 군용 비행기가 가득했던 경비 삼엄한 그 공항이 이젠 어엿한 호찌민시 국제공항 으로 변신 단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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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대합실로 나오니 높다랗게 부착된 통일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수염을 길게 늘어 뜨린 호찌민의 대형사진이 시야에 들어온다.

옛날 파월당시에도 흔히 보았던 눈에 익은 사진이다.

당시 사진은 수척한 모습에 수염 긴 촌부 같은 분위기 이었는데 지금 높다랗게 게시되어 있는 호찌민 사진은 인자한 지도자의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진의 기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호찌민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43년 전 필자가 다이한 용사로 정글을 누비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20대 젊은 초급 장교로 당시 열애 중이던 여인과 어머님의 간곡한 만류로 파월 결심이 흔들리기도 했으나, 한국의 젊은이로서 조국에 충성하고, 세계자유와 평화에 일조하기 위해 연합군의 한사람으로 참전한다는 자부심과 어려웠던 나 스스로의 경제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또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인생길에 믿거름이 될수 있다는 확신 하에 "운명은 재천이니 반듯이 살아 돌아 오겠다"며 누물 짓던 어머님과 사랑하는 여인을 설득하던 그때가 생각 난다.

그렇게 파월된 필자는 베트남에서 임기 중 때때로 얼룩무늬의 정글 복을 적신 땀으로 짜낼 정도의 더위 와 때때로 밤잠을 설칠정도의 긴장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원해서 참가한 월남이란 자긍심으로 다이한의 장교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언제 어디서 있을지 모르는 VC의 공격에서 적절히 대응하다 죽게되면 남자답게 죽으리라는 각오와 긴장감으로 불평 없이 더위를 이겨내던 때도 떠오른다.

경비 대대에서 생포한 포로 5명을 G-2에서 심문을 마친 후 인수 받아 비엔 호아 지역에 있는 월남 포로수용소로 후송하라는 인솔 장교로 명을 받고 VC 출몰지역으로 분류 되어 있는 고무나무 밭을 지나며 내내 총기를 움켜쥐고 손에 땀을 쥐고 긴장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영내 취침 중에도 VC박격포 부대 기습 공격 가능성을 배제 하지 말라는 부대 교육을 마음에 새기고 많은 밤을 비몽사몽 하던 일, 병과의 기본임무인 지휘관과 VIP 경호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항상 VC의 저격 목표로 노출될 수밖에 없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일, 영내 VC동조 세력 또는 베트공 푸락치로 추정되는 월남 직원이 수송부 차량에 설치해 놓은 부비추랩 이 터져 수사를 한답시고 영화에서 나오는 수사관 콜럼보를 방불케할 혼갖 추리를 동원하던일, 부대 접근로 일차 방어 헌병 초소에 근무하는 부하의 안전을 위한 초소 주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우호세력 만들기 위해 대민지원으로 심리전을 전개하던 일, 구정의 대대적이고 무차별적인 VC공격사태 때 자체 방어를 위한 비상근무는 물론 주 월 한국 대사관 경비 강화를 위해 차출된 증원병력 특별 후송 책임자의 임무를 띠고 포화 연기와 연합군과 VC간의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이로 지나던 숨 막히는 긴장감이 넘치던 그 때 일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1968년 구정사태는 북월맹군이 남월남군과 구정맞이 휴전 협정을 하여 월남군 대부분 구정에 부대를 비우고 방심한 틈을 타 미 대사관을 비롯하여 중요 도시 중요 기관에 집중적으로 무차별적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구정공세는 실패하여 ‘월맹군과 NLF’들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 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구정 공세는 미국에 반전 무드를 고취시키는 등 전략적인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베트남, 호찌민 시티(구 사이공)을 찾아서

드디어 탄산 누트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친구와 사업관계가 있다는 엄사장이란 여성한분이 그의 딸을 데리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분의 안내로 미리 예약한 ‘오스카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기후가 마침 건기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소낙비가 하루에 한두 번 지나지만 그런대로 좋은 날씨라고 한다.

항공기 내에서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에 그날 저녁은 생략하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기상하여 호텔 관광 센터에 앞으로의 관광지를 알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호텔 관광 가이드에게 43년 전 비둘기 부대가 주둔했던 지역과 한국군 주월사령부가 주둔했던 지역을 수소문하니 그런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엄사장이란 분은 관심 밖의 일이라 더욱 몰랐다 허기야 전 후 35년이지 난 오늘 그것을 기억 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가리켜 세대차라는 가보다.

