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편
오슬로를 찾아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까지는 500Km거리에 6시간 정도 대륙을 횡단하는 긴여정이다. 오늘은 어제 300Km 정도 드라이브 해온 거리보다 짧은 200Km정도의 거리라고 하나 약 세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슬로 연하는 도로 양편으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전나무와 상나무같은 늘푸른 침엽수와 잡목들이 함께 빽빽히 들어서 시계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바로 도로 주변에는 이름을 알수 없는 잡초가 긴 목을 내밀어 윗부분에 보라빛의 종을 달아놓은 듯한 뭉치 꽃들을 피우고 있었는데 마치 초롱꽃처럼 아름답게보
였다.
노르 웨이 국경지내 초원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쪽으로 길게 늘어선 유럽에서 가장 넓은 나라로 국토 중앙과 남서부가 넓은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다. 인구가 500만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나라이다. 문맹률은 사실상 0%이며 정치는 단원제를 기초로 한 입헌군주제이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노르웨이의 공용어는 노르웨이 말이 따로 있으며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이다. 화폐단위는 노르웨이크로네(Norwegian krone/NKr)이다. 전통적으로 어업 및 임업 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광업과 제조업이 크게 증가했다. 주로 서비스업,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업, 경공업 및 중공업 등에 기반을 둔 경제가 발달했다.
이나라는 800년 부터 1050년까지 왕성한 세력을 펴던 나라였지만, 왕정의 실정과 당시 창궐하는 흑사병 으로 국운이 쇠퇴기를 맞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프랑스와 러시아 간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데 노르웨이는 프랑스(나포레옹)에게 줄을 섰다가 프랑스가 러시아에 패함으로 러시아에 줄을 섰던 스웨덴에게 속국이 되는 수모를격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바이킹의 원조 나라로 한때 바다의 공포대상이었던 적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 모두가 바이킹의 원조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으나 이들 상호간에 충돌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스웨덴은 동부 러시아, 노르웨이는 아이스랜드, 덴마크는 독일 스코트랜드 쪽으로 분활진출을 하며 상대국에 간섭 하지 않은 전통을 서로 존중해 왔기 때문이란다.
특히 이나라는 만년설로 뒤덮인 산악지가 많아 빙하침식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휘요르드 바다와 호수 그리고 수 많은 폭포등의 자연관광이 풍부한 나라이며, 여름에는 1개월 정도 밤이 없는 백야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한참을 달려 오전 10시 45분경 스웨덴의 끝자락인 노르웨로 진입하는 국경지대에 도착하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고속도로의 어느지점을 통과 하는 것에 불과 했다. 국경지점엔 도로를 가로질러 국경을 알리는 대형 교통 표지와 “No Declare”라는 간판이 있을 뿐이다.
노르웨이 국경 지대
따라서 국경을 넘기 위해 별도 수속은 필요 없다. 우리는 국경을 넘기 전에 휴계소에 들려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휴식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서자 길 좌우편엔 스웨덴 지역에서 보던 풍경과 약간 다르게 일정 거리를 연하여 상나무류의 수목들로 빽빽히 들어선 지역들이 자주 보였으며, 그 지역을 벗어나자 국경입구라 그러한지 오히려 산악지역이 많을거라 예상했던 노르웨이가 스웨덴 보다 낮은 평야와 드넓은 기름진 농장들이 분포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저 프른 동산 뒤에는 높고 험한 빙하와 만년설의 산악지가 도사리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측엔 북에서 흐르는 강물인지 휘요르드 바다의 한쪽 자락인지 이집트의 나일강 물 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노르웨이 휘요르드로 가는 산악지대의 턴넬
현지 버스 운전기사는 우리가 베르겐으로 가기 까지 한 100여개의 작고 큰 턴넬을 지나야 한다고 말한다. 정확한 턴넬 숫자는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운전기사의 말이 어느정도 신빈성이 있다는 안내의 말이다.
우리는 오후 12시경 노르웨의 수도 오슬로로 진입 했다. 시골길 같이 교통이 한가한 마을 로 시작하여 시가지로 깊숙히 들어갈 수록 점점복잡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City Hall을 끼고 돌아서니 도로변에 4층 높이의 빌딩이 가득한 거리가 나온다. 몇개의 좁은 골목을 육중한 관광 버스로 비집고 돌아서니 호텔 간판이 여기 저기 보인다. 아마도 호텔이 모여있는 지역인 것 같았다. 세시간의 긴 드리브 끝에 목적지인 오슬로의 “Thon Hotel”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1시경이었다. 오슬로에 들어오니 첫번째 눈에 띠는 것은 아직도 도로위에 검은 전철선이 복선으로 깔려 있었고, 그위로 빠알간 전철이 다니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아마도 교통난 해소를 위하여 정책상 전철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모양이다.
*오슬로, 시가지 입구와 전철
오슬로는 국가 전체 인구 500만의 1/10로 50만의 인구가 사는 도시이다. 모두들 부유한 편이어서 25명의 인구에 1대 꼴로 “요트”를 소유 하고 있다고 한다. 이도시에는 한국인이 300명 정도 살고 있는데 간호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나라는 원래 조선업이 발전한 나라였으나 현재는 한국에 선박 제조를 하청 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편이 직접 배를 제조하는 것보다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란다. 이나라의 GNP는 8만 5천불로 룩셈불그 12만불 다음으로 부자 나라 이다.
개혁 기독교과 국교가 된 것은 호컨이란 왕조 시대에 수직 통치를 위한 정권 강화의 수단으로 천주교를 수입해온것이 동기가 되었다한다. 당시 군주가 수직통치 밥법으로 기독교를 악용하여 국가가 쇠퇴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나라의 바이킹은 원래 무역으로 시작해서 인접 국가 교회를 터는 절도로 바뀌었다가 다시 바다를 공포로 몰아 넣은 해적 바이킹으로 변천해 갔다는 안내의 설명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현지 안내 정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호텔식당에서 점심을 마치는 대로 우리는 “바이킹 물박관”으로 직행했다.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Vikingshipiphuset)으로
우리가 도착한 바이킹 박물관은 1927-50년에 완공된 것이다. 크기는 32만 제곱 미터(320,000M2) 라 했다.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21.5m(L) x 5m (W) 크기의 옥나무로 만든 마치 나막신 모양의 3대의 선박들이 박물관안 이곳 저곳에 나누어 전시 되어 있었다.
