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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스페인 ,폴트칼, 모로코 편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모로코편 슬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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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투갈 편 슬라이드

스페인편 슬라이드


스페인, 폴투갈, 모로코 편(2007년 4/20-30일)


우리부부는 금년여행 코스를 모로코,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도시를 중심으로 리스본-세비야-카사 부랑카-탕혜르-그라나다-마드리드-발렌시야-바르셀로나를 택했다.

이번에는 필라 공항대신 뉴왁 공항에서 오후 8시 15분 출발 예정인 컨티낸털 항공기를 이용하기로 하여 일행이 한국 그로서리 고바우 주차장에 집결하여 함께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미국과 리스본과 시차는 5시간, 비행시간은 6시간임으로 다음아침 현지 시간으로 8시경에 목적지인 폴투갈의 수도 리스본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엔 비교적 연로한분들이 동참하고 있었지만, 평상시에 모두들 젊게 사시는 분들이어서 분위기는 젊은 구릅 못지않게 밝았다.

그중에서 우리 부부는 젊은 편이어서 이번 여행기간동안 연락과 심부름을 해야 할 것 같다.

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으로

2007년 4월 21일, 우리는 예정대로 현지시간으로 오전 8시가 약간 넘어 폴투칼의 리스본공항에 도착 했다. 5시간의 시차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인지 머리가 맑지 않다.

그곳에는 스페인여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Mr. J란 가이드 청년이 우리를 맞아 한다.
우리는 대기시킨  관광버스를 이용 호텔에 여장을 풀 사이도 없이 첫 번째 광광 코스로 벨엠탑을 향해 달렸다. 단체 여행은 이렇게 강행군을 피 할 수 없게 마련이다.

버스가 벨엠탑을 향하여 가는 도중 안내는 여행 중에 필요한 현지 스페인 말 몇 가지를 가르쳐 준다.

"Hellow- 올라, Good By- 아디오스, 남자-아미고, 여자-아미가, Thank's- 오부리가도(남자가 사용할 경우), 오부리가다(여자가 사용할 경우), 변소-아세오서"등 기초적인 인사법이다. 버스 기사는 매 4시간마다 45분간의 휴식을 갖게 되어 있다는 상식도---.

이곳은 “태양을 팔아 사는 나라”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부분 건조성 기후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비를 맞으면 축복이란 말도 함께---.

폴투갈의 의 벨엠탑을 찾아서

벨엠탑을 찾아 가는 도로변에는 로마 시가지에서 보았던 우산 모양의 소나무가 이곳에서도 분재 처럼 잘 가꾸어져 어느 부유층 정원에서 한껏 멋을 부리고 있을 법 한데 이렇게 넓은 거리 양편에 아름답게 줄지어 있었다.(사)

우리가 도착한 연안에 우뚝 서있는 ‘벨엠탑’은 16세기, 스페인을 능가하던 폴투갈의 전성시대를 통치하던 만뉴엘 1세가 바스코다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함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테주강의 물속에 잠기도록 건축되었으나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게 되어 이 탑이 물위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선박 통제를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이 탑은 198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으며, 한때 1층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하고, 2층은 병사들이 기거 하는 곳으로 3-4층은 황족의 별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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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엠탑

이 “벨엠탑의 특징은 변소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당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변을 받아 창문을 통해 바다로 버렸다는 것이다.

현대 상식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곳에서 30여분 동안 벨엠탑과 주의를 둘러보며 기념촬영을 마치고, 중국집에서 점심을 하며 휴식을 취한 뒤 이번에는 유럽 최서단 폴투칼 땅 끝 마을이라는 “
까보다로까”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우리를 실은 버스는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일행들은 시차로 피로한지 모두들 졸고 있었다.

유럽의 최서단 마을,
폴투갈의 땅 끝 마을 ⌜까보다로까(Cabo Da Roca)⌟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의 중심지나 남북의 끝 지점 등 미지의 세계를 밟아 본다는 것은 호기심 나는 일로 여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행자들이 아프리카의 희망봉,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 지점 그리고 남미의 아름다운 도시를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면, 탐험가는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 남극 그리고 북극지점을 밟아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럽의 최서단의 포르트갈의 땅 끝 마을이라는 “까보다로까”를 밟아 보기 위해 탐험가가 된 기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사)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에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유럽의 최 서단지점“이라고 폴투칼어로 쓰인 비석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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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최서단 이정표

이 나라에서 추앙받는 ‘까몽리스’라는 시인의 글이 새겨진 비석이었다.

값비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새겨놓은 비석이 아니라 보통의 돌비석이지만 유럽의 최 서쪽 끝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몰아치는 거센 바닷바람을 몸으로 막으며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외롭게 보였다.

필자는 육지에서 서쪽으로 최대한 가까이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지점 까지 접근했다.

절벽 아래로 거센 파도가 산처럼 몰려와 절벽에 부딪쳐 온몸을 산산이 부서트리며 하얗게 물보라를 만들고 흩어지는 광경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잠시 눈을 옆으로 돌리니 저만치 땅 끝 벼랑에 길 잃은 선원들에게 방향을 안내하는 등대가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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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최서단의 등대

이곳 안내 사무실에는 15유로(?)정도 내면 이곳 유럽의 최서단을 밟았다는 “방문 Certification”를 발급 하고 있어 한 장 받아 둘까 생각하다 사진만큼 더 확실한 게 없을 것 같아 최서단을 알리는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해변 바람이 마구 불어 대는 들판에는 여린 선인장처럼 보이는 해초가 덮여 있었고 부자 집 정원이나 예쁜 화분에서 자라야할 돋나 물 보다 굵고 도톰한 줄기를 하고 있는 모습의 이름 모를 해초 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아무렇게나 해변 주위에 번식하여 들판을 덮어 가고 있었다.

일행들은 “유럽의 최서단 땅 끝에 내가 먼저 왔노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앞을 다투며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필자 역시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나, 여기 유럽의 최서단을 밟았노라.”

라고 마음속으로 뇌 아리며 마치 탐험가 같은 기분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폴투갈, ⌜엔리께 항해 왕자⌟의 기념비 와 ⌜제로니 모스 수도원⌟찾아서.

우리는 “까보다로까”를 출발하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이라도 배를 저어 항해하려는 선원들의 선두에 서서 거센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항해 하려는 “엔리께 항해 왕자”의 역동적인 모습을 조각해 놓은 탑을 볼 수 있었다.

이름 하여 “엔리께 항해왕자의 탑”이라 한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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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리께 항해 왕자 역동적인 항해 모습

폴투갈은 BC 700년경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겔트 족”을 시작으로 8세기에 “무어인”들이 장기간 점령하면서 문화, 건축, 농업의 기술이 도입 되었으나 12세기 그들이 몰락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15세기경 “주앙 1세”의 아들 엔리케 항해 왕자의 영도 아래 신대륙의 발견과 정복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나, 16세기말엔 스페인에 의해 몰락하다가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거듭되는 내란과 불안정한 정국으로 쇠퇴하여, 1910년 결국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공화국으로 바뀐 나라이다.

그러나 그 후 이 나라는 1926년에 군사 쿠데타의 성공으로 “군사 독재정치”가 시작된다.

“살라자르”가 사망하자 마침내 1974년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1986년 EU에 가입하여, 1992년부터 유럽통화제도의 정식 회원국으로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 된 나라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폴투갈 정부당국은 1960년대에 서단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엔리께 항해 왕”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는 높이 53m나 되는 대형 함선 모양의 기념탑을 만들었다.

해적왕국의 본거지라는 오명을 씻고 해상 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그들의 모습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기념탑으로 손색없다는 느낌이다.

이곳 기념탑 앞 광장에는 모자이크로 대형 세계지도를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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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장의 모자이크된 항해 지도

이곳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확연히 나타 나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한반도의 부속 도서인 울릉도나 독도는 찾을 수 없었다.(사)

폴투갈의 ⌜제로니 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을 찾아서

우리는 “엔리케항해왕” 기념탑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제로니 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이란 곳으로 이동했다.

이수도원 역시 폴투갈의 미누엘 1세가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가 인도항로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건립한 수도원이라 한다.

이 자리는 해상 왕 엔리케 항해 왕자가 세운 교회 자리에 대형 수도원으로 재건축하여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이 사용하도록 한 곳이다.

우리가 방문한 수도원엔 당시 많은 관광객이 운집하고 있었다.

벽화와 천정의 장식이 엄숙한 분위기를 잡고 있었으며, 건물 내엔 좌우로 나누어져 관이 놓여 있었는데, 그 좌측에 놓인 관위로 성자 “제로니모스”의 잠들어 있는 모습이, 우측 관위엔 항해사 “바스코다가마”가 칼을 찬 형상으로 누워 있었다.

‘제로니모스’는 의사이자 이베리아 반도의 성자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이며, 사자의 발을 고쳐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뒤에는 항상 사자가 따라다녔다는 전설의 인물이었고,

‘바스코다가마’는 인도항로를 발견한 사람으로 “미누엘 1세”황제가 특별히 좋아했던 항해사였다.(사) 

우리는 이곳을 나와 “4.25”다리를 건넜다.

이 다리는 1974년 4월 25일 폴투갈이 혁명에 의해 ‘갈라자“라는 독재가 무너뜨리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 다리 이름을 “4,25다리”라고 개명했다는 유서 깊은 다리이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서 “루시오 광장”을 잠간 둘러보고, 버스 창문을 통하여 “공메르시오 광장”에 우뚝 선  ‘호세 1세’의 동상을 볼 수 있었는데, 그 호세 1세의 동상의 투구가 다른 동상에 비해 유난히 호화스럽게 장식된 것이 특징이라는 안내의 설명에 호기심이나 확인하려고 눈길을 돌렸으나 이미 그 동상은 나의 시야에서 살아져 가고 있어 확인 할 수 없었다.

폴투갈, ⌜벤니아 궁전(Pena National Palace)⌟을 찾아서

독일의 "노인스바인스타인 궁전"과 쌍둥이(?)

우리는 리스본의 중국집(북경집)에서 제한된 메뉴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벤니아 궁전”을 향해 달렸다. 궁전 근처까지 관광버스로 접근했으나 더 이상 일반 버스통행이 금지 되어 그곳부터 궁전 정문 바로 앞 까지 구간으로 정기 운행하는 작은 승합차로 바꿔 탄 후 다시 하차하여 안내를 따라 5-6분정도 도보로 언덕을 올라가자 절벽을 이용하여 만든 지상에서 높이 500m라는 “벤니아 궁전”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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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투갈,벤니아 궁전(독일의 노인 슈바인스타인 궁정과 닮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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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니아 궁전 2층발코니에서

이 궁전은 중세 독일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1869년부터 17년에 걸쳐 건축하여 그의 음악 가정교사인 “바그너” 궁전의 아름다음을 극찬했다는 “노인슈바인스타인 궁전”과 거의 닮은 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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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니아궁전 건너편 산등성에 건립된 ? 장군동상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벤니아 궁전을 지은 “페로난도 2세”는 노인스바인스타인 궁전을 지은 독일의 “루트비히 2세”와 4촌간으로서 그는 건축가에게 지시하기를 “노인슈바인스타인 궁전'을 그대로 카피 하되 그보다 더 아름답게 건축 하라고 명령 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독일의 노인슈바인스타인과 닮게 설계된 것으로 그 궁전보다 규모가 크다고 느꼈으나 좀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관리 면에서 뒤져 있는 것 같았다.

군주 시대의 군왕의 궁전이 이렇게 절묘하게 아름다울수록 무고한 백성들이 흘린 피와 희생의 대가가 컷을 것이라 생각 할 때 군왕의 잔인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문득 일제 강점기에 강제 노역에 희생되었던 우리 민족 선열들의 희생이 생각이 스쳐 갔다.

오늘날 이 나라는 이러한 선배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림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등 그들의 희생이 다소나마 보답(?)되고 있다고 생각 되었으나, 일제 때 우리선배들의 희생은 그 무엇으로 보답되어야 하는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도착해서 입장권을 구입 하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Mr. 정은 스페인 말에 능숙하고 여행 가이드로서 관록이 있어서 그러한지 여느 관광 구릅보다 항상 우선하여 입장 시켰다.

궁전을 돌아보고 오후 4시경 산간지역구간을 운행 하는 구간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아슬아슬한 길을 다시 내려왔다.

 

폴투갈, ⌜에드워드 7세 (Parque Eduard VII)⌟ 정원

우리는 “벤니아 궁전”을 나와 서둘러 도착한 곳은 “영국 에드워드 7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에드워드 7세 공원”을 찾았다.(사)

그 공원은 센노라(Senhora do Monete)라는 언덕에 시가지 중앙과 테주강(Tagus River)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을 이용하여 허리에 닿을 높이의 정원수를 잘 손질하여 아름다운 미로의 광장(most beautiful avenue)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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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에드워드7세 정원
 

우리가 공원에 도착 했을 때는 한국에서 왔다는 동포 여행 구릅이 그 공원을 둘러보고 막 떠나려하고 있었다. 이역 땅에서 동족을 만나면 언제나 반가웠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정겨운 인사들을 주고받았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그쪽도요----”

정원에서 정원수로 만들어 놓은 미로를 따라 한가로이 거닐고 싶었으나 모두들 피로한지 호텔로 돌아가자며 재촉하는 바람에 외각에서 훑어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6시 30분경, 하루 밤을 보내기 위해 Praia Del, Mar라는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스페인의 ⌜세비야⌟를 향하여

4월 22일 “폴투갈 리스본”에서 맞이한 아침은 날씨가 청명했다.

어제 하루 강행군을 마치고 오늘은 “스페인의 세비야”로 6시간 이동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의 안전 여행일정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시작으로 여행 2일째 일정에 돌입 했다. 일행들이 거의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출발 전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교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행은 새로운 곳에 대한 도전이란 호기심도 있지만,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샘 돋는 따뜻한 인간미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도 하거니와 일행은 물론 각자 부부간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어 좋다.

어떤 의미에선 바쁘게 돌아치며 관광한 명승지보다, 함께 여행한 동료들과 보낸 시간들이 뇌리에 오래 남아 기억되는 법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격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전제 하며,

한마디씩 던지는 족크는 엔돌핀을 분출케 하여 피로를 풀기에 족했다.

세계에서 관광 수입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과 스페인이며, 유네스코 문화 유물은 이태리가 36개 인데 반하여 정열과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문화유물은 37개나 된다는 것도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날 우리는 세계 3대 성당의 하나라는 “세비야 대성당”을 거쳐 “황금의 탑-마리아 루이사공원”을 관광하기로 되었다.

