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이오영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탈리아 편
목 차
1.파리를 거처 로마로
*2.로마는 이탈리아의 영원한 수도
*3.로마 제국의 흔적
*4.콜로세움을 찾아서(사2)
*5.진실에 입에서 결백을 증명하라
6.지하무덤 카타콤페
7.바티칸 박물관
*8.성 베드로 성당
*9.스페인 광장(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곳)
*10.트레비분수대에서
*11.세계미항 나포리를 찾아서
*12.산타루치아 기념탑과 누오보성
*13.화산재에 갇혀 있던 도시 폼페이를 찾아서(사2)
*14.돌아오라 소렌토로--
*15.카프리를 찾아서(사2)
16.불로장생 약수터(아콰산타 공원)를 찾다.
17.폰토디 포도주 공장 견학
18.시엔나를 향해서
19.시엔나의 두오모 성당은--
*20.캄보광장을 찾아서
*21.피렌체를 찾아서
*22.기우러진 피사탑(피사탑은 지금도 기울고 있다)
*23.베네치아(베니스)의 대운하
*24.산마르코(성 마가) 성당과 비둘기들의 천당인 마가 광장
*25.두칼레 궁전 과 탄식의 다리
*26.베로나의 원형극장 ‘아레나’
*27.쥴리엣의 생가에서
*28.밀라노에서 마지막 밤을
*29.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30.레오날드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의 유화 원본은 어디에
31.밀라노여, 로마여, 그리고 이탈이아여 안녕 !
여행기는 사진슬라이드 다음에 시작 됩니다.
[ 이오영,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탈리아 편 ]
1. 파리를 거쳐 ‘로마’로
나는 오래전부터 로마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일을 2005년 6월 일로 정하고 여행공백기간의 일들을 미리 마무리하느라 바쁜시간을 보낸 후 Air France항공기를 이용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를 가기로 했다.
여행당일 필라를 출발 파리공항을 경유 로마의 ‘Leonardo Da Vinci’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출발 다음날(5일: 6시간의 시차 ) 낮 12시이었다.
파리공항에서 로마행 항공기를 갈아탈때 까지 1시간 30분 여유가 있었지만파리 공항에서 로마행 Gate를 찾기 까지 고생이 많았다.
겨우 찾아간 로마행 입구 Gate가 바뀌는 등 직원들의 무성의와 불친절이 직접적인 원인이라 볼 수 있으나 여행 꽤나 했다고 자부한 나의 부주의도 있었으니 아내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나의 파리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공항에 도착해서도 현지 여행사가 우리의 도착시간을 잘못 알고 있어 서로 찾는 번거로움을 거친 후에야 만날 수 있는 해픈잉이 일어나기도 해으니---.
여하튼 가이드의 안내로 우리부부는 신 로마지역에 위치한 'Sheraton Golf' 호텔에 낮 12시경에 Check in할 수 있었다.
여장을 풀고 각국에서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일행들을 기다리는 동안 호텔 식당에서 먼저 도착한 LA의 이 모 약사 부부를 만나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그들은 언제 보아도 항상 의욕과 생기가 넘치고 있는 부부였다.
마침 당일 호텔 부속 골프장에서 이탈리아 여성 챔피언 골프대회가 진행 중이어서 식사후 이 약사 부부와 토너먼트 경기를 관람하기로 했다.
호텔 뒤가 바로 골프코스와 연결되어 있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골프장에 진입 하여 마지막 라운드의 17 & 18홀의 Play를 관람할 수 있었다.
조지(Geozi)라는 Player가 ‘-14’라는 표말을 앞세우고 제 4위로 들어오고 있었다.
많은 갤러리가 따라 다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꽤나 유명한 선수 인가 보다.
그녀가 17홀을 마치고, 파 5인 18홀에서 120야드를 남겨 두고 세 번째 샷으로 공략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가 공을 날리고 얼마 되지 않아 갤러리 군중들로부터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환호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3번째 날린 공이 홀컵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 이글이 된 것이다. 우리 부부도 군중속에 묻혀 열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내가 모르는 선수 였지만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
두어홀을 보고나니 각국에서 오기로되어 있는 일행들과 만나기로한 시간이 되어 호텔로 돌아 가보니 지난번 러시아 여행을 함께 헸던 9평회의 반가운 얼굴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소나무’란 한국 식당으로 이동, 저녁을 한 후 여행일정을 론의 하기 위해 호텔 뒤뜰로 자리를 옮겨 앞으로 여행일정등을 토의 하며 밤 11시경에야 각자 헤어져 이탈리아의 첫 밤을 보냈다.
2. “로마”는 이탈리아의 영원한 수도
이탈리아 인구는 5,772만, 면적이 30만 1,277Km2, 수도는 로마, 종교는 가토릭교, 정식 명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지중해의 중앙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반도와 7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 진 나라로서, 알프스산맥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반도부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통일된 이탈리아보다는 “로마제국”으로 기억되어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로마는 일찍이 고대 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루네상스 와 바로크시대를 통해서 오랜 세월동안 유럽 문명의 발상지로, 고대 서구 사회를 지배했던 위대한 도시로 기억 될 뿐 아니라, 로마 신화와 전설이 넘치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3. 로마 제국의 흔적을 찾아 (사)
(시저가 가장 믿던 부하에게 암살당한 현장을---)
6월 6일 신 로마시가지에서의 첫 아침을 맞았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밤새 뒤척이다 아침 6시경 자리에서 일어나 고단해 하는 아내를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30분간 골프장 코스를 산책 하며 로마의 새벽 공기를 마음 것 들어 마시고 돌아 왔다. 호텔의 아침 식사메뉴는 양호한 편이다.
식사 후 8시 30분경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로, 하루 밤을 지낸 로마의 신시가지를 벗어나 구시가지라는 곳으로 향했다. 로마제국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로마는 신구시가지로 나뉘어 있다.
해송이 늘어서있는 아름다운 신 로마 시가지
버스가 지나는 시가지 양옆에는 해송이란 솔나무가 줄지어 있었는데 그 해송이 곧게 뻗어 위는 마치 활짝 핀 우산모양으로 새파란 동구랗게 송이모양을 하고 있어 퍽이나 인상 적이었다.
로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쌍둥이 형제가 건설했다는 신화가 있다.
이들은 ‘실비아와 전쟁신인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나 티베르 강가에 버려져서 늑대가 데려다 젓을 먹여 길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지 지금도 로마인은 궁지에 몰리면 야수처럼 저항하는 습성이 있다 하며, 곳곳에서 늑대가 쌍둥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쌍둥이들이 성장한 후에 통치권을 놓고 싸우다 ‘로물르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기원전부터 정권장악을 위해 피를 나눈 형제도 제거하는데 주저 하지 않는 인간들의 잔인성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7번째 왕 ‘따로비니아’가 정통 로마인이 아니고 ‘에트루리아계’라는 이유로 원로원으로부터 추방당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정을 열게 된다.
로마도시 건설의 특징은 “카미돌리오, 첼리오, 아벤티노, 에스퀠리노, 퀴리날레, 비미나레, 팔라티움 등의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한다.
우선 언덕을 중심으로 공공 광장을 만들고, 주위에 벽돌을 쌓고, 교회당과 대하수도를 건설하면서 점차 균형 있는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흔적(유적)
구 로마제국의 흔적을 면밀히 살펴본 후, 나는 아직도 현대인들의 헌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는 ‘카이사르(=시저)의 화장터’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아직도 헌화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시저가 현대 로마인들의 가슴속에 위대함으로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 되었다.
화장터를 지나자 ‘콘스탄티누스’가 터키를 정복한 후 입성했다는 ‘개선문’ 옆에 자리한 ‘원로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원로원의 건물은 당시 로마를 통치하던 권력의 중심지 치고는 초라한 편이었다.
당시 시저의 강력한 개혁을 두려워하고 저항하는 원로원의 의원들과 함께 그가 가장 신임하던 보좌관 ‘부르투스’가 그의 상관 시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는 원로원 입구 7번째 계단인 역사의 현장에서 발길을 멈추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시대를 주름잡고 위대한 로마를 건설한 영웅일지라도 영원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인간사의 무상함을 새삼 깨 닿게 했다.
시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어졌다.
