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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동유럽 편(취리힐,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체코)

해당사진은 추후 올리 겠습니다.

 

이오영,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동 유럽 편 (2006/4/23-5/4)
   * 본 여행기는 2006년 6월부터 50회에 걸쳐 “주간 필라” 주간지에 연제 된 내용입니다.


순 서


1. 서언- 필라에서 스위스로


2. 스위스, 취리힐에서 첫 일정을

   가. 취리히, 종교 개혁의 발원지, 윈스터 대성당의 ‘쯔빙글리’를 찾아서

   나. 스위스, 루체른의 카펠교를 찾아서

   다. 스위스, 알프스의 영봉 필라투스에 오르다


3. 독일 퓌센, 노이슈바인스타인(백조의성)을 찾아서


4. 오스트리아, 모찰트의 고향 “찰스(짤스) 부르크”

   가. 음악회에서 “원더풀”

   나.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의 미라벨 정원, 게트라이테 거리 등의 명승지

       *찰스브르크 대성당, *모찰트의 발자취, *요새 호헨 찰스브르크

   다. 오스트리아, “사운드 오브 뮤직”의 “미라벨 정원”

   라. 비오는 게트라이데 거리, 300년 전통의 차 집에서 ‘멜랑제’한잔을

   마. 오스트리아, 찰스감머굿에서 유람선을 타다.

   바. 오스트리아, 실망 준 비엔나 한인식당의 김치찌개 맛


5. 오스트리아, 음악의 도시 비엔나를 찾아서

   가. 쉰부른 궁전

   나. 칼 성당

   다. 비엔나, 성슈테판 대성당 과 국회의사당

   라. 음악가와 역대 대통령의 묘지공원

   마. 비엔나, 요한 스트라우스의 발자취 그리고 음악회


6. 헝가리, 부다베스트로 향하다

   가. 부다페스트, 부다 와 페스트

   나. 헝가리, 길레리트 언덕에서

   다. 헝가리, 어부의 성채 및 마챠시 성당

   라. 부다페스트, 영웅광장 그리고 사우나

   마. 헝가리, 국회의사당


7. 슬로바키아, 알프스의 “타트라”국립공원을 찾아서


8. 헝가리를 떠나, 폴란드로

   가. 폴란드경찰의 횡포 ?

   나. 폴란드, 크라카우 시가지

   다. 폴란드, 비엘즈카의 소금 광산의 한국인의 낙서

   라. 폴란드, 중앙시장 광장


9. 폴란드, 150만 유대인 학살하던 역사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서


10. 체코 제 2의 도시, 브르노에서 하루 밤의 추억


11.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찾아서

    가. 체코 프라하의 성

    나. 체코, 프라하의 황금소로

    다. 체코, 프라하의 불타바 강의 카를교

    라. 체코, 프라하의 야경 선박유람

    마.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사. “007작전” - 이 밤이 새기 전에 Missing Person을 찾아라!


12. 프라하여 안녕 ! 동유럽이여 안녕 !


1. 필라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2006년의 신년 새해를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해도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요즈음 나는 철인이나 문학도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인생이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지의 인생 종착역을 향해 속절없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지낸다.

그래서 여행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
금년엔 4월 23일부터 5월 4일 까지 아내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에서 친척 누님 내외와 함께 동행하기로 하여 보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다.


드디어 여행 D Day가 다가왔다. 오후 2시 40분 필라 공항을 출발, 워싱턴 DC의 달라스 공항을 거쳐, 스위스로 가는 United Air를 이용하기 위하여 12시 30분경 필라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기로 한 항공 스케줄이 Cancel되어, 셔틀 버스를 타고 워싱턴 DC의 달라스 공항으로 달려 United Air를 겨우 타야 한단다.
공항이 바뀌는 바람에 일행 대부분이 점심을 건너뛴 상태라 피곤하여 신경질을 낼만도 한데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예정 시간보다 20분정도 늦게 우리를 실은 United Air는 공항 활주로를 이탈하여 구름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항공기가 상공에 오르자 밀렸던 피로가 몰려왔으나 긴장했던 탓인지 잠은 오지 않고 눈꺼풀만 무겁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에 현지시간으로 아침 9시경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위스 취리힐 공항 도착


미국과 6시간의 시차를 생각 하면 8시간이 걸린 셈이다.

모두들 까칠한 모습으로 스위스의 취리히 공항출입국을 통과하여 대합실에 모였다.

그곳엔 영국런던에서 방금 도착했다는 인상 좋은 안내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12일간 우리를 안내할 여행사 직원 Ms.정이란다.


2. 스위스, “취리히”에서 첫 일정을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으로 둘러싸인 유럽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중립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나라 전체가 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스위스는 은행의 비밀이 보장되어 한때 세계의 검은 돈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이해되던 나라이면서 로렉스 시계가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이 이 나라 “제네바”에는, 유엔 본부를 비롯하여 269개의 국제기구가 상주 해 있고, 대한민국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영부인 프란체스카(오스트리아 인)를 만나 인연을 맺은 나라로 오래전부터 한번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 나라는 1648년에 독립하여, 1815년 파리회담에서 영세 중립을 승인 받은 나라로, 현재 22개의 칸톤 이라 불리는 미니 도시국가로 구성된 연방 공화국으로, 유럽 3대 하천인 “라인강, 론강, 다뉴브강”의 발원지로서 산과 강 호수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천혜의 관광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다.

현재 국민 소득이 4만 불로 부유한 나라, 재활용 문화가 발달해있고, 동양 상식에 맞지 않겠지만  묘지마저 25년 이상 보전 하지 않는 다는 진취적인 나라이다.

수질이 좋아 세계에서 장수자가 제일 많다는 나라이면서 또한 자살자가 세계 제 2위라는 이율배반적인 통계를 갖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수치는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살비율이 높아 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 나라는 과학 기기가 세계 3위로 아시아 수출을 15%장악 하고 있으며, 18개월이나 실업 수당을 줄 만큼 사회 보장 제도가 잘된 나라, 1차 산업으로 철강, 2차 사업으로는 공업, 3차 산업이 관광이라는 나라, 신고정신이 강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 시계 산업이 발달하였다 하나 시내 거리엔 아직도 고철 같은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서울의 남산 터널 기법을 이 나라에서 전수해왔을 정도로 터널 기술이 뛰어나 현재 650여개의 터널이 구축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일행은 스위스의 “취리히”라는 비교적 낮선 이름의 도시에 24일 아침 도착하자마자 역전 근처에 있다는 “윈스터 대성당”을 찾아가는 강행군으로 동유럽의 여행의 첫발을 내 디딘 셈 이다.


가. 취리히, “윈스터 대 성당”으로


이 성당은 1529년에 “종교개혁의 어머니”라 불리 우는 “츠빙글리”가 세워서 임종할 때 까지 시무했다는 교회이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가로 유명한 “말 턴 루터”나 “칼 빈”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종교 개혁의 선구자이다. 

이날, 우리는 공항에서 버스로 15분이면 충분하다는 “취리히역전”을, 돌고 돌아 1시간 30분이나 걸려 찾아 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운전기사는 체코에서, 안내양은 영국에서 원정 온 덕분으로 현지사정에 어둡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여행사의 사전준비 부족을 짜증 낼 만도 하지만, 예정에 없던 스위스의 시골길을 더 관광 한 셈 치기로 했다.


마침 이 고장은 우리가 도착한 그날 연중행사의 하나로
“봄맞이 축제”를 하는 날이다.

민속 축제로 눈사람 모형을 앞세워 시가행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도로가 차단되어  우리를 실은 버스는 취리히 역전 부근에 정차시키고 역전앞에 출퇴근시에 사용하고 있는 자전거가 유난히도 많이 주차되어 있는 장소를 지나 우리는 성당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취리히 기차 역전 앞 자전거 대기소


거리 모퉁이마다 시가행진에 참가하기위해 준비하는 무리들이 그들 특유의 행사복장과 악기를 점검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30여분 정도 걸어서 한 석조 성당 앞에 도착했다.

취리히 윈스터 대성당 앞에서


유럽 중세풍의 교회 건물 입구를 향하여 좌측벽면에 기독교계의 거장 “츠빙글리” 제자'하이리쉬 불링거' 성직자가 도포 자락을 드리운 근엄한 표정으로 부조물로 조각되어 있었다. *

 

스위스, 취리힐의 크로스 윈스터교회, 벽면에 부조물로 조각된 하이리쉬 불링거(종교 개혁의 아버지 쯔빙글리 제자) 부조상


"쯔빙글리" 주교가 시무하며 말턴 루터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윈스터 성당 안은 앞 쪽 좌편에 발코니처럼 돌출하여 가설한 설교대는 중세풍의 어느 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였지만 종교개혁의 중추 역할을 한 거장이 시무한 교회치고는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다.

윈스터 대성당 안


그 교회를 둘러보며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설교단상에서 당시 부패했던 기독교의 개혁을 역설 했을 “츠빙글리”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계속해서 “쯔빙글리”가 세웠다는 “아카데미 신학교”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길에서 헤맨 덕분에 시간이 모자라 멀리서 그 신학교를 지나 처야 했다.

이 신학교는 현재까지 “21명의 노벨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유명한 공과 대학으로 변신해 있으며, 2010년 세계첨단 대학으로 발 돋음 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 하고 있단다.


나. 스위스, 푸체른의 거리를 걸어 루체른의 다리 “카펠교”로 가다.

스위스의 “루체른”이란 도시로 이동하여 점심을 한 후, 670년 전에 건축되었다는 “카펠교”를 찾아 이동했다. 시내 거리엔 아직도 전철이 핵심 교통수단처럼 거미줄같이 전선이 드리워져 있었고 거리는 행인들과 차량으로 혼잡했다.
혼잡한 건들 목을 건느고 있는 우리일행을 거의 스칠번 할 정도로 거칠게 운전하는 현지 젊은이를 보고 모두들 혀를 찾다.

취리히 시가지 한단면

 

현지 사람들은 관광도시로서 관광객의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가 보다.

건들 목에서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느꼈다.


우리가 도착한 “카펠교”라는 다리는 길이 200m에 달하는 목조다리로 기와지붕으로의 덥혀있었다. 한쪽 다리 끝에는 당시 방위 탑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7세기 화가 하인리가 건축했다는 “팔각형 수 탑”이 등대처럼 외롭게 서있었다.

다리 중간 중간 벽 마다 루체른 수호성의 생애를 담았다는 112장의 그림들이 걸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첫날부터 피로를 느껴 대강 다리를 훑어본 다음 안내가 일러준 최종 집결지 의자에 앉아 후속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17세기 건축, 200m 목조 다리 입구 보도 불럭에서


마침, 이 지역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내가 앉은 옆 의자에 기대여 휴식하고 있어 이 다리의 역사적 의미를 묻자 “이 다리가 지닌 특별한 제작 동기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6-7백 년 전의 목조 다리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오래전에 화재로 인해 보수 된 것으로 이 고장의 상징물” 일 뿐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한다.

“카펠교”를 뒤로 하고, “그랜드 유럽” 호텔에서 스위스의 첫 밤을 보내기로 했다.


호텔 건너편에는, 베토벤이 영감을 얻어 월광곡을 작곡했다는 “피어바스 스탓시”라는 넓은 호수가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호수 가를 거닐고 있었다.