세비야로 가는 길은 8번 East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6시간 달려야 했다.

버스 창 좌우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란 목초의 들판, 밀밭, 목화밭, 상수리나무, 콜크나무 그리고 오렌지 밭으로 연결되어있는 초원지대를 달리고 있고 있었다.

그날따라 작은 언덕 마다 여유롭게 돌고 있는 풍차의 모습마저 정겹게 느껴진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 푸른 초원은 5월 이후가 되면 들판이 건조되어 황금물결로 변해 또 다른 장관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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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의 목장

우리는 6시간 이동하는 동안 각자의 소개를 하기로 하고 그래도 남는 시간을 신대륙 발견에 일생을 건 탐험가 “콜럼버스”란 영화를 감상했다.

콜럼버스가 신천지의 꿈을 키우던 현지에서 그의 일생에 대해 감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었다.

1492년 1월 24일 이사벨여왕은 그라나다를 탈환하고 이슬람을 몰락시킨다.

그녀는 계속해서 “가스티나, 레온, 아라곤, 나비라” 등 4개의 왕조를 하나로 통일 시키고 카돌릭을 국교로 선포하고, 이슬람 교인들에게 카돌릭교로 개종하는 사람만이 스페인에 남아서 살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스페인을 떠나라는 명을 내리는 오만을 부린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많은 부를 축척했던 자들이 개종대신 스페인을 떠나게 되자 경제적인 궁핍을 초래 했고, 경제 재건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이사벨 여왕 앞에 당시 39세인 이태리출신의 젊은 탐험가 “콜럼버스”가 나타나 주청을 드린다.

“스페인의 국토를 넓히고 많은 향료와 금은보화를 찾아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신대륙을 발견”해야 하니 출항을 허락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40세인 리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끌려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청을 받아 드린다.

이렇게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의 지시를 받고 인도양의 새로운 항로를 통하여 황금의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하여 출발했던 곳이다.

당시 콜럼버스는 포투갈 해상지역을 통과 하려 했으나 폴투갈의 방해로 서쪽으로 향로를 바꾸게 된다. 그는 지구는 둥근 것이니 어느 쪽으로 항해하든 인도를 발견하게 된다는 신념과 인도대륙에는 황금과 향료가 넘쳐흐른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에 싣고 떠난 음식과 음료가 바닥이 나고 거센 풍파를 헤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선원들의 대륙발견의 확신이 없어지고 절망과 위기가 찾아오고 있는 순간에 눈앞에 아득히 대륙이 나타나 모든 선원들을 흥분 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고생 끝에 발견한 대륙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이곳을 인도로 착각한 그는 이곳의 원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환심을 산후에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증원된 인원이 필요함을 느끼고 다시 찾아 올 것을 약속하며 잔류병 39명을 남겨 놓고 몇 가지의 금 부치를 모아서 귀국하여 이사벨 여왕에게 병력 증원을 다시 주청한다.

약속한 금은보화를 갖고 오지 못한 콜럼버스를 조정 대신들은 반길 리 없었다.

반대가 더욱 심했음에도 여왕은 8,000명의 군사들을 내어 주고 이태리 서민 출신인 그를 제독이란 파격적인 신분으로 격상시켜 신대륙발견에 전력 하라고 격려 한다.

이렇게 제독이 된 “콜럼버스”는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아메리카에 다시 상륙했으나 남겨 둔 잔류병들은 뜻밖에도 인근 “구호니”라는 원주민들에게 모두 학살당한 후였다.

자체 방어라는 상황에서 원주민들과 마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가능한 원주민을 회유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원주민을 힘의 원리로 평정 하려는 귀족출신들의 중간 관리들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함으로서 분위기는 점점 험해 진다.

결국 귀족출신이란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중간 관리들이 서민 출신인 제독을 얕잡아 봄으로서 마찰이 생기고 급기야는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모반이 일어나게 되자 콜럼버스 제독은 주모자인 귀족을 처형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그는 모함을 받게 되어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결국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파면과 투옥되기에 이른다. 그 후 이사벨 여왕의 특별사면을 받고, 그는 마드리드 북쪽 “바이아도리”라는 곳에서 1506년 사망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아메리카 신대륙도 이미 “Amerigo Vespucci"라는 최초 발견자가 있다는 조정의 발표로 그의 공로는 무위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그가 신대륙을 발견할시 10%의 커미션을 받기로 한 리사벨 여왕과의 계약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탐험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후세에 아버지의 억울함과 명예를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게 콜럼버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스페인 광장과 박물관을 지나12시 방향으로 세비야 법대를 지나 계속해서 “십자군 전쟁의 원조”라는 “엘시드 장군” 동상, 담배 공장과 황금의 탑을 지나서 오후 3시경 “세비야 중심지”로 접어들었다.


세비야, “대성당”을 찾아서

세비야에 도착한 우리는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세비아 대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성당”과 함께 제 3대 성당의 하나로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건물에 들어서니 안은 웅장하게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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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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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옥상

“세비아 성당”을 건축한 건축가가 신체적으로 다리에 문제가 있어 공사감독을 위해 말을 타고 올라 다닐 수 있도록 34개 층(?)을 연결하는 달팽이 식 경사면을 만들어 맨 위 층 까지 통로를 만들었는데 한참을 걸어서 오르다 보니 현재의 위치를 잃을 때가 있는데 매 층마다 번호를 붙여  도움이 되었다.

이 성당은 원래 이슬람교성당을 카돌릭식으로 바꾸어 놓은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성당 안 모퉁이에서 “레온(Leon), 가스티아(Castile), 나바라(Navarra), 아라곤(Aragona)”등 4개의 왕조로 상징되는 왕관을 쓴 왕들이 콜럼버스의 관을 바치고 있는 조형물을 볼 수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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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 왕조가 콩럼버스관을 떠밭이고 있는 장면

이조형물은 4개 왕조가 일개의 탐험가 콜럼버스의 관을 떠 바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현상이라 생각 되었지만 이것은 당시 왕조들까지 콜럼버스를 추앙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 된다.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죄인으로 추방당했던 콜럼버스였지만, 후에 그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업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재조명하여 후에 올바른 평가를 받게 한 결과이다.

아버지 콜럼버스를 역사의 그늘에서 밝은 조명을 받게 한 그의 아들역시 같은 성당 안에 아버지 콜럼버스의 관과 멀지 않은 대리석 바닥위에 영면 하고 있었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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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내에 콜럼버스 아들의 묘

이곳을 나와 저녁 식사를 위해 현지 식당으로 가니 돼지 뒷다리를 절여 만든 스페인의 전통요리라는 “하몬”이 곁들여 나왔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요리라지만 짠맛이 지나쳐 우리 입에는 맞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스페인의 전통문화로 유명한 “투우”를 감상하기로 했다.

스페인의 민속 전통 “투우(Plaza de Tors)” ?

스페인은 정열의 나라 또는 투우의 나라로도 불리운다.

18세기 초까지 만해도 마드리드의 투우는 주로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 열렸다는데 1929년 이후부터 22,300명 이상 관람객들이 몰려들기 시작 하자 이를 소화할 대 규모의 투우장이 필요하다하여 ”라스벤따스라”는 투우장이 건립 하였는데 스페인의 유명 투우사들은 누구나 이곳에서 사나운 황소와 생사를 건 결전을 선망하고 있다 한다.

원래 투우관람은 여행 스케줄에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투우의 고장에 들렸다가 투우를 감상하지 못해서야 말이 되느냐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어서 안내에게 주선해 보라고 부탁하니 몇 군데 전화를 걸더니 당일 저녁 옵션으로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입장권이 매진된 상태라 암표를 구입하려면 웃돈이 필요하다 했다.

투우는 3월-10월 까지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있으며, 매년 5월에 20여일씩 열리는 마드리드 수호성인 “이시드로”(San Isidro:5/15)라는 축제를 위해 투우 행사가 있는데 이 시기엔 스페인의 최고 투우사들의 기량을 볼 수 있는 시기라 우리로서는 다행이라는 것이다.

소를 찔러 죽이는 잔인성 때문에 투우 관람 여부에 대해 일행 중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으나 평생 한번 현지에서 투우를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기회라 주장하는 측에 설득당해 모두들 투우장으로 향했다.

암표를 구했다는 안내를 따라 경기장에 들어서니 정장을 한 스페인들과 여행객들로 장내가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유감스럽게도 ”라스벤따스라”가 아니라 “세비야의 투우장”이다. 그러나 이곳의 투우장도 마드리드의 메인 투우장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크기와 규모라고 했다. 암표라 그러한지 우리일행은 경기장 안에서 여기 저기 흩어져 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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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들은 투우장에 올 때는 정장을 원칙으로 하고 관람 도중 투우사들의 묘기가 있을 때 마다 예의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투우장 예의를 강조하는 그들이지만 앞뒤에서 피워대는 담배연기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아마도 담배연기로 인해 남에게 간접 피해를 주는 공중도덕에 대한 예의는 없는 것 같다.

투우장 관광객석에서 가운데 필자의 아내가 보인다.

예정시간이 닦아오자 방파 레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운동장 중간의 대형 문이 쪼개지듯 열리면서 뿔이 위로 날카롭게 뻗은 천년의 한을 품은 듯 성난 검은 황소가 누구라도 닥치는 대로 받아 치우려는 기세로 코를 벌름거리며 무섭게 달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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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경기장에 나와 있던 날씬 한 체격에 찬란한 복장의 2-3명의 보조 투우사가 소 앞으로 다가서며 소를 이리저리 유인하여 흥분 시킨다.

이들은 달려오는 소가 달려오면 경기장 주위에 설치해 놓은 벽을 방패삼아 칸막이 뒤로 몸을 숨기며 위기를 피하면서 소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5-6분이 지났을까 나팔소리가 다시 울리니 기마병이 나타난다.

말에 전신 갑주를 두르고 눈을 가린 두필의 기마병이 긴 창을 들고 흑기사처럼 성난 소를 행해 달린다. 소는 말에게 사정없이 달려들어 말의 배를 날카로운 뿔로 공격한다.

만약 말에게 눈을 가리지 않았다면 말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말 것이나 눈을 가려 놓은 덕분에 성난 소의 공격을 인식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눈을 가린 말은 얼떨결에 소에게 배를 받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고 기마병이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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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는 위험상황이 까지 발생했다.

다행히 말은 배와 허리가 방패용 특수 벨트로 감겨 있어 부상은 막을 수가 있었으나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칸막이 뒤에 대기 하고 있던 보조 투우사들은 재빨리 달려 나와 소를 다른 데로 유인하며 기마병을 구출한다.

말이 일어서자 기마병은 말을 성난 소를 향하게 하고 창을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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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의 임무는 소가 말에게 공격하는 때를 노치지 않고 창으로 소등의 급소를 찔러 피를 흐르게 하는 것이다.

가급적 많은 피가 흘러 소의 목과 등을 타고 흘러내려 피로 말의 목과 땅을 적시고, 이로 인해 소가 크게 광분하여 기진할 때 까지 공격해 오는 모습을 관중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소가 들이 받아 기마병이 탄 말을 쓰려 뜨렸다

잔인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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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6차례 소의 목을 향해 창을 찌른 다음 기마병은 퇴진하고 대신 양손에 1.5m정도의 오색찬란한 색깔로 감은 화살촉 같은 창을 든 3명의 공격수가 순서대로 성난 소 앞에 당당하게 다가선다. 공격 투우사를 발견한 소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온다.

아차, 하는 순간 소에게 받히면 살아남을 자 아무도 없다.

황소가 재빠르게 달려와 공격수를 받아 치려는 순간 공격 투우사는 소의 급소인 목과 어께부분 사이에 표창을 꽂아 넣고 옆으로 피한다.

다행인 것은 성난 소는 한번 설정한 목표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공격해 오기 때문에 방향만 약간 틀게 되면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각자의 공격수가 이렇게 2번에 걸친 공격을 마치고 퇴장한다.

그 창은 끝으로부터 6-7인치 부분을 Flexible하게 만들어 놓아 소의 등에 꽃이면 소가 날뛸 때 마다 덜렁거리며 소를 자극하게 되여 소는 더욱 광분하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3명의 공격 수에 의해 등에 박힌 6개의 창끝을 통하여 출혈은 점점 심해저 소는 점점 기진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이때 크라이 맥스를 알리는 팡파르가 다시 울려 퍼지자 찬란한 복장의 그날의 주인공인 메인 투우사가 3각으로 말아 올린 황금빛 모자를 벗어들고 도도하게 투우장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관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투우사를 환영한다.

사방으로 관중을 향해 돌아서서 여유 있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 그는 이젠 다시 그 모자를 투우장에 던져 버리며 붉은 만도를 들고 소를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모자를 경기장에 던져 버리는 것은 소와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 이기지 않고는 그 모자를 찾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 된다.

투우사가 관중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붉은 만도를 펼쳐 들고 소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까지 소는 그 투우사를 공격하지 않는 신사도(?)를 발휘 한다.

관중에게 인사를 마친 투우사는 침착하게 그러나 되도록 도도하고 멋있는 자세로 소에게  가까이 다가 갈수록 관중의 인기는 더 높아진다.

드디어 투우사와 성난 소는 지척의 거리에서 받고 피하는 결투가 벌어진다.

우직한 황소는 투우사를 바로 앞에 두고도 붉은 만또 만 받아치며 스스로 기진해감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소가 어느 정도 기력을 잃었다고 판단되면 투우사는 본부석에 다가가 지금까지 소를 유인하기 위해 사용하던 장식용 칼을 반납하고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공격용 칼을 받아 들고 다시 소 앞으로 다가간다.

일정거리를 두고 칼을 황소 앞으로 겨누며 소가 공격해 오기를 재촉한다.

소는 마지막 승부를 작심한 듯 모든 힘을 다하여 투우사를 향해 달려온다.

무섭게 달려오는 소를 향해 서있던 투우사는 달려오는 소의 급소인 등에서부터 심장을 향해 칼을 깊숙이 꽂아 넣는다.

소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가뿐 쉼을 몰아쉬며 피를 토하게 된다.

만약 소가 즉사하지 않고 고통 속에 몸부림 치고 있으면, 투우사는 날카로운 비수로 다시 소의 급소를 찔러 안락사 시킨다. 죽어 가는 소에 대한 마지막 배려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지혜와 소의 힘”의 대결은 “인간의 지혜”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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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는 광분의 도가니가 된다.