당시 ‘시저’는 젊은 나이에 갈리아 전쟁을 지휘하는 총독으로 가면서, 페르시아 총독으로 가는 ‘폼베이우스’와 스페인 총독으로 가는 ‘크라시수’와 함께 3두 정치를 통해서 로마의 참다운 개혁을 이루기로 굳게 약속했다한다.
그러나 함께 맹서 했던 동지 ‘크라시수’는 당시 스페인 총독으로 재직 중 사망하게 되고, ‘시저’는 갈라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으나 예상외로 7년 이상 장기전을 치러야 했고, ‘폼베이우스’만이 5년 만에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와 원로원에 실세가 됨으로서 ‘시저’와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그때 시저는 갈리아 전쟁에서 연전연승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두려워하게 된다. 결국 시저가 갈라디를 평정하고 귀국길에 오르자, 원로원으로부터 국경인 ‘투비콘강’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이 대목에서 잠시 임진왜란 당시 국운이 풍전등화같이 위기에 봉착 했을 때 우리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인 불멸의 3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장군을 생각 하게 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침략군인 일본군과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여,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휘하의 장병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자, 무능한 조정에서는 왕권이 위협받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이순신 장군을 역적으로 몰며, 제거 하려던 부끄럽고 한스러운 모습들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시저’는 돌아오는 길에 ‘아르메니아’에 들려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왔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로마의 국경선인 이탈리아 북부 ‘루비콘 강’에 다다르자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다. 결국 반기를 들기로 결심한 시저는 원로원의 무장 해제의 지시를 무시하고 입성하게 된다.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다”라고 선언한다.
그 후 그는 원로원에 들어와 실세가 되어 폼페이우스와 경쟁관계를 갖게 되지만, 그의 강한 개혁의지를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간다.
이에 겁을 먹은 일부 원로원 의원들과 시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브루투스’의 주도하에 어느 날 출근하는 시저를 칼로 찔러 암살 하게 된다.
이곳 정문 7번째 계단에서 시져는 가장 아끼던 부하 "브루투스"에게 사살당한다.
‘브루투스’ 품에 안겨 숨을 몰아쉬며 “너마저 나를 배신--” (여기서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닌 데키우스 부루투스라 주장 설이 유력)하며 한 시대를 주름 잡던 로마의 영웅이자 위대한 정치가는 그렇게 운명하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의 안목은 세인과 달라 그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측한 듯, 시저는 유서를 미리 작성해 놓았단다.
평소 아끼던 보좌관인 ‘부르투스’에게 당연히 후계권이 이양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 없고, 시저 누이의 손자(Grand Nephew)인 당시 15세인 ‘옥타비우스’에게 후계 권을 인계한다는 유서를 남긴 것이다. 그 뜻을 받아드리기로 결심한 ‘옥타비우스’는 갖은 역경을 물리치고, 시저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안토니오스’와 여러 형태의 패권 다툼을 벌리면서 로마 역사를 재창조해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21세)’의 등장을 목격하게 된다.
시저 생전(52세)에 그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시저가 죽은 후에 ‘안토니우스’와 다시 단꿈에 빠지게 된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옥타비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에게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
결국 시대적 배경을 볼 때 ‘안토니우스’에게 도전장을 낸 셈 이다.
‘안토니우스’는 사랑을 따라 ‘클레오파트라’ 편에서 싸우다가 전세가 기울자 이집트로 쫓겨 가서 자결하게 된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코브라 에게 가슴을 물게 하여 자결함으로서 이집트는 종말을 맞는다.
이렇게 ‘옥타비우스’는 로마를 평정하여 제일의 실권자가 됨으로서 ‘아우구스트’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다.
4.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찾아서
로마의 교통의 중심지에 제 1차 세계대전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1Km거리에 있는 ‘콜로세움’은 ‘베스파니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8년에 걸쳐 완성된 ‘원형 경기장’ 이라 한다.
구조면에서도 층마다 개성이 다른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란다.
한때 그리스토를 박해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이곳, 믿음의 선배들이 사자들이 우굴 거리는 경기장에서 공포와 절규하는 죽음의 원형경기장 구석구석 어디선가 아직도 그 원한의 원성이 들리는 듯 한 상상을 뿌리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대 로마의 유적으로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는 이곳, 직경이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으로, 외벽은 높이 48m로 3층으로 되어있었으며, “1층은 도리 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 되어 층마다 개성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곳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설치 된 규모의 대범함에 놀랐고, 이들을 15분 만에 출입이 가능하도록 여래개의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다는데 또 한 번 놀랐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진으로 망가지고, 중세에는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해 돌 벽을 뜯어가 외벽이 절반 이상 없어지는 손상을 입었지만, 18세기경 ‘그리스도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보전되어 있다.
5. ‘진실의 입’에서 결백을
이번에는 ‘진실의 입’이란 부조 상을 보기 위해 "베네치아 광장의 남쪽"에 위치한 옛날 가축시장이었던 ‘델라 베리타 광장’에 있는 산타 마리아 ‘코메스틴 성당’ 현관으로 갔다.
이부조상은 BC 4세기에 ‘강의 신 흘르비오’의 얼굴을 대리석부조물로 만들어 놓고 평소에 거짓말을 한 사람은 이 조각상 입에 손을 넣으면 잘린다 하여 “진실의 입”이라 명명되어 졌단다.
수많은 세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넣어서 인지 입술이 반질반질 닳아 있었지만 정작 손이 잘렸다는 기록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호기심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에 손을 넣고 무사한 손을 보이며 결백성을 강변하며 서로 웃을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 로마 도시를 생성케 했다는 일곱(7)언덕의 하나인 ‘팔 라티움 언덕’에 올랐다.
거기서 성곽주위의 흔적만 남아 있는 ‘대전차 경기장’을 관망하고 ‘카타콤 베’로 향했다.
6. 지하무덤, ‘카타콤 베’를 찾아서
카타콤베는 기독교인의 피신처였다.
영원한 안식처란 뜻을 가지고 있는 “카타콤 베”는 중세 까지만 해도 유일한 크리스천들의 지하 묘지와 크리쳔들의 피신처로 알려 지면서 모든 묘지를 ‘카타콤 페’라 부르게 된다.
물고기 그림이 있는 카타콤 페 입구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난후, 우리는 지하로 복잡하게 뻗어간 미로를 찾아 내려갔다.
이곳의 입구는 1800년도에 대폭 보수를 했다하며, 지하 10-14m의 깊이에 대해 폭이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굴을 거미줄같이 종횡으로 뚫고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구아피아가도’ 근처에는 25개의 크고 작은 ‘카타콤 베’가 있단다.
그리고 여기의 모든 지하통로를 합치면 500Km 나 된다고 하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카타콤 베는 7층으로 지하 통로는 19Km이라 했다.
때로는 몸을 옆으로, 때로는 허리를 앞으로 굽히며 지나야 하는 굴속은 습한 편이었고 굴벽은 공기에 노출되면 굳어지는 부드러운 특수 성분의 흙으로 되어 있었다.
굴속의 온도는 밖의 무더운 기온과는 달리 시원하여 오래 동안 굴속을 움츠리며 이동하는 동안 후덥지근하게 느껴졌으나 참을 만 했다.
로마에 지하무덤의 유적이 많은 이유는, 당시 이곳의 가난했던 사람들이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위에 만들 수 없어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 무덤을 만든 사회적 배경에서 기인한것 같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지하로 모여 들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거의 300년 동안 박해가 끈기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이 박해를 피해 지하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굴속을 피신처로 사용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굴속이 복잡한 미로로 엉켜 있어 자칫 길을 잃기 쉽고, 굴속이 습한 관계로 문등 병의 감염이 우려 되여 로마 군인들이 굴속에 들어가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곳에는 3세기의 교황들의 유골이 모셔져있던 흔적이 있었고, 칼로 목을 쳤으나 잘리지 않고, 또 끓는 물에 넣었으나 바로 죽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하여 성가의 수호성자로 불리고 있는 ‘성 체칠리아’의 묘의 흔적도 볼 수 있었다.
7. ‘바티칸 박물관’을 찾아서
점심을 비원이란 곳에서 한식으로 마치고 바티칸으로 향했다.