바이킹 박물관의 “튜나 호”
이선박은 900년대 국내에서 운항하던 것으로 당시는 소유주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한 모든 재산들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한다. 여기에 있는 선박도 원래 소유주가 사망시 함께 땅에 매장되었던 “튜나 호”라는 선박으로 1880년도 오슬로의 남단 “Oseberg” 라는 휘요르드에서 발굴 된 것인데 많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역사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다. 선박 양쪽으로 각각 15명씩 노를 저을수 있도록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는 목재로 된 말마차등과 같은 선박과 함께 발굴된 바이킹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슬로, 구스타프 비겔란드(Gustav Vigeland) 공원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칼 요한 거리( Karl Johans Gate )를 지나면 비겔란드 조각공원 (후롱네르(Fronger) 지역)이 있다. 이공원에는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드 (Gustav Vigeland :1869-1943) 의 “인간 삶의 모상”을 조각하여 전시해 놓은 세계최대의 야외 조각 소장품이 있는 곳이다.
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드(Gustav Vigeland :1869-1943)
이공원은 년간 2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비겔란드(Vigeland)는 일찌기 불란서의 생각하는 철인 로뎅을 만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이태리의 루네상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일생동안 이공원에 수백개의 청동과 화강암을 사용 212점(195점이란 설도 있음)의 조각과 650명의 인간모형을 남겨 놓았다. 그는 작품을 팔지않고 오슬로 시에서 영원히 봉급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불멸의 작품을 제작하여 이공원에 남겨 놓은 위대한 조각가이다.
비겔란드 조각공원
필자가 본 이공원의 전체적인 구도는 안으로 깊숙이 계단위로 높다랗게 자리잡은 장소에 그가 2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모노리스 석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탑은 인간이 위로 한없이 오르려고 하는 욕망을 예술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 탑 아래 지역 중앙에는 40년이나 걸려 제작 했다는 분수대가 시원한 물 줄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이공원 입구 양편으로는 인간 원래의 삶 모습을 여러가지 형태로 조각한 작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원래 분수대의 작품은 이나라 독립 기념으로 국회 의사당 앞에 세울것을 계획한 것인데 분수대의 크기가 계획했던 것 보다 크게되어 국회의사당 앞에 세우지 못하고 이곳 공원으로 옮긴 작품이라 한다.
필자는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공원의 조각들을 관찰해보았다. 우둔한 필자의 머리로 전체적인 작품의 참뜻을 정확히 이해 할수는 없겠으나 필자의 느낌을 가식없이 표현해 보려 한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와 상반되는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비겔란드의 모노리스 석탑
입구로 부터 안쪽을 향하여 행군중인 군 대열을 방불케할 실오라기하나 걸치지않은 전라의 인간들의 근본을 그대로 노출한체 길 양옆으로 특별히 설치한 난간위에 줄지어 세워 놓은 작품들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서서히 발길을 안으로 옮기었다.
중간 지점 한모퉁이에 어떤 아이의 조각이 필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다.
천진 하게 서있어야할 어린 아이가 불쾌하고 짜증나는 표정이 하도 이상해서이다.
이작품은 작가가 어린아이를 먹을것을 주었다 뺏었다 반복하여 약을 올려 극도로 화가 나있을때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라 했다. 왜 조각가가 아이를 학대에 가깝게 괴롭히어 약 올라 있는 모습을 작품화 했을까 하는의구심을 갖고 지나치려 하는데, 안내가 이 아이의 고추를 만지면 소원 성취한다고 부언 설명을 한다. 그래서 그러한지 필자가 다시 보니 아이의 고추가 반들반들 광채가 나 있었다.
필자도 여기 밝힐 수 는 없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소박하고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어 싫다는 아내를 불러 함께 포즈를 취해 봤다.
이외에도 수많은 조각품이 각기 특이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보면서 조각가가 인간 삶의 원래의 모습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 삶의 진화와 행. 불행의 경지를 묘사해 보려는 작가의 깊은 뜻이 엿보였다. 그러나 하도 많은 벌거벗은 인간의 뒤엉킨 조각들이 필자의 눈에는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특별히 중앙 분수대는 필자의 눈길을 끓었다.
비겔란드 조각의 분수대
분수대 네 귀퉁이에 설계된 나무의 조각은 인생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단순한 인간 삶의 여정뿐아이라 4개 모퉁이 지점에 각각 4사람의 태초의 인간이 나무파라솔 같은 자연의 결정체를 떠받고 있는 모형속에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 가야 하는 본질과 삶의 고뇌를 탈피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으며, 분수대 주위 돌벽면에 돌아 가면서 새겨놓은 작은 부조물들은 태초에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그가운데서 자식이 태어나서 가족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동안 생사 고락을 경험하게되고, 함께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윤회하는 인간 삶의 미로를 묘사해놓은 것 같아 인간의 삶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분수대를 지나 높다란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동산처럼 만들어놓은 공간에 인간의 육체가 뒤엉긴 모노리스 탑이 관광객을 맞이 한다. 인간이 위로 끝없이 오르려는 한없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필자는 이작품 속에서 인간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고, 앉고, 꾸부리고 또 꺼꾸로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어 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치열한 경쟁속에서도 서로 의지 하며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공동체로 살때에만 굳건히 설수 있는 허약한 존재 임을 발견 할 수 있었으며, 모든 인간은 이와같이 혼돈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도 아울러 엿 볼 수 있었다. 그탑 입구엔 양옆으로 길게 세워놓은 벌거숭이 남녀 부부 또는 부모와 자식들이 자연의 모습으로 가식없이 뒤엉킨 모습은 마치 그탑을 보호하는 수호신들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옆에 삶의 바퀴(Wheel of Life)란 제하의 4명의 어른과 3명의 어린이가 직경3m의 원을 만들고 있는 조각품이 있었다.
*비겔란드의 삶의 바퀴(Wheel of Life)
이작품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존성, 삶의 영원성,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윤회 사상을 함축시켜 놓은 것이다. 모노리스 탑에서 서쪽으로 내려 가면 12면의 조디악 형상의 해시계 조각품도 있었다.
조각가 비겔란드가 시당국으로 부터 평생 일정 봉급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었기에 작품에 전력할 수 있었겠지만 개인 자격으로는 웬만한 재벌가가 아닌 이상 이러한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기가 힘들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슬로, 시청사
오후 4시경 비겔란드 공원을 나와 시청사로 이동했다. 바이킹 박물관을 건축했던 건축가가 건축했다는 본 시청사는 앞에서 보면 “ㄷ”자 형 붉은 벽돌 건물로 되어있었다. 정문 광장에 서 있는 탑위에 2마리의 오리가 목을 길게 위로 뻗어 서로 뒤 엉겨있는 모습의 조각품이 눈길을 끌었다.
오슬로 시청사 전면
오슬로, 시청사 실내에서
시청사는 1-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층에는 대회의실과 소회의실로 나뉘어 있었다.