관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며 투우사에게 경의와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거칠게 날뛰던 소한마리가 쓰러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5-20여분 정도에 불과 하다.

*투우사에게 패한 소의 시체를 수거해가는 장면

심장이 약한 사람은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을 정도로 잔인하고 비참 한 광경이지만, 스페인의 투우는 18세기부터 현방식대로 민속 축제로 유래해오고 있으며 그 열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투우는 한번시작하면 6-7마리의 소가 이러한 방법으로 죽어 나가게 되는데 우리일행 중 여성들은 중간에 눈을 감고 있거나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 동물 애호가들이 이 행사를 묵과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서 잠간 투우사에 대해 몇 가지 추가 설명 해두고자 한다.

투우에 사용되는 황소는 검은 수놈으로서 투우사들이 목장에 가서 직접 고른단다.

원래 목장에서 자란 양순한 이 소는 투우장에 끌려와 캄캄한 독방에 24시간 가두어 Up set시킨 다는 것이다. 깜깜한 골방에 갇혀 있던 소를 밝은 투우장으로 몰아내면 그 소는 광분하여 공격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투우사는 유명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인으로서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 한다.

투우사는 때때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직업으로서 그 유명 도에 따라 대우와 보수가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다.

“꼬리다”라고 불리는 메인 투우사는 든든한 스폰서 지원 아래 한 마리의 소와 싸워 이기면 $50,000의 보수를 받게 되는데 한번 출현하면 두 마리의 소와 싸우는 것이 통예인데 $100,000정도의 보수를 받아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비야도”라 불리 우는 무명의 보조 투우사는 자기 개인 돈으로 소를 구입해 와야 할 정도의 비참한 대우를 받을 뿐 아니라 보수도 형편없단다.

투우장에서 투우사의 인기도 판정 기준은 기립 관중들이 흰 손수건을 얼마나 많이 흔드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투우도중 소의 발목이나 무릎 등 기능에 문제가 있어 투우사와 정정당당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투우사는 본부석에 신호를 보내게 되고, 본부석에서는 투우중지의 나팔을 불어 목에 방울을 단 10여 마리의 얼룩소들을 입장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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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한 소를 일반 소를 몰아 넣어 함께 퇴장 시키는 장면

얼룩소가 떼 지여 들어오게 되면 방금 전까지 날뛰던 소도 마치 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때와 같은 양순 한 소로 돌변하여 얼룩소떼들과 어울리다 그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이소는 다음번에 다른 투우사가 다시 Pick Up하는 실수를 막기 위하여 바로 도살장으로 가게 되지만, 투우장에서 경기 끝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 소는 치료 후에 목장으로 돌려보내 씨받이로 사용된다. “투우는 호기심에 한번정도 볼 것이지 두 번 다시 볼 것은 아닌 것 같다.”

라고, 한마디 씩 하면서 호텔에 들어온 것은 밤 11시가 가까워서였다.

아프리카 “모로코”로 --.

4월 23일 아침 날씨는 쾌청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아프리카 모로코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아침은 도시락으로 대치한다고 했다. 기상과 동시에 서둘러 호텔 Check Out의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집을 싣고 버스에 올라 스페인의 남단 “타리파”라는 항구 도시의 부두가로 1시간 정도 이동했다.

부둣가에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까지 유람선에 함께 싣고 “지브랄 타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북부 항구 도시인 “탕혜르”에 도착 하는 것이다.

중학교 지리시간에 지중해의 “지부랄” 타 해협의 명칭이 하도 이상하여 깔깔거리던 그 해협을 지금 파도를 헤치며 건너고 있는 것이다.

지부랄 타 해협을 건너는 유람선이 이렇게 비어서야 영업이 되겠나 싶을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호텔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즐겼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도시락을 들고 난후 여기 저기 앉아 졸고 있는 일행들이 눈에 띤다.

그러나 7순이 훨씬 넘은 L 박사는 지칠 줄 모르고 사진을 찍어 댄다.

언제 보아도 그분은 열정이 넘쳐흐른다.

45분정도 항해 끝에 우리는 드디어 아프리카 “탕혜르” 라는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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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쪽 모로코 국경지대

현지인 “압둘” 이란 키 큰 안내가 나와서 “안-녕-하십네까?"

서툰 발음으로 한국말 인사를 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제부터 모로코를 떠날 때 까지 “압둘”이 우리를 안내 한다는 것이다.

말이 안내지 그는 우리들의 여권을 모두 걷어 한 번에 입국 수속의 편의를 제외 하고는 관광지 설명은 한국안내인이 모두하고 그는 우리를 그대로 쫒아 다니는 데 불과 했다.

현지 면허가 없는 사람은 관광안내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현지가이드를 고용해야 한다.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구시구시”라는 현지 음식으로 점심을 했다.

이 음식은 닭고기, 가지, 오이, 당근, 무우 등과 세로미나(밀종류)라는 자료를 함께 섞어 쪄서 만든 음식으로 현지인들은 수저 없이 오른손으로 집어 먹는다.

우리는 손으로 먹는 것이 익숙지 않아 수저를 사용하였지만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배에 싣고 온 버스에 승차하여 3시간 정도 달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모로코왕국의 수도: 인구 약 146만의 행정도시)를 거쳐서 “카사 불랑카”로 이동하여 하루를 쉬고, 다음날 아침에 8세기 고대 도시 메디나, 모로코 왕궁, 가죽염색 공장 등을 관광한 후 모하메트 5세의 묘와 하산 모스크를 관람하고 “탕혜르”로 다시 돌아가 하루를 묵은 다음 아침 지부랄 타 해협을 건너 남부 지중해의 휴양지 “말라가”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결국 2박을 아프리카 땅에서 보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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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 도착하자 스페인 현지 시간에서 다시 2시간을 뒤로 돌려야 했다.

모로코는 아직까지 전재군주국으로 국왕이 통치하는 나라로 면적이 74만 Km2(한반도의 약 3배반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지만, 왕족을 제외한 국민의 GNP는 $1,700로, 실업률은 60%이상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아프리카, 페스의 “라바트 궁전”을 찾아서

탕혜루를 출발하여 라바트로 이동하여 “라바트 궁전”을 찾았다.

모하메트 5세 왕릉 이라는 곳을 지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현제 궁왕이 거주 한다는 궁전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입구는 사각형으로 손질된 정원수가 양쪽으로 줄지어 있고 파라다이스를 의미한다는 초록색의 지붕위에 알라와 무술림을 상징하는 등근 형태의 뾰족 모형을 한 거대한 건물들이 보였는데 이곳이 현제 국왕이 기거하며 국정을 살피는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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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정복을 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넓은 정원으로 가꾸어 져 있었으나 정원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왕궁 안이 궁금하였으나 들어갈 수 없어 정원에서 자유롭게 기념사진을 찍고 궁전을 떠나야 했다.


모로코의 “모하메트 왕능(Mohamed V Mausoleum)”을 찾아서

우리는 이곳을 나와 방금 지나쳤던 “모하메트 5세”가 안치 되어 있다는 왕릉으로 돌아 왔다. 모로코에서 일반인의 장례방식은 공동묘지에 남자는 1m, 여자는 1.2m 깊이로 묻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왕족의 시체가 안치 된 곳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755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복구 하였으나 아직도 그 주위엔 기둥만 남아 역사 유물로 가치를 발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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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람의 시조 모하메트 모덤 관


관이 안치되어 있는 건물입구는 의장 복을 한 근위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이 근위병은 하얀 유니폼을 입고 로봇처럼 서있었으나 관광객들이 접근하여 기념사진촬영을 찍자면 포즈를 취해 준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모자이크로 장식된 실내는 중심부에 한층 아래로 대리석 벽으로 각을 지어 움푹 아래로 파여 있었고, 그 중앙에 큼직한 관이 안장 되어있는데 그것이 “모하메트 5세”의 관이고, 한 계단 위 좌측엔 “하산 2세”가 우측엔 “모하메트 5세의 동생”의 관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관 옆에는 그 분들의 영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코란을 읽으며 관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모로코의 “카사불랑카”에서 하루 밤을

“카사불랑카”는 15세기 폴투갈 인이 붙인 이름으로 “하얀집”이란 뜻이라 한다.

이 도시는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90Km떨어진 곳으로, 20세기에 서구풍이 들어와 고층건물이 많고 거리에는 사람과 차량으로 붐비기도 한다.

이곳을 들어오기 위해서는 모하메트 5세 공항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공항은 서부 아프리카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유럽과 남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거점이기도 하다.

이곳은 현재 모로코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가 되고 있는 도시로서,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낭만이 넘치는 도시로 인식하고 있어 여행객들이 한번쯤 들리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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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 비안카 입구

또한 이 도시는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릿트버그만”이 출현 하는 “카사불랑카”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도시로 이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여서 기대가 컸는데 거리엔 매연과 혼잡한 교통질서가 한순간에 필자의 기대를 깨고 말았다.

이곳은 아픈 추억이 서린 도시이기도 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부유한 유럽인들은 리스본과 카사블랑카를 통해 아메리카라는 신세계를 꿈꾸는 많은 인파가 이곳에 모이기 시작 한다. 그러나 당시 제한된 항공편이나 배편을 이용하여 이곳을 탈 출 할 수 있는 사람들 이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남아 살게 된 도시이기도 하다.

“카사불랑카” 영화를 잠시 회고 한다.

                (무대의 시작은 프랑스. 파리--.)

 “릭”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파리의 한 Restaurant에서 우연한 기회에 우수에 찬 한 여인을 만나 열애하게 된다.

당시 “릭”은 프랑스의 지하 운동가의 한사람으로 식당을 운영하며 지하운동을 돕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쏘련의 침공으로 신변이 위험을 느껴 파리를 탈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한다. 물론 “릭”과 열애 중이던 여인은 그를 따라 카사불랑카로 갈 것을 굳게 약속한다. 식당에서 릭을 도와주던 피아니스트인 “샘”도 릭을 따라 나선다.

그들이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 기차역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주 시계를 보며 초조히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릭”의 모습이 초조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나기로 한 그녀는 보이지 않고 동내아이 하나가 메모지를 전해주고 빗길로 사라진다. 메모지를 읽고 난 후 멍해진 모습으로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릭”을 옆에서 보고 있던 “샘”이 그녀는 오지 않는다며 강제로 끌듯이 릭을 그곳에서 탈 출 하게 한다.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 한 여인의 배신을 가슴속에 묻은 체 “릭”은 사업의 수완을 발휘하여 “카사불랑카”에서도 유명한 “Rick's Restaurant”을 운영하여 거부가 된다.

그 식당은 이곳을 떠나 아메리카로 가는 불법비자, 마약, 카지노, 조직범죄가 판을 치는 중요 무대가 되기도 했다. 그때 까지 릭은 그녀의 배신으로 인한 상처와 그녀를 잃은 빈자리가 너무 커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식당에 그녀가 귀 부인의 차림으로 남편과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은 쏘련의 간부를 살해한 사건에 연루되어 카사불랑카로 잠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쫒는 수사망은 이곳으로 까지 좁혀 지게 되어 그들의 신변에 위협이 가중 되게 된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남편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카사불랑카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가는 길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릭”의 도움이 필요 했다.

릭에게는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무통제의 비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민 끝에 그녀는 릭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릭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하다.

“릭”은 그녀에게 파리에서 약속을 깬 이유를 다그치자 그녀는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다.

그녀에게는 릭을 만나기 전에 이미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사이었다.

남편 역시 프랑스의 지하운동가로 그녀와 결혼하자마자 체포되어 연락이 두절되다가 사망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당시 전황으로 보아 사형당한 걸로 판단하고 그녀는 좌절과 실의 속에 방황하게 되는데 이때 그녀를 위로하고 보살핀 것은 “릭”이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릭과 탈출하기로 약속한 당일, 약속 장소로 막 출발 하려하는데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연인이 약속 장소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순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던 남편이 아내를 찾아왔으니,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녀는 고민 끝에 결국 남편을 택하면서 사랑하던 남자를 홀로 보내야 했다는 것이다.

일종에 이유 있는 배신(?)의 길을 택한 것이다.

“미안하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함께 떠날 수 없음을 용서해 달라”

라는 그녀의 글씨가 쏟아지는 쏘낙비에 젖어 메모지에 번져 나가고 있으나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는 “릭”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샘”이 그의 등을 밀며 떠나기를 재촉하던 프랑스의 기차역의 환상이 지나간다.

지금까지 배신으로 알고 증오에 불타 있던 “릭”은 어쩔 수 없는 여건에서 그녀가 남편을 택해야 했던 상황과 당시 그녀의 사랑이 진실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되자 그녀를 돕기로 결심 한다. 결국 그가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무통제 비자”를 이용하여 사랑하던 그녀와 남편을 탈출시키며 Happy Ending으로 끝나는 사랑과 조국애를 조화시킨 영화였다.

이러한 영화의 무대였던 “카사불랑카”에 직접 와 있다고 생각하니 모두들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오늘저녁 식사 후에 “릭의 식당”을 찾아 한잔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릭의 식당”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Hotel Ajiad 근처 Hotel Hita 내에 “Rick's Restaurant"가 있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얼마 전에 문을 닫아버려 그 근처 까지 갔으나 허탕 치고 말았다. 나온 김에 운동 삼아 시가지를 걸어 보았으나 이 역시 얼마 걷지 않아 자동차 매연에 목이 따가움을 느껴 중단해야 했다.

아프리카, 모로코의 “카사불랑카에서 커피한잔 & 물 두병” 값은 ?

모로코 말을 몰라 횡재(?) 한 사람--.?!

거리의 매연으로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K씨 부부와 함께 시가지를 걷는 것을 포기 하고, 길가 주점 앞에 간이 Table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벽을 등으로 놓여 있는 의자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한 테이불 만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우리들은 복잡하게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매연으로 오염된 공기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 받은 삶일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다.

웨이타가 와서 주문하라 한다.

스페인이나 모로코 말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메뉴를 들고도 눈뜬장님이었다.

영어로 주문을 하니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딱히 오더할음식이 생각나지 않아 위생상 믿을 수 있는 커피 한잔 그리고 생수 2병을 손짓으로 시켰다. 아무것도 먹고 싶진 않았지만 자리 값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우리는 물을 한잔씩 마시고 더 앉아 있으려도 공기가 탁하여 건강에 나쁠 것 같아 자리를 뜨기로 하고 함께 동석했던 김 사장이 10유로를 지불했다.

모로코 돈과 유로의 차이는 10:1 정도로 파악하고 이었는데 웨이터는 거스름돈으로 모로코 돈으로 7불(유로로 70센트?)을 가져 왔다.