바티칸은 독립 도시로서 이탈리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곳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1,400여명 일자리를 갖고 있단다.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바티칸의 거대한 박물관은 미술관으로 이어져 수백 개의 방에 역대 교황들이 수집해 놓는 값진 물품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이 수집품들은 고대 시리아, 그리스, 로마, 이집트와 루네상스 시대의 역사적 유물과 조각, 그림, 지도 등으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들이다.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정면 벽에 그려져 있는 “최후의 만찬”을 둘러보면서 웅장함과 색상의 조화의 정교함을 엿볼 수 있었다.
네로의 목욕탕이라는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돌 접시도 보았다.
로마는 목욕 문화가 지나쳐 망국을 재촉했다 하리만큼 일찍부터 목욕문화가 앞선 나라라던가 ?
만원이 된 관광객에 묻혀 밀려가면서 바티칸 박물관을 대강 돌아보면서 이와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어떻게 보관 되었을까 다시 한 번 놀랐다.
수많은 인파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하루에 관광객이 얼마나 되느냐고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하루 평균 2만 명 된다는 것이다.
입장료가 1인당 12유로로 환산 할 때, 하루에 24만 유로의 수입이 예상되는 것이다.
로마의 찬란한 역사와 예술을 꽃피운 선배들이 후대들에게 주는 노하우이리라.
8. ‘성 베드로 성당’은
얼마 전 까지 당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어 하는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던 교황 ‘존 바오로 2세’의 체취가 묻어 있는 ‘베드로성당’을 찾았다.
‘존 바오로 2세’ 서거당시, 지구상의 모든 TV 에서 수많은 인파가, 그의 서거를 애도 하고, 그의 마지막 길을 축복하기 위해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그 현장에 직접 필자가 와있는 것이 감개가 무량 했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베드로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까지 약 120년에 걸쳐 완성 했다는 것이다.
성당 입구가 5개가 있으며, 중앙문은 “한손에 칼 그리고 한손에 열쇄를 들고 있는 성질 급한 베드로”와 “양손에 열쇄를 들고 있는 바울”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중 맨 오른쪽의 문은 성스러운 문으로 성년(100년)에만 열린다는 것이다.
실내 입구부터 천장과 모자이크가 100% 일치하는 정교함에 모두들 놀란다는 성당 안엔, 예배당이 36개나 있을 정도의 대 규모에 놀랐다.
계속하여 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에 미켈란젤로의 사인이 남아 있는 걸작 “피에타 상(불쌍하다)”라 이름 붙여진 진품이 보였다.
방금 운명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그의 생모인 성 마리아 무릎에 눕혀놓은 조각상이었다.
이 그림을 보고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후 십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33년이란 세월을 감안하면, 생모로서의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젊어 보이지 않느냐?”라고 꼬집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마리아의 의미를 부각 시킨 것이라 생각 하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다.
거기서 안으로 향해 옮겨 가면, 우측에 청동제의 ‘성 베드로 상’을 볼 수 있다.
이동상은 반질거리고 있었다.
방문객과 신자들이 하도 키스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중고교 시절 유명했던 명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 까 ?”(쿼바디스)란 영화를 생각나게 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와 기독교인들이 핍박받던 로마를 버리고 피해가면서 “변화 산 중턱’에 이르러 기도를 하게 된다.
이때 찬란한 빛과 함께 예수께서 베드로 앞에 나타나신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 까” 하고 묻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 다”고 대답하시고는 베드로로 부터 살아진다.
예수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게 된 베드로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그 자리에 꽂아 버리고, 다시 기독교인들이 핍박 받는 로마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막을 내리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하게 된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지금까지 나의 가족을 지켜주심에 감사하고, 두 아들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각자 전문인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 갈수 있도록 지켜 주심과 손녀 유리와 상은 그리고 은아를 이 세상에 건강하게 보내주심에 감사드리며 이들이 앞으로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아름답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 하는 기도“를 올렸다.
눈을 떠보니 아내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슨 기도를 드렸느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나와 같은 간구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내가 기도를 마치기를 기다려 나와 아내는 지하실로 내려가 좁은 공간에 역대 교황들이 대리석 관에 안장되어 영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서거하신 교황 죤 바오로 2세가 영면하고 계시는 방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생전에 그분이 간구하던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성당 안의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굳어 있던 나의 마음은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 분수대’로 장소를 옮기면서 밝은 마음으로 풀리기 시작 했다.
9. ‘스페인 광장’에서
우리가 찾아간 ‘스페인 광장’은 1726년도 프랑스 대사의 기증으로 만들어 진 노천 광장이었다.
광장 주위에는 소상인들과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스페인 교황청 대사관이 이 근처에 있어 스페인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곳은 15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에서 나오는 ‘오드리 헵번’이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13번째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앉아 있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고 부터 이광장이 더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여배우 덕분으로 이근처의 아이스크림 상점이 성황을 이루고 있단다.
우리가 도착한 당일 아이스크림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10. ‘트레비 분수대’에서
로마에 수많은 분수대중 ‘바르크 양식’의 아름다운 분수대의 하나로 “트레비(3거리)”란 곳에 있는 “트레비 분수대”를 높이 평가 한다고 한다.
이 분수대는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에 의해 ‘니콜라살비’라는 디자이너가 설계하여 30년 만에 완성 되었으나 그 후 세월 따라 망가졌다가, 교황 ‘니콜라우스 5세’때 복원되어 로마의 명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이작품은, 한가운데 ‘대양의 신 오체누스’가 있고, 양옆엔 ‘풍요와 건강’을 의미하는 석상이 있고, 폴리 궁전 배후의 벽면을 교묘히 이용하여 조각한 ‘바다의신 트리톤’이 이끌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은 ‘격동의 바다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하고, 분수대의 거대한 ‘수반은 대양’을 뜻한다.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카발 리노 비안 코’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오늘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11. 세계미항의 하나인 ‘나폴리’를 찾아서
6월 7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폴리’로 향했다.
나폴리는 이태리의 미항으로 유명한 항구도시이다.
시속 110Km로 되어 있는 순환 고속도로를 따라, 3시간 정도 육로로 이동하는 동안, 이곳이 바로 교황의 별장이 있을 뿐 아니라 시저와 아리우스의 고향인 ‘알바노’지역임을 알리는 안내원의 말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밖을 내다보았다.
광활 한 들판에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농장이 버스 창문을 스쳐가고 있었다.
이렇게 달리고 있는 동안 젊은 안내자는 중학교 때 부모 따라 이탈리아로 이민 와 언어와 풍습 때문에 갈등하던 어린 시절 이곳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다고 말하면서, 결국 그의 아버지의 여행사를 대물림 받기 까지, 자기의 체험에서 얻은 이탈리아인의 특성을 아는 대로 설명 하였다.
그중 수화 요령과 일반 상식에 대해 몇 가지 소개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여기 적어 본다.
1). 수화(바디 랭귀지)요령에 대하여
*모른다(손으로 턱을 쓸고 어께를 들썩) *빨리 빨리(손을 위로 들어 손가락을 쥐었다 폇다를 반복) *배고프다(손을 펴서 옆구리를 가볍게 친다) *예쁘다(손가락을 모아 입술을 찍고 엄지손가락을 오린다) *가라(손을 펴서 세우고 아래서 위로 흔든다)
2).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이탈리아는 산모의 분만비용을 국비보조로 충당하며, 산모가 영주권자와 관계없이 이곳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시민권을 주며.
*그 아이가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을 때 까지 산모에게 거주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음주운전은 별도 단속이 없으나, 사고가 났을 때 그 원인이 음주 운전으로 판명되면 가중처벌 을 받게 된다.
*언어의 억양은 ‘나폴리지역’을 기준으로 아래(남)쪽 지역에선 ‘첫 번째 모음에, 위(북)쪽에선 두 번째 모음’에 악센트를 주어 발음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싸울 때 주로 입으로 싸우는 편이며, 주먹질 대신 어께를 밀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이곳에서 Taxi를 탈 땐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단다. 그것은 이태리인들은 말하기를 좋아 하고 말을 할 때 손짓이 심해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면 운전 중에라도 핸들을 놓고 손짓을 하며 말을 하느라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리’는 이탈이아에서 통일이 제일 늦은 곳으로, 신시가지는 일본인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나폴리의 교통질서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다니는 차가 많아 주의를 요하는 곳이다.
