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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페루를 가다(제 7편/마지막편)

앞 6편에서 계속

 

페루를 가다 (제7편)

 

"물개섬”으로 이동

 

아침 6시 ‘세라톤 호텔’을 출발 '물개와 물새들의 고향인 물개섬'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엔 바다의 파도가 심해 일찍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가라파고스’라 불리는 물개 섬에는 수천의 각종 물개와 수천의 물새들이 서식하고 있는 그들만의 천국이다. 이곳엔 펜귄도 볼 수 있다는데 원래 펜귄은 남극이나 북극같이 추운 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동물과에 속하나 이곳 바닷물이 찬 관계로 펜귄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섬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3시간 가량 버스로 달려 부두에 도착, 다시 보트를 이용 1시간 가량 바다속으로 이동 해야 한다.

물개 섬으로 가는 도중 우리는 ‘Lima’의 번화한 거리를 감상하고 길옆으로 전개 되는 사막의 평야를 감상할 수 있었다. 물개 섬은 육로로 3시간 달려 ‘빠라카스’로 이동한 후 다시 모터보트로 접근 할 수 있는 ‘갈라파고스’라는 섬이다.

 

버스 창을 통하여 전개 되는 'Lima'는 페루의 수도답게 번화했다.

시내 마을은 산등성이 까지 연결 되어 있었는데 산등성이의 집은 폐가처럼 보이는 집도 있었으나 그런 집에도 이 나라 중산층(GNP 6500불/빈부의 격차가 심함)이 살고 있다고 했으며, 시가지 골목바다 약국, 카지노란 간판이 여기 저기서 번쩍이고 있어 제법흥행의 거리 같이 보였다.

2400Km의 긴 해안선을 갖고 있다는 이곳, 리마의 여름은 12- 2월, 겨울은 7-9월까지라 하며 현재는 가을 초입으로 아침저녁으로 쌀쌀 했다.


이나라의 관광 버스운전사는 2명이 있어야 하고 이곳을 돌아 볼 때는 원 주민 현지 가이드가 반듯이 동행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확인하기 위한 거리의 검문이 실시되고 있는 나라이다.

여행객의 안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란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왼쪽은 사막, 우측엔 남태평양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막입구에 벽돌 공장이 많이 보였다. 사막의 모래를 그대로 시멘트를 섞어 벽돌을 찍어내면 될 터이니 원가가 저렴할 것 이다.

모래사막으로 보이는 산등성에도 집이 있어 불안해 보였는데, 이 지역은 비와 태풍이 없어 모래 위에도 안전 하게 버틴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래지반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암 석화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언덕을 지나자 다시 나무가 우거진 마을이 나타나기를 반복 했고 푸른 마을이 있는 곳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인류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면 강물과 인간의 문명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곳 사막은 대부분 국유지이지만 사유지도 있다는데 사유지는 울타리를 쌓아 세면 부르크로 경계선을 표시 해놓았다.

저 멀리 하얗게 비닐봉지나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낮은 건축물은 양계장이라 하며, 군데군데 생각 보다 많은 양계장의 분포로 보아 이 나라의 닭고기와 달걀의 생산량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넓은 광야에 강물이 흐르는 농토에는 아스파라가스. 옥수수, 목화 등을 재배 하고 있었다.

목화는 흔히 흰색이 대분이지만 이 나라의 목화는 핑크색을 띄고 있는 종류도 보였다.

 

우리가 이동하는 도중 안내는 남미의 역사와 유럽 역사의 상관관계 특히 콜럼버스의 대륙 발견과의 깊은 관계가 있음을 상기 시켜 주었다.


여기서 잠시 콜럼버스와 나포레온이 동유럽과 남미에 끼친 영향을 요약해 본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출신이나 스페인의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1492년 8월 동방으로 가는 서쪽 항로 개척을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나호 등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들을 데리고 목숨을 건 동방항로 개척에 나서게 된다.


그는 동방에서 향료(후추가루), 황금을 찾아 나선 것이었으나 칼리브해의 산타 도밍고에 도착 황금을 찾았으나 실패한다. 일행을 잔류 시키고 다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잔류병이 질병으로 사망하고 현지인과 불협화음이 생기는 등 상황은 극도로 악화된다.