오슬로, 시청내부
오슬로, 시청 회의실
이곳 아래칭 메인 홀은 노벨상이 수여되는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노벨 평화상을, 기타의 상은 이곳 노르웨이에서 수여된다는데 그이유에 대해서는 노벨의 유언때문이라는 설이있으나, 정확한 사유는 알수 없었다. 시청사 앞으로 나오니 오슬로의 중심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시청사를 나온 우리일행은 여기 저기 추억의 기념사진을 바쁘게 촬영한 후에 오슬로 극장을 거쳐 왕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슬로 국립 극장
시청사에서 왕궁으로 가기위해서는 국립 극장 앞을 지나게된다.
극장앞에는 극작가의 동상이 서있었고, 옆에는 한 여인의 동상이 서있었다.
오슬로 국립 극장
오슬로 오페라 배우, 웬츠포사(Wenche Foss)
언듯보아도 유명한 여 배우같이 보이는 나이 연로한 여인이 밝은 모습으로 두손을 번쩍들고 마치 오페라를 열연 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공원에서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는 모습같기도 했다. 이녀는 오슬로 시장을 배출시킨 어머니이자 엡센의 인형의집 주인공이었던 여배우 “웬츠포사(Wenche Foss)”이다. 그녀는 오랜 연기 생활을 하다 나이 92세에 사망하게 된다. 조각가는 이작품을 스켓치 하는데 10개월, 이 조각을 완성하는데 1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웬츠포사 에게는 두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아들은 오슬로 시장이 된 반면에 다른 아들은 지체장애자였었다고 한다. 그녀는 시장에 출마한 아들을 위한 선거 유세에 참가 하면서 또한 지체 장애 아들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서는 등 솔직하게 현시을 세상에 알림으로서 많은 시민들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한다.
오슬로에는 국립 박물관과 에드워드 뭉크 박물관이 유명하단다..
그런데 1994년 국립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 났다. 치밀한 경비망이 있었는데도 뭉크의 작품 2개가 없어 졌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 현장에는 도범이 작품을 절도해 가면서 “너의 허술한 경비에 경의를 표하면서” 라는 Note를 남겼놓을 정도로 경비의 허술함을 비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장물을 처리하기 곤란했는지 어느 길거리에 버려둔것을 발견하여 현재 한점은 국립박물관에 또 한점은 뭉쿠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작품을 필자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아쉬임이 있었다.
오슬로, 왕궁을 찾아서
노르웨이 왕궁은 시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하고 있었다. 이왕궁을 등지고 시가지쪽으로 내려다 보면 칼요한 거리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거리의 시발 지점인 윗자락에 노란 색갈의 대리석으로 4층(?)으로 구축되어 있는 석조 건물이 바로 우리가 찾아온 “노르웨이왕궁”인 것이다.
노르웨이 왕궁
이왕궁은 스웨덴 칼요한 황제(1814-1906)가 노르웨를 통치 하고 있을때 건축하여 스웨덴과 이곳을 왕래하며 양국을 통치한 왕궁인데,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한지 100년이 지난 지금 노르웨이에서 아직도 왕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경이적인 일이지만, 궁전 광장 중앙에는 아직도 스웨덴의 황제 칼요한의 동상이 이나라의 주인처럼 건재하고 있는 것은 한번더 생각해 볼일이다.
오슬로, 칼요한 거리
왕궁입구엔 작은 초소가 있었고, 그 초소 앞엔 마네킹 같은 복장의 초병이 로보트 같이 서있었다.
건물 중앙 지붕위로 높다랗게 이나라 왕정을 상징하는 황금색 왕관이 새겨진 붉은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광장에서 내려다보면 길게 뚫려 있는 요한 거리 끝자락에 초록색 지붕의 국회 의사당과 노벨상 수여식때 연회 장소로 사용된다는 그랜드 호텔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런데 부를 자랑하는 노르웨이가 이 왕궁 광장을 아직 모래 바닥으로 두었다는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가?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친환경 정책 때문일가? 그렇다면 “파란 잔디광장”은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노르웨이, “릴레 하머(Lillehammer) 동계올림픽장”과 “돔바스(Dombas)”를 찾아서
아침 8시 50분경 호텔(Thon Hotel)을 출발하여 릴레 하머(Lillehammer) 동계올림픽장을 찾아나섰다.
조국이 지난 10년간 심혈을 기우려 세번째 도전하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지금 1994년도에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릴레 하머를 찾고 있는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왼일인지 이번 평창 유치는 반드시 성공 할 거라는 느낌이 온다.
*노르웨이, 릴레함머 동계올림픽장소 입구 안내 간판
이동중에 우리는 인근 Rimi라는 체인 슈퍼마켓에 들려 물을 두어 박스 사서 버스에 실었다. 더운날씨에 2.5시간의 짧지 않은 길을 떠나기 위한 사전 준비를 위해서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산등성이를 깍아 만든 도로를 지나는 동안 저멀리 만년설과 수많은 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노르웨이가 산악지대 임을 실감 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동계올림픽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안내의 노르웨이 역사 설명이 이어진다.
노르웨이가 세력이 왕성하던 시절은 800-1050년경이었다. 1300년경 이니라는 바이킹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었고 1350년도경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50만에서 25만으로 주는 대 재앙이 다가온다. 이러한 와중에 왕가는 덴마크 출신의 왕비와 8살난 왕자만 살아 남게 된다. 이에 당황한 왕비는 친정아버지인 덴마크의 왕에게 합병해 줄것을 요구한다. 이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노르웨이는 1384년 부터 1814년 까지 450년가깝게 덴마크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따라서 노르웨이의 언어는 덴마크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억양만 약간 다를 뿐이란다. 1814년 노르웨이는 덴마크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당시 프랑스 나포레옹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되는데 노르웨이는 프랑스편에, 스웨덴은 러시아편에 줄을 서게된다. 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덕분에 노르웨이는 다시 90년간(1814-1906)스웨덴에 식민지가 된다. 우여 곡절 끝에 1906년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된다. 그러나 왕실에 적통의 왕감이 없어 덴마크와 영국황실의 왕비에게서난 혹컨 7세가 독립된 노르웨이의 첫왕이 된다. 그렇게 외국 혈통의 왕으로 왕통이 이어지다 3세대에 가서야 왕자가 테니스 크럽에서 만나 결혼한 아들이 딸린 노르웨이 여인과 결혼함으로서 적통을 이어가게 된다. 이나라는 기독교 국가 이면서도 오슬로엔 3개의 성당이 있을 뿐이라 했다.
노르웨이 시민권 신청 자격은 3년이상 직장 경력자로 노르웨이 언어 250시간, 사회학 50시간 도합 300시간이상 수업을 받고 소정의 자격증을 소지한자로 4년차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이 부여 되는 데 2년에 한번씩 이민국이 아니라 관활 경찰서에서 거주 연장신청을 신청할 수 있고, 3회이상 무사히 거주를 연장받은자는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이 부여 된다고 했다.