*그리고 아직도 소매치기 들치기가 많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아마 이탈리아북부에 비해 남부가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고도 했다.
*이탈리아에는 한때 국제 조직인 ‘마피아’와 국내 조직인 ‘까므로’라는 범죄 집단이 있었다.
*원래 마피아는 스페인이 치칠 리를 침략하여 무차별 아녀자를 납치해 감에 격분하여, 이에 대응하기위해 만든 의병(?) 같은 집단으로 탄생, 그 후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반항하는 집단으로 변질되다가, 결국 이권을 노리는 범죄 집단으로 변질되었단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 두목이 체포된 후 그 세력을 잃게 되자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내자의 경험담을 듣고 있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나폴리’로 들어섰다.
우선 나폴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파노라마’에서 버스를 멈추게 하여 언덕 아래로 전개되는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나폴리항구’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나폴리의 지형을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양팔을 벌린 상태에서 수심이 깊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머리 부분은 50년 마다 한번 씩 화산이 터진다는 ‘베수비오산’, 오른 쪽 팔 끝 부분이 ‘나폴리’, 그리고 왼쪽 팔 끝 부분이 ‘소렌토’에 해당하고, 베스비오산과 소렌토 사이에 ‘폼페이’섬이 있으며, 좌로부터 우측으로 ‘카프리, 이 스키야, 브로치다’라는 섬이 차례로 자리하여 바람을 막고 있어 바다가 잔잔함을 유지 할 수 있어서 세계미항으로서 천연적인 구비 조건을 가추고 있다.
‘나폴리’는 그리스어로 ‘신도시’라는 뜻이며, 캄파니아 주에 속한 도시로서 로마, 밀라노 다음가는 제 3의 도시이다.
기원전 7세기경에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에 매료된 고대 그리스인이 대거 이주해온 곳으로 고대 로마 황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가들의 정열과 감동이 서린 땅이기도 하며, 기후가 이탈리아에서 제일 좋은 곳이기도 하다.
12. 산타루치아 기념탑과 누오보성
나폴리 시가지를 벗어나 해변 가를 지나고 있는 동안 성녀루치아(산타루치아=빛)의 기념비가 버스창문을 통하여 시야에 들어왔다.
산타루치아 기념탑
고교 시절의 배운 ‘산타루치아’란 이태리 민요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라는데 호기심이 더했다.
“---내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야 ^ -” 지금은 가사를 거의 잊어 버렸지만, 낭만과 꿈 많던 소년시절 세계 미항 나폴리를 멋대로 상상하며 부르던 노래의 본고장에 이렇게 와있다니 조금은 흥분 되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콧노래도 잠시, 기념비가 눈에서 사라지자, 1,100년 전에 노르웨이에서 감옥으로 건축되어 지금까지 부두 가를 외롭게 지키고 있다는 ‘계란성’이란 성곽이 시야에 들어 왔다.
어째서 계란성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되 ‘계란성’이 시야에서 살아질 때 까지 고개를 길게 느리고 버스창문 밖을 응시 하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나폴리의 상징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는 ‘누오보성(새로운 성)’이 눈앞에 다가 왔다.
1282년 프랑스의 양주 가문인 ‘샤틀’이란 사람이 세운 ‘4개의 탑을 가진 프랑스풍의 성’이라 했다. 현재는 전시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곳은 50년 전 폭탄을 맞고도 건재하고 있다하여 ‘남자다운 성’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우리일행은 제한된 시간에 버스를 Parking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이렇게 버스 창문 관광으로 대신하고 계속해서 ‘폼페이’로 향했다.
13. 폼페이를 찾아서
(베스비오화산에 매몰되어 사라졌던 도시)
폼페이는 나폴리 연안에서 23Km 남서쪽으로 떨어진 화산으로 유명한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었다. 이 도시는 지금의 ‘사르노 강’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돌출부에 건설된 고대 도시로서,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는 ‘베수비오 산’ 남동쪽 ‘사르노 강’ 하구에 있던 항구 도시다.
한때는 화산재에 매몰되어 사라진 도시었으나, 후세에 다시 발굴되어 고대 도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역사의 유적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폼페이 시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엔 순례지인 ‘산타마리아 델로사리오 바실리카’도 있었다.
거리는 돌로 포장 되어 있었고, 아래 지도와 같이 2000년전임에도 불구 하고 근대에 갖추고 있는 상가, 주택가와 인접하여 상점과 피자집, 도박장 그리고 입구에 남자 성기를 표시해놓은 사창가의 흔적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폼페이의 최후의 날을 보다 소상이 알리기 위해 다음 내용을 문헌에서 참고 하여 기록해 둔다.
서기 79년 8월24일 폼페이의 아침이 밝았다.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 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 눔에 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플리니우스는 스타비아이에서 친구들을 구조하려고 애쓰다가 죽었다.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용암과 화산재로 덮였다. 헤르쿨라네움에서는 격류와 함께 떠밀려온 화산물질 더미가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용암으로 굳어졌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로마 병사들,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 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Porta Marina에있는 이문을 따라 둘레가 약3km에 이르는 방벽이 둘러있고 지역의 넓이는 약63ha에 이른다. 이문을 통해 언덕 길을 올라서면 폼페이의 가장 중심인 포로(Foro) 이다. 각종 행정기관과 주피터 신전, 공회당 등 사회생활의 중심센터이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니
도시 발굴당시 화석이 되어 있었다는 각종 유물들(?)이 야외 철망으로 보호 되어있는 진열대 위에서 먼지로 뒤 덮여 있었다. 모조품이란 인상이 짙었다.‘폼페이 유적’을 답사하고 나니 오후 4시 30분이 되었다.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으로 하늘이 뒤덮이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서둘러서 “소랜토”로 향했다.
14. 낭만의 도시 ‘소렌토’로
소렌토는 캄파니아 주 나폴리현에 있는 도시로 나폴리 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 하고 있으며, ‘이곳을 잊지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민요의 원산지인 동시에, 오렌지, 레몬 등의 과수원과 포도주, 올리브유 산지로도 유명하다.
소렌토 전경(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 하고 있는 연안 도시)
15세기 재건된 성당과 박물관에는 17,18세기 나폴리 파 미술관계 소장품을 비롯하여 고고학적 유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하나 유감스럽게 방문하지 못했다.
우리일행을 실은 버스가 해변을 연하는 산길을 오르내리고 좁은 시가지의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 소렌토 해변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Hotel Rivage’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저녁 6시 30분이 되어서였다.
우리 일행은 저녁 7시 40분에 호텔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방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다.
내일 새벽 다시 짐을 꾸려야함으로 아내는 하루 저녁 사용할 것들만 꺼내 놓고는 들어 올 때 보아둔 해변 가로 산책을 나가기 위해서다.
마침 호텔 앞에서 아프리카의 시네갈에서 온 이 회장을 만나 동행할 수 있었다.
해변 가에 다 달으니 2-3개의 구멍가게가 있는 작은 부두가 나타났다.
낮선 이방인의 방문이 신기 한 듯 구멍가게에 앉아 있던 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사진 몇 장 찍고 산책을 중지하고 호텔로 돌아 왔다.
저녁을 하기로 되어 있는 식당은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장 골목에 있는 전통적인 현지 식당이었다. 이탈리아식 피자 4가지, 생선 한 토막 과 흰 포도주 한잔이 저녁 메뉴였다.
우리 좌석에서 포도주가 한차례 돌아가고 있을 때, 기타를 든 현지 무명 악사가 다가와 몇 푼의 Tip을 위하여 테이블을 돌며 이태리 민요를 열심히 연주 하자 일행의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비교적 귀에 익은 이태리 민요였기 때문에 친근감이 생겼나 보다.
흥이 많은 스페인의 김 회장으로 부터 시동이 걸렸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베사메 무처’ ‘선구자’--등 솔로와 합창 등 모두들 각자 잊혀져가는 가사를 더듬으며 노래는 끝일 줄 몰랐다.
얼마 후 남자 들이 지치는 가 했더니, 이번에는 새침 이를 띠고 있던 여성 측에 불이 당겨졌다.