그 후 콜럼버스는 4회에 걸쳐서 항해를 더 시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항해부터 몰락을 시작하면서 스페인 황실의 각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그에게 우호적이던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까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콜럼버스가 약속했던 금은보화와 향료는 없었고, 인도항로 개척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1502년 5월 4척의 작은 배를 끌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 콜럼버스는 별다른 소득 없이 2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고, 더 이상 왕실의 후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그를 후원했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콜럼버스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55세의 나이로 객사하다시피 사망하게 된다.

1542년 그의 아들과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시신은 서인도제도의 히스파니올라 섬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옮겨서 묻혀 졌다.

 

여하튼 그의 대륙진출은 결과적으로 파나마에 식민 정부를 세웠고 쿠바의 정복을 시도하고 '유카탄 문명'이 꽃피우기도 하고 남미를 차례로 독립시키는 영향을 주는 역사적 의미를 가게 된다. 

그러던 중 후 에 스페인 ‘프란시스카‘는 비루 족(페루)이 금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하자 이들의 금을 뺏기 위하여 1532년 페루를 침공 하여 당시 잉카의 서자출신으로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마지막 황제 ’와타우타‘를 멸망시켜 식민지로 삼는다.


페루는 스페인 ‘프란시스카‘에 멸망 당한 후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다가 1800년대에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남쪽에서 ‘산마르틴’을 선봉장으로, 북쪽에선 ‘심은 불리비아’(볼리비아 출신)장군을 앞세워 스페인을 물리치고 독립을 되찾는다. 당시 남미를 독립시키는 결정적인 원인 제공은 ‘프랑스의 ’나포레온‘이다.

영국을 고립 시키는 대륙 봉쇄 작전을 펴왔기 때문이다.

당시 폴트갈(남쪽)과 러시아(북쪽)가 나포레온 정책을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나폴레온은 이들을 치기 위해 스페인에게 길을 열라는 구실로 스페인을 장악 하고남 후 당시 스페인 왕을 폐하고 왕의 형인 ‘조셉핀’을 왕으로 추대하자 왕이 브라질로 도주하게 된다.

이렇게 스페인이 약화되자 그동안 식민지로 스페인 왕실에 조공을 받쳤던 남미의 나라들은 이를 기화로 차례로 독립을 하게 되는 등 유럽역사와 남미의 역사는 이렇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물개섬 “갈라파고스”

 

3월 22일 새벽 6시에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 이동하는 동안 잉카 제국이 스페인에게 멸망 당하기 까지의 역사를 훌터 보는 동안 물개섬으로 들어가는 ‘빠라카스’ 부두에 도착 했다

이제 이곳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32Km정도 바다 깊이 이동하면 ‘갈라파고스’라는 속칭 물개 섬에 다다른다. 모두들 보트 앞자리로 몰리다가 다시 뒷자리로 이동했다.


모타 보트를 타고 물개섬으로 향하는 일행

 

사진을 찍기위해 보트 앞자리를 생각 하던 필자로서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달리면서 추진력에 의해 모타보트 앞부분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앞부분의 의자에선 보트자체에 시계가 가맇 뿐아니라 파도를 가르고 지나갈 때 뿌려지는 물세례를 피할 수 럾게 됨을 보트가 출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쩐지 앞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뒤로 자리를 옮길 때 알아 차렸어야 하는 건데--- 

망망한 바다 중앙을 달리는 단조로움이 있긴 하지만 바닷물을 가르고 달리는 모타보트 앞으로 시원하게 스치는 바닷바람은 그간 고산지대의 답답함을 한순간에 날려 보내 주었다. 

가끔 파도가 모터보트가 좌우와 위아래로 심 하게 뒷등이면서 파도 물이 보트 안으로 몰려 들어와 일행들을 덮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게 한다.

그러나 그 비명은 즐거운 비명으로 모두들 스릴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참을 속도를 내던 보트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좌 측 해안가로 가까이 다가간다.

좌측 해안으로 연하는 넓은 산등성이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대형 “촛대” 그림이 선명하게 보인다.