화폐단위를 잘 모르는 우리는 제대로 거스름돈을 받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호텔에 들어가면 물이 더 필요하니 물 한 병을 더 사겠다고 Mrs. Kim이 한 손에 거스름돈을 한손에 빈 물병을 들고 카운터로 닦아가 물병을 보이면서 “이거 하나 더 달라”는 식으로 요구하자 이들은 당황하면서 우물우물 하다가 모로코 돈 12불을 더 내어 주더라는 것이다.

물이 더 필요하다는 뜻을 “물 두병 마셨는데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 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 이었다. Mrs. 김이 이를 받아 들고 자리에 돌아오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대로 자리를 뜰까 하다가 이왕 물을 한 병 더 사기로 했으니 한 번 더 수고 하겠다고 Mrs. Kim이 다시 빈 물병과 거스름돈을 들고 들어가서 “물병과 돈을 내밀며” 물 한 병 더 달라고 영어로 말 하자 이번에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직접 계산기를 두드리고 난후 모로코 돈으로 50불을 더 내 주더라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해 바가지를 씌우려다 두 번씩이나 항의 하는 것으로 알고, 이번에는 제대로 거슬러 준 셈이다. 대강 계산해보니 커피 1,5유로, 물 1.5유로씩이니 도합 4-5유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로코 돈으로 60불(6유로)을 거슬러 받았으니 40불(4유로)정도 Charge한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모로코 말을 못하는 덕분에 바가지요금을 면할 수 있었다며 한바탕 웃었다.

모로코, 유엔광장에 무더위에 긴 도포 짜락 복장을 하고 서성이는 저 사람들은--!?

       이름 하여 “아콰돌(물장사)”

4월 24일 아침, 이렇게 웃지 못 할 추억을 남긴 체 우리는 “카사불랑카”를 떠났다.

“유엔 광장”을 찾으니 우측에 비둘기가 많은 건물이 보였다.

2차 대전 당시 루스벨트 와 처칠이 회담을 가졌다는 건물이란다.

좌측으로 모하메트 5세 광장과 연이어 “알함브람 궁전”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지방법원”이 보였다. 유엔광장에는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색 바랜 붉은 도포자락의 긴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 곳 갈 쓰고, 큼직한 가죽 가방을 옆으로 둘러멘 후 앞가슴엔 종을 몇 개씩 단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한낮에는 꽤나 더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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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물장사(붉은 복장)

이들은 전통의상을 하고 있는 “아콰돌”(물장사)이라는 사람들이며, 관광객과 기념사진을 찍고 Tip을 받아 연명한다는 것이다.(사)

우리가 도착하니 이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자기들의 활동무대가 있어 남의 구역을 침범하면 이렇게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멋모르고 이들과 기념사진을 있는 대로 찍다간 바가지 Tip에 문제될 수도 있고, 사진을 같이 찍고 Tip 을 주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유의 하라는 안내의 설명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 좌측에 불란서 건축가가 구축했다는 제법 큰 성당을 지나자 “하산 2세 공원”에 도착 했다.

모로코, 하산 2세 공원의 “회교 사원”

이 지역은 원래 15-18세기에는 해적들의 본거지였으나 그 후 등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발전하기 시작 했다는 곳이다.

1992년 대서양의 한쪽을 매립하여 만들었다는 하산 2세 공원에는, 실내 2만 실외 광장 10만 도합 12만이상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회교 사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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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170m, 지하 30m의 규모로 8년간에 걸쳐 건축되었다는 이 회교사원의 입구는 말발급과 연꽃 모양을 가미 하여 만들어져 있었고, 광장중앙에서 주위를 살펴보니, 사원 한쪽으로 대서양의 드넓은 푸른 바다가 시원 하게 펼쳐 있었으며, 반대편 도로 가엔 열대의 낭만을 느끼게 하는 팜추리가 늘어서 있었으나 거리가 지저분하여 열대의 낭만을 느낄 수 없었다.

회교사원에서 도로를 넘어 작은 아파트 단지에 LG라는 상호가 붙은 에어컨이 부착된 것이 보였다. 여기 까지 한국의 상품이 미치고 있다고 생각 하니 친근감이 생긴다.

이곳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이번에는 “모로코의 마이아미 비치”로 향했다.

이곳의 마이아미비치와 미국 푸로리다의 마이아미 비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우리들은 “Miami Plage"란 간판이 달려 있는 해변 가의 간이상점에 앉아 어제 ”카사불랑카 거리 목로 집“에서 K씨가 거스름돈으로 받은 모로코 돈으로 커피 한잔씩을 쏘았다.

여기서 얼마나 항해 하면 미국 “푸로리다의 마이아미 비치”를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 본다.

모로코의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가죽공장”을 찾아서

우리는 카사블랑카를 출발하여 4시간을 달려 990개의 미로의 골목이 있다는 8세기 고대 도시 “페스(Fes=Fez)의 메디나”로 가보았다.

"페스"는 라바트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인구 93만, 모로코의 제 3대 도시라한다.

모로코 최초의 왕조를 세운 이드리스1세가 AD789년 페스강의 동쪽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뒤 이드리스 2세가 AD809년 페스강 서쪽에 도시를 건설한 후 “페스”를 모로코의 수도로 삼았으며, 왕조의 변천에 따라 “메린 왕조”시대에 가장 번창 했다 한다.

이곳 메디나에 있는 미로는 세계의 최대 미로로서 적이 침입 했을 때 추적이 불가능 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미로를 통과 하여 염색 공장을 가기 위해 현지 가이드가 앞장서고 우리는 낙오될세라 그 뒤를 열심이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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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팔을 벌리면 마주 닿을 정도의 좁은 길 양쪽에는 그곳 기념품인 토산품을 엉성하게 진열한 가게 들이 줄지어 있었다.

연로하신 분들은 그렇게 따라가기가 쉽진 않은지 힘들어 하면서도 한사람의 낙오 없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사람을 젊게 한다지만, 여행은 또한 젊어서 하라는 가보다. 골목길을 어느 정도 접어들자 말똥과 지린내 등이 섞인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어떤 가게주인은 쇠판을 두드리며 무엇인가 만들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니, 찍지 말라고 손을 좌우로 흔든다.

그렇게 고약했던 악취도 어느 정도 있으니 코에 배어 견딜만하다 했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난다. 가죽공장에서 풍겨오는 냄새란다.

곧 무너져 내려앉을 듯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 건물 위를 오르니 그곳에는 어림잡아 30여명이 비좁게 들어 설수 있는 작은 옥상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선 가깝게는 “가죽염색 공장”이, 멀리는 “페스 메디나” 도심지가 한눈에 내려보였다.

고약한 냄새나는 곳을 내려다보니 7-80여 개의 원형 염색 통 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염색물로 양 가죽을 염색 하고 있는 염색공들의 염색 장면들을 목격 할 수 있었다.

이곳의 양가죽 제품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상품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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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바지와 짧은 소매의 티-샷스를 걸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짧은 팬츠에 위통은 아예 노출해 버린 체 햇 볓 에 그을려 새까만 염색공들이 원형의 염색물 통속을 드나드는 것을 보며 피부병이 심각할거라 우려 했으나 염색 색소가 천연 재료라 피부병이 발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약한 냄새들은 어떻게 참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주제넘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곳 옥상에서 관광객 출입 시 얼마간의 입장료를 받기위해 서성이는 현지 젊은 남자들이 쳌커(장기와 같은) 놀이를 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시오?”인사도 건네며 농담을 걸어 왔다.

그중에 40대로 보이는 왜소하게 생긴 젊은이가 우리일행인 C장로에게 팔씨름까지 걸어 왔다.

그것도 내기를---.

언제나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여 풍부한 유모어 감각으로 분위를 잡아가고 있는 그분에게 친근감이 갔던 모양이다.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70이 넘은 C 장로가 이에 응하여 한판 겨룬다.

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응원의 박수 소리가 요란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게도 경노사상이 있는가 보다. 결과는 상상에 마낀다.

현지젊은이의 경로사상(?) 덕분으로 노익장을 과시한 C장로께 환호의 박수를 보내며 우리는 그곳을 떠나 “탕혜르”로 출발 했다.

탕혜르로 가는 도중 양고기 요리가 일품인 곳에서 한턱 쏘겠다는 안내의 약속이 있었으나 현지 국왕이 그 지역에 출두 중이라 접근로를 모두 차단하고 우회로로 통과 시키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경호상 국왕이 출두해 있는 지역은 이렇게 수시로 교통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곳 국민들의 답답한 삶의 체감 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하루에 5번씩 정기 예배를 드리고, 해가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 다는 모스람에 심취되어 있는 이들 “모로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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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농장이나 부두 가를 거점으로 연명하더라도 밀입국하여 “자유와 부의 꿈”을 꾸고 있는 이들 모로코의 젊은이들이다.

모순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지금 풀어야할 답은 무엇일까?

우리가 “라바트”를 경유하기 전에 “데페스 거리”를 지날 때는 현지 경찰의 불심 검문이 실시되고 있어 교통이 상당히 지체 될 것이라 걱정 했는데 다행히 15여 분 지체 후에 그곳을 벗어나 메인 국도로 들어 설 수 있었다.

도로 양편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들판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고, 군데군데 야생 선인장들이 아무렇게나 어울려 무더기로 번식하고 있는 것이 열대성 기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광활한 들과 연결되는 야산에는 오렌지 및 포도밭이 한없이 펼쳐지고 있는 그림 같은 풍경들이 볼만했다.

그리고 포도밭사이 오솔길로 무거운 짐과 등치 큰 뚱보 농부까지 등에 싣고 작열하는 태양이 내려 쪼이는 좁은 들길을 힘겹게 뒤뚱이며 걸어가는 작은 당나귀의 불쌍한 모습에서 뚱보 농부의 잔인성이 엿보였다.

계속해서 군데군데 야산에는 3-40에서 많게는 100여 마리 정도의 누런색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이에 서있는 목동들의 모습들도 보였다.

양들의 털이 흙먼지로 누렇게 변색된 것인지 지저분하게 보였다.

문득 동화책에서 나오는 “늑대와 목동(?)”이라는 우화가 떠올랐다.

양치는 목동들의 무료함이 이해가 갈 것 같다.

어느 날 양을 치는 목동이 무료한 김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늑대다!” 보이지도 않는 늑대가 나왔다고 소리친 것이다.

동내사람이 몰려 왔으나 거짓임이 들어나 그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진짜 늑대들이 나타난 상황이 발생했다.

“늑대다!” 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는 안 속는 다며 동내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아 낭패를 당하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이러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우리는 고속도로변에 있는 “과달기밀레” 라는 휴게실에 도착했다.

마침 휴게실 옆 정원엔 여행객들이 점심을 할 수 있도록 간이 Table이 준비되어 있어 우리 일행은 이곳에 둘러 앉아 현지동포가 준비했다는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할 수 있었다.

현지 동포가 손수 담갔다는 김치와 불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모로코, 아이들의 목숨을 건 스페인 밀입국 작전?

(버스 밑으로 기어드는 탕혜르 지역 아이들, 꿈에도 소원은, 유럽으로---.)

탕혜르는 인구 150만 정도가 살고 있으나 100만이 현지 영구 주민이고, 50만이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으로 밀입국하기위해 대기 하고 있는 유동인구라 했다.

이들은 고무보트로 지부랄 타 해협을 넘다가 파도에 묻혀 익사하기도 하고, 버스나 트럭 밑바닥에 매달려 스페인으로 밀입국을 시도 하다 차에 깔려 죽어가는 수가 부지기수 이지만 그들은 결코 꿈을 버리지 않고 밀입국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탕혜르 거리”엔 걸인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띠였다.

그리고 잡상인들이 여행객을 괴롭히는 편이다.

걸인이나 잡상인에게 관심을 표시하지 말라는 안내의 귀 뜸이 있었다.

작은 동정으로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다음일정을 진행하기 힘들 정도로 귀찮게 된다는 것이다.

화장실은 거의가 다 유료였고 화장실 옆에는 모스람 교인들이 기도드릴 수 있는 기도실이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기도실이라야 빈 공간 방에 모슬림 들이 꿇어 엎드릴 수 있도록 카펫 몇 조각 깔려 있을 뿐이었다. 모로코의 “모슬람 교인들은 언제고 죽으면 알라신에게로 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알라신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라파엘 천사”의 게시를 받아썼다는 “코란”을 중시하며, 하루에 5번씩 일손을 멈추고 의무적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니 못사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모로코의 건물은 겉모양이 헙수룩하지만 내부는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모하메트 5세가 즉위하고 난 후 고속도로를 놓고, 세대교체를 하는 등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남 모로코지역에서는 기름이 생산되고 있어 왕족의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부유를 누리고 있는데 반하여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재미있고 놀라운 일은 이들 왕족의 재산을 총괄하는 집사격인 인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나라의 오일 생산 Root는 알제리와 동일하다 했다.

그래서 알제리와 남 모르코는 oil의 취득 권을 놓고 빈번히 다투고 있다는 것이다.

밤 8시 20분이 되어서 우리는 “탕혜르”의 호텔에 들어 갈수 있었다.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지부랄 타 해협을 건너 스페인의 말라가, 코스타델 솔을 거치며 ‘그라나다’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9시가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유람선편으로 탕혜르를 떠나 지부랄탈 해협을 건너기로 되어있어 모두들 피곤하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며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은 K씨와 저녁식후 산책하기로 하고 호텔 입구를 나서 도로 쪽으로 가기위해 호텔 모퉁이를 벗어나 다음 부락 코너에 들어서니 7-8명의 10대 청소년들이 몰려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우리는 다른 방향의 호텔 모퉁이로 가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아이들이 5-6명이 몰려 있었다.

불량소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도로를 따라 산책하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전등불로 밝혀져 있는 호텔 앞을 반복하여 거닐기로 했다.

호텔입구 계양 대에는 태극기도 밤하늘에 가볍게 나부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싣고 온 버스도 고단한지 호텔 바로 옆에서 주차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 버스 앞엔 경비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한사람이 자리를 떠나고 나니 조용해 졌다. 호텔 코너를 되돌아 버스 주차장 앞을 지날 때였다.

경비병이 버스 밑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버스 밑에서 아이 하나가 후닥닥 뛰쳐나와 길 건너편으로 다람쥐처럼 달아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호텔주변을 맴돌던 아이들은 우리일행이 돌아갈 때 버스가 유람선에 실려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을 이용 기회를 노려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 그 밑에 매달려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렇게 차 밑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 하다 달리는 차에 떨어지거나, 움푹 파인 도로에서 땅과 부딪쳐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만 줄기차게 이 방법을 시도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며, 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 한 현실인가?