피어바스스탓시 호수- 베토벤이 이곳에서 영감을 얻어 월광곡을 작곡했다는 곳


호수를 끝으로 형성된 상가 거리에는 4층 대형 건물 전체를 사용하는 대형 “로렉스 시계 판매점”이 있어 들어가 보니 오리지널 이라는 “로렉스”들이 진열장에 황금덩어리처럼 가득 진열되어 번쩍이고 있었다.

가격표의 금액은 미국에서보다 만만치 않은 것 같으나 품질은 보장한단다.

중국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점원들과 Deal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다. 스위스, 알프스의 영봉 “필라투스(Pilatus)”에 오르다.*


아침 6시경에 기상하여 “피어바스스탓시”라는 호수 가를 40여분 걸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여행객 또는 지방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호수 가를 산책하거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유럽 사람들은 무뚝뚝한 것 같다.

“하이”하고 손짓을 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아무 반응없이 빤히 쳐다보며 그대로 지나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나라 민족의 도도함일까 아니면 아직도 마음이 열리지 않은 민족들이라 그럴까 해답이 이 나오지 않는다. 문득 어제 건들 목에서 난폭하게 운전하던 현지 젊은이가 생각났다.


아침 9시경, 높이가 해발 2,432m(7000ft), 경사 48도의 알프스 산의 영봉 “필라투스”를 오르기 위하여 케이블 정거장으로 이동하여 안내양이 입장권을 구입해 오는 즉시 우리는 4명씩 나뉘어 케이블카에 올랐다.

스위스, 필라투스-경사 48도의 알프스 산의 영봉


케이블카로 정상까지 One way에 30분정도 걸리니 상당히 긴 거리이다.

케이블 카 창문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저 멀리 흰 눈이 덮인 “만년설”의 신비스러운 산 계곡을 바라보며, 발아래 펼쳐지는 “피어바스스탓시” 호수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푸체른의 아름다운 전경”은 경이적인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필라투스를 오르는 케이불카안에서 누님과 아내


평지에선 저 멀리 보이던 눈 덮인 알프스의 계곡들이 산 정상에 오르니 지척으로 다가와 눈앞을 가로 막는듯했으며, 겹겹이 흰 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계곡 마다 만년설의 위용을 나타내고 있었다.

필라투스 정상에서 아내와

필라투스 영봉 정상에서 매형되시는 심윤섭과 이오영

이곳 필라투스 정상에는 1890년도에 건축했다는 호텔과 호텔부속으로 식당이 있었다.

“필라투스 정상”에서 만년설의 신비와 위용을 감상하던 우리들은 영하의 기온과 불어치는 차가운 바람에 몸이 얼어 오는 한기를 느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식당 안으로 서둘러 들어와 몸을 녹이기 위해 커피한잔씩 나누었다.

알프산 영봉 식당에서 따끈한 커피 맛은 별미였다.

커피 한잔으로 약간의 한기가 가시자 우리는 다시 식당에서 나와 용이 나왔다는 굴속과 전망대가 있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랐다.

필라투스 산정상에 용이 승천했다는 동굴 앞에서 필자 부부

필라투스 동굴안에서 필자 부인

필라투스 동굴에서 필자


전망대에 오르니 그곳엔 연수차 왔다는 3명의 한인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도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싶던 차에 우리를 만났다며 반가워했다.


어디선가 깜장산비둘기 떼가 우리를 향해 구구거리며 접근 해 온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나누어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람에게 접근하는것 같다. 손에 쥔것이 없어 산비들기에게 미안한생각이 들었으나 그대로 지나쳐야 했다.
산정상에서 한시간여를 즐기다가
우리는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점심을 마친 후 독일
“퓌센”으로 이동 했다.


3. 독일 퓌센, “노인바인슈타인 성(백조의성)”을 찾아서


우리는 독일 퓌센에서 여행 2일째를 맞았다.

독일은 인구가 8,200만 명, 면적이 우리나라에 1.6배인 35만 6,855Km2이란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과 2차 대전의 원흉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으며, 2차 대전 패전으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민족이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90년 10월 3일 현재 통일독일을 이룩한 나라로서. 일제 강점기 손기정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던 나라, 현재(2006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나라로 주목 받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는 이제 독일 남단에 아름다운 작은 도시 “퓌센”이란 도시에 와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중세 시대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그의 가정교사인 음악가 바그너의 정신적 영향을 받아, 1869년부터 17년에 걸쳐 건축했다는 아름다운 성곽이 바로 백조의 성(노안버안스타인 궁전)이다.
백조의성에서 마주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작은 계곡에는, 루트비히 2세가 왕자 시절 성장기를 보냈다는 작은 성곽이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 2세가 왕자시절 성장기 시절을 보냈다는 궁전, 마치 감옥같이 느껴진다.


노인바인슈타인 성은 눈 덮인 알프스 정상이 바라보이는 “슈반가우”라는 작은 마을 호수 가에 바위를  깎아 놓은 듯 가파른 절벽위에 마치 백조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루트비히 2세가 좋아하는 백조의 상으로 많은 실내를 장식하여 “백조의 성”이라 명명 되었단다. *

“디즈니랜드의 성”을 건축할 때, 이성을 모델로 삼았을 만큼 아름다워 마치 동화속의 궁전 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바인슈타인 성이 건너다 보이는 다리위에서 필자 부부

영국에서 우리팀의 안내를 위해 왔다는 안내양 Ms.정

숲속으로 보이는 '노인바이스타인' 궁전

"노인바인스타인"궁전 입구에서

     

일설에 의하면, 루트비히 2세 생존에 남모를 고독과 기구한 생애를 보낸 국왕으로, 아름다운 백조의 성을 건축하고 그 궁전에서 겨우 117일정도 남짓하게 살았으며, 그는 이웃나라 공주의 약혼녀가 있었으나 궁중의 사진사와 염문설이 있어 파혼하고, 42세까지 독신으로 지내다가 평소 수영을 좋아하던 그가 그의 주치의와 함께 뮌헨의 궁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 의문사를 하게 되는데, 그의 죽음을 놓고 권력 암투에 의한 희생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결국 자살로 정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후계자는 군부의 막강한 실력자였던 그의 삼촌이라 한다. 


4. 오스트리아,  모찰트의 고향 찰스 부르크(짤스부르크)


우리는 “백조의 성”에서 내려와 2시경 독일을 출발, “오스트리아의 찰스브르크” 라는 곳에서 저녁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점심은 독일 퓌센에서, 저녁은 오스트리아 찰스브르크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유롭의 인접 국경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결국 세상이 좁아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땅거미가 드리워 어둠이 시작될 무렵, 찰스부르크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하여 현지에서 살고 있다는 안내양이 우리를 기다려 중국식당으로 안내 했다.


가. 찰스 부르크, 음악회에서 원더풀


저녁식사 후, 안내양이 “찰스브르크”의 음악회가 유명하다고 소개 하며 옵션으로 희망자에 한해서 저녁 7시30분에 공연하는 “음악회”를 가도록 추천 했다.

음악에 비교적 문외한인 필자이지만, 세계적인 음악가 “모찰트”의 고장까지 왔으니 가 보자는 아내의 제의로 따라 나섰다.

입장료는 1인당 60유로(75불)이고, 바이오린 4협주곡이란다.

호텔과 공연장 까지 그리 멀지 않아 부슬 비를 맞으며 걸어서 안내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1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보통집의 응접실만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입구에서 안내로 보이는 여인이 “음악회 순서 프로그램”을 2유로에 팔고 있었다.

공연장에서 당일 공연하는 순서 지, 그것도 카피된 순서지를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상업적이란 생각이 들어 놀랐다.


유명한 연주장이라 하여 잔뜩 긴장 했는데, 청중석에는 50여개의 접는 의자가 구석구석 까지 꽉차이게 노여 있었고, 특설 무대도 없이 악보 밭침 대 몇 개가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는 아주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 방이 연주장이라는데 또 한 번 놀랐다.

안내 말에 의하면, 이곳에는 유명한 연주자들이 이런 형태의 연주를 자주 하고 있으며, 이것도 입장권을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관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주 시간이 임박해 지자, 텅 비었던 50개의 좌석이 모두 차고 있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자리를 뜨면서 “원더풀”이라 환호하는 동료 부부를 처다 보며, 필자의 음악 실력이 예까지 미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나.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의 명승지를 찾아서


오늘은 27일, 여행 5일째 아침을 음악가, 건축가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찰스 부르크에서 맞았다.

이 도시 중앙을 가로 지르는 “찰자흐강”을 중심으로, 왼쪽이 구시가로 “호헨찰스부르크 요세, 논베를그 수녀원, 성 페터 교구청, 찰스브르크 대성당, 레지덴츠, 프란치스카 성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찰스브르크대성당을 둘러보았다.

강 오른쪽이 신시가지로 “미라벨 공원, 쉬탈인가쎄, 린저가쎄”등이 가볼만한 곳이라 한다. 이나라말로 가쎄는 거리를의미한다.

미라벨공원


도시근교로는, “쉘브른궁전과 히틀러의 여름 별장이 있다는 베레흐테스 가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작곡한 ’프란츠싸벌‘이 잠들고 있다는 할라인 기념박물관, 모찰트의 어머니의 고향으로 젊은 연인이 즐겨 찾는다는 낭만이 넘치는 산속의 작은 마을 찰스감머굿, 험한 알프스 산맥의 중간에 이 지역에서 가장 춥고 눈이 많아 유명하다는 스키장과 얼음 동굴, 20m의 얼음 벽, 신비의 동굴안의 호수 등 볼거리가 많아 1875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했다는 곳이다.
1980년 찰스 부르크, 티롤, 케른튼 3주가 합작품으로 조성한 “호헤타워른 국립공원”등이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 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관광지중 미레벨 정원, 게트라이데 가쎄(거리), 찰스감머굿, 모찰드의 생가 등을 선택하여 보기로 했다. 이렇게 제한적인 관광에 만족하고  비엔나에 도착하기 전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더 많은 곳의 관광을 해야한다는 안내의 극성(?)에 우리는 내일 아침  7시 40분에 호텔을 출발하기로 했다.
원래 찰스부르크는 ‘소금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나, 나는 지금까지 이곳을 세계적인 음악가 “모찰트”가 태어 난 곳이라 유명해진 도시로만 알고 있었다.


696년경 “루페르트”라는 대주교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 이 도시로 부임하여 소금을 생산하여 경제를 부흥시키고, 이곳주민들에게 카돌릭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페터성당(교구청)과 베네딕티 수도회를 설립하여 현재 까지 이 지역은 종교와 상업의 원천지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 하고 있었다.

“루페르트”주교는 당시 바유바리라는 영주의 청으로 귀족출신의 부인들을 위하여 알프스 북쪽 논베르크산에 “베네딕티나 수녀원”을 짓게 되는데, 이 수녀원 묘지에는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관계로 정치망명자의 도피소로 이용된 적이 있었다고 했다.