여고시절에 갈고 닥은 노래 솜씨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두둑한 팁에 기분이 좋아진 악사도 “도대체 무슨 음악인 협회에서 온 구릅이냐 ?”고 우리들을 추켜세우며 그가 갖고 있는 레퍼토리 봇 다리를 무제한 풀어 놨다.
이곳저곳 Table에서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환호와 박수갈채로 흥은 절정에 이루고 시간이 늦어짐에 따라 이 지역 손님들이 자리를 떴으나 우리들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식당주인은 식당 영업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별 내색 없이 친절하였다.
밤 11시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내일의 여정을 위하여---”,
마지막건배를 끝으로 약간은 비틀거리며 호텔로 돌아 왔다..
15.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카프리”를 찾아서
6월 8일이 밝아 왔다.
어제 늦잠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6시 자리에서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해변을 연하는 능선지에 오렌지가 탐스럽게 열린 오렌지 나무 밑을 따라 산책을 하고 조찬을 마친 후 8시 45분경 ‘카프리란 섬’으로 가는 모타 보트를 타기위해 인근 부두가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쾌속정을 타고 50분정도 가면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카프리’에 도착하는 것이다.
카프리는 동굴사이로 들어오는 찬란한 빛과 푸른 바닷물이 조화를 이루어 ‘에메랄드’보석 빛을 발하고 있어 황홀감을 주고 있는 천연의 보석인 ‘푸른 동굴’로 유명하며, 장난감 같은 집들과 꽃 울타리로 장식된 듯 한 작은 섬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역대 황제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원래 ‘카프리’는 ‘양’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원주민은 양 목축을 하는 목동들이었단다.
현재 인구는 13,000명으로, 축구장이 2개, High School이 1개, 앰뷸런스가 3대, 지역주민의 생계는
70%이상이 현지에서 관광 사업을
카프리해의 푸른 동굴( ‘에메랄드’보석 빛이 발하고 있다)
하고, 30%의 주민이 육지에 취업하여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섬 마을이다.
옛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보다 면적이 몇 배나 넓은 ‘이스키아’ 섬에서 휴식을 취하다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악천후를 만나 우연히 들르게 된 섬인데 그는 이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섬의 주인을 수소문하여 그의 소유인 ‘이스키아 섬과 카프리 섬’을 맞바꾼 후 이곳에 별장과 ‘아우구스투스’정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관리 소홀이 이유인지, 정원이 역사적 가치를 제외하곤 별로 보잘 것이 없었다.
우리는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해발 579m의 1,200m 길이의 ‘케이블 카’를 타고 그림 같은 카프리 해안 일대를 12분가량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었다.
케이불카에서 내려서는 육로로 ‘안나 카프리’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카프리에서 6Km 정도 거리로, 걸어서 왕복 3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좁고 험한 오르막길 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우리일행은 작은 미니버스로 20여분 만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길은 두 대의 차가 서로 비켜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위험한 길이었다.
여행객으로 붐비는 안나 카프리에서 카프리를 내려다보는 전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정감을 주었으며 우리일행은 자유 시간을 갖기로 하고 ‘안나 카프리’일대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리와 상점 등을 돌아보면서 추억을 만들어갔다.
카프리에서 내려다본 정겨운 바다
오후 1시 경, 기념품상점 뒤편에 위치한 식당(Terrazze)에서 피자로 점심을 때우고, 미니버스로 ‘카프리 부두’로 내려와 그곳에서 모타 보트를 타고 ‘나폴리 항’을 향했다.
오후 2시 30분경, ‘무소린’이가 뚫었다는 고속도로를 이용 하여 4시간 반 정도 신나게 달리면 끼얀차노의 ‘Grande Albergo Le Fonti란 호텔’에 도착 하게 된다.
이 호텔에서 하루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씨엔나’의 이름 있는 포도주 농장을 견학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날 비교적 많이 걸은 탓인지 모두들 이동하는 동안 졸기 시작 했지만 모두 건강했고 일정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여기저기서 수근 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졸음이 걷힌 모양이다.
아직 호텔에 도착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자 독일의 박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전문 개그맨을 방불케 할 조크로 버스안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 했다.
차장 밖으로 펼쳐지는 “토스카주”의 탁 트인 농촌 풍경은 한국에서 호남평야를 생각나게 했다.
어린 시절 수학여행에서 호남평야가 누렇게 익은 벼이삭의 끝없는 황금색 물결로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움을 느꼈다면, 이곳은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 과수원의 푸름으로 우리에게 포근함을 안겨 주고 있었다..
이렇게 들길을 한참 달린 후에야 우리를 실은 버스는 ‘끼안차노 끼안띠’라는 작은 시가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골길에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외지의 관광객으로 생각 되었다.
시가지는 프라타나스, 소나무. 보리수, 지팽나무 등의 가로수가 비교적 깨끗하게 손질이 잘 된 상태로 줄지어 있었고, 안내자는 이곳이 바로 ‘끼안띠’의 신시가지이며, 구시가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이고장에 들어서니 여기 저기 가늘고 길게 하늘로 치솟은 연초록 ‘지팽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예정보다 늦게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자마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모였다.
필자는 고단하여 쉬고 싶다는 일행들을 설득하여 저녁식사 후 운동도 할 겸, 이곳을 떠나기 전에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아 두자며 구 시가지를 가보기로 했다.
돌로 포장되어 있는 구시가지는 호텔에서 5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으며 신시가지처럼 넓고 곧은 길 대신 좁고 굴곡이 심한 상태였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동네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주막 목로 집에 들려 이곳이 원산지로 백알 보다 독하다는 ‘끄라파라“를 주문하여 한잔 씩 나누며 추억을 만들어 보았다.
16. 불로장생 약수터, ‘아꽈산타 공원’을 찾아서
일정이 강행군이었지만 모두들 지칠 줄 몰랐다.
고단한 몸이어서 늦잠을 잘만도 한데 아침 일찍 호텔근처 ‘아꽈산타 공원’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인간의 모든 질병을 낳게 한다는 약수터로 유명한 곳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침 7시경 호텔을 떠나 약수터에 다다르니 벌써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다민족의 노인들이 7-8개의 줄로 나뉘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선 개인당 8유로씩 입장료를 받고 있었으며, 약수는 수도꼭지를 설치해놓고 약수 관리 아가씨들이 나란히 지켜 서서 차례가 된 여행객들에게 푸라스틱 컵에 약수를 받아서 한 컵 씩 건네주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우리도 약수를 한 컵씩 받아 들 수 있었다.
약수는 더운 천연 수로서 맛은 유황냄새와 새큼했다.
특히 ‘장과 간에 좋다’는 이 약수는 3일 이상 계속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란다.
입증할 수 없는 약수를 위해 3일을 머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비싼 약수 한잔 하고 간다며 그곳을 떠나야 했다.
17. “폰도디 포도주 공장”을 견학 하다.
버스가 호텔을 떠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버스 앞 유리창을 가리 우는 빗줄기를 윈도실드가 열심히 닦아내며 행인이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 들길을 따라 버스로 2시간 정도 달리니, 어느 농원의 붉은 벽돌집이 나타났다.
우리가 견학할 ‘폰도디’란 상품의 포도주 공장이란다.
보슬비가 나리는 들판 언덕위에 빨간 건물의 포도주 공장 앞엔 농장 사장과 밀라노의 박 사장 아들이 비를 맞으며 우리 일행을 정중하게 맞아 주었다.
이 농장은 170에이커 포도농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년 300,000만 병(Buttles)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중 95%이이 Red wine라 한다.
포도주의 제조과정과 저장과정에 관해 소상히 설명을 듣고, 우리는 포도주를 시음하기 위해 한 사무실로 안내 되었다. 포도주는 포도의 산지에 따라 그 질이 나뉘고, 제조과정과 보관방법과 기한에 따라 그 질이 천태만상으로 달라 질수 있다는 것이다.
와인 감별 방법이 퍽이나 까다로워 보통사람이 이를 감별하기란 그리 용이 하지 않다고 한다.
이곳에선 포도주를 마시는 데는 격식을 많이 따진다.