“갈라파고스” 해안 지대에 작가미상의 촛대 그림


누가 왜 이런 곳에 그렸는지 아직 까지 미스터리인 촛대 그림, 아무도 그린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림이란다.

일설에 의하면 외계인이 만들어 놓은 그들의 이정표라는 설과 잉카인이 그려 놓았다는 설 또는 해적들이 그들의 테리토리를 표시하기 위해 그려놓았다는 설이 분분하나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어쨌든 저 촛대 그림은 같은 자리에서 600년 이상 존재하고 결코 없어지거나 변경되지 않고 존재 하고 있으며, 한번 그림을 지운 적이 있으나 다시 나타났다는 그림이고 보면 신비의 그림임에 틀림없다. 모두들 카메라 샷터를 눌러 댔다.


잠시 그곳에 머물던 모터보트는 다시 물개 섬으로 방향을 돌려 달리기 시작 했다.

앞에 달려가던 모터보트가 경쟁이나 하듯 우리 보다 속력을 더 내고 있었다.

거의 우리와 같은 시간 에 출발한 보트였는데 우리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달리는 보트전면으로 앞서간 보트가 작게 보이며 그 앞에 작은 섬들이 아득히 나타난다.

섬 앞에 다가서니 독도 보다 큰 괴 암석이 몇 군데 그 위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고부터 인새들의 고향 물개들의 고향이었던 바위섬으로 간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바위섬이었으나 이제는 수시 관광객들의 접근을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바위에 둥근 홀을 통하여 보이는 물새들의 평화로움

 

바위섬과 모래사장 주위엔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바다의 제왕 물개들이 모래와 바위위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고, 높은 바위 위를 하얗게 덮고 바위섬하늘을 온통 하얗게 덮고 나래 짓을 하고 있는 물새들---


물개섬 바위 주위에 한가로히 쉬고 있는 물개들---, 

이런 물개 휴식처가 주위에 4-5군데 더있다.

 

이들은 위아래에서 그들의 왕국임을 인간들에게 선언하려는 듯 질러 대는 소리가 불협화음이 되어 음산 하게 들려온다.

가히 이들을 이 섬의 제왕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위섬을 하얗게 덮고 있는 물새들 틈에는 한 마리 펭귄이 외롭게 웅크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다 추운지방에 가지 못하고 이런 곳에서 떨어져 외롭게 살고 있는 가 ?

물개들의 무리 속에는 수십 마리의 암 놈을 거느린 사자 상을 한 수놈이 육중한 몸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가 하면, 바위섬 근처 바다에는 어미 물개가 새끼 물개와 함께 자맥질을 하며 새끼들에게 수영을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바위섬은 세월의 연륜을 자랑하듯 바다 파도 물에 뚫린 천연 동굴도 있었고, 바다위에 옹기종기 솟아 오른 바위와 바위섬 주변에 생긴 찬연 모래사장엔 물개들로 까맣게 덮여 있었다.

아마도 우리눈앞에 보이는 저 수천 마리의 검은 물개들은 인간의 접근을 아랑곳 하지 않고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떤 놈은 새까맣고, 또 어떤 놈은 Brownish한 색깔을 하고 있었다.

새카만 놈은 지금 바다에서 막 나온 놈이고, 부라운 색깔은 바다에서 나와 일광욕을 오래 한 놈이란다.


바위 주변 모래사장에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개들이 쉬고 있다. 

 

도대체 저 많은 물개들이 여기서 무얼 먹고 살아 갈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인간세계에서나 해당할 일이고 이들은 필요할 때 마다 무한대로 연결되어 있는 바다 속에서 무궁무진한 먹이 감을 잡아먹고 살고 있을게다.

공중을 나르고 있는 물새도 마찬 가지다.

바위섬 주위에 물새가 하도 많아 사진 찍다가다 배설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들 물개와 물새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는 역겨울 정도 인데 냄새와는 달리 인간에게 유용하게도 사용된다고 한다.

그 증거로 산 위 가장자리에 물새 배설물이 모이도록 일정 높이의 트림(낮은 벽)을 만들어 놓았는데 1년에 한 번씩 배설물을 수거하여 화학제품, 화장품등의 원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산위에 건물을 짓고 사람이 상주하고 있다고 했다.