이나라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몰라도 박지성 축구선수는 알고 있을정도로 축구의 열의가 높으며 아울러 박지성이 이나라에서 국위 선양을 하고 있슴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나라의 복지와 교육은 출산 유급 휴가는 10개월에서 1년간 가능하며, 만 10개월에서 한살이 될 때까지 돌보아주는 유아 케어 시설이 잘되어 있으며, 6세까지 유치원, 10년간의 의무교육과 고교때 인문과 실업으로 분명하게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며 8학년까지 성적표가 없다고 한다. 대학 졸업식이 별도 없고 졸업장은 우편으로 배달 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형식을 배제하고 실속위주로 교육이 실시 됨을 의미한다.
취업은 건축업, 가구 수리, 전기, 요리사 계통에 취업률이 좋은 편이라했다.
8학년까지 성적표가 없다는 것은 발육기의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겠다는 자율교육을 통한 스스로의 성찰을 유도하겠다는 의미인데 과연 이들이 이런 방법으로 국제 경쟁력에서 이길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번 전세계의 학력평가에서 한국이 1위 노르웨이가 한국에 비해 1.5년 뒤졌다는 평가에 당국의 우려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석유가 발견된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도로, 철도건설이 붐을 이루고 있는데 노동력은 주로 파키스탄 사람들로 충당되었다는것이다. 따라서 현재 이나라는 파키스탄인이 전체 인구의 3%나 차지할정도로 많이 살고 있다.
버스가 달리는 도로의 우편에는 이따금씩 아름 다운 여인 상이 붙어 있었는데, 여인상 얼굴의 반쪽은 분명한 얼굴 모습인데 다른 반쪽은 초점이 흐려져 있는 얼굴상이었다. 과속 방지를 위한 교통 표지 판이라 한다.
릴레 하머(Lillehammer) 지역의 거의 다다르는 지점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릴레 하머(Lillehammer)” 지역은 1820년에 형성되었으며, 인구 2400명의 작은 도시로 1994년 동계올림픽이 유치된 올림픽 도시로 통하는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가 휴식을 취한 곳으로 부터 한참을 꾸불꾸불 산길을 돌아 돌아 올라가니 대형 미끄름틀 같은 초록색 스키 점프장이 저멀리 시네마스코프 화면처럼 눈앞으로 닦아 온다.
스키장에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들이 스키장 옆의 계단을 이용하여 등산하듯 올라가고 있었고, 한편에는 겨울철에 스키타는 사람들이 타고 올라가던 수십개의 립프터가 컨베어 벨트에 매 달려 위아래로 부지런히 돌고 있었다.
*릴레 하머(Lillehammer) 스키장
리프터가 한바퀴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정도 였으며, 입장 티켓은 노르웨의 화폐로 55.00크로메(US$11.00) 였다. 필자는 컴베어 벨트에 달려 있는 리프트가 도는 동안 발아래 펼처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기대하고 티켓을 끊었으나 눈이 없는 마을은 그져 그랬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대한민국 평창으로 유치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우리고있는 한국을 생각해 본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도 성공적으로 치룬 동계올림픽이라면 평창에서 못할일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유치성공을 기원했다(필자가 필라에 돌아 와서 여행기를 쓰고 있는 동안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승전고가 울렸다.) ,
12시.30분경 그곳을 떠나 인근의 골프 칸츠리 크럽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오찬을 했다.
오찬을 마치고 우리는 이곳에서 30여분이상 산책을 즐겼다.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칸츠리 크럽은 공기가 맑고 경치가 아름다웠다.
골프장 부설 연습장에는 어디로 부터 이골짜기 까지 찾아 왔는지 알수 없으되 몇몇사람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필자는 15세 어린이의 깨끗한 스윙에 놀라음을 금치 못했다.
아이온 클럽 7을 들고 160m 이상을 쉽게 날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 지지않은 산모퉁에에서 살고 있다는 어린소년 ---!
제2의 타이거 우즈가 되라는 칭찬과 격려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이곳을 나와 우리는 요정이 살고 있다는 돔바스(Dombas)로 이동 하여 하루밤을 보냈다.
요정(Troll)이 살고있다는 돔바스
돔바스 호텔은 호텔이라기보다는 산장의 방카루 같았다. 예정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고 호텔측의 준비미비로 안내가 여기저기 뛰어다닌 후에 방 Key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밤을 쉬고 다음날 새벽 휘요르드 관광일정에 맞추기 위해 일찍 기상하여 떠나기로 했다. 안내로부터4-5-6작전 지시가 내려 졌다. 다음 스케줄인 게이랑에르(Geiranger)에서 페리를 승선할수 있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 4에 기상하여, 5시까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6시정각까지 출발 준비를 완료해달라는 비상이동 계획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모두들 이국의 밤의 정취를 그냥 흘려 보내기가 아쉬웠는지 마을 주위를 걷기도 하고, 또 혹자는 마을의 Store를 돌아 보기도 했다. 지역 특산품중 마음에 드는 기념품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필자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Store 앞에서 왼 괴물이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보기에 흉물스러운 난쟁이 키에 귀신머리에 뻐드랑 이와 코가 유난히 크고 코끝이 빨간, 그리고 배가 뽈록한 작은 체구에4개의 손가락과 발고락을 갖고 소꼬리모양 긴 꼬리가 달린 기형적인 괴물 인간 형체의 “트롤(Troll)”이라는 요정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눈에는 징그럽게 보였다. 왜 저렇게 흉물스러운 상을 Store앞에 세워 놓았을가 의구심을 가지며 Store안에 들어가보니 상당 크기의 공간을 그런 종류의 괴물인형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지역에서는 꽤나 유명한것이란 생각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상점 밑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지역박물관에 들려 트롤(Troll)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었는데 이 요정은 아주 아주 옛날에 인간과 함께 이 산악 지대에서 살고 있던 절설속 요정의 모습이었다.