우선 포도주는 컵을 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잔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아 둔 채 잔에 따라야 하며, 잔을 잡을 때 잔의 둥근 몸통대신 가는 허리 부분을 잡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적인 포도주 감별방법’으로 유리잔에 조금 따라서 우아하게 흔든 다음 흰 바탕 위에 기우려서 포도주의 흰 부분과 붉은 부분의 간격을 관찰하고, 다시 서서히 잔을 세워 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포도주의 응집력이 형성 되는 모양과 냄새를 맡아 그 질을 구별하여 자기가 원하는 포도주가 서비스되고 있는가 여부를 가린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상식이지만 일반인으로 이와 같은 격식을 지키기엔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견학 하고 있는 ‘Fontodi’공장의 최고 포도주는 “Flaccianello 2000yr” 이다.
시음을 한답시고 포도주 낭비가 심했으나 덕분에 최고급 포도주도 한잔씩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제조한 포도주를 10여병 선물로 받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포도주 제조 공장을 떠났다.
포도주 농장을 나와 ‘Osteria Le Panzanelle'이란 식당에서, 농장에서 선물로 받은 포도주를 곁들이며 2시간여의 점심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피자, 스파게티가 주종인 이태리식 정식 코스는 음식 서부 과정이 지루했지만 이탈리아 정식코스는 기다리는데 묘미가 있다고 이태리 박 회장이 한마디 한다.
그러나 시간이 금 쪽인 여행 중에는 좀 그러 했다.
여행기간 중 한번정도는 정식 코스로 그 나라의 음식문화를 즐기는 것은 의미가 있으되 계획된 여행 스케줄이 바뀔 정도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점심이 끝나도록 밖에 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18. 시엔나를 향해서
우리일행은 식당에서 나와 비속을 뚫고 ‘시엔나’로 향했다.
이 도시는 “토스카 주”에 속해 있는 세계적인 아름다운 도시로, 1990년도를 기준해서 인구 6만여 명. 피렌체 남쪽 50Km지점, 옴브로네간 근처의 해발 320 m의 구릉에 위치한 포도주, 대리석, 농기구등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간 여행에 피로한 몸에 포도주를 한잔씩 한 탓이라 4시간여의 긴 드라이브는 모두에게 좋은 휴식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시엔나’도시의 입구에서 100유로의 입장료를 내기 위해 잠시 정차하는 바람에 모두들 긴 낮잠에서 깨여 창밖으로 스치는 ‘시엔나’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젖은 도시의 가로수와 벽돌과 석재로 축조된 중세풍의 도시 건물들은 필자의 눈엔고독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비에 젖어 고독하게 느껴지는 이 도시의 중세풍의 건물들은 현대 문명에 밀리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나름대로 중세의 위용을 침묵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표현이맞을런지도 모른다.
시엔나(피렌체의 남쪽)
19. 시엔나의 두오모 성당에서 푸대접을
오후 4시경 Hotel Garden에 도착하여 서둘러 Check in을 한 후 바로 안내원에게 부탁하여 구해입은 일회 용 푸라스틱 우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맊으며 이곳의 “두우모(성당)”을 찾았다. 비가 온다고 호텔에 대기 하는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빗속을 뚫고 찾아온 우리 일행을 이 성당은 푸대접(?) 하고 있었다.
성당안을 잠간 둘러 보느데 입장료(각자 10유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만민을 위해 항시 열려 있어야 하는 교회가 자의에 의한 헌금이 아니고, 강제성을 띠고 있는 입장료를 받는다니--.
관리유지를 위한 비용이라지만, 성당이 상업용으로 쓰이는 것 같아 어쩐지 씁쓸했다.
이탈리아에의 모든 두오모(성당)의 내부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고 판단하여 입장을 포기하고 돌로 포장되어 있는 성당주위만 돌아보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캄보광장’ 이란 곳으로 이동했다.
20. 말 경기장, 캄보광장을 찾아서
완만한 경사와 독창적인 부채꼴 모양의 캄보 광장, 원석에 가까운 무게 있는 돌을 다듬어 광장 전체를 포장하고 있었고, 그 육중한 돌이 군데군데 닳아 움푹 움푹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의 유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캄보 광장’ 중앙에는 ‘가이아의 분수’가 있었고, 광장을 내려다보노라면 벽돌로 만든 ‘만지아의 탑’이 하늘로 뻗어 있었으며, 탑 아래는 12세기에 건축되었다는 ‘푸폴리코 궁전’이 있었다.
지금은 궁전이 아니라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시청 정면 상단부분엔 시엔나의 심 볼인 ‘흰색과 검은색의 방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700년 가까이 전통적으로 매년 6월과 7월에 ‘시엔나 팔리오’라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축제는 ‘안장 없는 승마’로 달려 승부가 결정되는 스릴 만점의 경기로 한번경기에 단 몇 초에 우승자가 결판나는 경기임에도 그 인기가 대단 하단다.
비가 계속내리고 있음에도 많은 관광객이 비를 맞으며 광장 주변을 기념 촬영을 하느라 구석구석을 서성이고 있었다.
21. 피렌체를 찾아서
‘피렌체’라는 도시는 지정학적으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 주에 있는 영어로 ‘플로렌스’라고 하는 도시로, 이곳은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 강의 양안 구릉과 선상지에 있어, 상공업이 중심을 이룬 근대적인 도시로, 이곳을 무대로 레오날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단테,마키아벨리,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들이 전성기를 구가 한곳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대성당(3만명 수용가능?)
이곳은 이탈이아 박 사장이 1973년도에 유학중 꿈을 키우며 온갖 고생을 하던 곳으로 감회가 새로운 도시라고 회고 하고 있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나드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산타마리아 성당’(두오모)이 있는 곳이다.
1292년에 착공 1446년에 완공된 것으로 지금까지 피렌체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원통모양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불멸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이, 그의 왼쪽에는 그의 미완의 대작인 “피에타”라는 그림이 있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 도나텔로를 비롯한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의 벽화와 조각이 소장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르네상스로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기베르티, 갈릴레이, 로시니 등이 잠들어 있다는 ‘성 십자가 교회’을 그대로 지나 ‘미켈란젤로 광장’이란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두오모 와 지오토 종탑’을 감상하고, ‘천당과 지옥’이란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가 삐아뜨리체와 애틋한 사랑을 꽃 피웠다는 ‘본테바퀴어 다리=오래된 다리’다리의 아름다운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3층으로 되어 있는 ‘우미치 미술관’과 연결 되어 있는 ‘본테바퀴어 다리’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연인들의 사랑을 속삭이는 다리가 아니라 유명 보석상들의 치열한 경쟁을 벌리고 있는 사업의 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미치 미술관’은 항상 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도에 한화 23여억 원의 누적된 적자로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고 한다.
미술관 주위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다윗’, ‘헤라크레스’ 그리고 분수 가에 ‘바다의 신 내툰’ 동상 등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당대의 부호였던 ‘메리치 가문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유명해 질수 있었다는 것과 ‘레오날드 다빈치’ 작품의 유명한 ‘모나리자, 예수의 십자가, 성모마리아, 산상기도’ 등의 주옥같은 작품 등이 오늘까지 전수 될 수 있었던 것은 ‘두초’라는 사람이 ‘다빈치의 작품’을 수집 보관해온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알 수 있었다.
22. 기우러진 “피사탑”을 찾아서-
(피사탑은 정말 지금도 기울고 있는 가 ?)
우리는 미켈란젤로 광장을 떠나 ‘피사’라는 고장을 찾아 갔다.
토스카나 지방 ‘아르노 강변지역’에 기우러져 가는 ‘피사탑’을 보러 가는 것이다.
이 탑은 본래 성당의 종탑으로 지은 것인데, 갈릴레이가 새털과 쇠공을 떨어 뜨려 낙하실험을 한곳으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기울어진 모양 때문에 더 유명해저서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피사’라는 도시는 한때 ‘피렌체와 제노바와 대적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이었으나, 1509년 이래 ‘피렌체에 정복 되고 나서는 아주 소박한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고급 건물 자료로 그 유명한 백색대리석의 생산지라는 ‘까라라 산’ 밑을 지나 해변 가를 끼고 도는 시골길로 들어섰다.
‘까라라 산’은 백색 대리석이외도 조각용으로 많이 쓰여 지고 있는 대리석으로 유명하여 부드럽고, 그 질이 좋아 이탈리아에 유학하고 있는 동포 미술학도들에게도 인기가 대단 하다 했다.