이렇게 되면 필자가 근무 했던 디안을 가 볼 수 없게 될 것 같아 조금은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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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공 교외 정경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친구의 월남인 친구 루이가 운전기사가 딸린 그의 회사 미니밴으로 호텔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날은 루이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 친구는 호찌민 시티에서 오일 저장 탱크를 만드는 공장을 하고 있는데 상당한 재력가로 친구와는 사업을 떠나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나이를 물으니 60이란다. 
그 나이면 35년 전 월남 전쟁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 사이공시내 주 월 사령부와 디안에 비둘기 부대가 주둔하던 자리를 물으니 자기는 당시 북월맹 군인(전사)이었기 때문에 이곳 지역에 대해선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친구야 말로 당시 월맹정기군인으로 나와는 반대편에서 총부리를 마주 겨누었던 사이구나 생각 하니 더 이상 구체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언제 베트남에 왔었느냐고 묻고 있었다.
43년 전이라 답하고 지나치듯 당신은 이 나라 통일의 영웅이 당신이다 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고는 화재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오늘 그는 호찌민 시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붕타우란 해변 가로 우리를 안내 하겠다했다. 친구를 통해 필자가 붕타우에 근무 한 적이 있었다는 언질을 받고 그리로 우리를 안내 하겠다는 것이다. 감사한 일이라 “깜언 안(감사하다)‘으로 답했다.

붕타우로 가기위해 한참을 복잡한 사이공시가지를 벗어나 붕타우 입구로 접어들자 양쪽 도로 중간을 연하여 잘 손질된 관상용 나무들과 아름다운 열대 화초들로 아름답게 단장 된 아스팔트길로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그 도로를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드디어 파도가 출렁이는 붕타우 해변이 나타났다.
옛날 월남전이 한창일 때도 이곳만은 비교적 안전하고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로 정평이 나있었고 이곳에 비둘기 부대 이동 외과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해변 가에 서서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지난날의 남다른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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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타우 해변 휴계실에서

당시 웨스트모오랜드 주월 미 사령관 보다 더 큰 체구와 용모 수려하여 미 사령관을 앞도 하는것 같이 보여 파월장병의 자존심을 지켜 주던 채명신 주월사령관과 원칙주의 전략가로 정평이 나있는 최일영 비둘기 부대 단장이 병원 부대 순시 및 부상 장병 위문을 위해 방문 할 때 마다 필자는 초급 장교로서 경호차 수행하면서 간간히 시간을 내어 들렸던 해변이었다.

한번은 최 단장으로 부터 병원부대 부조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특별 조사명령을 받고 몇 일간 붕타우에서 머물며 수사를 했으나 별로 혐의점을 발견 못하고 수사 보고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정리하며 거닐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 추억거리가 또 있다. 이곳 파견대로부터 병원 PX 담당관의 비행 정보를 접하고 헌병대 차원에서 확인 수사를 하고 있는 도중 병원장의 일방적으로 단장에게 선제 보고하는 바람에 단장의 진노하여 상당기간 입장이 난처했던 추억들이 지금 이 순간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멀리서 나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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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붕타우 해변가에서 우측부터 친구 부인 과 필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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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타우 해변전경

날씨가 흐려 비가 오락 가락하고 있는데도 2마일 이상 길게 연결되어 있는 해변의 모래사장엔 옹기종기 많은 피서객들로 무리 지어 북적이고 있었다. 43년 전 전쟁당시 이 해변 가는 파도 소리만 들리는 쓸쓸한 해변으로 일반 피서객은 볼 수 없었고, 가끔 다이한과 미군 유공 휴가 장병들만 넘실대는 파도를 즐기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베트남이 오늘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지만 피서객들로 미루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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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타우 푸른 바다에서(우측부터 친구, 루이, 필자)

그러나 그곳의 피서객을 위한 탈의장이나 부대시설은 아주 낙후 되고 비위생적이어서 기대를 갖고 찾아온 필자를 실망시켰다.

사워 장은 베트남 돈으로 1,000동(US돈으로 약 50센트)을 받고 있었는데, 주위가 불결하고 사워 후에 옷을 걸어 놓거나 갈아입을 장소가 없어 젖은 사워장내에서 적당히 갈아입어야 했다. 마침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어 바다에 들어가면 추울 것 같아 상인들이 자릿세를 받을 목적으로 천막을 치고 준비해 놓은 파이프에 프라스틱 천으로 만든 간이 의자 몇 개를 빌려 놓고 앉아 피서객들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겨 있는데 ‘루이’가 먼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 들면서 친구와 필자를 들어오라 손짓한다.

여기 까지 왔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그곳을 떠나면 후회 될 것 같아 준비해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풍덩 뛰어 들었다.

생각 보다 바닷물은 따뜻했다.
그러나 출렁이는 파도 물에 쓰레기도 함께 출렁인다. 한마디로 관리가 엉망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얀 이빨을 나무 열매로 새까맣게 염색한 할머니가 월남 특유의 포도 알 같이 작은 과일을 담은 광주리를 내밀며 사달라고 한다. 친구가 한 봉지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몇 개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니 생각 보다 너무 단 맛이라 먹을 수 없었다. 
두어 시간 남짓 그렇게 바다에서 파도를 즐기다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해변을 떠나 '루이'는 해변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루이가 오찬을 월남 식으로 한턱 쏘겠다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야외 식당에 차려진 식탁에 자리 잡고 둘러앉았다. 꽃게 요리와 삶은 닭고기 그리고 쌀가루로 종이처럼 얇게 빚은 보쌈에 여러 가지 나물들을 넣어 쌈처럼 싸서 먹는 요리가 나왔다. 영양식에 다이엇 식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향료 풀(?)같은 야채를 제외 하고는 먹을 만 했다. 이런 음식들 때문에 월남사람들은 비교적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살 찐 사람이 드문가 보다.