 

물개와 물새를 원 없이 본 후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고 그들의 왕국을 떠나 다음은 사하라 사막다음으로 크다는 ' “와까치나” 사막으로 이동한다.

 

페루의 “이까” 지역의 “와까치나” 사막의

‘샌드카와 샌드스키 보드’의 스릴을 즐기다.

 

그렇게 물개 섬을 떠나 1시간 30분 달려 ‘이까’라는 마을을 거쳐 ‘와카치나’ 사막과 오아시스라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 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사막하면 흔히 사하라 사막을 연상하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제일 큰 사막은 '사하라' 사막이요, 제일 건조한 사막은 칠레 북쪽의 ‘아타까마’ 사막이라 한다. 이 나라의 사막의 크기는 사하라의 다음이라니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곳 사막의 특징은 바다 바람에 의해 ‘따라까스’라는 모래 기둥이 일어 상당히 위험할때도 있다 한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한곳은 길 엽으로 하얗게 사막의 전경이 펼쳐지는 입구였다.


사막용 지프차

 

입구에는 사막을 달릴 수 있도록 개조된 특수 지프차가 즐비하게 대기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여행객은 빠른 속도로 스릴을 즐기는 구릅, 적당히 달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 천천히 달려서 안전감을 좋아 하는 구릅 등 3으로 나누어진다.

 

필자는 사진을 찍기 위하여 천천히 달리는 지프차에 으르기로 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가는 모래가 날려 카메라 렌스를 버릴 염려가 있으니 플라스틱 백에 카메라를 담아 오라는 안내의 지시에 따랐으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들고 있자니 플라스틱 백은 무용지물이 됐다.


사막위를 질주 하는 지프가 멀리 보인다.

 

천천히 달린다는 구릅의 사막지프차도 일단 달리기 시작하니 상당히 빠른 속도로 모래사막 위를 달려 긴장감과 스릴을 주었다.

그리고 영화나 기록에서만 보아 오던 사막의 언덕이 그렇게 심하게 오르고 내리는 경사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사막의 비탈길을 비스듬히 지프가 기울어서 달리는 기분, 언덕길을 전속력으로 올라 간 후 낭떠러지 비탈길을 떨어지듯 달려 내려오는 기분, 마치 젊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어드벤처 공원에서 트랙 위를 달리는 소형 기차(?)를 타고 을 낭떠러지를 직강화 하며 곤두박질 할 때 기분이라 할 가---.

오르고 내리고 급커브를 돌 때 마다 지프에 동석하고 있던 일행들의 함성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릴 만점의 지프는 사막 중간 언덕에 세워 졌다.

일행은 지프에서 내려야 했고 현지 안내가 일행에게 일일이 샌드 스키 보드를 나누어 주었다.

이제 부터는 이 스키보트로 비탈길을 내려가야 한단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니 까맣게 보인다.

이런 언덕을 4번 정도 차례로 샌드스키 보드로 내려가기로 된 것이다.

처음엔 서서 타는 샌드스키보드인줄 알고 평소 아픈 무릎을 핑계 하여 기권 할 가 했었는데 다행히 샌드 보드는 엎드려서 탄다고 한다. 

여성들이 타고 내려가는 판에 기권한다는 것은 체면 문제라는 생각에 동참 했다.


사막용 스키 보드를 타기위해 대기중인 필자 부부...

 

언덕위에서 현지 안내로부터 샌드 보드 타는 요령에 대한 교육을 대강 받은 일행은 남성들부터 차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모두들 처음 경험치고는 겁 없이 능숙하게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런데 일행 중 큰소리 치고 출발했던 여성이 미끄러져 내려가다 중간에서 뒤 둥구는 해프닝이 일어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보다 더 웃게 했던 것은 그 여성의 뒤 둥근 이유가 사람의 바란스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비탓이라고 주장하는 아내인 여성을 감싸는 애교 있는 변명이었다.

전형적인 애처가의 모습이 이런 걸까----!?.