피사탑을 향하여 달리는 버스 차창을 통하여, 해변 가에 늘어선 소나무들은 이상하게도 해변을 향해 일률적으로 기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바다바람의 풍화 현상이라 생각 되지만, 안내원은 이것을 기우러진 피사탑과 연계시켜 의미를 부여 하고 있었다.
피사는 과학자 ‘갈릴레이’,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미술가인 ‘일피사엘로’, 조각가 ‘조반니 피사노’등의 고향이기도 하다.
드디어 피사탑근처에서 우리는 하차했다.
피사탑은 이곳 출신 ‘피사노’란 사람이 설계한 작품으로, 높이가 북쪽이 55.22m, 남쪽이 54.52m로 기우러져 있으며, 8층의 대리석 종탑 설계도면에 따라 3층까지 완성 했을 때 한쪽이 기우러지기 시작 하는 일이 벌어 졌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높이를 맞추기 위해 4층부터 내려앉은 쪽을 조금씩 더 높게 만들었는데 오히려 하중만 증가 시켜 탑이 더욱 기우러지는 결과를 초래 했다는 것이다.
현재 피사탑은 ‘해마다 1mm식 기울고 있다’고 하는데 줄로 잡아 매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피사의 "기우러진 피사탑"
관광객들은 탑 앞에 거리를 두고 서서 기우러지는 탑을 손으로 떠 바치고 있는 형상을 사진으로 촬영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우리일행도 자유 시간 동안 주위를 산책하며 사진 찍기를 즐긴 후 이곳을 떠나 ‘무소리니’가 만들었다는 3.8Km의 ‘자유의 다리’를 건너 “베네치아(베니스)”로 향했다.
23. 베네치아(베니스)를 찾아서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베니스의 상인”의 본 무대인 ‘베네치아(베니스)’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지방과 베네치아주의 행정 중심지이자 주요 해항지로서 한때 지중해 전역에 세력을 떨 쳤던 해상공화국 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운하, 예술, 건축과 낭만적인 분위기로 많은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세계적인 운하 도시이다.
‘베네치 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약 51Km 로 뻗은 초생 달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118개의 섬 들을 운하로 이어주고 있으며, 중심 수로인 “그란데 운하(Ganal Grande)”가 도시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운하는 역 S자형으로 총길이 3.8Km로 베네치아 중심부로 흐르는 베네치아의 메인 해상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폴로’가 이 운하를 이용 중국과 교역을 시도한 운하였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 일행만을 위하여 별도 전세 낸 모타 보트를 운하에 띠웠다.
우리 보트 앞뒤로 검고 윤기 나는 곤돌라에 몸을 실거나,
베네치아(베니스) 시가지
모타 보트를 탄 많은 관광객들이 “그 란데 운하”를 시원하게 가르며 달리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곤돌라는 바나나 모형으로 한쪽으로 노를 저어도 똑바로 가는 특징이 있다.
지금은 유람객을 싣고 한가로이 운하 위를 배회하지만, 한때는 흑사병환자를 실어 나르는 응급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던 때도 있었가고 한다.
베네치아(베니스)대운하앞에서 필자 부부
물이 금방이라도 방벽을 넘을 듯이 찰랑거리는 운하 양쪽 주위에는 많은 대저택, 교회, 해상 주유소 등이 필자의 시야를 바쁘게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에는 9세기 베네치아 총독의 사저였던 ‘두칼레 궁전’과 지금은 베네치아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로 온갖 잡상인들로 북적 거리는 ‘레얄토다리’와 한번 건너면 다시는 세상 구경을 할 수 없다는 ‘탄식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 보았다.
“삶은 무엇인가?”
이곳을 떠나 버스에 오르자 갑자기 독일의 박 변호사가 질문을 던졌다.
탄식의 다리를 보고난 후 잠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질문하는 것으로 여겼다.
“인생은 만남의 역사다”라고 정색을 하고 누군가가 대답 했다.
“그래요?!,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인간의 삶은 달걀’ 일 뿐이다”라고 능청을 떨고 있는 독일의 박 변호사의 조크로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일행은 산마르코(성 마가)광장으로 들어섰다.
24. 산마르코(성 마가) 성당과 광장
안내를 따라 정교하게 조각된 아름다움이 환상적인 성당 앞으로 안내 되었다.
‘산마르코 성당’이란 곳이었다.
우리는 이 환상적인 건축물의 예술성에 매료 되어 건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부 구조의 예술적 가치와 마가성당의 전체적인 건물의 아름다움은 모든 형용사를 다 동원해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성마르코(성마가) 성당 전경 과 광장
이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이곳 주민들이 성 마르코 시체를 다른 곳으로 부터 흠처와 이곳에 성당을 짓고 이 고장 수호신으로 모신 후 부터는 침략이 끊겼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 찬란하게 아름다운 성당 주변에 길이 175m, 폭 80m인 거대한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선 드넓은 ‘산마르코 광장’이 장관이었다.
이 광장은 ‘비둘기 광장 또는 비둘기 천국’이라 명명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비둘기가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들과 벗해 주고 있었다.
나폴레온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응접실”이라 극찬했다는 이곳은 당시 종교, 정치 집회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관광객과 비둘기 떼가 광장을 뒤 덮고 있었다.
모이를 들고 비둘기를 유인하고 있는 관광객들과 필사적으로 모이를 빼앗아 먹으려는 비둘기 떼가 어울려 생 동력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마가 관자에서,이영희와 비둘기들---
작은 좌 판대를 펴놓고 비둘기 모이를 팔고 있는 행상으로 부터 모이를 구해서 양손에 쥐고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비둘기 떼가 새까맣게 몰려온다.
비둘기 떼들은 제멋대로 사람의 머리와 팔목에 앉거나, 날개를 퍼덕이며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을 벌리게 하려고 쪼아대는 모습이 하도 억척스러워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25. 두칼레 궁전과 탄식의 다리에서
‘두칼레 궁전’은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바다위의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의 정치, 군사, 예술, 경제 전문분야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이곳에는 과거 베네치아를 통치하던 영주들이 살았던 곳으로 현재 2층엔 가로 22m, 세로 7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유화가 전시 되어 있었다.
이 궁전에서 나와 왼쪽의 다리에서 운하 쪽을 보면 중간에 다리가 하나 보인다.
그 다리가 17세기경 엄격하고 공정하기로 유명한 베네치아의 법치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 주었던 ‘탄식의 다리’이다.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조감도
이 다리는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과 감옥을 연결하고 있었다.
평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이 감옥으로 수감되기 위해서 필히 건너야할 다리로서, 한번 이 다리를 건너 수감되면 다시는 나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세를 한탄 한데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부쳐 졌다 한다.
우리일행도 두칼레 궁에서 감옥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면서 작은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하게 망망한 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현재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일행들과 농담하며 다리를 건너고 있지만 당시 수감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는 죄수의 입장에서는 삶의 절망과 체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렇게 엄격하기로 유명한 감옥임에도 유부녀와 바람피우다 감금되었던 ‘카사노바’가 카니발 행사를 이용 궁중여인을 꼬여서 탈출에 성공했다는 전설이 있다.
베네치아는 매년 6월경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가면무도회의 유래는 귀신으로 부터 인간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가면으로 위장 하던 것이 유래되어 지금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한다.
우리일행은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오후 7시 30분경 북서쪽에 유명한 조선소가 있다는 베로나라는 고장에 있는 ‘파도바 호텔’에 도착 했다.
이제 11일간의 여행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 이곳엔 “바도바의 공원”이 유명하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 밤을 보내면 언제 다시 올수 있겠느냐며 모두들 저녁 식후에 ‘바도바의 공원’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군데군데 젊은 남녀의 구릅이 모여서서 그들의 이상을 토로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림잡아 100여개의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광장 주위에 버티고 있어 공원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해 보였다.
26. 베로나 의 원형극장 ‘아레나’를 찾아서
고대 로마의 병영 도시였던 아레나는 인구 25만, 서쪽으로는 밀라노, 동쪽으로는 베네치아, 남쪽으로는 피렌체와 로마로 통하고 독일로도 이어지는 지리적 요충지대 이기도 하다.