음료수로 333이란 상표의 시원한 Beer 몇 캔이 나왔다. 사이공에선 꽤나 유명한 Beer라며 특별히 루이가 주문한 것이다. 한 잔 마시니 쓴맛이 나는 게 미국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는 ‘니코바코’란 Beer의 맛과 흡사했다.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사이공으로 돌아가야 했다.

차안이 비좁아 2-3시간 견디기에 좀 불편하긴 했으나 루이의 배려를 생각 하여 불편을 참아야했다. 사이공입구에 접어드니 러시아워라 그러한지 교통체증이 생각보다 심하게 혼잡해지고 있었다. 차량이 서행시마다 수많은 오토바이가 차량 앞 뒤 옆으로 파고들며 체증은 점점 가중되며 곡예 같은 운전 광경으로 거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어제저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오토바이와 일반 차량이 한데 어울려 복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옛날이 생각났다. 특이한 것은 당시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 여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오토바이를 탄 젊은 남자들이 더많음을 볼 수 있었다.

시대 발전에 따라 차량이 늘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지금 저 많은 오토바이들이 거리의 터진 둑을 쪼개고 넘처나오는 홍수 물결 같이 아슬아슬하게 밀려오는 광경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혼다 사이즈의 작은 오토바이엔 2명이 함께 타고 가는 것은 다반사고, 3-4명의 가족이 함께 타고 위험한 질주를 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선 가족이 함께 타는 것을 허용한단다.

사이공 인구 1,000만에 오토바이가 600만대라니 그들이 일시에 거리에 나온다고 생각하면 그 복잡함이 가히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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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공의 교통 현주소(차선이 엉망 ?)

이렇게 복잡한 교통 체증에도 사이공 거리에서 교통신호등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마치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가지를 연상케 한다. 먼저 비집고 들어가면 임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케도 대형사고 없이 각자 일자리를 찾아, 낭만을 찾아, 사업상 등 각가지 이유로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오는 모양이다.

차량이 신호등이나 앞차 때문에 잠간 멈추거나 서행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몰려드는 오토바이 무리들이 차량을 포위 하듯 에워싸 버리는 광경이 반복 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차선도 방향도 무시한 채 복작거리며 접근하는 모습이 두려움을 느ㄲ기게 하여 “꿈에 나올 가 겁이 난다”며 아내가 한마디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러다 곧바로 대형 사고라도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 했다. 금방이라도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무리들은 신호가 열리거나 앞차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용케도 빠져 제갈 길로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한마디로 사이공 거리이 교통은 무질서속에 질서를 이루고 있다고나 할가-- !?
그러나 필자의 눈에 비친 사이공(호찌민)의 거리는 오토바이 물결이 넘치고 있는 교통이 혼잡한 거리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대하처럼 쏟아져 흐르는 물결을 헤치고 역류하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힘의 원천이 생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일가?

이것은 교통질서 측면에서 한걸음 비켜서서 인적 자원이란 측면에서 들여다보았을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나라는 풍부한 자원과 전후 세대인 젊은 무리들을 자산으로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며 경제 부강을 꿈꾸고 있는 잠재력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 거리의 모습은 마치 무리진 이무기가 용이 되어 비행을 준비 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형상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도 베트남 친구 ‘루이’ 사장 덕분에 오토바이 대열과 차량이 곡예 하듯 어울려 운행되고 있는 사이공 거리를 헤치고 무사히 붕타우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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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궁(통일궁) 옥상에서 내려다본 궁 앞의 거리

저녁을 함께 하자는 필자의 제의를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루이'사장을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로 보내고 우리 끼리 호텔 식당에서 ‘골뱅이’와 ‘사부사부’로 저녁식사를 했다.

셀프서비스로 되어 있는 이날 식사는 야채 종류와 어물종류의 자료가 많이 준비 되어 있어 당뇨환자들의 음식으로는 적절했다. 포도주 한잔을 곁들인 멋진 저녁을 마치고 사이공 거리를 걷기위해 친구 부부와 외손녀도 함께 호텔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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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화려했던 사이공 도시가 지금은 낙후된 도시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으며 거리의 공기는 차량 매연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파월 당시 필자에 눈에 그렇게 화려 하게 비취었던 사이공 거리가 기대 이상으로 발전 하지 못한 도시의 모습으로 머물고 있는가?

전쟁후의 경제 고갈과 점령자가 사이공을 호찌민 시로 하고, 베트남 수도를 월맹의 호찌민시로 변경하여 발전 속도가 늦을 수 있지만, 생각해 보니 눈높이의 차이일 것이다. 아마도 필자가 파월 당시 가난했던 한국 도시의 모습과 비교하여 사이공이 화려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빌딩 숲이 우거진 현대 도시 모습으로 탈바꿈한 서울의 변한 모습과 미국에서 오래 살며 대도시에 익숙해진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이공 시가지는 분명 다를 수 있다고 생각 되었다.