트롤(Troll)
이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어 자기들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수도 있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어둠속 에서 살다가 해가 뜨기전에 산속으로 숨어야 하는데 햇빛을 보게 되면 돌로 변한다고 했다. 때때로 처녀 Troll은 예쁜 처녀로 변신하여 젊은 총각과 농부들을 유혹하여 산속으로 데려 가는데 한번 산속으로 들어간 총각과 농부들은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요정이 변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꼬리 부분이라는데 이요정에 유혹되지 않으려면 여자의 뒷부분(꼬리 부분)을 유심히 관찰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설에나오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 구미호가 연상된다. 그리고 안내가 설명한 다른 전설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가난한 농부가정에 3형제가 살았다한다. 집이 가난하여 산에가서 나무를 해 와야하는데 첫째아들이 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트롤을 만나 당장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호통치는 바람에 그대로 줄행당을 쳐서 빈손으로 돌아 왔고, 큰소리를 치고 나갔던 둘째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고 돌아 왔단다. 이번에는 세번째가 어머니에게 바위 처럼 보이게 크고 둥근 치스를 만들어달라고 하여 그 것을 들고 산에 오르자 역시 트롤이 나타나 금방잡아 먹을 듯이 닥아오자 세째는 치스를 번쩍들고 인근 연못으로 던지자 그것을 바위덩어리로 착각한 트롤은 자기보다 힘센 장사가 나타난것으로 오해하고 그에게 고분고분해졌을 뿐아니라 트롤의 집까지 초대 받아 가지고 간 치스로 음식을 해주자 배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죽었다는 결국 셋째의 꾀에 굴복했다는 동화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다. 그외 전설적인 이야기는 많으나, Troll과 잘지내면 인간을 해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잘지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Troll의 모형을 가게 앞에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새벽부터 비상이 걸렸던 돔바스지역, 산장의 호텔
그런데 그이튿날 새벽에 비상이 걸렸다. 모텔에서 시계가 고장났는지 새벽 4시에 자동적으로 울려야 하는 웨크업 알람이 2시 30분에 울리는 바람에 모두의 잠을 설치게 한데다가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가 출발 예정시간이 넘었는데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밤새 “요정 Troll”에 유괴된 것은 아닌지 모두들 밤새 무슨일이 있었는지 걱정을 하며 찾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정해진 호텔방이 문제가 있어 다른 방으로 바꾸어 투숙하는 바람에 모든 방문을 일일히 두드리는 소동끝에 결국 늦잠을 잔 그를 찾아 내어 한바탕 웃어 넘기는 해픈이 있었지만 예정시간 보다 25분 늦게 출발 하여 3시간 정도를 이동하는 장도에 올랐다.
쿠르스, 휘요르드 항해(Geiranger – Hellesyit, Briksdal)
& 빙하 전동차( Blu Glacie)를 타다.
우리는 돔바스(Dombas)지역을 예정시간보다 늦게 출발하여 게이랑에르(Geiranger) 선착장으로 향했다.
돔바스에서 게이랑까지는 버스로 근 3시간 정도 험한 산악지대에 수많은 턴넬을 통과 해야한다. 우리가 통과한 턴넬중엔 해저 40m의 턴넬도 있었다. 이 험한 산악 지대를 뚫고 길을 낸 인간의 능력이 대단 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해발 852m의 높이의 좁은 산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 험한 계곡을 뚫어 놓은 수많은 턴텔을 통과 하고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고 있는 좁고 험한 길을 육중한 관광 버스를 몰고 있는 운전 기사에게 우리의 생명을 담보한체 곡예하듯 좌우로 굽이치며 위아래로 오르 내리는 동안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노르웨이 산악지대에서 내려다 보는 “휘요르드 “
이길은 굽이 치는 계곡위에서 수직으로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계곡이 수없이 반복 되고 있어 아래 끝자락을 보고 있는 순간 아찔하여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저멀리 버스 창문을 통하여 보이는 계곡정상의 만년설과 계곡의 허리를 흰구름이 휘감고있는 모습은 한폭의 동양화 같았다.
U자 보다도 더 심하게 꾸불꾸불한 급커브가 하도 많아 몇개나 되느냐고 물으니 11개나 된다고 한다. 여하튼 그러한 급커부와 수없이 많은 계곡의 정상위를 대형 버스가 곡예하듯 비껴가며 우르내릴때 마다 앗찔함을 느껴야 했으며, 고비고비를 통과 하는 동안 운전 기사의 노련한 기교에 우리는 힘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만년설이 녹아 계곡의 바위를 타고 퍼져 내리는 많은 폭포의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신부의 면사포를 보는 신비스러움을 주고 있어 열린 입을 다물수가 없게 하였다.
덕분에 예정대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휘요르드로 인정 받는 “게이랑에르-헬레쉴트” 구간을 한시간 동안 항해하는 유람선 (Geiranger-Hellesylt) 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항해도중 눈앞에 스치는 마치 신부의 하얀 면사포와 같은 일곱 자매 폭포, 눈덮힌 빙하등 참으로 아름다운 휘요르드 바다의 절경들은 내생애의 오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우리는 “올덴”으로 향했다.
휘요르드 바다의 절경(1)
휘요르드 바다의 절경(2)
이해를 돕기 위해 “휘요르드”라는 뜻에 대해서 알아 보자. 안내의 설명에 의하면, “수억년전에 빙하의 무게에 의해 지층이 가라앉은 부분에 바다물이 들어와 생긴 산속의 바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빙하가 무게에 의해 부분적으로 갈아 앉았다는 말에 선듯 동의 할수 없어 자료 책자를 뒤적겨려 얻은 결론은 “빙하의 무게에 의해 내려앉인 것이 아니라 수억년 빙하가 녹아 흐르면서 서서히 침식하여 깊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결국 바다 수면보다 낮게 되자 바다물이 들어온것”이란 가설에 동의하기로 했다. 휘요르드 바다의 깊이는 10m-1300m까지 다양하다. 이날 우리가 탈 Ferry는 약 한시간가량 운항하게 된다. 관광객이 Ferry 에 승선을 마치자 곧 출발하기 시작 했다.
페리위에서, 산허리를 휘어 감은 아름 다운 구름띠
갑판위에 올라 주위를 살펴 보니 저멀리 해안선 군데 군데 지붕을 푸른 잔디로 파랗게 단장하고 있는 작난감 같은 집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는 반면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귀신 머리처럼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집들도 있었다.
이나라는 열관리를 위해 지붕위에 흙을 언고 잔디를 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런 풍습도 얼마나 관리를 잘 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상반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멀리 첩첩이 쌓인 높다란 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흰구름이 계곡의 허리를 휘어감고 있고 그사이로 진주 처럼 반짝이며 곤두박질하고 있는 폭포 줄기에 감탄이 절로 날 지경이며, 어떤 폭포는 억만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바위 계곡 깊숙히 간직해온 흰 진액을 쏟아내는 것으로 착각 될정도로 신비스러움에 벌린입을 다물지 못했다.
*7자매 폭포
*7자매 폭포 와 휘요르드
신이 창조한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출발지에서 부터 따라온 갈매기는 인간과 좀더 밀착 관계를 유지 하려는 듯 파도를 헤치며 질주 하는 페리를 계속 따라오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하늘과 맞다은 계곡과 계곡사이를 잇는 흰구름이 다리를 놓은듯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구름을 다리 삼아 금방이라도 선녀가 하늘에서 하강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내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일본,독일, 노르웨이 그리고 한국어의 안내 방송이들렸다.