이곳은 로마 최고 전성기(서기120-130)에 세워진 ‘아레나’(어원은 라틴어로서 모래)라는 원형극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로마시대에 맹수 사냥과 검투사 경기로 관중의 함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곳 이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단다.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아이다’ 와 비제의 ‘카르멘’등이 이곳 무대에 올라 대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는 이곳은 원래 그리스인들이 지형을 이용 반원형 극장을 만들었는데, 그 후 로마인들이 이를 마주 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극장을 개조 했다는 것이다.
이 극장은 음향의 효과가 뛰어나 무대의 미세한 소리 까지 관중석에 들리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 ‘아레나’에 도착한 시간은 6월 12일 아침 9시경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러 한지 극장 주위에 인적이 드문 편이었으나, 얼마 전 촬영이 있었던 것처럼, 낡고 부서진 성벽부분을 원래의 모습대로 그려진 대형 포장이 성벽을 가리 우고 있었고, 대형 스핑크스와 이름 모를 괴물들의 모형들이 광장 앞에 이곳저곳에 싸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일요일 이라 문을 열지 않는다 하여 주위만 돌아보기로 했는데, 다행히 한쪽 문이 열려 있어 열린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 갈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일부 관광객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건너편의 무대 쪽에는 오페라 공연 준비를 위한 무대 세트를 하고 있는 중인 것처럼 주위가 어지럽혀 있었다.
입구 통로 좌우편엔 영국의 찰스황태자를 비롯하여, 외국의 유명인이 다녀간 사진들이 전시 되 있었다.
우리 일행이 평소 노래를 잘하는 스페인에서온 김 회장에게 세계적인 무대에서 한곡 하라고 부탁 하자 김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층계 앞으로 나갔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로미오’ 가 차례로 원형극장 안을 울려 퍼졌다.
건너편 계단에 있던 구릅에서 이탈리아계로 보이는 뚱뚱한 젊은 청년이 가슴을펴고 손을 높이 쳐든체 따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양쪽 구릅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김 회장의 노래가 끝나자 우리는 ‘선구자’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며 잠시 ‘아레나’의 주인공이 되어 보았다.
27. 쥴리엣의 생가를 찾아서
우리는 ‘로미오와 쥴리엣’의 순고한 사랑의 현장을 보기 위해 줄리엣 생가를 찾기로 했다.
줄리엣의 동상과 그녀의 집 테라스(발코니)가 남아 있었으나, 로미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는 넓은 공간과 주위엔 상가가 형성 되어 있는 공간을 지나 줄리엣 생가 입구에 들어서자 그곳엔 이미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여러 형태의 낙서로 가득찬 양쪽 벽이 눈에앞에 다가온다.
쥴이엣 동상앞에서
지금은 더 이상 낙서를 금지 하고 있었지만 한때는 방문객의 낙서를 허용했던 모양이다.
줄리엣 동상주위 담장 벽에는 빛바랜 메모부터 방금 걸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메모쪽지들이 빽빽이 걸려있었다. 메모 속엔 현대 젊은이들이 제마다의 사랑의 소원이 담겨져 있으리라---.
로미오와 줄리엣을 닮은 애틋하고 절실한 사랑으로, 가슴 알이 하는 젊은이들의 순애보적인 사랑을 연상할 수 있어 잠시 젊은 날의 감회가 새로웠다.
관광객이 줄리엣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 차례를 기다려 한 장 찍었다. 그녀의 동상 가슴 부위는 얼마나 많은 관광객의 손길이 닿았는지 반들거리고 있었고, 그녀가 로미오를 은밀히 맞아주던 발코니는 옛 모습 그대로 보전 되어 있었다.
28. 밀라노에서 마지막 밤을--.
6월 12일 베로나에서 중식이후 우리는 이탈리아의 제2의 수도 ‘밀라노’로 가기위해 2시간동안 버스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지나면 꿈같은 여행 일정도 끝나가게 되는 것이다.
우측의 알프스산맥을 끼고 6차선의 넓은 고속도로를 달려서 프라타나스 와 보리수가 늘어서 있는 밀라노 시가지에 들어선 시간은 오후 3시가 되고 있었다.
‘밀라노’는 유럽 오페라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북부 최대 산업도시로 유행을 만드는 도시이기하거니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멀리 경마장이 있다는 곳을 지나, 밀라노 시가지에 들어서니 맞춤 복장으로 단장한 새 신랑의 모습 같이 5-8층의 대리석으로 건조된 건물들이 도시의 신선한 느낌을 주었고, 건물 사이를 가르는 시가지가 균형 있게 뻗어있어 현대 도시의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미라노 최대 시장 입구에서
밀라노의 어느거리에서
우리는‘Atahotel Quark’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곧 바로 어느 시골 교회당에서 펼쳐진 작은 음악회로 안내 되었다.
이곳에는 매주 일정한 시간에 무명 음악가가 자기의 기량을 발표하여 체험 하는 음악회(Arianna a Naxos)를 하고 있는 곳이라 했다.
현지에서 유명 오페라를 보기로 했던 우리일행은 주최 측의 사전 예약의 실패로 부득이 참석한 음악회였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음악회가 끝나자 우리는 주 이탈리아 한국 대사부부와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 호텔에 들려 땀에 젖은 옷만 갈아입고 서둘러 식당으로 직행 했다.
대사 부부는 퍽이나 서민적이었으며, 필자가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회장 당시 시카고 총영사를 지냈던 연고로 필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친근하게 대화 할 수 있었다.
29. 밀라노의 두오모(성당)를 찾아서
시내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길이 157m, 폭 92m, 높이 108.5m 의 성당은 고딕 양식의 걸작이자 밀라노의 상징물의 하나인 이 두오모는 현재 건물 정면 쪽을 수리하기 위하여 흰 천으로 가려 놓고 있었으나 옆면과 뒷면 그리고 솟아 있는 윗부분 등을 통하여도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다워 마치 거대한 보석 상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밀라노의 두오모선당
1386년 밀라노를 지배하던 ‘Gian Galeazzo Visconti’의 명으로 건축을 시작하여, 400년이 지난 1809년 ‘나폴레온’에 의해 완공 되었다한다.
이것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다.
성당 외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일류 정원사에 의해 잘 다듬어진 숲을 연상시키고 있었으며, 2-3천개여의 직접 손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성자의 조각 모형들이, 135개나 되는 탑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 어떤 형용사와 수식어로도 적절히 표현하기 힘든 황홀한 예술 그 자체였다.
내부는 대단히 높아 다소 설렁한 분위기로 느껴졌으며, 100m높이의 유리 청 탑이 하늘로 치솟아 인상적이다.
30.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의 유화 원본은 어디에
레오날드 다빈치 작품의 “최후의 만찬”의 오리지 날은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 교회에 있다. 그러나 이곳을 가기로 된 계획은 아쉽게도 취소되었다.
교회의 크기 때문에 하루의 출입자수를 제한하고 있어 내일 아침에나 가 볼 수 있단다.
필자는 그날 아침 공항으로 출발해야하기 때문에 힘들게 된 것이다.
1495-97년경 이 교회가 건축 되었을 시기에 그려졌다는 이 그림은 예수께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유채로 그린 것인데, 지금은 상당히 퇴색되어 있다한다. 아쉽지만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당일 저녁 우리는 특별 event를 갖기로 했다.
밀라노의 박 사장이 사업에 성공하여 ‘사업 확장 이전 개업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급히 3개의 벽시계와 화환을 준비하여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행사가 끝나고 Mrs. 박이 준비한 저녁상에 김치가 등장하여 일행들의 인기가 대단 했다.
몇 일간 느끼한 음식을 먹어오던 일행들은 김치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개업식을 보면서 필자는 박 사장 내외의 그간의 노고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궁화”를 피우려 노력하고 있는 그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의 사업에 영원한 번영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행사장을 떠났다.
31. 밀라노여, 로마여----, 이탈리아여 안녕 !
6월 14일 아침 6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로비로 나오니 마지막 코스인 “최후의 만찬”의 원본을 보기 위해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 교회로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 일행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 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내몫까지 보아 주오란 농담을 건네며 대충 작별 인사를 마치고, 7시에 밀라노 공항으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에 올랐다.
“밀라노여, 로마여, 이탈리아여 모두 안녕! 그리고 동지들이여 또 만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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