사이공강변의 밤거리


얼마쯤 걸으니 그곳에도 한국 식당 간판이 보였다. 그리고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사이공 강을 유람하는 선박이 주둔하는 부두가 나타났다.
낮에 그리 많던 오토바이는 밤이 되자 모두 귀가 했는지 이상할정도로 보이지 않았지만 일반 차량 통행량이 증가 한 듯이 보였다.
부두로 건너는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없어 건들 목 앞에서 차량이 서주기를 기다렸으나 달리는 차량은 아예 서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냥 포기 하고 호텔로 돌아 왔다.

월남 대통령궁 기념관을 찾아서

셋째 날 아침 7시에 기상하여 호텔식당으로 내려가니 옛날 젊었을때도 부지런했던 친구 종길이가 벌써 나와 오늘 우리를 안내 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엄사장이 사람을 보내어 월남 대통령 궁과, 전쟁 기념관, 구찌턴널로 안내 한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엄사장 딸이 우리를 안내할 안내양과 미니밴이 도착하여 우리에게 소개 했다.
그 안내는 베트남 현지 아가씨로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전공하여 한국어를 잘 구사 하고 있었다.

아침 9시 30분경, 우리를 실은 미니밴은 대통령 궁으로 향했다. 대통령궁은 호텔에서 3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궁은 1966년 프랑스 ‘총독 관저’로 건축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이후 ‘고딘디엠 대통령’에게 인계되어 ‘대통령궁’으로 사용하며 독립을 기념 하는 ‘독립궁’으로도 불렀으며, 북 월맹이 이곳을 점령 항복을 받아낸 후는 ‘통일궁’으로 바뀌어 지금은 그들의 ‘전승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궁은 필자의 눈엔 상당히 눈에 익은 건물이었다.

필자가 파월 장병으로 디안에 근무 하고 있을 임무 수행 차 사이공에 나올 때 마다 지나쳤던 당시 경계 삼엄했던 월남 티우 대통령이 집무 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건물 앞에 드높이 계양되었던 노란 색이 섞인 남 월남국기 대신 중앙에 왕별이 선명한 붉은 월맹 깃발이 건물 중앙 상단에 높다랗게 그리고 건물주위에 나란히 게양되어 펄럭이고 있는 것이 그 건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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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대통령 궁’ 기념관 전경

주차장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1층엔 길고 둥글게 생긴 테이블 주위로 빈 의자만 덩그렇게 놓여 있는 ‘웬반 티우’대통령시절 국무위원 회의실 과 식당, 2층엔 대통령 접견실과 외교 사절 신임장 제출 실, 3층은 대통령 전용 식당과 영부인의 사교실 그리고 대통령 친인척이 머무는 공간도 볼 수 있었다. 4층엔 대통령 전용 연회실과 극장이 있었다.

옥상에는 헬리콥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엔 당시 월남 대통령 전용 인 군용 헬리콥터가 그대로 주인을 잃은체 홀로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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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티우 대통령시절 각료 회의실

지하실로 내려가니 전 폭격기 공격으로 부터 방어 할 수 있는 방카식의 콩크리트 방이 여러 개 구축되어 있었고, 당시 월남전을 총 지휘 하던 작전 상황실로 보이는 방에는 대형 군사지도에 붉은색으로 군사 배치도가 선명한 상황판이 그대로 보전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상황실벽엔 차트 병이 손으로 써서 붙인 것으로 보이는 당시 월남 파병 국가와 파병 인원을 월남어로 기록된 현황판이 벽에 붙어 그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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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 의하면 당시 월남전엔 미국군 541,933명. 한국군 50,356명을 비롯하여 5개국의 전투요원과 작게는 12명까지 비전투원을 파견한 나라까지 포함 총 604,481명에 달하는 8개국의 연합군이 투입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신장비로 무장하고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 평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전투에 투입 되었지만, 공산주의의 위장 평화조약에 속아 재래식 군장비로 무장한 ‘북베트남(월맹군)과 남부의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에게 허무하게 패망해 버린것이다.





전쟁당시 상황실에 걸려 있는 참전국과 병력 현황판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를 생각 하며 더 깊은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다. 지하실 모퉁이를 돌아 서니 입구에 출입금지란 푯말이 붙은 쇠사슬로 막혀있는 어디론가 통하는 콩크릿 턴넬이 보였는데 이것은 유사시에 대통령이 미국 대사관으로 도피할 수 있는 도피 로라 했다.

그리고 도피로 입구 모퉁이에는 비상대기용으로 보이는 “15770”란 넘버가 선명한 검은 지프 한 대가 덩그랗게 전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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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패망과 운명을 같이한 지프(마지막 월남 대통령 등반민이
                                               항복하기위해 승차 했던 지프)

무어냐고 물으니 패망당시 마지막 월남 대통령(등반민/Doung Van Min)이 독립궁으로 부터 라디오 방송국으로 치욕의 항복 문을 발표하기 위해 타고 갖던 지프차란다.
결국 월남의 운명과 함께한 지프 였다.