* 찰스 브르크 대성당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바로크형식의 성당인 찰스 브르크 대성당은 이도시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찰스브르크 대성당 입구

찰스 브르크 대성당 내부


이곳은 "루페르트" 주교의 성지가 된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독일 지방에 카돌릭이 전파되었으며, 이 성당은 1598년 대화재로 파괴되어 당시 “볼프디트리히 주교가 대성당을 헐어버리고, 주민들의 주택과 공동묘지 등을 강제로 철거하면서 까지 이곳을 로마의 축소형으로 개조 하여 오늘날 "이탈리아 형 찰스부르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성당에서 요한네스, 크리스토무스, 불흐강우스, 테오리우스, 모찰트등이 유아 영세를 받은 곳으로 알려 져 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찰스브르크는 여러가지 역사적의미를 갖고 있지만 음악의 거장
“모찰트”로 인하여, 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찰트의 발자취

내킨김에 모찰트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로 했다.

모찰트는 1756년 1월 27일 게트라이트 거리 9번지에서 출생한다.

모찰트의 아버지는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였고, 그는 1747년 주교청 관리인의 딸과 결혼하여 7명의 자식을 생산 하지만 5살 위인 누나와 음악의 신동 모찰트 만이 성장하게 된다.

그는 노래하는 딸과 피아노 치는 아들의 가족 음악회를 자주 열었으며, 모찰트를 유아기에 유럽일대에 연주 여행을 자주 보내 경륜을 쌓게 한다. 그로 인해 모찰트는 비엔나, 파리, 런던에서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편으로 교황으로부터 “기사의 황금 박자”라는 애칭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안내에게 모찰트의 생가쪽으로 안내를 요청했다.

그날따라 부슬비가 내리고 있어 우리는 비를 맞으며 게트라이데 거리를 걸어  9번지까지 이르렀다.

모찰트의 생가(기념관) 입구


그곳에는 모찰트의 생가 Apt.건물임을 금방알아 볼수 있도록 그가 태어난 일시가 적힌 간판이 건물에 부착되어 보전 되고 있었으며,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엔 한때 그가 살았던 건물로 지금은 기념관으로 보전되고 있었으나, 그날은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지지않았다.

그러나 안내말에 의하면 지금 그 기념관 내부는 관광용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다.


* 요새 호헨 찰스부르크

우리는 안내를 따라 요새 호헨 찰스 부르크가 올려다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레온하르트 주교 가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란다.
교황과 황제의 냉전 시기인 1077년경, 교황 편에선 찰스 부르크 대주교 게하르트는, 황제의 임명권을 얻기 위하여 전쟁을 자주 일으키는 독일 영주들로부터 주민들과 대주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요새를 짓게 된 것이다.


요새에는 용과 십자가 그리고 화초와 둥근 무가 그려져 있는데 둥근 무의 유래는, 레온하르트가 젊은 시절 평소밭농사에 흥미를 갖고 있어 주민들로부터 ‘농사꾼양반’이란 놀림을 당하며 마을 개구장이들은 그에게 둥근 무를 던지기 까지 하였다는데, 그 후 주교로 출세하여 그 요새를 증축하면서 그는 주민들에게 옛 날 괄세받던 시기를 상기하는 교훈을 주기 위하여 방패에 둥근 무를 삽입시켰다는 것인데 과연 주민들에게 얼마만큼 반성과 경각심을 주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없다한다.

그날따라 유난히 쏟아 지는 비를 피해 사진촬영을 대강 마치고, 필자가 대학 시절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현지 촬영장이었던 “미라벨 정원”으로 이동했다.


다. 찰스브르크의 “미라벨 정원(불어:아름다운 전경)


이정원은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서 눈에 익어 그러한지 자주 찾아와 본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찰스브르크,의 미라벨 정원 입구


이 정원에는 1803년 나포레온이 독일 침략 당시, 한때 독일창고에 방치해 놓았다던 15개의 난쟁이 동상을 이곳으로 운반, 이곳에 나열해 놓은 난쟁이 정원도 있었다.

미라벨 정원, 독일 창고에서 찾아낸 15개의 난쟁이를 전시해 놓은 동산(정원)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이렇게 아름다운 미라벨 정원은 1606년 성직자 볼흐 디트리히 주교가 당시 성직자의 결혼 금기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찰스 브르크 평민의 딸 살로메와 사랑하게 되어 10명의 자식을 낳는다. 그 주교는 살로메 와 자식들을 위하여 찰차흐 강변에 “알텐아우”라는 이름의 궁전을 지어 준 것이데, 이로 인해 주교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탄받게 되어 1676년 요새에 강 금 되어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후세성직자들은 이 주교의 행적을 하루속히 없애기 위하여 그 궁전에서 그 성직자의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도 추방시키고 이름을 “미라벨”로 바꾼 아픈 역사를 지닌 정원이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잔디위에 정원수와 화초 그리고 분수가 잘 어우러져 낭만이 넘처 흐르는 정원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가정교사 수녀 마리아가 해군 예비역 트랩 대령의 7명의 어린 아이들과 “도레미화솔---”을 부르며 천진난만하게 뛰 놀던 모습들이 생각났다.


때는 1930년대--.

오스트리아 태생인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후 오스트리아와 합병하고, 세계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던 시대였다.

독일과 합병을 반대하던 오스트리아 민족주의자 트랩 대령의 강한 애국심과 수녀 마리아의 순수한 인간애를 드라마틱하게 역은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라벨 정원”을 관광하는 동안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그런대로 비를 피할 수 있었지만, 준비성이 없는 사람은 비를 흠뻑 맞아 감기가 우려되기도야 했다.

다행인 것은 기후가 춥지 않아 보슬비에 젖은 옷이 체온에 의해 마르고 있다는 것이다.


라. 찰스브르크, 게트라이드거리- 300년 전통의 차 집


아름다운 궁전의 정원을 돌아본 후에 “게트라이드가쎄(=거리)”로 향했다.

이 거리는 중세풍의 거리로 옛 부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이곳 주민들의 삶과 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답니다.

비오는 날의 '게트라이드가쎄(=거리)'


우리는 “게트라이드” 거리에 늘어선 상가의 건물에는 당시 문 맹인들을 위해 상현문자처럼 각 상점의 특징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작은 간판들이 앙증스럽게 달려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선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큰 간판은 법으로 금하고 있단다.

골목길은 자손만대 까지 사용해도 좋을 든든한 돌조각으로 포장 되어 있었고, 돌 정원의 노천카페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평상시의 “게트라이드”라는 거리는 옛날 서울의 명동거리와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늘 복잡란 거리란다..

그날따랄 오락가락하던 보슬비가 장대비로 바뀌어 더 이상 걷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비를 피해 코너에 자리 잡고 있는 커피숍으로 들려 비를 피해야 했다.
이 커피숍은 1703년도에 개업하여 현재까지, 3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커피숍" 이라한다.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차집앞에서 필자 부부(1703년 이란 글자가 보인다)

300년 전통 찻집안에서 잠간 여유를


커피숍 안은 현주민인지 여행객인지 구분이 안가지만, 책을 보는 사람, 동료들과 환담 하는 사람, 사색하듯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 등으로 나름대로 낭만을 누리고 있는 분위기다.

25명이나 되는 대 구릅이 비에 젖은 몸으로 커피숍으로 몰려 들어가자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별채의 구석방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비엔나커피”라 부르는 커피(이곳에서 “멜랑제 또는 카푸치노)를 시켰다.  이 따끈한 “멜랑제” 한잔은, 비에 젖어 차가워진 몸과 마음을 데워 주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잠시 달려가게 했다.


마.  오스트리아, “찰스감머굿”에서 유람선을 타다.


비가 뜸해지는 것을 기다려 우리는 찰스감머굿에서 유람선을 타기위해 부두가로 이동했다.

오스트리아의 찰스감머굿(Sartzkemergut)이란 곳은. 세기적인 음악가 “모찰트 어머니의 고향”이기도하며, 이곳은 76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울창한 숲, 가파른 절벽 등 낭만이 넘치는 산속의 작은 도시였다. (사진)


옛날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흐란츠 요셉이 16세의 바이른 공주인 씨씨 와 첫 사랑을 속삭이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찰스”는 소금이라는 뜻으로 한국 안내인들은 “짤스”라고 발음 하고 있었으며, “감머굿”은 보물창고 라는 뜻이란다.

부두에 도착하자 안내는 예정에 없던 유람선을 타는 것이라고 선심을 썼다.

유람선을 타고 연안일대를 바라보는 느낌은 평화롭고 아름다워 육로를 달리며 버스차장을 통해 바라 보는 경치와는 확연이 다르게 느껴짐은 여행에 들뜬 마음 탓일까?

Fisherwrit(피셔비르스) 식당이 있는 골목길


유람선에서 내려, 호숫가에서 가장 전경이 좋다는 Fisherwrit(피셔비르스)라는 호수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비엔나로 이동했다. *


바. 오스트리아, 비엔나 한인 식당의 김치찌개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빈)에 도착하니 어두워지기 시작 했다.

현지 안내라는 한인 유학생이 우리를 “교도?”라는 한국 식당으로 안내 했다.

이미 메인 요리로 김치찌개가 한 냄비 씩 차려진 저녁 식사 table에는 4명씩 앉도록 되어있었으나 우리 table에는 5명이 앉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치찌개의 질에 있었다.

신 김치를 대강 끓여놓은 빈민 구호소 급식소의 수준정도로, 지금까지 여행 중 현지 한국식당중 그 질과 량 그리고 서비스 까지 최하위라 생각 되었다.

주인을 찾으니 나와 보지도 않는다. 해외에서 동포 음식점에 들어가면 동족이란 남다른 친근감과 기대감이 들게 마련이지만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한국식당은 정말 실망이었다.

식사 단가를 낮추다보니 질이 떨어진 것이고, 손님보기 곤란하니 주인이 나타날 수 없었으리라. 죄 없는 안내에게 항의가 이어 지고, 앞으로 식사 질을 높이도록 시정을 요구했다.


5. 오스트리아, 음악의 도시 “비엔나(빈)”를 찾아서


천년의 부를 상징하는 호화 찬란했던 궁전들과 비엔나의 숲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예술의 도시, 관광객이 끊기지 않는 도시로 유명한 비엔나는 도나우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동유럽의 문턱으로 동쪽에서 슬라브족과 헝가리 족 등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으며, 전쟁이 있을 때 마다 로마 군사들의 남북을 연결한 교차점이 되던 곳이다.

비엔나의 크기는 415 Km2이고, 행정 구역은 스테판 성당 중심으로 제 1구를 시작으로 23구로 되어 있으며, 시민 수는 약 1,500,000명으로 360년간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도로 자리 매김 하던 곳이기도 하다.도시는 1979년 3번째 유엔 본부가 들어섰으며, 1995년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고, 2001년에 유로화가 도입되었다.

 

비엔나 극장 전경



그리고 특별히 비엔나 거리에서 필자에 눈에 삼성 간판이 높다랗게 건물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한민국 삼성이 이곳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비엔나 거리의 삼성 건물


빈의 자랑거리는 많은 성당과 궁전, 화려한 건물및 극장, 박물관, 갤러리, 빈 하모니, 빈소년합창단, 신년음악회, 스페인 승마학교 초콜릿케이크, 비엔나 카페 등 수없이 많다.
특히 세계적인 음악의 대가 하이든, 모찰트,글룩,살리에리,베토벤
들이 현재 이곳 중앙묘지에 잠들어 있거니와 게속하여 콘서트와 오페라가 공연되어 음악 도시의 정취를 흠뻑 맛 볼 수 있어 세계각국에서 여행객이 그치지 않고 있는 곳이다


가. 쉰부른 궁전


4월 27일 밤 이곳에 도착하여 28일 아침을 맞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여행 6일째 되는 날을 마지 하는 것이다.