인간은 누구나 인종을 초월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살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권은 그들이 거역할 수 없는 태어난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의 운명 앞에 제한당하고 마는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의 시도”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삶의 선택권을 쟁취 하고자 그들 스스로의 운명에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국왕은 말단 민초들의 이러한 고충을 알기나 한 것인가 ?

일제 강점기시절 핍박과 억압 그리고 극심한 굶주림을 피해 간도로 만주로 그리고 시베리아로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아려 왔다.

필자가 비록 미국 땅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삶의 선택권을 자유로이 구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탕혜르”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의 “타리파”로

4월 25일, 아침 5시에 기상 알람이 울렸다.

이제 짧은 아프리카 일정을 마치고 “탕혜르”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서둘러 아침식사를 하고 6시경 지중해의 지부랄 탈 해협을 건너  현지시간 아침 8시에 스페인의 “타리파”에 다시 도착 했다.

도착하자마자 시간차 조정을 위해 2시간을 빠르게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빨리 지나는 느낌이었다. 지부랄 탈 해협은 18세기부터 영국 영토였으나, 한때 스페인과 영토 분쟁으로 현지 국민 투표에 부쳐졌으나 주민모두가 영국 영토로 남기를 원한 덕분에 면세 지역이란다.

우리는 1292년 건축 되었다는 “타리파 성곽”을 출발하여 산등성이에 매끈한 풍차가 줄지어 한가로이 돌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라나다”로 이동 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 부라 궁전” 과 “헤네랄 리페 정원”을 찾아서

우리는 그라나다로 가는 도중 지중해의 휴양지 “코스타 텔 솔”이란 휴양지를 지나면서도 아쉽게도 시간에 쫓겨 휴양지에 내려 보지도 못하고 지나쳐야 했다.

출입 시간에 제한을 받는 “알함 브라함 궁전”“헤네랄 리페 정원”을 보기 위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3차선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를 한참을 달리니 성모님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는 하얀 색깔로 단장한 “미하스라”라는 마을을 지나서 우측에 대서양을 끼고 피서객들의 휴양지로 보이는 방카루가 많이 운집해 있는 산등성으로 한가로이 케이블카가 지나고 있는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도로가에는 군데군데 지금이라도 달려들 듯한 “용맹스런 검은 대형의 황소 모형”이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날카롭게 위로 치솟은 뿔을 가진 검은 황소의 형상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오스본 술 제조 공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스페인의 전통 문화인 투우에서 유래 된 것이라 생각 된다.

“그라나다”는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 위치한 곳으로 711년경부터 스페인을 약 8세기 동안 다스렸던 이슬람 계통의 “나사리 왕국”의 최후의 거점 지이기도 하다.

관광도시로 수입이 높은 편이며 해안까지의 거리가 불과 50Km로 맑은 날 산정에 올라가면 아프리카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가 그라나다를 “명상의 도시”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곳은 “알함브라 궁전”이 유명하고, 이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다보이는 알바아신 지역 에서는 아직도 집시들의 정열의 “풀레밍고” 춤을 추고 있는 곳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계속해서 그라나다 시내 분수 앞을 지나서 1992년 세비야에서 엑스포가 열렸을 때 스페인에서 가장 빠른 “아베”라는 열차가 출발했던 “까야아토차”역 앞을 통과하여 현지식당에 도착했다. 여기서 해물 “빠이야”로 점심 식사를 하고난 후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했다.

이곳은 밤 9시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궁전을 거쳐 계속해서 “헤네랄리페 정원”까지 둘러보고 밤 10시 30분부터 공연한다는 “프레밍고”를 감상하는 강행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항상 여행 중에는 시간은 없고 가볼 데는 많게 마련이다.

“여행은 기회다, 지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알함브라 궁전”은  “헤네랄 리페(Generalife) 정원, 나자리에(Palacios Nazaries) 궁전, 그리고 알까사바(Alcazaba) 궁전”등 3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궁 앞 쪽으로는 미완성 궁인 “카롤로스 5세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롤로스 5세 궁전”은 16세기 1층을, 17세기에 2층을 증축한 이래 그가 사망하고 나자 3층은 미완성의 건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슬람교와 카돌릭 기법을 절충한 것으로 사자의 상과 독수리상의 큼직한 손잡이가 특이했고, “카롤로스 5세”가 결혼 후 첫 날밤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천장에는 이들 황제부부의 방을 의미하는 “카롤로스 5세”의 이름과 이사벨여왕의 이름을 딴 “K & Y"라는 사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4세기에 지어졌다는 “나자리에 궁전”은, 입구서부터 차례로 “신화의 방”(이사벨 여왕이 이스람을 정복한 이후부터 사용하지 않았다함), 다음에 “왕의 방”이 있었다.

이방은 이스람과 캐톨릭 기법을 좌우 대층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어 분수가 졸졸 흐르도록 중앙에 “분수와 물길”이 있었고, 이슬람 정복당시 항복 표시(권력 이양)로 받았다는“황금 열쇄”를 전시해 놓은 것이 보였으며, 6가지의 다른 색깔의 고급 타일을 붙여 만들어 져 있는 널찍한 공간으로 보아 “연회장”의 흔적이라 생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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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각국 대사들이 머무는 “대사의방”이  있었고, 기둥사이에는 웬만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납을 사용하여 완충 역할을 하도록 건축 되어 있었다.

좌측에는 첫 번째 왕비가 머물렀다는 “왕비의 방”과 우측에는 “아벤세리스”라는 2번째 왕비가 머물던 “자매의 방 또는 금남의 방”이라 불리는 대리석바닥의 방들이 있었다.

두 번째 왕비는 평소 바람기가 있어, 남자를 초청하여 관계한 후 보안을 이유로 “금남의 집에 들어온 죄”를 물어 목을 잘라 죽였는데 그 수가 36명이나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중국의 서태후와 막상 막한가 보다. 목욕탕에는 악단대기실이 있을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 놓았다. 이 궁전과 정원에는 하루에 관광객을 7,000여명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궁전으로 이슬람 왕은 평소 여자 몸에 장식한 장식물이 부딪치는 소리 밸 리 춤(Vary Dance)을 보거나, 분수가 폭포수처럼 흐르지 않고 물이 은은하게 넘쳐흘러 내리는 물소리를 좋아 했을 뿐 아니라  여인들의 방 옆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여자들이 소근 거리는 소리를 엿듣기를 좋아 했다는 것이다. 이번여행을 통하여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은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고, 이슬람왕궁에는 부엌이 없다”는 것이다.

왕궁을 나오니 동쪽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헤네랄리페 정원”은 입구로부터 잘 다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에 둘러싸인 통로가 길게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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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맞추카의 정원, 코마레스의 정원, 라이온의 정원”등 세 개의 정원이 있었다.

이 정원은 “그라나다” 성주가 14세기 초에 여름 별장으로, 그 중앙에 수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수로 옆에 설치해 놓은 작은 분수대에서 힘에 겨운 듯 넘쳐흐르는 물소리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나와 한강이라는 한인 식당으로 갔다.

김치찌개, 오징어, 부침개, 쌈에다 포도주까지 곁 드린 한식으로 후한 저녁을 하고나니 밤 9시 30분이 넘어가는 시간, 몹시 피곤한 몸이지만 계속해서 Option으로 되어 있는 “풀라밍고”를 감상하기로 했다. 통상 이춤의 공연은 저녁 9시 이후에나 시작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풀라멩고”를 감상하다

우리가 “풀레밍고”라는 집시들의 민속춤을 감상하기 위하여 안내된 공연장은 100명 미만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타불라오”라 이름 하는 작은 극장식 식당(목로주점)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70유로로 안내에게 일괄 처리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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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입장료는 40불인데 30불은 버스대기를 위한 운전수와 안내의 팁 + 알파라 한다.

우리가 도착하니 이미 3개의 서로 유럽 각지에서온 다른 여행 구릅들이 도착하여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입장료에는 맥주 한잔, 포도주 한잔, 또는 콜라한잔 중 택일 하여 서비스 하도록 되었으나 캄캄한 장소에서 사용하던 푸라스틱 컵에 서브되는 음료수는 위생상 꺼림직 하
*풀레밍고 연주 장소 입구


여 마실 수가 없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공연이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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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레밍고 집시의 훌레밍고 춤

“풀레밍코”춤은 안달루시아의 집시예술로 “노래와 춤, 반주”의 3요소로 이루어 져 있다.

공연이 시작 되자,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이 조명이 비치는 작은 무대에서 안달루시아 집시라고 불리는 2-3명의 남자가 한명은 마이크 없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한명은 통 기타를 치는 것이 그들의 악기의 전부였다.

근육질의 한 청년과 2명의 여인 댄서들이 붉고 얇은 옷을 통하여 속살이 들여다보일 듯 말 듯 한 복장으로 2명이 한조로 또는 솔로로 그들 특유의 음정에 엇박자로 손뼉 치며 손과 발을 리듬에 맞추어 바닥에 구르면서 몸을 비틀며 신나게 추는 춤이 바로 “풀레밍코”라는 춤이다.

문득 영화에서 본 석양이 지는 황야의 인디언 마을에서 모닥불을 펴 놓고, 추장을 중심으로 원형을 따라 “어이 어이” 울부짖으며 춤을 추는 “인디안" 무리들이  생각났다.

“인디안 춤”은 그들 나름대로 단결과 화합을 다디고 그들의 신에게 그들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울부짖는 듯 발을 구르고 어께를 들먹이며 창대를 위아래로 흔들며 추는 춤의 “열정적인 면”에선 닮았다고 느껴졌지만, 인디안 춤이 단체의 하모니가 있는데 반하여, 온 몸을 던져 열정적으로 추는 바람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있는 “푸레밍고”는 무희들의 개인기로 집시민족의 천년의 슬픈 한을 메아리 없는 허공에 호소하려는 듯 그들 특유의 음색으로 토해내는 개인 기 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면 다른 것 같았다.

이러한 “풀레밍고”를 보고 있노라니, 지구상의 온갖 민족 들이 목숨이 있는 한 그들의 민속 문화를 지켜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아 막연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열정적인 춤의 공연은 1시간 30분 정도 계속 되었다.

입장료가 싼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 이국적인 민속 문화에 젖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호텔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다 되는 늦은 시간이었다.

스페인의 “꼬르도바”를 찾아서

2007년 4월 26일,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라나다”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상쾌했다. 9시에 호텔을 출발, 3시간 드라이브 거리에 있다는 “코르도바”로 향했다.

이곳은 인구 284,737명, 면적 13,718Km2, 해발 123m 고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꼬르도바”라는 이름은 그 옛날 대량 생산 되었던 “꼬르도바”란 가죽제품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암흑의 중세라고 불렀던 시절에 이곳에는 이슬람교가 전래됨과 동시에 수백 개의 이슬람사원, 수많은 목욕탕, 호화로운 궁전 등으로 유럽에서 제일가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었다. 회교 사원 안에는 스페인 최초의 마드라사(학원)가 설립 될 정도로 꼬르도바는 고대와 중세 문화의 가교였다고 할 수 있다.

중요 관광지로는 메스끼따(회교사원), 구시가지골목들과 알까 살 등이 있다.

우리는 유태인의 거리와 꽃으로 장식되어있는 구시가지 골목길을 관광하고, “메스끼따라”는 성당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옛날 회교 사원으로 건축된 것을 개조 하여 성당으로 만든 곳으로 건물 구석구석이 이슬람 사원 잔재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메스끼따 사원을 나와 오후 4시 10분경 ‘꼬르도바’에서 “마드리드”로 향하기 위해 계속해서 약 5시간의 장도에 올라야 했다.

스페인은 치안이 비교적 안전하다지만, 우리가 향하는 마드리드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주의 하라는 안내의 말이다. 모두들 여행 중에 의례적인 주의라 그런지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국도를 따라 마드리드로 가는 도중 중간 휴게실에서 40여분 휴식을 취하면서 스트레치도 할 겸 버스에서 내려 휴게실 상점에 들렀다.

밖에는 비가 내려 날씨가 제법 싸늘했다.

일행 중 별로 말이 없는 K사범이 이곳의 특산물이라는 국화차(만산이야) 한잔을 들고 왔다.

이럴 때 국화꽃 향기 물신 풍기는 따사한 차 한 잔은 마음도 몸도 덥혀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K사범을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K사범은 휴식시간마다 우리일행의 건강 스트레치를 인도해주고 있어 모임의 단합과 건강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과묵한 그는, 태권도의 달인으로 체육인다운 신사도가 몸에 배여 있어 겸손할뿐더러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헌신적이어서 인기가 있었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탐험의 스릴도 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새롭게 알게 되는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어 의미가 있다. 

우리는 "마드리드"로 이동하는 동안, 밖에는 제법 굵은 소낙비가 내리더니 이내 햇살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방금 걷었던 창문 커튼을 다시 드리워야할 정도로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이동 중 안내가 준비해온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영화를 감상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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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히 돌아가며 부인들이 앞에 나와 남편에 대해 설명하고 한 가지씩 개인 주특기를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날 그 순간 남편을 자랑하던지 흉을 보던지 무죄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노래 대신 인격을 초월한 족크로 일행을 웃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Dr. 전무식은, 나는 전적으로 무식한 사람이라 전제 하면서 언제나 여행 때 마다 일행들에게 사전 준비해온 자료들로 웃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남편의 단점대신 장점들만 소개 하고 있었다.

부부라는 인연으로 사는 동안 단점보단 장점이 많이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형성된 서로 다른 인격들이 가정이란 한 울타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온갖 역경을 헤치며 동반자로 일생을 함께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한편의 인생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해피엔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즈음 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 장소 불문하고 뜨거운 사랑의 표시를 하는 젊음의 사랑보다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힘이 되고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이, 은은하지만 깊이 있는 성숙된 인생 동반자로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아름다움의 극치라 생각된다.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가 평화로운 얼굴로 서로 마주보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던가. 노부부가 손을 잡고 쏟아지는 햇볕을 차단하는 연이은 가로수의 그늘 밑을 걷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뿐만 아니라 노년에 부부가 함께 여행하며 젊었을 때 생활에 쫓기어 서로에게 소월 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남은여생을 다시 설계해보는 것도 여유 있고 의미 있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같이한 일행들의 부부들로 부터 바로 이러한 모습들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연로한 나이들이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며 가정의 행복을 창조하려는 열정적인 의지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생이란, 오랜 세월을 통하여 부부라 이름 하는 한 폭의 자화상에 인내 와 사랑이란 이름의 색깔로 균형 있게 덧칠하며 완성해가는 과정”이라 생각 한다.