다행히 현장 사막의 모래가 워낙 가늘어서 설사 어느 누구든 뒤 둥글더라도 다칠 염려는 없다고 한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맑고 순수하게 만든다.

사막위에서 그런 작은 실수에 서로 악의 없이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사막에서 지프 드라이브, 샌드스키 보드등 새로운 프로그램의 체험을 마치고 나서 모두들 뒤 짚어 쓴 모래를 털어내느라 법석을 떨었지만 오랜만에 젊음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아서 즐거워했다.

다시 사막의 지프를 타고 출발 했던 입구 쪽으로 돌아아 짚프가 정지 한다. 

출발시에는 무심코 지나 쳤던 입구에 그림 같은 오아시스가 있었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

 

오아시스엔 작은 호수를 중심으로 파란 잔디밭과 열대 식물 그리고 야자수 잎이 아름답게 드리우고 있었다. 사막가운데 이런 오아시스가 있다니--?

그리고 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인간의 마을이 형성 되고, 이러한 사막 체험 장이 생길 수 있다니 이런것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라 말한다면 --- ,여하간 오아시스의 아름다음이 한폭의 그림 같았다.

잠간 지프에서 내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아시스의 기념사진을 찍고 사막을 벗어나 ‘나스카’로 이동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사막에서 '나스카'로 가는 길은 왼쪽에 안델스 산맥이 멀리 보이고, 드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가끔은 안델스 산맥을 자르고 만든 계곡 길을 지나갈 때 펼쳐지는 아름다운 계곡이 시야에 영화 필름같이 지나간다.

이 평야에 물만 끌어 들일 수 있다면 무한정 개발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 창밖을 스치는 사막의 광야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길옆으로 길게 인위적으로 심어 놓은 이름 모를 나무묘목들이 보였다. 이 나무는 사막용으로 뿌리가 물길을 찾아내려 가는 특성을 갖고 있는 나무로 나무가 뿌리를 어느 정도 내릴 때 까지 인위적으로 물을 주면 된다고 한다.

문득 이스라엘의 사막지대에서 성경에서 나오는 ‘언약궤’를 만든 자료로 사용했다는 나무가 아닌가 생각 되어서 나무 이름을 질문하니 현지 가이드 왈 ‘와랑꼬’라는 생소한 나무 이름을 대준다. 

한동안 사막을 지나면 다시 푸른 나무가 우거지고 농토가 전개 되는 마을이 나오기를 반복 한다.

어떤 사막의 계곡은 점점 석회질로 사암화 되어 농작물 재배가 불가능하여, 흔한 선인장이나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다. 어떤 곳은 산맥을 잘라내어 만든 도로에 고대 철인의 얼굴 형상의 보습의 자연 바위가 눈길을 끌기도 한다.


안델스 산을 뚫고 만든 산악 도로 우측에 고대 철인 형상(자연바위)

 

시계가 6시(PM)을 가리킬 때 쯤 우리는 ‘빨리 빠랑’이란 마을을 지나고 있었고 사암의 골짜기에는 어두움이 깃들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우리가 지나온 사암은 검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사장이 오랜 세월 햇볕에 뜨거운 열이 가해지고 공기와 산화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사막의 평야는 내일 관광할 ‘나스카 라인’ 평야라고 한다.

땅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나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오르면 수많은 그림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그림은 누군가가 검은 사암 바탕을 긁어내어 모래 색깔이 드러내게 선을 만든 형식의 작품으로 작자 미상의 불가 사이한 신비의 그림이 그 평야에 있다.

내일 아침이면 그 현장을 간다.

 

신비의 “나스카(Nazca) 라인”으로

 

오늘 아침 호텔을 나오면 오늘 마지막 관광 코스인 “나스카 라인”을 관광하고 바로 “Lima”공항으로 이동 하여 뉴왁 행 항공기를 타게 된다. 따라서 오늘밤은 기내에서 보내게 되는 셈이다.

이로서 8박 9일의 여행 일정을 모두 마감 하게 되는 것이다.