한국의 위상이 이렇게 신장되어 있구나 생각하며 눈은 휘요르드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에 흠뻑 빠져 든다.
구름에 가려진 만년설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외딴 골자기에는 띠엄띠엄 가옥이 보인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들은 1년내내 아무도 찾어올것 같지 않는 만년설리 뒤덮힌 산기슭에서 저렇게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일가?
만년설 계곡에 별장들
이렇게 자연에 도취 되어 있는 동안 페리는 목적지(Hellesylt)에 서서히 도착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최대의 빙하 지대인 브릭스달로 이동, 브릭스달 빙하(Briksdal Glacier)를 오픈카를 타고 관광하기로 했다.
전동차를 타고Briksdal빙하지대로
우리 일행이 전동차 정거장에 도착하니 가볍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개일것같은 날씨이기 때문에 개이치 않고 7명씩 승차할수 있는 Open전동차를 나누어 탔다.
현지에서 비를 피하라고 나누어 주는 프라스틱 조각으로 무릅 앞을 가리고 만년설이 덮여 있는 브릭스달 빙하(Briksdal Glacier)지점 입구 까지 올라갔다. 전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지점까지 올라 간 다음 다시 도보로 빙하지점 가까히 접근 하는 것이다. 전동차 탑승 시간은 왕복으로 30분 정도 걸린것 같다.
전동차에서
전동차를 타고 중간지점쯤에 이르자 물벼락이 우리가 탄 전동차로 덮쳤다.
산등성이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바위에 부디쳐 하얀거품을 발산하며 다시 위로 물길을 솓구치게 하다가 스스로의 무게에 다시 땅으로 쏟아지는 물덩이가 다시 바위를 치며 앞을 가린 텐트 쪼각 위로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옷이 젖은 것은 아랑것 하지 않고 모두들 즐거운 비명을 발한다.
*Briksdal 빙하로 가는 중간 지점의 폭포
전동차에서 내린 지점으로 부터 우리는 도보로 15분정도 더올라가 빙하지점으로 근접할 수 있었다.
벼란간 천둥소리 같이 우당탕 소리가 요란하여 올려다보니 골짜기에서 빙하조각이 떨어져 아래로 딩굴고 있었다. 보기드문 현상으로 장관이었다.
*빙하지점에서 필자 부부
빙하의 얼음들은 프른 빛을 띠고 있었고 깊이를 알수 없는 계곡을 따라 녹아내리는 물이 빙하속으로 흘러 내려 한데 모아 지면서 폭포를 만들어 밑으로 떨어 지는 경관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 물줄기는 계곡의 깊이를 더해가며 아래로 흐를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구의 온난화로 이빙하가 모두 녹아 버릴날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날이 오면 지구가 물에 잠기게 될가 그렇다면 지구상의 인류는 어찌 되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며 빙하의 언저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은다음 필자 부부는 일행들을 뒤에 두고 전동차가 기다리는 집결지로 서서히 발길을 돌렸다. 일행이 모두 집결지에 모이기를 기다려 우리는 다시 전동차를 타고 산아래로 내려 왔다.
스 케이(SKEI)를 찾아서
저녁을 호텔에서 여유 있게 마치고 필자 부부는 호텔앞에 길게 뻗어 있는 호수 주위를 1시간쯤 산책했다. 맑은 공기가 필자의 폐부를 깊숙히 파고 들어 기분이 시원하고 상쾌해 진다. 산등성이로 적당한 간격으로 하얀집과 빨간집들이 조화를 이루며 서있었다. 대개의 경우 흰집 옆에는 반듯이 붉은집이 있어 멀리서 보면 색갈의 조화때문에 더아름답게 보이는것 같았다. 이렇게 산등성이를 따라 서있는 집들은 마치 한가로운 별장 같은 아름다음으로 필자 앞에 다가 왔다. 가끔 색갈이 엊박자가 나는 곳도 있었지만 유심히 가옥을 살펴 보니 흰집은 사람이 사는 가옥이요, 붉은 집은 헛간이나 가축장으로 구분 할 수 있었다. 붉은색의 페인트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그렇게 구별 하여 색갈을 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약 1시간쯤 산책을 하고 있노라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Skei Hotel에서 하루밤을
비를 피해 호텔로 들어온 필자 부부는 호텔라운지에서 따끈한 그린차를 한잔씩 들고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나이든 피아니스트와 아코데온을 연주 하는 두 악사가 열심히 분위기를 띠우고 있었다. 음악이 지속되자 몇몇 젊은 부부가 음악에 마추어 신나게 춤을 춘다. 필자 부부도 차잔을 테불위에 내려 놓고 그분위기에 빨려 들어가 보았다. 오랫만에 음악에 맞추어 스탭을 밟어 보니 운동화바닥이 마루에 제대로 미끄러지지않는다. 우리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제법 많은 여행객들이 함께 분위기속에 동참하여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분위기가 점점고조 되고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내일의 여정을 위해 오래앉아 있지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라운지를 떠나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일 Skei 지역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토요일 아침을 맞았다. 밤새비가 내렸는데도 날씨는 흐려 있었다. 아침 9시경 호텔을 떠나 ’Fram-Myrdal’ 구간의 기차 관광을 위하여 Flam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1986년도 개통되었다는 빙하턴넬(Fjordland Tunnel)를15분간 통과 하고 어제 통과한 턴넬 수만큼이나 많은 턴넬을 더 지나야 했다.
한참을 햇빛이 가려진 어두컴컴한 골짜기와 Ternnel을 지나서야 햇볓 쏟아지는 산길로 들어 설 수 있었다.
그러나 햇빛 쏟아지는 계곡이지만 흰구름을 걷어 치우기에는 열기가 역부족한양 아직도 흰구름은 산허리를 휘감고 놓아 주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길이가 가장길다는 204Km나 되는 “송내 휘요르드”에서 아우랜드 휘요르드 (Aurlandsfjorden) 와 기차 정거장이 맞다은Flam으로 가기 위해 10분간 페리를 타고 이동했다.
이지역의 관광 개발은 정부 자원이 아니라 민간 기업이 개발했다고 한다.
*Flam Train Station 전경
관광 코스는 Flam Railway 정거장에서 Train을 타고 20.20Km의 거리에 있는 해발 866M의 정상의 Myrdal까지 환상의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점심을 인근 식당에서 마치고 안내가 나누어주는 티켇을 들고 Flam Train에 오르니 차는Myrdal계곡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은 산악으로 시계가 차단 되어 있었고 우측은 천애의 절벽의 오묘함으로 관광객의 감탄사를 절로 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와—“ 하는 환호성이 터진다.