어느덧 나는 “나의 자화상에 모퉁이만 남겨 놓고 조화 되지 않는 색깔로 아무렇게나 채워온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 남아있는 여백을 무슨 색깔로 채워서 완성 할 것인가” 정말 마음이 조급해짐은 나이 탓이라 생각 된다.

일행이 개인적으로 간직했던 부부의 비밀들을 털어 놓으며 웃고 즐기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마드리드” 호텔(Hotel Hesperia Getafe)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후에 계획에도 없는 이곳의 명승지인 “마요르 광장”과 “솔 광장”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2일 밤을 보내고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오기 힘든 곳이기 때문에 호텔에서 쉬겠다는 일행들을 설득하여 이곳으로 산책하기로 했다.

이국의 밤거리 산책은 그런대로 그 나라의 특색 있는 정취를 맛 볼 수 있어 좋고 저녁운동이 되어 건강상 좋기 때문에 우리부부는 가능한 저녁식후에 40분 이상 호텔 주위를 걷는 것을 거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마침, 그날 안내가 개인사정이 있어 동행하지 못한다며 약도를 그려 주기에 이를 받아들고 앞장서서 출발 했다. 30분정도 도보 거리라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33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호텔을 출발했는데 40분이 지나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겨우 물어물어 찾아간 “마요르 광장”은 원래 투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노천 상가로 변해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러 한지 몇 쌍의 젊은 데이트 족 이외에 한산한 편이었다.

‘마요르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필립 3세”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곳 까지 온 김에 아이스크림을 한 컵씩 하자고 카페에 들렸더니 한 컵에 6유로($7.5usa)라는 것이다.

예상외의 가격이라 우리는 30여명이 앉을 자리가 없다는 이유를 대고 나와 버렸다.

호텔에 돌아오는 길에 33명의 대부대는 자연히 두 구릅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앞섰던 구릅은 갈래 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30여분 헤매기도 했다.

낮선 나라에서 안내 없이 함부로 멀리 산책을 나갔다간 망신하기 딱 이다.

스페인의 “똘레도(Toledo)”를 찾아서

4월 26일, 마드리드에서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친 후, 천년의 고도라 불리 우는 “똘레도”의 유명지역으로 출발했다.

날씨는 쾌청했다.

“똘레도”는 원래 “이베로” 부족의 하나인 “까르뻬따노(Carpetano)라는 민족이 있었으나 BC 192년 “마르코 풀비오”라는 로마의 집정관이 이 지역을 로마제국의 변방지역으로 합병 시켜 ”똘레툼“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똘레도“라 불리 우는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5세기 후는 “비시고도”인들이 들어와 그 세력을 넓히며 AD 418년 이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왕조를 건설하여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그중심지가 되어 5세기 이후 수많은 종교회의를 개최한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589년 제 3차 종교회의 때에 비시고도 왕국의 “레까레도”왕이 카톨릭을 국교로 결정한다.

그 후 711년 이 지역은 다시 아랍에 의해 정복 되지만, 가스띠야(Castilla) 왕국의 “알폰소 6세” 국왕이 이를 다시 수복 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13세기 페르난도 3세 와 알폰소 국왕 때에 이르러 똘레도는 오늘의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스페인 반도에서 유대인을 추방정책을 쓰게 되는데 그 결과 이도시의 모든 공업과 상권을 소유 하고 있던 유대인의 추방은 똘레도 경제의 쇠퇴로 직결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Madrid)로 옮김으로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또한 똘레도는 19세기 말 이후로 군사적 중요 도시로서 이곳엔 “사관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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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당히 높은 천형 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아름답게 설치해 놓은 6계단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상당히 높은 고지대 까지 오를 수 있었다.

스페인, 똘레도의 화가 “엘 그레꼬” 의 걸작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을 감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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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는 미술관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전에 우선 “산또 도매(Santo Tome)”란 교회당으로 안내하여 교회내부 우측 벽 전면에 걸려 있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이란 “엘 그레꼬”의 초대형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유명한 그림으로, 그림의 전체 구도는 아래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경계선으로 하여, 아래위로 나뉘어 있는데, 위로는 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측으로 성모마리아와 그녀의 오른쪽에 세례요한으로 이어지는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었고, 아래는 백작의 시신을 어거스틴과 스테반이 거두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1323년 사망한  오르가즈 백작”은 믿음이 좋았던 귀족으로 일생 성당에 많은 재산을 기증 하면서 소외받는 주변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었다 한다.

그의 장례식 날 “성 어거스틴(San Augustin)과 성 스테판(San Esteban)”이 하늘에서 내려와 친히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인들은 이처럼 하늘의 포상을 받느니라.”라는 말씀을 남겼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엘 그레꼬”가 상상화로 그린 성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금빛 두루마기 제의에 그려진 화려한 수와 옷 주름의 표현을 통해 미술적 테크닉을 나타냈으며, 엷은 흰옷을 통해 입체 식으로 투명하게 들어나 보이는 검은 색의 조화는 작가의 노련미와 완숙미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작가인 “엘 그레꼬”화가의 자화상도 보였는데 통상 그 화가는 자기의 그림 속엔 항상 그의 자화상을 그려 넣고 있는 것이 특징이란다.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비화도 있었다.

처음 성당 측에서 “엘 그레꼬”에게 이 그림을 그리라고 부탁하면서 당시 현지 화폐로 46,000마라베디(?)를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그림이 완성된 후 성당 측에서 너무 비싸다고 트집을 잡아 45,000마라베디로 재협상을 제의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전문가에게 재 감정을 의뢰하여 값을 다시 정하자는 선에서 일단락 짓기로 했다.

양측이 인정하는 감정가를 찾아 재 감정한 결과 감정가가 60,000마라베디로 처음 계약금보다 더 비싸게 나오자 성당이 또다시 이에 동의하지 않아 쟁송까지 하게 되지만, 작가 엘 그레꼬는 평소 가정 형편상 주위사람들에게 많은 채무가 있어 채권자들의 빚 재촉의 성화에 못 이기자 빚을 갚을 목적으로 45,000마라베디 선에서 합의를 보고 고소를 취하했다는 것이다. 결국 엘 그레꼬는 그 돈으로 모든 채권자들에게 차질 없이 빚을 갚아 명예를 지켰던 인격자라 했다.

스페인, “또레도 대성당”(Toledo Catedral)을 찾아서

또래도 대성당은 “알폰세 8세와 히메네스라다 대주교”가 “똘레사 대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한 후, 1221년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226년이 되어 서야 건축의 초석을 놓아 1738년경에야 완성되었다 한다.

이성당의 제원은 L 120m x W 60m x H 33m의 크기로 5개의 신랑(Nave: 성당 같은 건물 내부에 위치한 벽 또는 아치 기둥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간)으로 건축 되어 있는 성당으로 이스람 왕국 시절엔 회교 사원이었던 곳이다.

1086년 알폰소 6세에 의해 똘레도가 수복되었고 이 회교 사원은 캍톨릭 성당으로 개조 되었다. 여기서 높이를 33m로 한 것은 예수의 생애를 의미한다고 한다.

성당의 정면 모습은 두 개의 탑이 양쪽에서 서로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한쪽 종탑만 원형으로 완성되었고 내부에는 “고르다라”고 하는 약 18,000Kg의 대형 종을 설치해 놓았으며, 왼쪽은 처음 원형으로 된 설계와는 다르게 팔각형의 지붕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정면의 양쪽 탑 사이로 3개의 출입구가 있었는데, 가운데 문을 통과 하면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용서의문”, 오른쪽에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심판의 문”, 왼쪽의 문을 “지옥의 문” 또는 “종려나무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스페인, 똘래도 성당의 “야냐 문(평탄 문: Puerta Llana)”

과거에는 성당 건축 재료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가 출입하기에 용이 하도록 고안한 것으로 주로 이 문은 “성체 현시대”를 실은 마차와 가마가 드나들기 쉽도록 고안 하여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스페인, 똘레도 성당의 “사자의 문(Puerta de los Leones)”

1452년부터 11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된 이문은 성모 승천을 경의 하는 뜻으로 “기쁨의 문(Puerta de Alegria)”이라 했는데 17세기에 사자의 상이 새겨진 기둥을 가진 철창문이 세워 지면서 “사자의 문(Puerta de los Leones)"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치에는 천사 상들이 조각 되어 있었으며 안쪽으로 사도 상과 마리아 상이 조각 되어 있었다.

스페인, “똘레도 성당 내부”

1493년 멘도사 추기경 때 내부까지 완성되었다는 이 성당은, 그 이후에도 풍부한 재정 지원으로 수많은 보석, 장신구, 그림, 고문서, 오르간, 조각품등으로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한 때 카톨릭의 중심이 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미화 작업은 바로크 시기였던 1732년 “뜨란스빠렌떼(Transparente)”가 완성 하였다한다.

성당 안에는 “뜨란스빠렌떼(Transparente)”라는 환상적인 제단이 있는데, 이는 당시 츄리게레스꼬(Churrigueresco)라는 바르크 풍의 양식의 창시자인 츄리게라(Churriguera)라는 건축가의 제자였던 “나르시소 또메”(Narciso Tome)가 당시 “아스또르가”라는 추기경의 지시를 받고 남의 도움 없이 거의 혼자 수작업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제단은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경외스럼과 논란의 대상인 제단이다.

이 제단은 중심부에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고, 금색으로 장식된 섬광 조각물과 네 명의 대천사인 “라파엘(Rafael), 가부리엘(Gabriel), 미겔(Miguel), 우리엘(Uriel)천사”가 조각 되어 있었다. 상부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최후의 만찬”이 아래서 올려다보는 각도마다 모양이 달리보이도록 절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스페인, 또레도 대성당의 “성물실(Sacristia)”

대 제단 왼편에 팔각형으로 된 성 유물실위에 커다란 대형 천정화가 그려져 있는 둥근 천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천정화는 17세기 이태리 화가 루카지오르다노(Luca Giordano)에 의해 그려졌는데, 그림의 내용은 일데폰소 성인(San Ildefonso)에게 제의를 내리는 모습을 주제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과 수많은 천사들이 약 250m의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어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한다. 명화로는 엘 그레꼬의 “똘레도 전경 지도”를 비롯하여 “베드로의 눈물(Lagrimas de San Pedro”), 안쪽 정면에 18세기에 만들어 졌다는 대리석제단엔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라는 그림으로 장식 되어 있었고, 베르나르디노 성인의 “제단의 풍경”을 비롯하여 당대의 유명화가들의 주옥같은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 외에도 그곳엔 메나(Pedro de Mena)의 “프란시스코 데아시스 성인의 조각상”과 알폰소 5세가 대주교 알론소 까리오 에게 하사 했다는 “십자가”등이 전시 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화려한 장식의 의류들이 진열 되어 있는 “의류 장식실”을 둘러보았다.


스페인, 똘레도 성당의 “대제단(Capilla Mayor)”

이곳은 1498-1504년 시스네로 추기경 지시로 페티-진(Petit-Jean)에 의해 확장되었으며 대 제단 뒤에 거대한 평풍이 유명했다.

이 제단의 특징은 주로 똘레도 지역의 낙엽송을 자료를 사용하여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아름답게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제단 병풍에는 7열의 조각물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이곳 중앙 옆에는 하단부터 차례로 성모상, 성체 현시대, 예수의 탄생 그리고 성모 승천이 조각 되어 있었고, 주변 열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이, 중앙 상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볼 수 있었는데 좌우측에는 성모상과 성인 요한의 상이 그리고 그 바깥쪽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명의 도적의 상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왼쪽 벽면은 상당히 변조 되어 있었는데 “멘도사 추기경의 관”을 이곳에 안치하느라  변조했다는 것이다.

스페인, 똘레도 성당의 “성가대실”

대 제단 맞은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가대실이 있었고 그 앞에 철장 문이 설치 되어 있었다. 필자는 원래 음치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현재 적을 둔 교회에서 훌륭한 지휘자를 만나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는 직분을 허락받아 봉사하고 있는 관계로 이곳 성가대실에 남다른 관심을 같고 감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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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실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하얀 성모상(Virgen Blanca)”이 성가대실 앞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다.

이 성모상은 14세기 프랑스에서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나 작가 미상 이라한다.

성모상은 마리아가 환하게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모습으로, 어린 예수를 안고 있어, 통상 볼 수 있는 웃음 먹은 자애로운 마리아의 상과는 대조적 이었다.

이 성모상 뒤에는 호두나무로 만들었다는 줄지어 고정 시켜 놓은 좌석들이 상하부로 나뉘어져있음을 볼 수 있다.

1489년부터 6년에 걸쳐 "로드리고 알레만(Rodrigo Aleman)"이 만들었다는 의자마다 등 받침 세밀한 조각 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났다.

의자에 새겨놓은 조각들의 내용은 카돌릭 국왕(Los Rayes Catolico)이 당시 이슬람 제국의 “그라나다”를 정복 하는 과정을 마치 필름에 담듯이 한 장 면 씩 연출하는 모습을 이었다.

성가대실 중앙에는 거대한 독수리 형상의 “청동 악보 대”를 볼 수 있었고, 좌우측 상부에 대형의 “파이프오르간”이 우람하게 뽐내고 있었다.  .

파이프 모형은 좌측엔 바르크 양식의 화려하게 보였으나, 우측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모형이 약간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이 성가대실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대리석 기둥”이 벽 속에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회교사원의 기둥을 장식용으로 재활용했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외벽 전체에도 조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는 구약의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는 장면”들을 소재로 성경내용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뒤쪽 에는 “영원한 아버지”라고 하는 메달 형 조각상을 볼 수 있는데 역시 “알론소 데 베루게떼”의 작품이란다. 그 옆에 “니꼴라스 데 베르가라”의 작품인 “원죄와 무죄”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첨가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면모를 가추고 있어 금방이라도 파이프 오르간을 통하여 “할렐루야”가 울려 퍼질듯 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스페인, 똘레도 성당의 “보물실(Tes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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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실은 “성 요한 예배 실”이라고 하는 소 예배 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성당의 귀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은 곳이다.

내부 천정엔 똘레도에서 유일한 작품으로 황금색의 종유석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에 위치한 “성체 현시대”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1517-24년 독일 작가가 만든 것으로 그 내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순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약 18Kg의 금이 소요 되었으며 12,000개의 금으로 만든 나사가 사용 되었다고 한다.  