 

전일 Nazca(나스카)의 Casa Andina 호텔에서 페루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우리는 아침 6시 20분 호텔을 나와 ‘나스카 라인’을 보기위해 경비행장으로 이동 했다. 경비행기를 이용 하늘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나스카 라인’---,

풀리지 않는 신비 ‘정체불명의 기하학적인 모양과 동물 그림’이 있는 나스카의 평원---

서울시의 60% 크기에 해당하는 평원에 그려진 신비의 그림---

경비행기로 한 바퀴 돌고 나면 어느 정도 그 수수께끼를 풀릴 수 있을까?

 

경비행장에 도착 하니 공항의 규율은 엄한 것 같다. 이곳에서도 일반 공항과 마찬가지로 여권과 티켓의 일치 여부를 확인 한 다음 활주로로 나가 그들이 할당하는 경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언젠가 이곳에서 경비행기 납치소동이 일어난 사건이 있은 후부터 출입이 엄해 졌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도 우리와 다른 팀의 한국인 여행 그룹이 도착해 있었다.

이제는 어디가나 한국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게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이야기일 게다.

 

경비행기는 4명이 한조가 되어서 타는 아주 작은 경비행기와 15명 정도 탈 수 있는 비행기로 나누어 타게 된다. 우리 부부는 아내 친구 2명이 한조가 되어 2번째 경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비행기지만 조종사가 2명 있었다. 왼쪽에 앉은 주 조종사로 보이는 조종사가 오른쪽 부조종사에게 비행 조정법과 하늘에서 평야에 전개 되는 그림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스카 라인’ 상공을 안내한 현지 경비행기 파이롯드와

 

LA에서온 아내 친구가 조종사에게 팁을 듬뿍 주고 이어서 기도를 올린다.

항공 중 간절한 마음으로 안전을 기도 하는 것이다.

기도 덕분에 우리는 안전하게 그 넓은 사암 평야를 이리 저리 공중을 40여 분 날아다니며 나스카의 사암평원에 신비스럽게 그려있는 기하학적 그림인 원숭이, 독수리(콘도르), 라마, 범고래, 파충류, 거미, 물소, 왜가리, 벌새 등의 선명한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좌우로 기울며 평야의 그림을 찾는것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약간 어지러움증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기전에 멀미약을 먹두는게 좋다는 안내의 말을 생각 했을때는 이미 늦었으니 참고 견딜수 밖에----.


모래사막에 그려져 있는 각종 그림들 중 하나

 

도대체 언제 누가 왜 이런 그림을 이곳에 그려 놓았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의 불가사이 한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흐린 날씨 보다 갠 날씨에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다행이도 이날 기후는 쾌청하여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연 평균 몇 십 mm의 극소의 강수량이 전부라는 극도의 이곳 건조한 사막 기후 덕분에 손상되지 않은 선들, 산화되어 사암화(철을 함유)된 검은 색의 표면을 걷어 올려 황색 모래가 드러나도록 그려진 그림 들, 외계인들이 내려 와 그려 놓았다는 설, 잉카인들이 고무풍선을 이용 그렸다는 설, 자연의 풍화에 의해 남겨진 흔적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기원전 200부터 기원 후 800년의 나스카 문화시대에 가뭄을 해소하기 위한 기우제 같은 종교 의식을 치루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 할 뿐이라 한다. 경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자 조종사는 친절하게도 우리 4명 각자에게 나스카 평원을 비행한 증명서에 친필 사인을 넣어 주면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어 준다.

이것으로 이번 페루의 여행일정은 모두 마치게 되는 셈이다.

 

우리 일행은나스카 라인 공항을 떠나 뉴왁 공항으로 가기 위해 '리마'공항으로 가는 도중 ‘이까’에 들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리마' 공항으로 계속 이동하게 된다.

 

‘이까’에서 현지 식사는 현지 호텔(Las Dunas = 모래언덕이란 뜻을 갖임)에서 소등심, 심장,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각종 생선 등의 즉석 BBQ에 야채를 겸비한 푸짐한 메뉴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이카’의 “Las Duns" 호텔입구

 

이 호텔의 특이점은 여행객들이 ‘Lima'로 이동중 식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음식 질과 량이 좋은 편이다.