한편 ‘월맹과 NLF’ 총공세로 참패당한 ‘웬반 티우’ 대통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1975년 4월 21일 전쟁 중에 하야 한 후 많은 금괴를 지참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자 ‘등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 75년 4월 30일, 월맹은 정규군 3군단을 앞세워 사이공에 진입 독립궁을 점령 월남 대통령 ‘등반민’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베트남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 된 이후, 그들과 적이었던 월남 대통령이 집무 실인 대통령궁을 오늘날 이렇게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대통령궁이야 말로 가장 큰 승자의 전리품으로 그들의 승리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그들의 후세에게 영구 업적으로 남겨 두기위해 보전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구찌 턴널(속칭 VC 땅굴 ?)을 찾아서

대통령궁을 나오니 오전 11시 30분이 되었다.
다음은 전쟁 기념관을 가야 하는데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 오후 2시 까지라 곤란 하단다. 왼 점심시간이 그리 긴가 물었더니 그들이 낮잠을 즐기는 “시아스타 타임”이란다. 전쟁 중에도 존중되었다는 시아스타 타임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관광 스케줄을 바꾸어 ‘구찌 턴넬’을 먼저 보기로 했다.
인근 맥도날드에 들려 햄버거를 order하여 구찌 턴넬로 가는 차안에서 적당히 점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시간을 절약하기로 한것이다.

구찌마을은 사이공에서 2시간 정도 거리의 밀림우거진 정글 마을로 지금은 성지로 불리는 곳이지만 월남 전 당시 땅굴 속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본거지를 구축하고 연합군을 상대로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이 성지화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으며 땅굴에서 사회주의 통일을 위해 투쟁하던 이들이 전사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 연합군 측에서는 이들을 베트콩(VC) 라 불렀다.

구찌 마을에 도착하여 우선 땅굴을 소개 하는 야전 상황실에 들어서니 우리 앞에 한국에 서온 관광객일행을 위해 기록 영화가 20여분 상영 된 후 한국인 안내의 간단한 추가 설명이 있었다.
내용은 전쟁당시 NLF전사(VC)들의 활동사항과 땅굴에 대한 소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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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한 월남 아가씨는 관광도중 우리의 편의를 도와주는 정도이지 베트남에 대해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 우리는 염체 불구하고 앞 팀에 합류하여 땅굴 현장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땅 굴속에서 생활하던 공간과살림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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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옛날 필자가 파월 당시 옴리 파월 교육을 통하여 배우고 또 파월 이후 월남에 근무 하는 동안 직접 보고 들은 사항들이었지만, 가옥의 입구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쇠칼쿠리 같은 것이 내려오게 하여 안면이나 복부에 깊은 상처를 주고,
                                미군의 포탄껍질을 수거하여 재래식 폭발물을 제조


예상 접근로에 구덩이를 파고 그 밑에 뾰족한 대나무 나 표창 등을 촘촘히 세워 놓고 땅 표면을 주위와 똑 같게 위장하여 누군가 접근하다 한쪽 면을 밟으면 땅 밑으로 떨어져 표창 끝에 찔리도록 하는 등 접근하는 연합군을 살상 내지는 부상하게 하도록 설치해 놓은 각종 재래식 부비추랩을 보고 옛날 이런 곳에서 무사히 귀국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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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 접근로에 표창을 설치해 놓은 부비추랩

이들의 재래식 부비추랩은 전술적으로 상대편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측면에서 많은 실효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땅속 밑으로 재래식 호미와 바구니를 이용 개미굴처럼 땅굴을 파 들어가 그들의 이동 통로와 진지를 구축했는데 파낸 흙은 주머니에 담아 정글주위나 메콩강가등지에 버려 흔적을 없애는 주도면밀한 형식으로 땅속밑으로 3갈래로 150 Km(?) 길이나 긴 굴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땅 지면과 가까운 첫 번째 굴은 미군이 사용한 포탄 껍질로 폭탄을 제조하고, 폐타이어를 이용 슬립 퍼를 만드는 등 각종 군수품을 제조하고 재생하는 공장으로 활용했고, 그보다 한 단계 깊은 2차선의 땅굴은 그들의 병력 이동 경로로,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3차선의 땅굴은 그들의 도주로로 메콩 강 밑으로 연결 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나무 밑에 작은 체구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땅굴 입구를 만들어 놓고 그 입구를 송판으로 가리고 그 위에 주위와 똑 갖게 덤불 등으로 덮는 형식으로 위장하여 게릴라 전을 수행하던 그들, 땅속에서 밥을 지으며 나오는 연기를 몇 십 미터 거리 밖에 자연으로 쌓여진 흙더미 밑까지 파이프로 연결 소화해 나가던 그들, 땅굴 속에 다시 작은 통로를 지나게 하여 몸집 큰 연합군이 입구를 부수고 들어와도 중간에서 다시 통과 하지 못하도록 굴속에서 기교를 부려 놓기도 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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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굴 입구, 작은 체구가 겨우 들어갈 수 있도록
                           입구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주위와 똑같은 덤불들로 위장해 놓았다.