호텔을 막 출발하자, 이곳에서 6년간 유학을 했다는 청년이 비엔나 안내를 위해 호텔 길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안내는 여행사 와 사전에 정해진 약속장소에서 함께 만나 현지 안내가 끝나면 임무를 마치는 형식으로 하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안내를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캐나다 밴쿠버로 가게 되었다고 자기소개를 한다.

그는 우리를 “쉰부른 궁전과 정원”, “칼 성당”, “성 슈테판 사원” 그리고 비엔나 시가지등으로 안내 했다. 호텔 TV에서 오늘의 날씨는 계속해서 흐리고, 간혈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미리 우산들을 지참했다.


우리는 칼성당을 찾았다. 칼성당은 건물자체가 거대하게 조각한 예술품으로 참으로 웅장했다.

칼성당 입구

칼성당 내부

칼성당, 아취형 윗부분의 3개의 원


칼성당에서 나와 우리는 “쉰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쉰”이란 말은 아름답다, “브른”이란 말은 샘 또는 분수를 의미 한단다.

따라서 “쉰부른” 이란 말은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곳”이란 뜻이 된다.

 

쉴브른 궁전 앞에서


이곳은 1619년 마티아스 제왕이 사냥 도중 빈의 강가와 숲을 발견하고 왕가 전용의 사냥 별장을 위하여 짓게 된 것이란다.

1695년 터키의 친입으로 파괴되어 복구를 시도했으나, 경제적인 문제로 재건축의 공사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744년-1750년까지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바로크와 로코코형식을 조화시켜 1441개의 홀과 방으로 호화스럽게 완성, 이 궁전에서 마리아-테레지(1740-1780)여왕과 그의 아들 요셉 2세(1780-1790)가 문화의 꽃을 피우는 전성기를 누리는 등 합스부르크 왕가의 설화가 담겨 있는 곳이란다.

특히 “나폴레옹과 마리아-루이제” 가 1805-1809년까지 거주한 곳이기도 한데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1832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단다.

나폴레옹은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지략과 용감한 영웅임에 틀림없지만, “나폴레옹 신드름”이란 유행어가 있을 만큼 평소 그의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에 늘 불만에 쌓여 있었다고도 한다.


화려한 궁전 안을 돌아본 후 궁전건물을 나오니 아름다운 바로크 형식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쉴부른 궁전 정원


정원은 1765년부터 프랑스식으로 완성되었다는데, 각을 맞추어 다듬어진 나무들 그사이로 반듯하게 연하는 정원 길, 비밀스런 이름을 소유 하고 있을 이름 모를 화초들, 분수대와 석고상 이런 것들이 주위의 아름다운 전망과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듀폰가가 일구어 놓은 펜실베이니아의 롱 우드 가든과 흡사함을 느꼈다.


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스테판 대 성당 과 국회의사당”


비엔나의 상징적인 건물로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스테판 대 성당”을 빼 놓을 수 없다.

이 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식 건물로 137m의 뾰족 탑이 있고, 지붕에는 청색과 금색의 타일로 새겨져 있는 쌍 독수리 마크가 있다. 

쌍 독수리 마크는 합스부르크왕가의 상징이란다.

 

비엔나 스테판 성당

스테판 성당 내부


스테판 성당 내부 앞벽면


한때는 거리의 건물은 이 성당보다 낮아야했다고 한다..

성당은 한마디로 호화찬란하였으며, 왼쪽 신자 석 앞에 1447년에 제작되었다는 제단화, 좌측 앞에 섬세한 조각으로 제작한 고딕 형 설교대,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화상,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관, 건반 4줄, 파이프 10,000개로 구성되어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보였다.

필자가 섬기는 필라 연합 교회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항상 크고 웅장하다고 생각 했었는데 그 파이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형이었다.

그 파이프를 통하여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는 어떤 것일까 ?!

대성당을 나오자, 안내는 예정에 없던 시내를 관광 시켜주겠다고 한다.

시내 중앙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우측에 오페라 하우스를 지나쳐 1시 방향으로 “궤테”의 동상이, 그리고 얼마 안가서 좌측으로 유태인의 학살 주범인 히틀러가 2번이나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쉘러 미술대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히틀러가 당시 “쉴러 미술대학”에 정상적으로 합격하여, 이학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면, 당시 150만이란 유태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은 일어 나지 않았을까 ---?


계속해서 우리는 다뉴브 강을 건너서 유엔본부, 좌측에 원자력, 산업, 인권기구 등의 중요 공공건물과 좌측에 박물관을 버스로 스치면서 “국회의사당(Parament)” 앞에서 잠시 내려 기념촬영을 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국회 의사당


높은 계단위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건축된 아름다운 국회의사당이었다.

1873에 시작하여 10년에 걸쳐 건축되었다는 이 건물은 정면에 육중한 8개의 코린트식 돌기둥이 있어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였다.

계단 밑에는 지혜의 여신을 상징하는 아테네의 여신이 금 투구를 쓰고 서있는 조각상이 있고, 그 아래로 “입법과 행정”을 의미 한다는 두 여신이 금투구를쓴 지혜의 여신을 수호 하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을 떠나 왼쪽으로 돌자, 안내는 정면에 높이서 있는 군인 동상을 가리킨다.

이동상은 1945년 2차 대전당시 빈을 탈환한 소련군의 진입과 전쟁종말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12m 높이의 소련군 장군 대리석 기념 동상이 보였다..

일제 총독부의 잔재를 없앤다는 구실로 구 중앙 청사를 막대한 재정을 들여 허물어버린 조국 대한민국 김영삼 정부와 대조적으로 이들은 후세에 올바른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점령군인 소련장군을 기억하라는 뜻에서 이 동상을 세워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는 먼 훗날 역사가 다시 평가 하겠지만, 이쯤 되면 이들 민족성의 대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873년, 소련군 동상 앞에는 “호흐슈트랄”고압 분수대가 설치되어 여기서 치솟는 분수가 소련 장군의 동상의 시계를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의도적인 작품이라면, 소련에 대한 오스트리아 민족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국회의사당을 떠나 우리는 유명 “음악가 와 역대 대통령”의 “묘지”가 있는 공원으로 안내 되었다.


다. 음악가와 역대 대통령의 묘지


“세계적인 음악가”의 묘지는 다 이곳에 있는 듯했다.

묘지 입구에는 “베토벤, 모찰트, 슈벨트, 요한 스트라우스” 등 음악계의 거장들의 기념 동상이 버티고 있었다.

모찰트는 생전에 “베토벤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이 유언에 따라 베토벤 옆에 영면 하게 된다.


“역대대통령 묘지”
는 과연 대통령의 묘지가 맞을까 의심할정도로 소박하였다.

입구를 음악가의 묘지 쪽으로 향하여 낮고 둥글게 돌관 위를 화초로 가꾸고 역대 순대로 그 관 앞에 대통령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맨 오른 쪽에 이름과 출생 년 월 일 만 적혀 있는 관머리(?)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대통령을 위한 가묘란다.

예술가의 묘지보다 검소하게 제작된 대통령들의 묘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될 기념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일행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하고 “음악회”에 가기로 긴급 결정을 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음악 감상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다.


라. 비엔나에서 음악회


비엔나는 “요한 스트라우스”가 탄생한 도시이다.

“찰스부르크를 모찰트가 먹여 살린다”면, “비엔나는 요한 스트라우스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요한 스트라우스 기념관에서 시작하는 음악회에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로 음악회를 원하는 사람들은 음악 공연장에서 내리고, 음악회를 원하지 않는 일행은 직접 호텔로 가기로 했다.

요한스트라우스 기념관


입장료는 단체 특별 요금으로 1인당 60유로란다.

일찍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입장권에 딸려 나오는 쿠폰으로 음료수를 제공받는 리셉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리셉션 시간에 참석자들과 환담을 하고 있는 여가 를 이용하여 안내는 필자부부에게 “요한 스트라우스의 기념 동상”을 보여 주겠다며 따라 나서란다.
특별 서비스인 셈이라 감사한마음으로 아내와 내가 안내를 따라 나섰다.
 

요한스트라우스(좌), 부라함(우)

요한스트라우스 기념 동상

 

음악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립 공원 모퉁이에 조명 불에 영롱한 광체를 발 하며 바이올린을 연주 하는 모습의 “요한 스트라우스의 동상”이 있었다.

동상 앞에서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사람,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 등 줄 지어 기념사진을 찍고 있어, 차례를 기다려 사진 몇 장을 찍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음악당으로 돌아 왔다. 이곳 연주 장소는 제법 넓은 홀로, 많은 사람들이 입장 하고 있었다.

순수 크라식 음악 연주가 아니라, 춤과 노래를 드라마틱하게 엮어 관람객이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럽게 프로그램이 짜여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난후 안내에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라는 인사를 건네자 그날이 오스트리아에서 마지막 근무라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현지 박 모라는 안내 청년과 그렇게 작별하고 호텔로 돌아 왔다.
이제 2일간의 비엔나의 체류를 끝내고, 내일 아침이면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로 이동하게 된다.


6.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하다.


오늘이 여행 7일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아침식사를 마지막으로, 오전 9시경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밖의 기온은 싸늘한 편인데 비까지 내리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지금까지 날씨는 우중이었으나 그런대로 스케줄은 차질 없이 진행 되고 있는 편이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 까지는 291 Km리며, 버스로 4시간 정도 달리는 거리였다.


창가를 통하여 끝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푸른 초원, 방금 비가 그치고 구름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저멀리 지평선에서 돌고 있는 풍차 날개에 부딪쳐 반짝이는 자연의 모습이 신비스럽게 다가오는 듯 하였다. 풍차 옆에는 동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성냥갑 같은 작은 방카로가 줄지어 자연과 어울려 아름다음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1시간이나 달려왔을까, 헝가리의 국경검문소가 우리를 막아섰다.

국가와 국가의 국경선이 아니라, 마치 같은 나라의 도시와 도시를 구별하는 검문소 같았다.

2명의 군복유니폼에 기관단총을 든 동안의 젊은 헝가리국경 검문관이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한단다. 여권을 꺼내 내미니 각자 여권에 출입 확인 도장을 찍어 주고 내려가는 형식적인 검문을 하고 있었다.

검문을 위해 잠시 멈쳐서있는 버스 창 밖 출입국 건너편엔 “코카콜라”란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국의 음료수가 이곳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 일 것이다.


이제부터 “헝가리”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

헝가리는 1948년 공산체제 국가로, 1989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1990년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이다.