특히 BC 200-600전후의 유품들이 호텔 통로 벽에 만들어 놓은 특수 진열대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페루‘이카’에 소재 “Las Duns" 호텔내의 비치된 골동품

 

이렇게 귀중한 골동품을 호텔에서 개인 적으로 그럴게 많이 소장하고 있다니 놀라웠다.

점심을 충분히 들고 난 후 호텔 식당을 나와 계속해서 ‘Lima’공항으로 이동을 시작 했다.

이곳에서 ‘Lima’까지는 300 Km로 4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버스창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은 농촌 풍경이다.

좌측으로 연이어 전개 되는 포도나무 밭이 보이고, 이따금씩 목화 밭. 피망 밭 등이 보였다.

이곳 도로선상에서도 ‘신기루 현상’이 보였다.

중간에 ‘친체’라는 곳에서 10분간 휴식을 갖기로 했다.

버스 안에서 대기 하던 운전기사가 임무를 교대 하는 동안 화장실에 다녀올 사람들을 위해서다. 이곳은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개고기는 안 먹어도 고양이를 먹는 고장이라 한다.

독일 이민자가 많이 사는 “옥사밤바‘시는 한국인이 시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도시는 포도생산지이자 포도주 생산 공장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한국인 시장은 월급을 $1만 받고 있어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4차선으로 넓게 뚫려 있었으며 왼쪽 해안선에 한국인 ‘광어’ 양식장을 차려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저력이 이곳에 까지 미치고 있어 듣기 좋았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덧 ‘LIm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아내 친구 L씨는 LA로 가기위해 다른 터미널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고, 여행기간동안 정들었던 현지 안내 나계진 씨는 ‘성’이 ‘나’ 씨라 나 뒤에 이름 계진을 부쳐 ‘나계진’ 하면 건방지게 들렸을 것이라며, 차라리 성이 ‘전’ 씨였으면 ‘전 계진’입니다. 로 표현하여 겸손미가 더했을 것 이라 농담조의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이어서 그동안 부족했던 점 이 있었다면 이해 주시고 주거지에 돌아가면 건강하게 최선을 다해 살기 바란다며, 자기는 페루에 남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라고 말해 일행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역시 만남은 반가움이고 헤어짐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수반하게 되나 보다.

필라 일행들은 뉴왁 까지 함께 이동하게 된다.

모두들 피로한 기색이지만 이번 여행은 나름대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페루 여행 요약

페루의 수도 ‘Lima’에 입성하여 아마존의 정글과 밀림의 원숭이 섬, 꼬스꼬의 산타 도밍고 성당 과 성곽 및 신전 등 각종 유적지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인 고원 지대의 마추피추, 홀리아카의 ‘실루스타니 우적지, 세계최고지역의 호수 인공섬에서 문명을 거부 하고 그들 부족의 전통 생활 방식을 고집하던 우르스족을 방문, 갈라파고스의 물개섬, 이까의 와까치나 오아시스 및 샌드카 투어 경험, 다시나스카로 이동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나스카 평원 속에 그려져 있는 정체불명의 기하학적 그림들을 감상하며 페루 남부 지방을 두루 훑어 ’고대 잉카와 현대 문명‘ 사이를 넘나들며 8박 9일 동안, 바쁘게 다녔다.


고원 지대라 조금은 힘들기도 했지만 참으로 후회 없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불행이도 필자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 1개월 전에 좌측 대 태부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걸음이 불편하여 여행을 무사히 소화 낼 수 있을까 걱정했었지만, 일행 중 뉴왁 공항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부상한 아내의 친구, 그리고 엎친데 겹친 격으로 LA 친구마져 고산 지대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나의 부상정도는 명암도 못 꺼내고 어금니 속으로 묻어 놓아야 했다.

다만 내가 행동반경에 제한을 받고 있는 상태이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불편한 아내 친구들를 가까이서 돕지 못한 미안 함이 컸다.

다행히 그들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전문 간호사답게 필요시에 서로 도와 응급 조치를 해가며 낙오 없이 어려웠던 여행코스를 끝까지 소화해내는 뚝심을 보여 주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통하여 평소 한 지역에서 같이 살고 있었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던 이웃들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가 돠었던 점도 감사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