그 땅굴 중에 50m 길이 정도 관광객에게 실제 체험이 허락된 곳이 있어 필자가 들어가 보았다.
통로가 좁고 굴속이 구불구불하여 허리를 굽이고 기다시피 움직여도 벽에 몸이 스칠 정도로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어 허리가 아픈것은 물론이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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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 땅굴 내부 - 관관객 이 굴속을 통과 하고 있는 모습

전쟁당시 8차례에 걸친 미군의 항공 집중 공격에도 건재 하리만큼 깊은 땅 굴 속에서 온갖 고생과 역경 을 감수 하며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며 지속되는 게릴라전을 감행해 온 이들의 초인간적인 정신력을 볼 때 이들이 이룬 통일은 우연 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굴속을 나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씻어 내며 새삼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파월되어 전사 당하여 유명을 달리한 5천여 한국군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VC들이 그들의 통일을 위해 연합군 보다 더깊고 아픈 고통과 더많은 희생을 치루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젠 이렇게 참혹한 전쟁은 지구상에서 없어 져야 한다고 생각 되었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은 그들이 사회주의 통일 이후 사회주의 통일을 위해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며 게릴라 전으로 투쟁한 전사들을 통일 이후 통일 유공자로 대우는 커녕 2000여명씩이나 숙청하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그들의 사회주의 통일을 위해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살아 있다는 것은 연합군과도 내 통했다는 이른바 양쪽 간첩으로 사상검증이 않되었다는 이유였다니 기막힌 일이다.
어쩌면 이것이 공산 주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전쟁에서 파월장병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출발하여 사이공에 들어오니 4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안내에게 전쟁 기념관으로 방향을 돌리라 했더니 그곳은 오후 4시에 이미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정을 서둘렀어야 건데  아쉬워하며 전쟁기념관 관광은 포기해야 했다.

사이공강의 쿠르스로 사이공의 야경을 감상하다

그날 저녁은 엄사장이 사이공유람 선상 저녁 식사에 초대하며 사이공의 야경을 즐기자며 호텔로 찾아 왔다.
우리일행은 엄 사장을 따라 부두로 나갔다.
사오공 뎁람(사이공은 아름다워)”이란 찬가가 있을 정도로 하릅답던 사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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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루스에서 본 사이공의 야경

그 옛날 화려했던 사이공 강 주변 부두 가는 아직도 네온이 번쩍이고 있지만 어딘지 세련되지 못한 아가씨의 옷차림 같은 느낌이 들었고, 흐르고 있는 붉은 강물엔 쓰레기가 떠다니는 등 오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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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공강 쿠르스/우측부터 친구 부인, 친구의 외손녀,필자 부인

그곳 사이공강의 크루스는 미리 예약 없이는 탈 수 없을 정도의 고급 크루스가 있는 가 하면 예약 없이도 탈 수 있는 낮은 등급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감사한 마음으로 엄사장이 안내 하는 크루스에 올라 선상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엄사장이 능숙한 솜씨로 베트남 식 요리와 Beer 몇 병을 주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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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강 선상에서 디너

배가 떠나기 시작하자 저녁 식사가 서부 되고 선상 밴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몇 명의 현지 월남여자 가수 들이 돌아가며 노래로 흥을 돋우고 있었다.

가사는 베트남어로 하고 있었지만 멜로디는 귀에 익은 한국 노래 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어떤 가수는 아예 우리를 향하여 한국어로 정감이 넘치는 칠갑산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다른 가수 보다 더 많은 박수를 그 가수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날 밤 호사다마라 했던가?

선상에서 음악과 식사를 즐기며 강물을 따라 사이공의 야경을 감상하는 도중 친구 부인이 속이 좋지 않은지 얼굴이 창백해지며 고통스러워했다. 아마도 닭고기가 덜 익은듯하여 꺼림칙했었는데 그 음식을 먹고 세균에 감염되었나보다. 사이공강 가운데에서 낭감한 일이얶다.
용케도 유람선이 부두에 도착 할때 까지 잘견디어 냈다.
크루스에서 내리며 병원엘 찾아 가보자는 필자의 제의를 “좀 쉬면 낫는다”며 호텔로 돌아 왔다.
오히려 자기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게 해서 미안 하다고 사과하는 친구 부인에게 그렇지 않다고 위로하며 아내가 지참 해 온 비상약을 주어 쉬라고 당부 하고, 우리는 쾌유를 기원하며 각자 방으로 헤어 졌다.

메콩강을 찾아서

다음날 아침 기상하여 친구부인의 건강때문에 메콩강 관광이 순조롭게 진행 될 수 있을까 염려하였는데 아침 식당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 부부를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보니 벌써 사이공에 온지 4일째가 되었다. 오늘 낮을 보내고 나면 밤 11시 30분 항공편으로 사이공을 떠나 인천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날이다.
낮 시간을 유익 하게 쓰기 위해 친구는 그날 하루 사업 일을 보기로 하고, 친구 부인과 외손녀 그리고 우리 부부 4명만이 아침 식사 후 메콩 강을 관광하기로 했다.
그날은 호텔 관광 코너의 안내로 이루어진 관광으로 우리일행을 맡은 안내는 전문 현지 관광 안내 청년이었다. 자상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복잡한 사이공을 지나자 모처럼 2차선 도로가 시원 하게 쭉 뻗어있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이도로는 신축된 산업 도로로 드물게 차량만 달리고 있어 물어 보니 오토바이 출입이 금지 되어 있는 도로라고 한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전개 되는 농천 풍경, 드넓은 설탕 수수밭이 군데 군데 시야에 들어 왔으며, 들판 한쪽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한쪽에선 이제 모를 내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2-3모작이 가능한 이 나라의 농촌 풍경을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논 가운데 콩크릿트로 관을 올려놓은 묘지가 제법 많이 보였다.
아니 청개구리 후손이 아닐 찐대 묘지를 논바닥에 만들어 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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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 가운데 묘지(벼가 익어가고 있는 논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유심히 관찰하니 일정 높이의 콩크릿트로 기초 바닥을 만들어 침수를 방지 할 수 있게 해놓고, 그 위에 역시 콩크릿트로 관을 만들어 올려놓은 묘지들이였다.