1956년 10월 23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한지 3년 후, 자주 독립을 갈망하는 63명의 대학생(공대생)들이 중심이 되어 “소련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위해 모임을 만들어 소련 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는 등 10개 항의 자주 선언을 하게 되는데, 소련이 이들 주모자를 처형하게 되자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궐기대회가 확산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당시 4-5천여 명의 헝가리 인이 희생 되었고, 이 희생은 후일 이 나라 자주독립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부다베스트 전망대에서 다뉴브강을 내려다 보면서


특이한 것은, 헝가리가 독립된 이 후 지금까지 당시 희생자들 중 한명도 현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국가를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뿐이라는 "강한 자존심과 애국심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임을 알수가 있었다."
이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스탈린 탄압으로 “한 많은 민족”이 되었으며, 한번 한을 품으면 3배로 갚는 단다.

또한 이 나라는 1241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8개월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당시 몽고군은 무고한 이곳 주민들을 40% 정도 살상하는 잔인성을 보였던 역사를 갖고 있단다.

현재 이 나라의 사회 보장제도는 아이들이 생후 6개월간 국비 보조의 보육원에 맡기게 되며, 교육은 대학까지 국비이며, 근무시간은 8시간 이지만, 오버 타임은 3배, 주말은 5배까지  수당을 지불한단다.


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는, "부다 와 페스트 "


“부다페스트”는 현재 헝가리의 수도로, 2,800km에 달하는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뉜다.
좌측(서)은 8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구시가지 부다”로, 우측(동)은 300여년에 걸쳐 이룩된 신시가지 페스트”로 구별된다.

역사적으로 241년 몽골군의 외침으로 부다와 페스트의 번영기가 멈추게 되었으며, 1541년부터 150년 동안 터키에게 강점당하면서 왕궁 시민주택, 수도원이 무너지고 회교성원과 천탑, 터키식 둥근 지붕의 목욕탕이 성행하게 되다가 18세기 십자군에 의해 터키 군이 추방당하고 1872년 부다와 페스트를 통합, 부다페스트가 생겨났다.

부다 베스트 조감도


 이 도시는 고대 중세 및 근대의 유적들이 조화롭게 공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로마와 베네치아를 절충시킨 도시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이곳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흑해를 지나는 “다뉴브 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나라는 상업도시와 관광도시로 조명예술이 발전 하였을 뿐 아니라, 전국에 135개나 되는 온천중에 100여개가 이곳에 있을 정도로 온천의 왕국이란다.

부다페스트는 1,800년도에 홍수로 강 뚝 이 무너져, 2년 전 미국의 뉴 올리안스를 방불케 할 막대한 수재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곳이다. 거리를 누비는 차량은 비교적 소형차량이었고, 특이한 것은 도로에 “전용 버스차선”이 구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래에 대한민국 이명박 서울시장이 서울시 교통난 해소방안의 하나로 과감히 버스전용 선 운영을 시도하여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혹시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닌지---?

평범한 사람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반적인 사항이라도, 비범한 사람은 응용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관찰력이 있나보다.


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겔레리트 언덕


정통 헝가리 음식으로 점심 후에 “부다페스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전망이 좋다는 “겔레리트 언덕”에 올라 다뉴브 강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측에는 150년 전 런던의 타워 브리지 공법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체인부리지(=사슬다리)”가 다뉴브 강의 동서를 연결하고 있었다.

발아래 다뉴브강을 가로 지르는 체인 다리가 보인다.


이 언덕은 부다페스트에서 4번째로 큰 것이며, 이름은 이곳에 선교하러온 이태리 선교사 “겔레리트”가 현지 무속 인들에 의해 이 언덕에서 살해당하게 되는데, 바로 그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란다.

언덕 중턱에는 847년 혁명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돌로 성채를 건축하고, 순교한 선교사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14m의 "자유의 여신상"을 세웠는데 특이한 것은 이 여신상이 모스코바를 향하고 우뚝 서있는 것이란다. *

부다베스트 겔레이트 언덕의 자유의 여신상


여신상이 구쏘련을 향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침략을 잊지 말자는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이리라.

다뉴브 강의 체인브리지”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몇 일전 여행 중 버스 안에서 보았던 “글루미선데이=우울한 일요일”영화가 생각난다.

나치시대의 어두웠던 시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어느 무명의 작곡가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1935년경, 부다페스트 한 식당에서 한 여인을 두고 두 명의 유태인 남자가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애증에 찬 질투를 넘어서 질서 있는 사랑(?)관계를 수립하게 되어 누가 아버지인지 구별하기 힘든 아들을 둔다. 여기에 또 한명의 독일청년이 그 여인을 짝사랑하여 결국 3각 관계가 벌어진다. 식당 주인의 설득으로 독일 청년이 부다페스트를 떠나 독일로 귀국하여 후일 점령군인 독일 나치의 충복장교가 되어 다시 그곳에 섭정 관으로 나타나 재물착취, 유대인 학대 등 갖은 나쁜 짓을 다하게 된다.

그는 잔인 하게도 은혜를 입었던 여인의 남편 식당 주인을 살아서 돌아 올 수 없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여인을 차지한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 독일에서 대 기업인으로 성공한 그는 그 식당에 추억을 찾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복수의 칼을 갈아온 여인의 치밀한 계획으로 식당에서 심장 마비에 의한 사인으로 판명되도록 독살한다.

한마디로 나치가 유대인 멸종 계획으로 광기를 부리던 시대의 어지럽던 사회상을 배경으로 스릴 있게 엮어 가는 민족의식과 애정을 나타내는 드라마틱한 내용이다.

특이한 것은 이 식당에서 피아노를 치던 무명 작곡가가 작곡한 “글루미선데이란 곡”이 발표 된지 2개월 만에 18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됨으로 당시 이곡은 사회문제가 된다. 그것도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들 그 곡을 듣다가 또는 들은 직후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 곡을 “저주 받은 곡”이라 대서특필 하게 된다.

그 곡의 음률이 여성이 울 때 성대 떨림과 비슷한 음폭으로 사람의 마음속을 파고 들 뿐 아니라, 곡 진행이 장송곡과 비슷하여 당시 나치의 핍박으로 헝가리의 어두웠던 사회여건과 어우러져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 자살을 유도 했다는 것이다.


작곡가는 번민하게 되고, 스스로도 그 곡을 저주받은 곡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곡의 오선지를 다뉴브 강에 던져 버리고 전율하면서 권총자살(일설에 의하면 고층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가 그 곡의 오선지를 던져 버리고 몸부림치며 전율 하던 다리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다뉴브강의 체인다리”란다.


다. 헝가리, 어부의 성채 및 마챠시 성당


우리는 겔레리트 언덕을 내려와 7개의 뾰족한 고깔모양의 타워로 된 “어부의 성채”라는 곳과 역대 헝가리 왕들이 대관식을 올렸다는 “마챠시 성당”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으로 이미 붐비고 있었다.

기후는 Humidity가 높은 편 이어서 무더웠다.

부다베스트 어부의 성채 입구

“어부의 성채”는 중세의 이 고장을 방위 하기위해 만들어놓은 성이라지만, 한 번도 방어용으로 쓰인 적이 없었으며 중세에 어부들의 상업조합이 형성 되었던 관계로 “어부의 성”이라 불리게 된 곳이다.

헝거리 왕들이 대관식올렸다는 마챠시 성덩


“마챠시 성당”은 유럽에서 흔히 보는 성당으로서는 그리 화려 하지 않지만 단단하게 건축된 석조 건물로 낡아 보였다.

   한때는 헝가리 대왕들이 대관식을 올리던 곳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성당이다.*

성채 위에서 여유롭게 다뉴브 강을 연하여 형성된 페스트를 내려 보노라면 전경이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온다.*


라. 부다페스트, 영웅광장 & 사우나


우리는 헝가리 어부의 성체를 둘러 보고 호텔로 가는 도중 “영웅광장” 앞에서 버스를 세우고 둘러보았다.

 

부다 베스트, 영웅광장


영웅광장”은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 졌다 하며, 광장 중앙에는 높이 36m의 영웅 동상이 있었다.

이곳은 1986년 유네스코에서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광장 모퉁이에 조각 되어 있는 이 나라 건국의 영웅들의 동상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난후에 광장 건너편에 유럽 최초로 만들었다는 지하철 입구를 돌아 볼 수 있었다.*

영웅광장 건너편에 유럽최초의 지하철 입구


오후 7시경, 다뉴브 강에 아름다운 작은 분지가 형성된 곳에 건축된 호텔(Danubius Thermal)로 안내 되었다.

호텔에는 천연 온천과 사우나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주위는 고무바닥으로 되어 있는 조깅 코스가 섬 주위를 연하여 둥글게 가설되어있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조깅을 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여 30분간 Walking을 한 후, 온천과 사우나를 즐길 수 있었다.


남녀가 공동 사용하는 사우나 입구엔, “옷을 벗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이 있었지만, 설마하고 미국에서처럼 수영복을 입고 사우나 한 모퉁이에 앉았다.

온천은 넓은 천연 온수로 수영장만한 크기 인데 반해 사우나 내부는 아주 작아 5-6명 정도 수용가능 한 비좁은 계단식 마루가 설치 되어있었다.

얼마쯤 앉아 땀을 빼고 이는 도중 현지 중년으로 보이는 배가 앞으로 처진 전라의 여인이 수건 한 장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무릅위에 수건을 펴서 놓고 필자 앞에 자연스럽게 앉는 것이다.

아마 “옷을 벗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에 순응하는 여인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문화의 차이일 것이라 생각하고 필자가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고 사우나를 나와야 했다.


마. 헝가리, 국회의사당


이제 여행 8일째를 맞는 4월 30일 주일 아침이 밝아 왔다.

아침 일찍 호텔이 있는 섬 주위로 연결되어 있는 조깅코스로 나가니, 벌써 부지런한 매형이  다뉴브 강의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조깅코스를 한바퀴도니 1시간정도 걸렸다.

아침을 서둘러 마치고, 출발전에 주일 예배(9시30분)를 드리자는 지 장로의 제의에 따라 버스에 올라 간단히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고 10시경, 호텔을 출발 하여 “국회의사당으로”로 향했다.

아침예배의 기도 덕분인지 날씨는 이번여행 중에 제일 좋은 편이다.

호텔 부속 온천 및 사우나를 즐기고 깊은 잠을 자서 인지 주위의 경치가 청명한 날씨에 어울려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고 있었다. 

국회 의사당은 1884-1904년에 다뉴브 강 동쪽 베스트 지구 ‘체인다리’ 근처에 고딕양식으로 건축 되여 궁전 같은 모습으로 잡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에 들어 갈수 없어 안쪽의 구조는 볼 수 없었으나, 문헌에 의하면 각종 유명 미술품(1893년 ‘문카치미하이’라는 작가가 그린 거주지의 정복)과 조형으로 장식 되어 있고, 붉은 카펫으로 복도를 깔아 위엄을 더해주는 상당히 호화판 수준이라 더욱보고 싶었으나 그날따라 문이 잠겨 있단다.

현재 이 나라의 국회의원의 수는 800명으로 직선제로 소선거제를 택하고 있다.

국회의사당 맞은편엔 쿠리아(고등법원)가 있었는데 오늘날 민속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국회의사당 자리는 1956년, 소련으로부터 이 나라가 독립 하기위하여 “63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대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소련으로 부터 자주권을 주장, 민중복기를 일으키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7. 슬로바키아,  “타트라” 국립공원으로 가다.