그 중앙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십자가 있었고, 성체 현시대 외부는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이 “성체 현시대”는 성체 축일이 되면 똘레도 시내를 도는 행렬행사가 있는데 이때 그 모습을 외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양피지로 되어 있는 성경책을 볼 수 있었는데 각 페이지마다 성경 내용을 나타내는 금박 그림들이 있었다. 그리고 좌측 진열장에는 똘레도의 수호성인의 “황제관”이 진열 되어 있고. 이는 이사벨 여왕이 쓰던 왕관을 알레호 데 몬또야(Alejo de Montoya) 라는 사람이 1586년 개조하여 사용했던 것이란다. 

우리는 오전 11시 15분경 성당을 나왔다.

성당근처에 데모 군중들이 혼잡을 이루며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시위(데모)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데모대들은 붉은 자켓을 입고 붉은 깃발을 들고 한 젊은 연사가 스페인 말로 가설 연단위에서 무엇인가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군중들은 이를 따라 복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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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직장 재해 보장 요구”를 주장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고 데모대는 있게 마련이고, 데모의 방식은 유사했다.

데모대들은 대중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선동하기 위하여 붉은 색을 좋아 하는가 보다.

현명한 국가 지도자는 데모군중의 성난 외침이 있기 전에 “잔잔한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이를 겸허히 수용해나감으로서 성난 외침이 거리에 범람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잉그릿트 버그만”이 출현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다리 폭파장면의 촬영 현장이었다는 “알깐따라 다리(Puente de Alcantara)”에서 잠시 휴식을 갖게 되어 그 다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스페인, 똘레도의 “알깐따라” 다리(Puente de Alcantara)

똘레도를 연하여 흐르는 “타호 강”은 두 개의 커다란 바위로 된 산을 사이로 폭이 좁아지는 장소가 있다. 바로 이곳에 “알깐따라”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리의 기초공사에 쓰인 재료들이 로마시대 건축 양식을 따른 점으로 미루어 로마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안내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촬영한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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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는 아랍 제국시대 똘레도의 저항군과 아랍군 사이에 걸친 치열한 싸움으로 많은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압달라만 3세에 의해 보수 되어 보존되다가 1257년 대홍수에 의해 심한 훼손을 보게 되어 알폰소 10세가 다시 보수 하도록 명하여 교각에 보호 장치를 넣어 튼튼한 다리로 보수 된 다리다.

이 다리 양쪽에는 두 개의 탑이 있었는데 한쪽은 1484 고메스 마리케라는 건축가에 의해 재건되었고, 건너편 다리 끝에는 1721년 탑을 헐어 버리고 대신 아치문이 설치되어 마차 등이 쉽게 통행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출발하겠다는 버스를 대기시킨 체 일행들은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정보다 늦게 이곳을 출발하여 우리는 산마르틴 다리, 육군사관하교, 까바목욕탕의 흔적, 알까사르등을 버스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마드리드로 향했다.


스페인, 또레도의 “산마르틴 다리”에 얼 킨 전설

이 ‘산마르틴 다리’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명문 건축가가 몇 년에 걸쳐 시공을 했으나 골재를 실은 마차의 하중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설계된 다리임을 깨달은 건축가가 뒤늦게 고민을 하게 되는데 건축가의 아내가 계략을 낸다. “다리를 불사르고 다시 건축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건축 중이던 다리는 원인모를 화재로 유실되었고, 건축가는 하중을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높이 27m, 넓이 40m의 초대형 아치로 다리를 재건축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스페인, 또레도의 “까바 목욕탕”의 전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까바 목욕탕을 지나치자 안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옛적 비시고도 시절에 “홀리안”이라는 백작에게 “플로린다 라 까바”(Florinda la Cava)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 딸의 전용 목욕탕이라 그렇게 불리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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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고도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로드리고”(Rodrigo)는 이 백작의 딸인 까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늘 흠처 보며 그녀의 나체를 즐겼다고 한다. 아마도 목욕탕 인근에 궁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 알게 된 까바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림으로서, 아버지는 딸의 몸을 음흉한 마음으로 흠처 보던 왕에게 복수심이 생긴다.

그로 인해 “홀리안” 백작은 “아랍” 사람들이 스페인을 점령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줌으로서 비시고도 왕조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찾아서

스페인의 “마드리드”는 지리적 면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메세타(Meseta)지형이 불리는 해발 650m의 기복의 고지위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서 현재 인구는 300만에 이르는 대도시이다.

12-14세기 까지 마드리드는 가스띠야 레온 왕국으로 인구 1,5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였으나,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똘레도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부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빠른 성장을 거듭해 간 도시이다.

이 도시엔 여러 성당과 수도원, 마요르광장(Plaza de Mayor), 브엔페티로 궁(Palacio de Buen Retiro)등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마드리는 나폴레옹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고, 나포레옹 동생인 “호세보나파르테 1세”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1808년 5월 2일 이 도시에서 최초로 프랑스에 대항하는 시민전쟁이 일어나 독립전쟁으로 발전한곳이기도 하다. 1936-39년에 있었던 스페인 내란으로 이 도시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집권기간(1940-75) 많은 건물들이 복구되었던 도시이다.

지금 우리는 그 도시의 궁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Placio Real)”을 찾아서

“알깐따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를 떠나 1시간 정도 걸려 달려오니 대부분 5층의 흰 석조 건물들이 아름답게 늘어선 깨끗한 도시가 눈앞에 전개 된다.

“마드리드” 시내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를 둘러보면서 스페인의 도로 분기점(0 Km)이라는 “솔 광장”을 지나, 마드리드의 중심 부 우측으로 중앙은행, 은행 건너편 11시 방향으로 석조 건물로 우람하게 서있는 미 대사관 과 땅의 여신이란 동상이 서있는 “네톤 광장”을 지나 “마드리드 궁전”에 도착했다.

이궁전은 원래 관광 계획에는 없었는데 마드리드 까지 와서 궁전을 보지 않고 가서야 되겠느냐는 일행들의 의견이 있어 안내가 특별히 안내하게 된것이다.

현재 왕궁은 원래 아랍요새가 있던 자리였다.

이 요새는 스페인, 오스트리아 왕가 시절 왕궁으로 쓰였으나 1734년 성탄절 밤에 화재로 소실되었단다.

그 후 “펠리페5세”는 이탈리아의 “필립뽀쥬바라”로 하여금 현재 왕궁의 모습으로 재건축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건축가가 죽게 되자 “지오바니 빠띠스따 시게띠”라는 건축가에게 계속해서 이탈리아 “바로코양식”으로 완성시킨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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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정문을 들어서니 “아르메리아 광장(Plaza de Ameria)이란 깨끗하고 드넓은 광장 모퉁이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3층 대리석 건물로 된 왕궁이 있었다.

이 광장에서는 매주 첫째 수요일 경호대의 교체식이 장엄하게 열린다는 것이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니 “사바띠나(Sabatini)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왕궁의 중앙 계단”을 통하여 내부의 화려함이 시야에 들어 왔다.

방마다 화려한 장식과 각종 가구, 도자기, 미술품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가득히 소장되어 있어 현재 훌륭한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옥좌의방 :

이방은 전체적으로 방내부의 장식은 화려한 바로코 및 로코코 양식을 혼합하여 순은과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2개의 대형 상델리아와 12개의 대형 거울이 실내의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방을 들어서면 1764년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Tiepolo)가 그린 천정화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야에 다가온다.

중앙벽면에는 금실 은실로 수놓은 왕실 문장이 있고 그 앞에는 주인 잃은 왕과 왕비의 옥좌가 놓여 있었다.

도자기방(Salon de porceana):

실내 장식은 까롤로스 3세의 지시로 이탈리아 호세 그리치(Jose Gricci)의 디자인에 의해 마드리드의 “부엔레띠로”라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도자기판으로 되었다.


연희장(Comedor de gala)

연희 장으로 들어서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145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대 규모와 화려함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화로운 연희 장이었다는 이곳은 1879년 알폰소 12세(Alfonso XII)와 그의 2번째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했다.

연희 장 천정화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가톨릭 국왕부처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왕실 성당(Capilla Real)

왕실 전용성당으로 스페인 건축가 벤뚜라 로드리게스(Ventura Rodriguez)에 의해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된 곳이다.

병기 저장소(Armeria):

까롤로스 5세, 펠리페 2세 등 스페인의 왕들이 소유하고 있던 갑옷과 무기류의 중요한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곳으로 펠리페 2세에 의해 만들어 졌다.

궁을 나오니 동쪽 광장에 펠리페 4세의 기마상이 위엄을 뽐내고 있었으며, 광장 주변에는 리베리아 반도의 옛 왕들의 조각상들도 볼 수 있었다.

동쪽 광장의 동북쪽에 펠리페 3세 부인이었던  마르가리따(Marigarita de Austria)가 수녀들을 위해 대리석으로 건축했다는 “성육신 수도원(Monasterio de la Encarnacion)"이 보였다. 이궁전은 규모가 방대하여 대강 훑어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 되어 다음 목적지인 “프라도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와 엘 그레코등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만나다.

이곳에는 8,000여점의 작품이 전시 되어 있다고 하며, 이 미술관을 모두 둘러 보기위해서는 2-3일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미술관 문 닫는 시간이 1시간30분 정도 남아 있어 그 시간동안 중요 작품만 선별 하여 관람하기로 했다.

이곳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설치된 보안경비 문을 통과해야 했고 실내에서 사진 촬영은 금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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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에 “레오날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대표적인 화가가 있었다면, 스페인에는 “고야, 피카소, 벨라스케스, 로제르 반 데 웨이든” 등 유명한 대표 화가들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엘 그레꼬 의 자화상”을 비롯하여“벨라스케스” “고야”등의 유명 작품들이 시야에 들어 왔다.

“엘 그레꼬”는 1541년 그리스 크레타 섬의 칸디아 라는 곳에서 태어나 베네치아로 유학, 당대의 거장 ‘티치아노’ 밑에서 수학하여, 이곳에서 서양 르네상스 예술의 기초를 확립하고, 그 후 1년간 로마에서도 활동하다가 1577년 스페인에 오게 되는데, 1578년 “엘 에스 꼬리알 궁”을 장식할 “마우리시오 성인의 순교”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당시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가 불만족을 표시하여 궁정화가로서 활동을 접고 결국 또레도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화가였다 한다.

그는 그의 자화상에서 가슴에 손을 얹은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가운데 두 손가락이 서로 붙어 있는 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1599년 세비아에서 태어난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으로 17세기 스페인화단의 최고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화가이다.

그의 작품으로 “시녀들, 불카노의 대장간, 브레다의 항복” 등이 전시 되어 있었으며,

“고야”(Francisco de Goya)는 1746년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태어나서 젊은 나이에 마드리드로 오게 되는데, 그는 ”성 페르난도 예술 문화원“에 두 번씩이나 낙방하는 시련을 경험 한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에 유학하고 돌아와 “바예우” 라는 가문의 “호세파”라는 여인과 결혼 하게 된다. 그는 1789년 까롤로스 4세의 예술 고문관이었던 “안또니오 라파엘 멩스”의 추천으로 궁정 화가 가되어 1792년 까지 주로 카르톤(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대표작으로 “눈먼 닭, 결혼식, 스페인의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등의 눈에 익은 그림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또한 고야(Francisco de Goya)의 작품으로 “까롤로스 4세의 가족” “몽끌로야의 총살”등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고야의 “까롤스 4세의 가족”이란 그림은 당시 황후 “마리아”가 궁중의 실권을 잡고 품행이방정치 못함을 은연중에 작품에 풍자해 놓았다.

통상 사진에는 최고 권력자인 “카로스 4세”를 중심에 두는 것이 마땅한 것이나 이 그림에는 황후를 중심에 두어 궁중의 실권자가 황후 마리아임을 풍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명 미상의 여인이 누워있는 전라의 누두를 그려 놓고, 다른 화폭에는 옷을 입고 누워 있는 당시 카롤로스 4세의 황후 마리아의 상을 그린다음 “마리아”의 얼굴을 전라의 여인에 접속시켜 마치 전라로 누워있는 마리아를 그린 것처럼 풍자한 작품이 있었는데, 이 그림으로 그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았지만, 그는 얼굴이 같을 지라도 육체가 서로 다른 여인임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고야는 말년에 "제우스신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식을 잡아먹는 무서운 형상"의 작품을 남겨 놓기도 했다.

그 작품은 고야가 말년에 홀로되어 정신 분열증으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착각에 빠져 있는 환각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라파엘”의 작품인 “실성한 아이가 보고 있는 예수”라는 작품 속에는 모두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실성한 아이만이 예수를 보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는 내용이라 비종교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주옥같은 작품들 감상을 그쯤해서 마치고 7시경 미술관을 나와야 했다.

방금 전에 소낙비가 그쳤는지 밖의 공기가 신선하여 기분이 상쾌했다.


스페인, “발렌시아”(Valencia)를 찾아서

4월 28일, “마드리드”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밖에는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었으나 하늘을 보니 계속 내릴 비는 아닌 것 같다.

아침 9시경 “마드리드”를 출발하여 Rt. A-30을 벗어나자, M30,M40,M50등 3개의 지하 순환 노선을 가리키는 도로 안내 사인이 유난히 눈에 띠는 지하철역을 지나, 4차선으로 되어 있는 남쪽의 고속도로를 타고 “발렌시아”로 이동 이곳의 대성당과 시내 관광을 하고, 다시 “까스테촌”으로 이동하여 투숙하기로 되어 있다.

원래 이동계획 시간은 4시간 30분정도였으나 고속도로의 교통 혼잡으로 한 시간이상 지연되고 있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오후 1시 30분경 휴게소에 들려 20분간 휴식을 취한 뒤, 계속해서 쏟아지는 소낙비를 뚫고 ‘발렌시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 했다.

소낙비로 버스 창밖의 시계가 좋지 않았다.

차창 관광이 불가능하자 우리는 일전에 감상하다 마지막 부분을 남겨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계속 감상하기로 했다.