어느 곳은 가족묘지인지 울긋불긋 색을 칠한 여러 개의 콩크릿트 관이 나란히 구축 되어 있기도 했다. 하필이면 논 가운데 선조를 모시는 묘지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안내에게 물었더니 영혼이 농사를 지켜 주기 때문에 논이 명당자리란다.
부잣집 뜰 안에 묘소를 만드는 것은 보았어도 논 가운데 묘지를 만들어 놓은 것은 처음보는 일이다.
그들의 깊은 뜻은 몰라도 비교적 풍습이 우리와 같은 이들이지만 묘지선택만은 풍수지리설을 중시하는 우리네 풍습과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그렇게 농촌 풍경을 감상하며 2시간정도 뻥 뚫린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린 후에야 메콩강 포구에 도착했다. 포구에 도착하니 15인승 정도 크기의 허름한 보트가 우리 4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구라야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낡은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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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에서 관광객을 안내한 선박

대기 시켜 놓은 보트는 우리일행 만을 위해 대기시켜 놓은 것이라 했다. 우리가 승선하자 갈증이 나면 마실 수 있는 코코넛 몇 통을 서비스로 싣고 바싹 마른 청년이 보트를 몰기 시작 했다.
오늘 우리는 사이공 영역에 해당하는 메콩강일대를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메콩 강은 붉은 빚을 띠우며 예로부터 지금 까지 라오스 캄보디아를 연하여 흐른다.
그리고 그 강을 본거지로 영세민들이 생활을 영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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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메콩강의 부두


옛날 필자가 파월 당시엔 메콩 강을 헤치고 오가는 이들을 VC의 위장 이동 전술일 지도 모르니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아 그들을 항상 의심과 경계심으로 바라보던 그때를 생각 하면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들에게 있어 메콩강은 생활의 터전이며, 그 작은 보트는 생활의 수단으로 어떤 사람은 보트 자체가 주거지로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생활 하는 순박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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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작은 배로 농수산물을 운반하고, 배위에 농수산물을 비롯한 일상생활 필수품을 펴놓고 강위에서 상거래를 하는 가하면, 모래 채취를 위해 정박하고 있는 보트형 선박도 여기 저기 보였다.



                                작은 배안에서 생활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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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사이의 흐르는 메콩강

그래도 부두 한모퉁이 움막에는 결혼 파티가 한창인지 월남 특유의 노래 소리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웅성거려 여유로움이 있어 다행 이었다. 
순박한 이들은 이곳을 지켜갈 새로운 삶을 이렇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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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콩강주변의 결혼 파티

우리가 탄 보트가 어느 정글 모퉁이를 돌아가니 보트위에서 투망을 하여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보였다. 그러나 물위로 건저 오른 그물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물고기 잡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간혹 강가에 있는 집들 부근엔 갈대 같은 것으로 사방 4-4m의 규모로 물위에 울타리를 처 놓은 곳이 있었다. 고기가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갇히게 되면 잡겠다는 일종의 츄랩을 설치 해놓은 것이다.

보트 드라이브 청년은 강폭이 넓은 곳과 좁은 정글 사이로 모터보트를 제법 기교 있게 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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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탄 안내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군데군데 선물을 파는 집 앞 부두에 잠간씩 들리게 했다. 순 꿀벌이 만든 꿀을 생산 한다는 곳, 쌀가루로 만든 보쌈을 직접 만드는 곳, 그리고 뻥튀기 머신대신 가마솥에 모래를 넣어 쌀겨를 태운 열로 달군 후 옥수수나 보리 같은 것을 넣으면 하얗게 튀겨져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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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후에 얼개미 체로 모래를 걸러 낸 후 밥풀튀기 과자를 만드는 현장 그리고 애완용 구렁이를 만지게 하는 등의 관광을 시키며 우리가 선물용으로 그들이 생산 하는 물건들을 구입 해 줄 것을 원했다.

                                튀긴 강냉이로 과자를 만드는 광경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을 보며 딱한 생각은 들었으나 우리가 사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나와야 했다.

1시간 40분 정도 지나자 보트가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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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콩강 주변에 100년 되었다는 성당

보트에서 내리며 우리를 위해 묵묵히 보트를 몰아준 젊은이에게 20불을 팁으로 주자 누가 볼세라 손아귀에 그대로 움켜쥔 채 머리를 조아리며 ‘캄언옹“한다.