4월 30일 우리 일행은  국립의사당을 돌아보고, 폴란드와 슬로비키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타트라”국립공원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 위해 4시간 이상 이동하는 장도에 올랐다.

슬로바키아 알프스의 타트라 산장 모텔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꼬불꼬불 험한 산길을 따라 오후 6시경에 목적지인 “타트라 국립공원‘에 자리 잡고 있는 ”Gran Jasna Hotel"도착할 수 있었다.

이 공원은 알프스산맥중의 하나로 총면적의 3/4는 슬로바키아, 나머지 1/4 이 폴란드령에 속하고 있는 곳으로 1949년도에 국립공원(TANAP)으로 지정된 곳이란다.

우리가 도착한 모텔은 고도 2,663m의 눈 덮인 정상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산장 같은 기분이나서 하루 밤 쉬어 가는 기분은 그런대로 새로웠고 의미가 있었다.


타트라의 저녁 기온은 영하로 한기가 느껴졌다.

저녁식사를 마친 8시경이 되었으나 아직 타트라의 산중은 어둡지 않았다.

호텔에 사우나와 온천이 있었으나 서비스 시간이 지나버려 사용할수 없었고, 피로한 몸이지만, 이제 오늘이 지나면 이자리엔 다시 오지 않을것이다며 일행들을 독려하여 산 정상부근까지 오르기로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고등시절에 부르던 “바위 고개 언덕, 소나무여, 그 집 앞” 등의 가곡이 콧노래로 시작되다가 어느새 합창이 되어 눈 덮인 알프스산맥에 흘려 퍼진다.

깊이 들이 마신 타트라 산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짜릿함과 키 작은 나포레온이 세계정복의 꿈을 키우며 넘나들었다는 알프스 산의 한 모퉁이를 걸고 있노라니, 오늘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여행이란 이렇게 “몸을 젊고 건강하게, 마음을 넓고 깨끗하게, 기분을 좋고 명랑하게” 하는가 보다.


8. 슬로바키아를 떠나 “폴란드”로 가다.


오늘은 5월 1일, 슬로바키아 타트라 정상에서 여행 9일째 되는 날을 맞았다.

아침 6시에 기상, 아침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홀로 어제 오른 반대편의 타트라 산의 산책로를 따라 나섰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으나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모여진 물이 제법 큰 시냇물이 되어 성난 강물처럼 구비 치며 급하게 아래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산중계곡의 물치고는 예상외로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요즈음 계속 비가 내려 물량이 많아 졌고, 산등성이의 흙들이 섞여 내려오기 때문리란 생각이 들었다. 잔득 찌프리며 참고 있던 구름덮힌 하늘은 타트라를 출발하는 아침 8.30분경 부터 기여코 장대비를 쏟아 붇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척을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내리는 쏘낙비를 헤치며 아침 10시 30분경, 폴란드 국경에 도착했다.

군복 유니폼의 폴란드 출입국 관리원이 버스에 올라  우리들의 여권을 점검하는 형식으로 검문을 마치고 쉽게 통과 시켜 주었다.

“폴란드”는 1989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된 슬라브족으로 폴란드 언어를 따로 쓰고 있으며, 문자는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이다.

영토의 70%가 산악으로 되어 있는 한국에 비해 가용면적이 10배나 큰 편이며, 수도는 바르샤바이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겨울엔 눈이 많단다.

인구는 4천만으로, 현지에 한인 동포가 극소수 상주 하고 있다 한다.

춤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결혼식을 하게 되면 1박 2일 계속 파티를 즐긴단다.

강인한 민족성을 갖고 있으며, 국민소득은 8,300불정도로 낮은 편이다.

이 나라는 국경지대가 연하는 독일과 러시아의 열강사이에서 늘 피지배 위치에 있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아직 동유럽권에서 체코나 헝가리만큼 개방되어있지 않지만,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150만 이상 학살당한 역사의 현장  “유태인 수용소(아우슈비츠)"가 있는 곳이다.


가. 폴란드 경찰의 후진성(횡포 ?)


“폴란드”를 향하는 버스 창문 밖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들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그 넓은 들판에 농작물이나 과수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지반이 암석이라 농작물이 잘되지 않는다는 안내의 말이다.

드넓은 초원과 연하는 낮은 언덕위에 슬래브 지붕의 2-3층의 별장 같은 건물들이 아름답게 창문을 스치고 있었다.

폴란드의 드넓은 초원과 그림같은 별장들이 구름에 덮여있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10시 40분경 폴란드 국경을 떠나 12시 30분 경, 폴란드 하이웨이 진입로에 다다랐을 때 폴란드 경찰이 우리가 탄 버스 앞을 가로막고 긴급 정지시켰다.

폴랜드 경찰의 불심검문 ?*경찰이 우리가탄 버스 증빙서류를 압수 Van안으로 들어가 40여분간 발이 묵힌상태


소위 불심검문을 당한것이다.
경찰은 차에 올라와 체코인 운전기사에게 운행기록부와 소화전등을 점검하더니, 아무 말 없이 운전기사의 신분증과 검사 증 등을 압수 하여 길옆에 세워둔 경찰 Van안으로 운전기사를 불러들여 한 시간 정도 붙들어두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가도 좋다는 경찰의 선심(?)이 떨어 졌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돌아오는 운전기사에게 지체한 이유를 물으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통상 교통안전을 위해 경찰이 하루에 12시간이상 지속운전자를 단속을 하기 위해 이와 같이 노상에서 불심 검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일 운전일지에 위반사실이 없는 것이 이미 확인된 뒤이고 보면, 무슨 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불우 했던 시대, 검문소나 노상에서 경찰의 노골적인 행패(?)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외국관광객을 이렇게 무례하게 세워두는 것은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둔함인가 아니면 후진성일가? 아무튼 이런 연유로 폴란드의 첫인상은 불쾌 바로 그것이었다.

나. 폴란드, 크라카우 시가지


폴란드의 “크라쿠프(크라카우) 시가지”는 중세이후 비교적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편이란다.

아직도 공중 전기 줄에 의해 움직이는 전동차가 거리를 누비고 있는 모습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고풍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도시는 ‘퀴리’ 부인과 ‘쇼팽’의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2005년도에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 수학하고, 한때 같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는 “야기에오 대학”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시내 공중 주차장에 다다르니 이곳에 온지 2-3년 되었다는 김 모라는 한인 청년이 현지 안내를 하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2-3년 동안 이 나라에 대해 무었을 배워 알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내색 하지 않았다.

주차장 건너편에 “삼성”이란 간판이 보였다. 이곳까지 삼성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모국의 국력신장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경찰로부터 불쾌했던 첫인상을 떨쳐 버리고, 현지 안내를 따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금 광산 비엘리츠카”를 찾아 가기로 했다.


다. 폴란드, "비엘즈카의 소금광산" *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바다였던 곳으로, 바다가 건조되어 암염광산이 된 곳으로 추정되며, 약 10세기경에 소금제조장의 흔적이 발견되어, 현재 관광용 소금광산으로 개발해 놓은 곳으로 197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문화 유산으로 지정 된 '비엘즈카 소금광산'이 있다.

소금광산 입구(바위돌에 유네스코 지정 년도가 보인다)


오후 5시 20분 늦은 시간임에도, 입구에는 많은 관광객이 비를 맞으며 차례를 기다리는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내가 입장권을 구입하여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헬멧을 쓴 소금광산 안전 관리원(여성)이 나와 광산 내에서의 안전 수칙에 관한 설명을 한 후 우리를들을 안으로 안내 했다.

소금광산 굴속


안내가 소금벽임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젖은 옷을 털면서 그 관리원을 따라 광산 입구로 들어 설 수 있었다.

소금광산을 돌아보는 시간은 2시간 정도로, 구석구석 돌아보고 저녁 7시 20분경에 굴속을 나올 수 있었다.

이 소금광산은, 지상 입구에서 땅속으로 각 층에 7계단씩 53개 층으로 모두 372계단으로 연결 되어있었다. 갱도의 총길이는 300Km, 계단의 총 높이는 직선거리로 64m, 지하의 최저지점은 지상에서 135m나 된단다.

계단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계단 틈사이로 64m높이의 바닥을 내려다보니 각층마다 밝혀놓은 불빛만 아련히 보이는 가파른 절벽으로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노라니, 나무 계단과 소금 벽이 온통 사람들의 이름과 낙서로 가득했다.

이곳을 방문했던 관광객들이 왔다간 흔적을 후세에 남기려는 인간의 강한 본능의 표시이리라. 가끔씩 한글도 보였다.

한국인 관광객도 년 간 2만을 넘고 있다니 한글이 보일만도 했다.


지하 동굴 구석구석에 형성된 공간에는, 소금 돌로 만든 각종 기념 조형물들이 조각되어 있었고, 천정에 소금으로 만든 크리스털 진품을 방불케 할 “상들리에” 와 입체 식으로 “성화”를 조각하여 웅장미를 더해 놓은 “거대한 지하 성당”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

소금광산 지하의 소금벽면을 깍아아 만든 성당


성당의 크기는 백여 명이 함께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지하 공간이었다.

몇 세기 전에 이곳을 다녀갔다는 “괴테”의 조각된 모습도 보였고, 어떤 방에 들어가니 갑자기 찬란한 빛이 발산 되면서 어두움이 겉이고 연이어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소금 호수”의 경이적인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소금호스


이따금씩 광산 안내자가 들고 있던 플래시를 굴 벽에 접촉시키고 비추며, 투명하게 보이는 굴 벽이 소금바위임을 입증시켜 주고 있었고, 최종 집결지에는 굴속에 간이식당으로 사용되는 넓은 공간도 있었다.

소금광산 지하동굴에서 나오니, 소금광산은 어두움으로 서서히 덮이고 있었으나 비는 계속 쏟아 지고 있었다.
우리는 소금 광산을 출발하여 “비즈아강의 다리”를 건너 바벨언덕 우측에 “바벨 성”을 바라보며 “크라카우”로 다시 이동하여 현지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라. 폴란드, 중앙시장 광장


우리는 저녁식사 후에, 계속해서 중앙시장의 야경을 관광하기로 했다.

이 광장은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크라카우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유럽에서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2번째로 넓은 광장 이라 한다.

산마르코 광장은 수천마리의 비둘기 떼가 관광객들에게 온갖 재롱을 떨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비둘기떼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들었다.
이곳저곳에 파라솔을 친 상인들이 자리 잡고 있는 노천 상점이 보였으며, 광장을 산책하는 관광객과 젊은 연인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 9시경,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학살했던 수용소"로 지금은 교육용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있는 일정을 재확인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 졌다.


9.  폴란드, 15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서


아침 7시에 기상, 9시경 호텔을 출발하여 크라카우 서쪽으로 61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아우스비츠”수용소를 찾아 나섰다. 날씨는 시계가 불투명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히 낀 편이었으나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한다는 광적인 망상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후 150만 명의 유대인들을 인종청소라는 이유로 악랄하게 살인 행위를 하는 광기를 부렸다. 당시 나치 정권은 소련, 슬라브족, 폴란드 족, 유대인등의 정치범을 수용한다는 구실로

3개의 수용소를 건축하게 되는데, 제 1수용소는 1940년 28동 규모로 건축했으나, 점차적으로 제 2수용소(1942년), 제 3수용소(1943년)등 300동 이상씩 증축하였다는 것이다.