점령군의 중요 군사 이동통로인 “다리를 폭파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부상을 당해 함께 탈출이 불가능 해 지자 기관총을 길목에 장치하고, 탈출 하는 동료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남겠다는 남자에게 함께 남겠다고 오열하는 여인에게 “당신이 사는 것이 당신가슴속에 나도 함께 사는 것”이라며 사랑하는 여인을 억지로 달래어 보내고 그는 동료들의 탈출을 기관총 한 자루로 엄호하다 장렬히 산화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끝나니 잠시 숙연해 진 분위기였다,

숙연해진 분위기도 잠시,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은 남자들 방금 전에 감상한 전쟁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자연히 군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문득 내가 젊은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ROTC 3기 장교로 임관하고 얼마 안 되어 전방에서 고생할 바엔 젊음이 있을 때 세계평화 유지 군으로 월남전에 참가 하는 것이 조국과 나 자신을 위해 값진 삶의 모습이라 판단하고 월남을 지원하던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파병용사들의 월남 정글 교육현장인 춘천 인근의 “옴리”에서 훈련과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대 입구 삼거리엔 전선으로 떠나는 자와 남아있는 자들의 애틋한 정을 나누던 목로주점 겸 다실 같은 면회소가 있었다.

”면회소에 파병병사들이 다시는 이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절실한 심정을 “그 목로주점 벽과 식탁” 위에 낙서처럼 써 놓은 수많은 글들 중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맴도는 작가 미상의 시한구절이 생각났다.

"그녀가 오거 던

나는 그녀를 마음속에 담아서

전선으로 떠난다고 일러 주오.

그녀가 눈물 짓 거 던

나는 입술을 깨물며

조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떠난다고 일러 주오.

내가 “전선에서 장렬히 산화” 할지라도,

슬피 울지 말아 달라 일러 주오.

나는 그녀의 가슴속에

항상 함께 있음으로

죽어도 함께 살아 있노라 일러 주오.”

세월이 흐른 지금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 대강 이런 내용의 시 구절 이었다.

아마도 월남 전선으로 떠나야 할 시간까지 마지막 면회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무명 파월 용사의 애절한 마음을 면회소 벽 모퉁이에 낙서처럼 남겨 놓은 시 구절 이었다.

당시 겨울 폭설로 서울과 춘천 그리고 옴리 사이에 교통이 자주 두절되어 면회 오는 사람들이 춘천에서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시기였다.

아마도 이 병사도 꼭 나타나야할 사랑하는 여인이 어딘가에서 발이 묵혀 만나지 못하고 월남의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을 낙서처럼 피력하며 이시를 쓰는 순간까지도 기다리던 여인이 목로주점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입구를 몇 번이고 응시하며 떠나가든 파월 병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어 당시 전쟁터로 가는 모든 월남 파병 용사들의 심금을 울려주던 유명한 시였다.

이렇게 옛날을 회상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덧 “발렌시아”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늦어 “대성당과 시내”를 돌아보지 못하고 “까스떼촌”이란 곳으로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했다.

발렌시아는 인구 130만정도의 항구 도시로서 “토마도 축제와 불 축제”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한때 로마의 식민지였으나, 아랍이 지배하던 도시이기도 했다.

1094년 엘시드(Elcid)장군이 탈환하여, 1238년부터 아라곤 왕국(Aragina Kingdom)을 구축하면서 기독교인과 회교도인 들이 살기 시작한 도시이다.

오늘날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3대 도시”로 성장 발전하고 있으며 상업, 문화, 유물, 시설물 등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기후가 온화 하고 다혈질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발렌시아”에서 “까스떼존”이란 마을로 이동하여 “Hotel Abba Castellon"에서 하루를 쉬었다.

스페인, 가스떼촌에서 “바르셀로나”로 이동

(황영조 한국의 마로도너가 금메달을 획득하던 곳)

4월 29일, 이제 이번 여행을 사실상 하루만 남겨놓은 주일 아침이 밝아 왔으나 날씨가 잔득 흐려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주일 예배를 드리고 “바르셀로나”로 출발했지만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바르셀로나”에 도착 했다.

이곳에는 현지에서 여자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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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안내했던 가이드 정군은 다시 폴투갈을 거쳐 모로코로 가는 여행팀을 마지 하기위하여 여기서 작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부두 가에 위치한 현지 식당으로 점심시간이 되어서 그러한지 인파로 북적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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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이곳 현지에서 유명한 전통 음식 “해물 빠이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동안 느끼한 음식 탓인지 각종 해산물로 만들어진 느끼한 “빠이야”보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생각났다.

점심을 마치고 이 지역 부유층의 개인 보트가 정박해 있는 강변을 따라 버스가 대기 하고 있는 곳으로 20분간 산책삼아 이동 하니 버스 앞에는 지금까지 안내했던 Mr.정이 가방을 들고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좋은 여행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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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자 이별이군!”

“그러네요”

“-----다시 폴투갈과 모로코로 간다고?,

건강 조심하고, 또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이국에 남겨놓은 아들에게 당부하는 마음으로 악수를 청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찡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관광 가이드와는 여행 중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다가 여행일정을 마치면 석별의 아쉬움을 항상 경험 하고 있지만, 정군이 그간 관광지 마다 극성스럽게 앞장서서 우리에게 우선권을 주고 보다 많은 혜택을 주려고 애썼던 그였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정 군 역시 우리와 헤어지는 것이 서운한지 우리가 떠난 버스 뒤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한 것, 우리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로운 현지 여 가이드를 따라 바로셀로나의 명승지인 “성가족 성당, 구엘 공원 올림픽 경기장, 몬주익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그쳤던 가랑비가 다시 창문을 두들기기기 시작 했다.

오늘이 마침 이 고장에 마귀가 손질하는 날이라 가랑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셀로나”는 일찍이 세계박람회가 개최된 도시이며, 1992년 대한민국의 “황영조 마라돈 선수”가 죽음의 언덕이라 부르는 “몬주익 언덕”에서 선두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영광스런 현장이자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8.8Km의 해변에 연해 있는 아름다운 미항의 도시이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곳이니 이동관광 중에 소지품을 주의하라는 안내의 주의가 있었다.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한 그 죽음의 언덕에는 한국에서 조각해서 실어온 “황선수가 달리고 있는 형상”을 평면 석에 입체 식으로 조각하여 설치 해 놓았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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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작열하는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바로 셀로나 몬주익 언덕” 에서 대한민국의 황선수가 한 민족의 자긍심을 만천하에 과시하던 그날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국인으로서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이 조형물을 보면서 아쉬움이 있었다.

이것을 만든 한국의 체육 관계자와 정부부처의 무지와 단견 아니면 무관심을 보는 것 같아 서이다.

조형물 설명에 “영어나 스페인 말”이 한마디도 새겨져 있지 않고 한국어로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온 세계 많은 관광객들이 스쳐 가는 이곳에 이왕 많은 돈을 들여 제작한 조형물이라면 영어권이나 스페인어 권 관광객들에게도 그 조형물의 주인공인 황영조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여기 왜 서있는가 정도는 알릴 수 있도록 고려했어야 하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화가 났다.

황 선수 조형물 앞을 지나 바로 셀로나 “올림픽 광장” 앞에서 잠시 버스에서 내렸으나 올림픽 광장은 수리가 한창이라 들어 갈수 없어 주위만 둘러보고 오후 3시 20분경 “성가족 성당”과 “구엘 공원”으로 이동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성가족 성당”

이 성당은 “예수님 가족의 조각상”이 있기 때문에 “성가족 성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바로셀로나의 명물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천재적 조각가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의 17대 작품의 하나라는 이 성당은 1883년 건축을 시작하여 33년간 지속하다가 가우디가 사망함으로 중단 되었다가 현대 건축가가 지금도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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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모양은 곡선을 이용한 환상적인 건축물로서 용, 바다의 가센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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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등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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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건축물에 살려가며 설계된 특이한 작품으로 일반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힘을 지탱하도록 건물 내부 천정에 연결되는 기둥은 아름드리 대리석 기둥대신 팜 추리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형상이 바치고 있도록 설계되었고, 입구에는 거북이 등위에 마리아와 요셉의 기둥이 양쪽으로 서있었다.

정문은 탄생의 문이라 명명하고, 풍성한 과일, 꽃, 사이프러스나무 형체로 조화롭게 설계되어 있었고, 부활의 영광을 상징하는 조각물로 장식되어 봄을 상징하고 있다 하며, 12기둥은  12제자를 상징하는 것이란다.

뒷문은 수난의 문 이라 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형상이 조각 되었으며,가을을 상징하는 갈색으로 채색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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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가우디가 본건물의 건축 작업을 직접 지휘하고 동참하기 위하여 거주 했다는 작은 침대하나가 아직도 골방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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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계 방법은 실에 무게를 달아 밑으로 늘여 트리는 형식으로 기둥의 무게와 중심을 잡도록 하여 이를 바르게 세워 놓으면 훌륭한 모형도가 되도록 설계모형을 만들어놓은 공간도 있었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설계도의 상당부분을 찾을 수 없게 되어 건축 완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 건축가들이 모여 “가우디의 기초 설계”를 근거로 컴퓨터로 재생해 가며 본 건축물을 완성해 가고 있는 중이어서 2020년경에나 완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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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성당을 보기위해 다시 이곳을 찾아 달라는 안내양의 당부가 있었다.

“글쎄, 그때까지 건강이 유지 된다면---.”

웃고 있는 일행들의 얼굴엔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눈치였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구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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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4년 언덕위에 60채의 별장 같은 건물을 짓고 상류층에게 전원주택으로 분양하려고 지은 것이었으나 호응이 좋지 않아 전원주택을 포기하고 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만약 전원주택 60채가 완성되었다면 세계 제 1위의 아름다운 전원주택 마을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는 곳이라고 현지인들은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곳엔 현재 마귀할멈의 집 2채만 완성되어 있었다. 지붕은 바람 길을 고려하여 유선형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건물의 형상은 용의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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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원주택의 설계는 “가우디, 베랑게, 주조리”라는 3대 작가의 공동 작품으로 그중 가오디 작품이 2채나 되는데 하나는 탁아소이고 다른 하나는 정비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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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86개의 기둥을 세워 위에는 드넓은 광장을 만들어 놓아 입주할 상류 급 주민들이 함께 가든파티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래쪽 천정은 4계절을 의미하는 4개의 원이 있고, 바닥과 천정 등은 모자이크로 장식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곳에서 사용된 모든 모자이크는 상업적 가치가 없는 100%깨진 것을 주워 모아 만든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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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재료비 없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정원에는 자연석을 쌓아서 바다의 험난한 파도를 연상하게 하는 파도 모형으로 만들어진 반 아취를 만들어놓은 것이 일품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감탄이 그치질 않았다.

바침 기둥이 없는 천장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 이지만 어디엔가 무게를 분명히 받고 있어 안전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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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몸이 피곤하여 버스에서 남아 있던 사람은 우리들의 연발되는 감탄사에 함께 동행 하지 않음을 후회 하고 있었다.

유럽의 관광은 비교적 궁전과 성당 그리고 유적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공원의 관광은 또 다른 신선함이 있어 좋았다.

이곳을 나와 우리는 한식당으로 안내되어 갈비찜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Hotel Princesa Sofia"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시 일행들과 호텔 주변을 걸었다.

호텔을 나오니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넓고 시원하게 직선으로 뻗은 메인 도로를 달려가는 차량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도로계획이 미래 지향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통행차량의 매연검사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지 호흡 시에 탁한 매연을 느낄 수 있었다. 보행자 거리는 오가는 보행자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드넓은 공간으로 조성된 보행자거리는 가운데에 가로수가 있을 정도로 넓고 길게 늘어서 있어 공기를 정화 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차량이 내뿜는 매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듯 했다. 그럼에도 보행자들 틈에 끼여 걸어보는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는 충분히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일행 20여명이 함께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를 걷기로 하고 호텔 문을 나섰으나 운동이 목적인 사람은 빠르게, 산책이 목적인 사람은 천천히 걷는 바람에 함께 출발한 우리의 대열은 흩어져 버렸다.

몇 명은 빠른 걸음으로 1마일을 걷고 발길을 돌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걷기를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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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씨 부부, 두 분 K씨 그리고 우리부부 만이 처지게 되어 호텔 앞 상점 앞 노상 식탁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우리는 함께 노천 간이 Table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 들을 감상하며 남자들은 시원한 생맥주로 여자들은 시원한 콜라로 잔을 채우고 부라 보를 외쳤다.

 “쨍”

“건강을 위하여”

이렇게 추억을 만들고 있는 동안 바르셀로나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스페인, 폴투갈, 모로코여 안녕!

4월 30일 아침이 밝아 왔다.

엊그제 여행길에 오른 것 같은데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10박 11간의 일정이 끝나 버렸다.

3개국을 바쁘게 누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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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침 10시 55분 “바르셀로나 발 뉴욕 행” 항공 시간에 늦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묵고 있던 소피아 호텔을 서둘러 출발했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일행들은 각자의 가정과 사업장으로 되돌아가야한다.

10박 11일간 돌아보던 모든 관광지와 긴 이동시간에 만들진 추억, 9일간 우리를 억척스럽게 챙기든 가이드 정군과 애틋한 마음으로 헤어지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 1박 2일 바르셀로나의 안내를 맡았던 매너가 별로였던 J양, 이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 뇌리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J양은 유난히도 질문을 싫어하는 안내 같았다.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는 중

“얼마나 더 가면되나요?”

궁금한 일행이 질문 하면, 간단히 예상되는 시간을 말해 주면 될 텐데.

“가보면 알아요.”라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답하여 질문하는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

그렇게 탐탁찮았던 J양도 막상 헤어진다니까 같은 동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용서 되고 섭섭함이 생긴다.

참고로, 유럽은 외국인이 물품을 구입할 경우 자국인과 동일하게 세금을 부치게 되는데 이때 외국인임을 확인해 주면 대금 물건 구입처에서 발행한 지불 확인서에 나타난 세금을 출국 공항에서 환불받을 수 있다.

유의 할 것은 출발 시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서 동시에 Check in 하다보면 환불 시간을 노칠 수도 있게 되는데 이를 고려하여 여유 있게 움직여야 한다.

항공기가 스페인 땅을 이륙하자 나는 그간의 여행을 정리 하느라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얼핏 머릿속엔 관광한 명승지 보다 유럽 대륙을 버스로 누비며 이동하던 지루했던 기억들만 크로즈업 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33명이란 대 구릅이 10일이란 짧지 않은 기간을 함께 여행하면서 아무 사고 없이 즐겁게 여행을 마치고 “뉴욕 행” 항공기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기간 동안 일행들의 투철한 협조 정신은 물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우리와 동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일행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렇게 스페인, 폴투갈, 모로코 등 새로운 세계를 찾아 보낸 시간들은 내 남은 생애에 소중한 시간들로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 되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