이제는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부두를 출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글속의 한 주막 음식점으로 안내 되었다.

식당 주인이 불교 신자인지 음식점은 100년 이상 되었다는 고풍이 풍기는 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인데 집안에 불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한쪽 공간엔 나무 침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침상이 그 집 식구의 주거 공간인지 곱게 늙으신 할머니 한분이 침상에 바르게 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안내청년이 들어가며 인사를 드리자 반갑게 인사를 받는다. 누구냐고 물으니 이집 주인 할머니로 92세가 되었다고 한다. 노령임에도 참으로 건강하고 곱게 늙어 가고 있는 할머니구나 생각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안내를 따라 집 뒤로 들어서니 그곳에 제법 넓은 야외 식당이 있었다.

이 식당은 앞엔 가옥, 뒤는 정글로 둘러 싸여 바람이 막혀서 그런지 실외 식당 치고는 답답할 정도로 더웠다. 지붕을 밭치고 있는 기둥에 선풍기가 달려있어 틀어 달라고 하니 전기가 없어 못 튼다는 것이다. 정전인지 아직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이야긴지 해명 없이 거절당하고 만 셈이다.
흐르는 땀을 닥아 내며 안내된 식탁에 자리를 잡자 웨이트레스의 서부가 시작 되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야채 숩 과 작은 접시에 싸라드가 서부 되고 곧이어 접시에 야채를 깔고 그 위에 세워놓은 넙적한 베드로 고기(?) 같이 생긴 튀긴 생선 한 마리가 등장한다. 그리고는 메인 메뉴로 넓적한 쟁반에 닭고기 삶은 것과 몇 가지 야채를 곁들여 쌀 로 만든 보쌈을 함께 식탁위에 갖다 놓는다. 닭고기는 덜 익었는지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으나 야채와 생선을 뜯어 쌀로 빚은 쌈에 싸서 그런 대로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이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출국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농촌을 되돌아보며 탁 트인 산업 고속도로를 달려 사이공으로 향했다. 사이공 입구에 들어서자 잠시 잊고 있던 수많은 오토바이가 도로에 뒤엉겨 자기 갈 길을 바쁘게 오가며 혼잡을 이루는 혼잡한 오토바이와 차량이 눈에 다시 들어온다.
운전시사는 아무 불평없이 그 혼잡한 차량 사이를 비집고 사이공 중심부로 돌아 왔다.

사이공 중심가의 Art Gallery를 찾아서

안내는 사이공에 유명한 Art Gallery가 있는데, 그곳에 들려 그림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관람하기 위해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한가지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좋다고 했다.
그 집은 주로 여러사람의 Artist들이 오리 알 껍데기를 아교로 화판에 수작업으로  부친 후 색깔을 내고 매끈하게 코팅을 하여 몇 번이고 물에 담가서 광택을 내는 과정을 거치며 겨우 힘들게 작품 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액자에 넣어져 그림의 가치를 알아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벽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감상하다 마치 “아랍풍의 세 여인의 춤추는 율동을 미적 감각으로 조화시킨 그림과 보트위에서 투망하는 어부”가 필자의 마음에 들어 두 점을 구했다.
액자에 넣어 있는 작품이지만 운반 편의를 위해 액자는 미국에서 하기로 하고 작품만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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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오리알 껍데기로 미술 작품을 제작 하는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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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제작 과정(물에 담구어 광을 내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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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작품(사이공의 두여인과 투망하는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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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hop의 전속 신니어 Artist와 필자

그림을 구하는 것을 본  Gallery의 Sr.화가가 그림을 볼줄아는사람을 만나 반갑다며 접근하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여 포즈를 취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엄사장이 떠나기 전에 저녁 식사를 대접 하겠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에 관광지로 떠나면서 호텔에 맞겨 놓은 짐을 찾아 엄 사장을 따라나섰다. 엄사장이 안내 한곳은 탄산 누트 공항과 인접한 드문드문 한국어 간판이 눈에 띄는 초롱가의 한국 식당이었다.

저녁은 꽃게 전골로 시원한 맥주 한잔을 곁들여 오랜만에 얼큰한 한국식 요리를 하고 나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친구로 인하여 엄사장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는 동안 시간이 흘러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번 여행이 짧은 시간으로 베트남 전지역을 돌아 보지 못하고 특히 필자가 43년 전 근무 하던 디안 지역 탐방을 다음 기회로 미루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낯익은 붕타우 해변과 사이공 시가지를 비롯한 독립궁, 메콩강 그리고 사이공 주위의 게리라 주력부대의 VC(베트공)의 본거지인 “구찌 땅굴”을 돌아보며 월남 패망의 원인을 음미 해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큰 의미가 있었다.
다음기회에 북 월맹지역과 중부 그리고 필자가 주둔했던 디안 일대에서 당시 친하게 지냈던 현지 주변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여기서 베트남의 여행을 마감해야 햇다..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없어 우리는 밤 11시 항공기 출발시간에 맞추어 엄사장에게 감사하다는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엄사장이 불러준 택시를 이용 공항으로 이동 인천행 KAL기에 올랐다.

사이공아 안녕!        사이공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