10시 23분경, 28동의 제 1수용소인 붉은 벽돌집에 이중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도착 했다. 현재는 그 수용소를 보수 하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사용하면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곳은 1079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어진 곳이기도 하다.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 입구 철문에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영원히 세상에 나갈 수 없는 지옥 길 임에도, 독일어로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라고 수용자들을 기만하는 현수막이 입구를 가로질러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곳 전시실 방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사망한 유태인의 머리카락, 안경테, 압수된 가방과 신발 그리고 생활도구가 가득하여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으면 저렇게 많은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을까?

희생자 유물전시관을 지나 당시 수용자들의 거실 쪽으로 이동했다.

이불대신 풀잎 덤불을 깔아놓은 침실은 현대식 외양간이나 돼지우리 보다 못했다.

또한 어느 방에는 벽면 가득히 생체실험을 위해 동물보다 더 처참하게 죽어간 젊은이와 어린이, 중노동에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사진들이 방 벽 가득히 전시 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사워를 시켜준다며 유태인을 몰아넣고 독살하던 가스실이 그을린 채로 남아 있었고, 나치가 개발하여 한통으로 400명이상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자랑하며 사용한 빈 가스탄통이 어느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전율 하였다.

수용소안을 둘러 보고 있다.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저럴 수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이곳은 “스티븐 스필드라”는 감독이 영화한 “쉰들러 리스트”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히틀러 나치정권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감행되던 당시, 독일의 전형적인 장사꾼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람이 나치의 광기가 유태인 인종의 멸종을 위해 벌리는 학살행위에 대한 독일인으로서의 참회와 유대인 종족 보전이란 차원에서 목숨을 걸고, 독일 장교를 매수하여 유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값을 치루면서 살려내던 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이다.


이러한 독일인이 있었기에 독일은 국가적으로 용서 받을 수 있었는가보다.

당시 구출된 유대인쉰들러에게 건넨 반지에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구절은 지금도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인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 구절이다.  그 후 독일은, 여러 차례 국가수상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들이 눈물로 참회 하고 있으며, 많은 독일국민은 자숙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수용소”방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소연했던 독일과 폴란드는 관계가 개선되고 있으며, 세계가 관용의 마음으로 독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현재 유태인들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필 수로하고 있단다. 12시 20분경, 필자는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처참히 희생된 영령들을 위하여 “고이 잠드소서!” “다시는 이런 끔찍한 비극이 이지구상에서 일어나지 말기를--” 고개 숙여 기도를 드리고, 수용소를 나와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은 바로 수용소 인근에 있었다.

수용소에서 기분이 다운 될 대로 다운된 터라 점심식사가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현지 안내가 12시에 북 킹했기 때문에 늦었다고 서둘러 식당에 도착했는데, 오히려 식당에서는 3시에 북 킹이 되었는데 너무 일찍 왔다고 놀라는 표정이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안내는 우리에게 “돼지고기 메뉴를 주문했는데, 생선요리만 가능하다”는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결국 준비되는 대로 서부 하겠다하여 식당에 앉아서 기다리니, 생각 보다 일찍 1시 30분이 되자 점심이 서부 되기 시작했다. 서부 된 메뉴는 생선이 아니라 돼지 고기였다.

현지 가이드 청년이 현지에서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이 고조 되었지만, 현지 가이드 한인 청년이 낮선 나라에서 살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참기로 했다.

점심을 마치니 오후 2시 40분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폴란드의 식당을 떠나 4시간이 소요되는 “체코 제 2의 도시, 브르노”로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10. 체코, 브르노에서 하루 밤의 추억을


우리는 수도 “프라하”로 가기 전에 체코 제2의 수도 “브르노”에서 하루 밤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체코로 가는 길은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 이름 모를 농작물이 드물게 보일뿐 드넓은 푸른 초원의 연속이었다.

체코시가지 조감도


오후 4시 30분경 “폴란드 와 체코”를 가르는 국경에 도착했는지 체코의 검사관이 버스에 올라와 여권을 간단히 조사하고 통과 시켜 주었다.

동유럽은 군데군데 국경 검문소가 없었으면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각국 들판의 전경은 거의 흡사 했다. 앞으로 3시간 더 달려야 “브르노”에 도착한다.


아파트형 건물들로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이따금씩 이어지는 초원, 그 초원엔 잡목이나 잡풀이 보이지 않았고, 누가 손질한 것 갖지 않은데 일정 길이의 파란 풀이 드넓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으로 보아 목축업이 꽤나 성행할 것으로 생각 되었으나, 기대했던 목장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편이었고, 가끔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의 모습이 한가로워 보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저녁 7시가 가까워오자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었다.

우측으로 붉은 기와지붕의 건축물들이 잘 정돈된 도시가 눈앞에 다가왔다.

저녁 7시 20분경, “브르노”지역의 호텔 “Holiday Inn”에 도착한 것이다.

호텔은 시설이 좋은 편이었으며, 저녁 메뉴도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여장을 풀자마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중국관광 팀으로 보이는 구릅이 앞서 도착하여 북적대고 있었다. 저녁을 마친 후, 필자는 아내와 서울에서 온 형님 그리고 Mrs.전과 함께 40여 분 간 호텔주위를 산책하며 체코 “브르노”라는 도시에서 하루 밤 산책의 추억을 만들었다.


11.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찾아서


아침 9시경, ‘부르노’를 출발하여 3시간이상 달려 ‘프라하’에 도착하니,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안내양이 우리를 현지 식당으로 안내하여 푸짐한 갈비로 점심을 할 수 있었다.

체코는 원래 “체코슬로바키아”이었으나 1993년 슬로바키아와 분리된 나라로서 2005년에 EU(유로화)에 가입한 나라이다.

우리한국과는 1990년 3월 22일 국교가 수립되었으며, 현재는 주 체코 대사관이 슬로바키아 대사관을 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구는 1,046만 명, 면적은 7만 8,864Km2(한국의1/3배)이며, 이들은 체코 고유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부 보헤미아 지방과 동부 모라비아 지방으로 나뉘고 있다.

체코는 650년 전, 국왕 카를4세가 신시가지를 건립하게 되는데 당시부터 환경오염이 없는 도시를 설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중 프라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 받지 않고 중세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도시 중에 하나이다.

프라하가 있는 보헤미아 지역은 구릉과 분지가 교차하는 지형으로 “보헤미아의 숲"으로 불리는 살림이 우거져 있다.

보헤미아 북서부에는 온천이 많으며, 모라비아 지방은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농지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 이 도시영화 “프라하의 봄”의 촬영 장소이기도하며, 우리가 돌아볼 예정된 관광지는 “바츨라프 광장”, “황금소로”, “구시가지”, “시계탑의 천문 시계”등이다.


가. 체코, 프라하의 성


점심식사 후 우리는 11세기에 시작하여 1,000년 동안 중단과 지속을 거듭하다가 1929년에 공식 개방한 “세인트 비루스(St. Vitus)성당”앞을 지나서, 흐랏차니 언덕위에 성곽과 함께 건립되어 프라하 오랜 역사를 지켜 왔다는 “프라하 왕궁”(현 대통령집무실)앞에 도착했다.

체코, 프라하 왕궁-현, 대통령 집무실및 관저


왕궁전면은 철책 울타리가 되어 있었고, 입구 정문 양편으로 초병이 각각 한명씩 조각된 인형 처첨 서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서는 관광객에 상관없이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로봇트 처럼 서있는 것으로 보아 초병은 보초로서의 역할보다는 의장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성안에는 성 비루스 대성당 이외에, 성 조지 바실리카 성당, 로레토 성당”등의 교회와 “스트라호프” 라는 수도원이 유명하다 했다.

성곽 윗부분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고깔모양의 뾰족탑과 붉은색들의 지붕 그리고 노란색의 벽 색갈이 조화를 이루어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고 있는 시가지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이래서 프라하를 “황금의 도시”라고 부르는가 보다.


나. 체코, 프라하의 황금소로


“황금소로”라고 하여 황금 상들이 줄지어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었지만, 황금 상들은 볼 수 없었고, 옛날 성의 연금사 들이 살았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골목의 크기는 아주 좁아 답답할 지경이다.

집들은 16세기 방어용 성벽에 지어진 것으로 전설에 의하면 당시 소로의 폭이 1m 정도로 좁은 거리 양쪽에 루돌프 2세 치세동안 황제를 위한 금, 영원한 젊음의 영약, 현자의 돌을 제조하는 연금사들이 거주한 곳이라 황금소로라 명명되었단다.

프라하의 황금 소로



필자가 돌아본 황금소로는 좁은 골목에 길게 늘어선 상점들 가운데는 무기전시관을 비롯 하여 상점마다 나름대로 긴 역사와 특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특색있는 기념품이 될 만한 것이 없는 구멍가게에 불과 하다고 불만 석인 말하자 그래도 있을건다 있다 라며 아내가 나의 생각을 부인하고 나선다. 1917년 이 나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이골목 22번지에서 이 거리를 산책하며 "성"이란 작품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좁은 골목으로 소방도로가 확보되어 있지 않아 화재 시엔 엄청난 피해가 예상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시내 관광을 끝내고 카를교로 향했다.


다. 체코, 프라하의 “불타바 강의 카를교(Charlse Bridge)"


프라하엔, 불타바 강을 가로 지르는 17개의 다리가 있다.

이중에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카를교”가를 찾아보기로 한것이다.

이 다리는 1,118년 목조교로 제작되었으나 부서져, 1,158년 석조교로 복원했으나 194년 후에 홍수 범람으로 다시 파괴되어, 1,357년 7월 카를 4세가 직접 주춧돌을 놓아 공사가 시작하여 제작된 다리로 “프라하의 다리”라 하였으나, 1780년부터 이 다리의 축조를 명한 “카를 4세”의 이름을 따서 “카를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520m이고, 폭이 10m 가 된다지만, 차량통행이 금지되고 있으며 각종 야외공연이 이곳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으며 붙타바 강에서 가장 오랜 된 다리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에 하나란다. 다리는 한마디로 그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요, 예술의 결정체라 생각 될 만큼 아름다웠다.


다리 양쪽 난간에는 유명한 조각가 조한 부르곱이 제작했다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상을 안고 있는 St. Nepomuk동상을 비롯하여, 섬세하게 조각된 30개의 동상(현재 서 있는 것들은 카피라 함)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웅장하게 줄지어 있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관광객들로 다리 위가 붐비고 있었다. *

다리 위 여기저기엔 무명화가가 이지역의 풍경화를 그려 팔기 위하여 상품으로 전시하고 있었으며, 즉석에서 원하는 행인들을 앉혀 놓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다리 건너로 보이는 마을의 전경은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연안의 아름다움과 견줄만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카를교 다리위 중간부분


카를교를 건너면 카를 4세 동상


우리는 “카를교”를 건너자마자 우뚝 서있는 카를 4세의 동상 밑에서 집결한 후, 기념 사진을 찍고 저녁식사를 위하여 골목 시장 길을 걸어 한때 포도주 지하 저장 창고를 개조 하여 만든 현지 식당으로 이동했다.