모두들 오른쪽으로 몰리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오갈때 서로 자리를 바꾸어 앉으라는 안내의 말대로 질서와 예의를 지켜 가면서---.
Flam Train은Myrdal에 가기 중간지점에 이르자 함성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곧이어 기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Fram-Myrdal”중간 지점인 ‘퓨요포센 폭포(Kjosfossen Waterfall)’란 곳이 었다.
‘퓨요포센 폭포(Kjosfossen Waterfall)’
아마도 이지점이 이번 기차여행의 하이라잇트가 되는것 같았다.
이폭포는 오른쪽이 아니라 기차 왼쪽에 있었다. 빙하에서 녹아 내린 물이 모여 떨어 지는 마치 하늘 모퉁이에서 일거에 내려 오듯 산 정상에서 쏟아 지고 있었다. 폭포 옆 돌벽에 부착되어 있는 “높이 93m, 넓이 305 Feet”라는 폭포에 제원에 대한 간판을 볼 사이도 없이 모두들 폭포의 웅장하고 경이적인 자연 경관에 빠져 들어 간다.
근 100m산위에서 폭포가 수직으로 떨어져 계곡아래 넓은 바위에 부디친 거센 물줄기가 분산되어 눈보라를 이르키며 퍼져 산 아래 일대를 덮어 버리는 모양은 관광객들을 매료 하기에 충분했다.
카나다 나이아가라의 거대한 폭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빙하가 녹아 내려 쏟아 지는 이폭포는 또다른 거대한 폭포로 필자 앞에 다가 왔다.
모두들 기차가 멈춘 짧은 시간에 기념 사진을 찍기위해 폭포 앞에서 복닥거리고 있었다.
좀 기다리니 모두들 기차에 오른다. 모두들 기차에 오르는 시간을 기다려 필자도 재빨리 몇칻드 하고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우리는 이렇게 경이적인 Flam Train관광을 마치고 이제 육로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노르웨의 제2의 수도라 일컷는 베르겐(Bergen)으로 이동하게 된다.
베르겐으로 가는 도중 우리는 보스(Voss)를 통과하면서 안내는 이 나라에 대해 설명을 계속했다.
“Voss”라는 회사의 생수가 이지역에서 생산된다는 것과 이나라 사람들의 근무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3까지 주 평균 37시간 일을 하며 오후 3시 이후에는 모는 전화가 자동으로 앤서링 시스템으로 넘어 간다고 했다. 50대 여성이 가장많이 일하는 편이며 실업율은 3%이며, 취업율은 40%가 공개 채용, 60%가 인맥에 의해 채용하는 방식을 택한다는데 그래서 그러한지 근무지에 스파이가 많아 말조심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휴가는 5주이며, 구조조정이 있게되면 신입사원 부터 정리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혼하면 양육비는 1/2씩 부담한다고 한다.
이렇게 안내로 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버스는 Bergen지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도시는 깨끗한 인상을 주었으며 우리가 도착한 “Quality Hotel”에서 여정을 풀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덕분에 이날 저녁 산책은 할수 없었다.
이 도시는 1070년도에 형성된 도시로 이지역 사람들은 타지역에 비해 유난히 자존심이 높은 편이란다. 인구는 22만, 지금은 오슬로가 노르웨이 수도 지만 12-13세기 까지 노르웨이의 수도는 Bergen이었다.
노르웨이 베르겐, 작곡가 그래그(Graieg)(Graieg) 박물관
7월 3일 일요일, 아침에 기상하니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비가 계속하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일행들이 방을 하나 빌려 경건의 예배를 보기로 했다.
박찬규 장로님의 사회로 이석구장로님의 기도와 뉴욕에서 오셨다는 이규성 장로님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렸다. 일행중 천주교인들은 다른방에서 별도 예배를 시간을 갖었다.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예배 방식이 다르니 어쩔수 없다지만 어딘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배를 마치고 호텔을 나와 보니 대형버스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트레일러를 부착한 버스가 호텔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오늘 노르웨이 여행을 끝으로 덴마크로 떠나야 하기때문에 짐을 실고 다닐 컨테이너가 필요 했던 것 같다.
버스에 승차가 완료되자 이지역에서 탄생하여 활동한 이지역의 유명한 작곡가 “그래그(Graieg)(Graieg)(Graiegs) 박물관”을 찾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원래 음악엔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래그(Graieg)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이번 그의 기념관격인 박물관 방문을 통하여 작곡가 그래그(Graieg)를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베르겐, 작곡가 그래그(Graieg)의 생가(박물관)
“그래그(Graieg)(Graieg)의 박물관”은 1865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작곡가 그래그(Graieg)(Graieg)가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는 곳이다.
박물관이라기보다 그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기념관 이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른다.
푸른 바다를끼고 푸른 초목이 우거진 조용한 초원에 넓게 자리잡고 있는 별장같은 집이었다.
그는 영국이민 3세로 아버지가 사업가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하며 키는 작은편이고 4살 연상인 사촌 누이와 근친 결혼하여 부모로 부터 극열한 결혼 반대에 부디치기도 했다한다.
그는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음악적 소질을 이어 받았는지 16세때 바이오린 연주를 했으며, 독일 유학으로 작곡가가된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우리귀에 익은 “솔베지의 노래 와 피아노 협주곡”등 다수가 있다. 박물관은 크게 그의 생가 연주회관, 절벽에 만들어놓은 그와 그의부인의 묘소 그리고 그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던 선착가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생가 입구에 도착하니 아무 안내 시설도 없이 입구 길위에 묘령의 여인이 우산을 바치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그(Graieg),
생가 입구 안내원
분명 입장 객을 통제 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입장표를 구해서 들어 가는 동안 얼굴 한번 들지 않고 책만 읽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고 나니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그래그(Graieg) 생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 서니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그(Graieg), 연주회관 입구 및 동상
두번째 방에는 식탁이 비치된 방으로 식당으로 사용했던 방이다. 벽면에는 아이들이 자유스럽게 뛰 노는 제법큰 그림이 부착 되어 있었는데 그래그(Graieg)는 생존에 아들 1명 두었는데 그아이가 1살때 사망하게 되고 그이후로 더 이상 자식을 갖지못하게 되어 그를 안타깝게 생각한 지인이 어린 아이들의 노는 그림을 선물로 주어 이곳에 부쳐 놓고 마음을 위로 했다고 한다.