라. 체코,  “프라하의 야경” 선박 유람.


저녁식탁엔 푸짐한 돼지 갈비가 나왔다.

이런 돼지 갈비 음식엔 포도주를 곁들이는 것이 적격이라 생각되던 참에, 우리일행 모두에게 포도주를 쏘겠다는 사람이 나와서 환영의 박수를 받았다.

우리일행은 지금까지 저녁마다 돌아가면서 그 지역의 특산물인 포도주나 맥주를 스폰서 하면서 여행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마침 그날이 김택승 사장 내외의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라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스폰서가 되겠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 두 부부를 위해서 즉석에서 빵으로 만든 “약식 축하 케이크”에 둘러서서 축하의 노래로 “생일 축하 합니다”를 합창했다.

이어서 축하 겸 개인 노래장기로 이어 졌다.

마침 우리가 사용하던 식당은 지하 별채에 포도주를 저장하던 장소를 개조하여 만든 방으로 왼 만 한 고성도 다른 방에 방음이 되고 있어 노래 파티장소로선 안성맞춤이었다. 

Mrs.최, Mrs.임을 시작으로, 지 모 장로의 굵은 바리톤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푸라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흥이 한참 고조 되고 있었지만 밤 9시 옵션관광으로 선상에서  
프라하의 야경을 보기로 예약한 상태라 아쉽지만 8시 30분전에 축하 파티는 끝내야 했다.

우리는 이색적인 경험을 체험하기 위하여 배를 타는 부두까지 덜렁거리는 대중 전동차를 15분간 타고 이동했다.

프라하, 불타바 강변의 야경


부두에는 전세로 빌려 놓은 30명 정도 규모의 적은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박 측에서 선박요금 1인당 30유로에 포함되어 제공하는 맥주, 소다수 중 원하는 것을 한 컵씩 받아 들고, “불타바 강(거친강)에 모타 보트에 올라 연안 일대의 야경을 40분정도 유람하며 야경을 즐겼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자랑하는 현지 청년의 유창한 영어설명을 들으면서-. 불야성같이 밝게 비치는 전등 빛 속의 프라하, “불타바 강”의 야경은 추한 것들은 어둠에 가려 지고, 아름다운면만 불빛에 반사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을 안겨 준다.


마.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을 찾아서


이렇게 “불타바 강의 야경”을 즐기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구시가지 광장”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광장은 낮에 보는 것과 밤에 보는 느낌이 다르다.
밤 9시 40분경, 부두를 출발하여 30분간 걸으니“구시가지 광장”이 나왔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야경


마침 이 지역 시내 중심가는 외국소속의 버스 주차가 허용되지 않는다하여 1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버스를 대기 시키고 도보로 접근해야 했던 것이다.
프라하에서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아내와 거리를 걸으니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다. 광장 인근엔 늦은 시간임에도 산책 나온 현 주민과 관광객으로 보이는 인파가 한데 어우러져 복작되고 있었고, 코너에는 인근을 돌며 관광할 수 있도록 말이 끄는 마차들이 대기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구시청사와 틴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시대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구시청사는 1338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Jan왕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오리지널 고딕 양식의 탑 위에는 구 시가지를 나타내는 “르네상스식 창문”이 있고, 구시청의 벽에는 2개의 소형 시계 창문에 각각 사도들의 얼굴이 보였고, 그 밑으로 나침판모양의 웅장한 “천문시계(사도시계=Apostle Clock))”가 골통품 처럼 버티고 있었다. *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구시청벽면의 천문 시계들


17세기경에 예수의 12제자 상이 매 시간마다 2명씩 시계창문에 나타나게 하는 기능 장치를 추가로 제작 하였고, 19세기경에는 시계 밑에 달력 판을 추가 하여 설치했단다.

이 시계는 년, 월, 일, 시를 모두 나타내는 기능과 지구를 중심으로 유성들의 궤도와 황도 12궁을 보여주는 천문학적인 기능을 갖고 있단다.


주변에는 옛 귀족들의 저택이 중세풍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광장 한 모퉁이에는 간이식당과 관광객들이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쉬어갈수 있도록 모퉁이 마다 큰 텐트와 파라솔 Table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비가 멎은 후의 밤공기는 신선하여 광장을 산책하기에 쾌적한 편이었다. 광장과 접해있는 골목에 줄지어 있는 크리스털 기념품 상점에 전시해 놓은 크리스탈들이 오색 찬란하고 신비로운 빛깔로 반짝이며 행인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40여분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

호텔로 돌아가자는 안내를 따라 버스가 주차해 있는 곳으로 도보로 이동해 갔다.


사. “Missing Person"을 찾아라.


버스가 대기 하고 있는 집결지에 도착하여 안내양의 인원점검이 있었고, 우리를 실은 버스는 유난히도 많은 공사 중인 거리를 피해가며, 11시30분경에야 호텔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일행 중 가장 연로한 한사람이 Missing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출발 직전 인원점검을 위해 번호(부부간에 한 번호씩 매겨짐)점검이 있었으나, 앞자리에 있던 부인이 평소와 같이 남편이 뒷좌석에 있으려니 믿고 “예!" 라고 번호 점검에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 이었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도착한 일행 모두는 난리가 났다.

일행 중 가장 연장이신 이모박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해하는 안내양과 일행 중 용감한 C 장로가 선발대로 “구시가인 광장”으로 달려갔고,

이어서 후발대를 2개조로 편성하기로 했다.

Taxi비를 위하여 호텔에서 체코 돈(꼬로나)으로 바꾸어야 했다.

호텔에 이 고장 지도를 부탁하여 각자 지참하고 전화가 없으니 연락처는 호텔로 하고, 최악의 경우 가상 집결지를 정해서 서로 지도에 표시했다.

경찰에 도움을 다시 요청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호텔에 당부 했다.

낯 선 거리에서 자칫 우리도 미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강이 꽤나 흘렀는데 선발대로 나간 안내와 C 장로로부터 구시가지 광장에서 Missing Person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화가 왔다. 게다가 밤이 늦어 선발대의 안전을 위하여 지원군을 빨리 광장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다. 상황이 급해 졌다.

불러놓은 콜택시가 왜 이리 더딘지 모르겠다.

택시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막 호텔 문을 나서려는데, 호텔안내로부터 경찰에서 Missing Person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안도의 환성이 터졌다.

노익장을 과신하던 이 분은 평소에 부지런하고 매사에 솔선하고 적극적이었다.

이날도 줄지어 서있는 상점 쇼윈도의 밝은 전등불에 보석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크리스탈의 영롱함”을 사진기에 담다가 대열에서 낙오된 것이다.


나중 그분에게서 들은 내용은 산을 촬영하다 옆을 보니 내가 저만치 가더라는 것이다.

한참을 나를 따라 왔으나 가까이서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쓴 다른 사람을 착각했던 모양이다. 당일 투숙하는 호텔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얼마동안 출발지에서 기다렸으나, 헛고생하는 것 같아 인근 호텔로 찾아가 여행사 본사에 e-mail로 예약된 호텔을 확인 하려 하였으나, 유인물에 나와 있는 e-mail 주소로 전송이 되지 않아 더욱 황당해 지더라는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자, 마침 앞을 지나는 헝가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평소 영어숙지는 이런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 같다.

마침 호텔과 안내양들이 경찰에 신고해 놓았던 터라 바로 접선이 가능했던 것이다.


밤 1시30분이 다 되어서 택시를 타고 황당한 표정으로 도착하는 Dr. L과 간만의 차이로 선발대로 나갔던 동료들도 도착 했다. 우리는 환호의 박수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밤 깊은 줄도 모르고 호텔로비에 둘러앉아서, 이번 사건을 통하여 몇 가지 값진 교훈자료를 나열하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새벽 2시 반이 넘어서야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으나, 오늘밤 프라하의 밤을 마지막으로 12일의 모든 여행 일정이 끝나게 된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Missing사건으로 너무 긴장했었던 탓인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렇게 체코의 밤은 비몽사몽 중에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12. “프라하여 안녕 !”


아침 6에 기상, 너무 일러 호텔식을 할 수 없어 약식으로 준비해준 도시락을 한 봉지씩 들고 7시에 일찍 호텔을 출발 했다.

오늘 필라 행 항공기 예약 시간이 오전 10시 5분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오후 1시에 런던으로 떠난다는 안내양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즐거웠습니다. 또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수속을 마치고 프라하 공항을 떠나는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그간 정이 들었는지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인다. “그간 수고 했다, 잘 가라. 곧 시집간다는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겨 놓고 우리 부부도 프라하 공항보안 점검 구역을 통과했다.

인간은 만날 때 헤어짐을 전제 한다지만,헤어짐은 역시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갖게 한다.


항공기가 프라하 공항을 이륙하여 미국으로 향하는 동안, 눈을 감고 지난 12일 간의 여행 기간 동안의 각종 추억을 떠올려 본다.


이번 여행은, 필자에겐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기회의 하나였다.

유럽은 인접해 있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한때 서로 먹고, 먹히는 아픈 역사의 현장임인 동시에, 찬란하게 꽃피웠던 유럽의 중세 문화와 현대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버스로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서, 창문을 통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푸른 초원의 정취와 구름도 쉬어가다 멈추어 버린 만년설이 뒤 덮인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때로는 지척에서 때로는 멀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기억도 다시 살아난다.

풍차가 도는 끝없이 전개 되는 푸른 초원의 낮은 동산. 울긋불긋한 기와지붕과 노란색의 벽으로 단장된 동화속의 별장모양 예쁘게 단장된 그림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국경지대의 평화스러운 전경에 흠뻑 취해 있는 동안, 버스가 서고 각국의 검열관이 여권 조사를 위하여 버스 안으로 올라 올 때 비로소 “국경을 넘고 있구나!”라고 느끼던 그때의 순간들이 머리에 스친다.

그리고 강행군에도 지치지 않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노익장을 과시하던 일행들----.

이들과 함께 긴 시간을 버스로 유럽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명 광지를 찾아 다니는 동안, 인격과 연령을 초월한 각종 조크 와 경험담을 나누며 즐거웠던 시간들---.

이름이 전무식이라 “전적으로 무식하다”라고 스스로 소개하면서도, 가장 유식한 조크로 일행을 웃기던 Dr. J ---.
무뚝뚝하고 건방지고 서비스 없는 미인보다, 말대가리 같이 생겼어도 상냥하고 서비스 좋은 여인이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창조할 줄 아는 현대 여성이 갖추어야할 덕목이라는 친척의 실화
“말대가리 학설(?)”을 공격적으로 발표하여 “말대가리”라는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낸 L 박사---,

007작전을 방불케 할 Missing Person 구출작전으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동료애. 

안내양이 눈시울을 적시며 진지하게 들려주던 어린 나이의 연애 실패로 방황했던 아픈 경험담을 들으면서, 사랑하는 딸의 숨겨진 슬픈 과거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아 안쓰러웠던 추억까지, 여행기간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영화필름이 되어 지나간다.

더욱이, 2 년 전에 척추 대수술로 아직도 보행이 불편하신 누님이 이번 여행에서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일정을 함께 마칠 수 있게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프라하여 안녕!   동 유럽이여 안녕!


                                2006년 5월에  이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