자식을 더갖지 못함은 아마도 근친결혼이 빚은 결과라고 세인들은 말하고 있단다. 그곳엔 여러가지 식기가 있었는데 선박 모양의 Beer담는 그릇, 간식을 놓아 둘수 있는 층계있는 은색 트레이등 검소한 생활도구들이 었다. 세번째 방에는 거실로 꾸며진 방으로 1892년 그의 친구로 부터 선물받았다는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고, 덴마크의 친구로 부터 선물 받았다는 대형 벽화도 걸려 있었다. 뜻은 잘 모르겠으나 꽤나 가치있는 그림 같이 보였다. 평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지만 사람 만나기를 싫어 하는 성격이라 부인이 면회를 조절했다 한다. 코너 벽에는 나이 보다 늙게 보이는 39세 당시와 89세때 모습의 부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방구석에서 서부 활극시대 선술집에서난 볼 수 있었던 통나무를 때는 통 난로를 보면서 생가를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하게 건축된 그래그(Graieg) 연주회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그(Graieg), 연주 회관 실내
* 그래그(Graieg)와 그의 부인의 묘지(절벽)
연주실 앞에는 그래그(Graieg)의 생전의 모습을 동으로 건립해 놓은 동상이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유난히 키가 작아 보였다.
연주실을 돌아보고 바다로 통하는 오솔길로 내려 가니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바위 계곡절벽에 만들어놓은 그의 무덤을 볼 수 있었다. 어쩌자고 바위 절벽을 뚫어 관을 안치 하라고 유언을 했는지 ? 아마도 바다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이기 때문일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래그(Graieg)의 개인 보트 선착장
그리고 그가 찾아 오는 사람중 만나기가 싫은 사람을 피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그래그(Graieg)의 개인 보트 선착장을 돌아보며 박물관을 떠났다.
베르겐, 어시장을 찾아서
작곡가 그래그(Graieg) 박물관에서 나와 베르겐에서 유명하다는 어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버스 창문으로 희색 빛갈의 베르겐의 시청사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오슬로 사람들이 그들의 시청사를 유난히 좋아하는 반면에, 이곳 베르겐(Bergen)사람들은 그들의 시청사를 싫어 한다고 한다. 이유는 이곳 시청사가 회색으로 주위환경과 조화 되지 않아서라는 안내의 설명이지만 진실은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오슬로의 시가지 건물들은 특수 상호가 부착된 고층건물을 제외하고 평균 3-4층 건물이 주를 이루는데 비하여 Bergen시가지는 6-7층의 비교적 높은 건물들이 시가지의 무게를 잡고 있는것 같았다.
얼마나 크고 잘 만들어 놓았기에 관광 코스로 어시장을 넣었을가 기대를 하며 어시장에 도착했다.
안내는 어시장을 돌아 보라며 우리에게 1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어시장의 규모는 바다 해안을 따라 한 불락이상의 크기로 조성되어있었으며, 이곳엔 이나라 각종 수산품이 진열대 마다 가득히 진열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았지만 비린내 나는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비가 내려 비린내가 좀 심해졌음에도 불구 하고 많은 관광객으로 시장안이 붐비고 있었다.
베르겐의 어시장
어시장의 바닥은 돌로 포장 되어 있었으며 한국 부산에서 보는 자갈치 시장에서 보던 거와 다를바 없었다.
특히 관광중인 여행객들이 구입할만한 적당한 어물은 없는 것 같았다. 30분간 돌아 보고나니 더이상 돌아 볼 것이 없어 버스로 돌아 오고 말았다.
왜 이런 곳을 관광 코스에 포함시켰을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입수한 정보를 기준으로 이곳의 건어물과 상어알등을 비롯하여 특별히 좋다는 품목을 찾아 보기 위해 구석 구석을 살피는 일부 일행들도 있었으나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한자동맹 거리를 찾아서.
어시장을 돌아보고난 후 우리는 한자동맹 거리로 이동했다.
“Hansa 거리 또는 한자 동맹거리”는 13-17세기경에 독일인들이 비자 없이 바다를 통해 이곳에 들어와 상권을 이루며 제법 활발하게 상거래를 하던 곳이란다. 지금은 세계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는 곳으로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비롯하여 생활 필수품까지 팔고 있는 상가로 존속 하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한자 동맹 상가
버스에서 내려 얼마쯤 걸어 내려 오니 좌측으로 보트들이 줄비하게 정착해 있는 바다가 맞다아 있는 거리 광장 건너편에 붉은 색갈의 3층 목재건물이 길게 연립으로 건축 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르켜 한자 동맹 이라고 했다. 이건물은 13-17세기 건축이후 3번에 걸친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재건축이 되었는데 재 건축시에 화재 발생우려가 있어 Heating 시설 허가가 나오지 않아 추운 겨울 추위와 싸워야 한단다. 다행히 해양성 기후로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지만---.
물건 값은 비싼편이며 화폐단위가 크로매로 US달라 단위와 헷갈려 꼭 바가지 쓰는 기분이라며 물건을 사고 나오면서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 한자동맹 빌딩 골목 쓰러져가는 기둥을 보조대로
상가가 금방이라도 쓸어 질것같이 기울고 있는 곳도 있었으나 역사적 유물이라 허물지 않고 보조 기둥에 의해 힘겹게 지탱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대형 사고 로 이어 질 것 같아 불안한 감마져 든다.
이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곳에는 화장실 사용이 문제인데 이곳엔 일반 상점의 화장실은 유료 화장실이나, 식당에서는 자유롭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며 안내는 가능한 그쪽을 이용하기를 권하고 있다.
전동차(Panoramamica)를 타고 전망대로
아침에 일찍 베르겐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전망대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날씨가 흐려 전망대의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기 위해 시 먼저 시내 관광을하고 오후에 이곳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전망대 주위엔 안개가 자욱하다. 안내가 티켓을 구하기를 기다려 우리는 전망대에 오르는 케이불 전동차에 올랐다.
앞좌석이 경관이 좋다니까 모두 앞쪽으로 몰려 들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전동차가 오르는 동안은 물론 정상에 올라서도 주위가 온통 안개에 쌓여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으니 앞뒤 좌석 모두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앞에 앉으려 앞에서 복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상위엔 고급 레스토랑이 있었다. 안개 때문에 한치밑을 내려다 볼 수 없어 식당 건물을 배경으로 몇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케이불 전동차로 내려와야 했다. 비록 안개 때문에 발아래 경치를 감상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날의 분위기는 노르웨이라는 외지에서 전동차라는 적은 공간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양 즐거울수 있었던 같았다.
우리는 전망대를 떠나 외국인으로 이지역에 최초 식당을 Open했다는 “양자 식당”이란 중국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내부 가옥 구조가 고풍이 물씬 풍기지만 식당 분위기는 별로 였다
저녁을 마지막으로 노르웨이와 작별하고 덴마크로 가는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 해야 한다.
다음은 덴마크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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