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영」의 중국(상하이,소주,장가계) 을 찾아서
11/15-19/04
아래 슬라이드는 중국 전반에 걸친 유명한 곳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편집한것으로 여행기에 해당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 아래 내용은 미주 지역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필라 여성 회지에 실린 내용이다.
아내와 나는 2004년도를 보내기 전에 5일간 중국 상해, 소주, 그리고 장가계 & 원가계를 여행하기로 했다.
북경 쪽으로 가자는 아내의 제의를 2년 전 미주 총연 회장당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50주년 기념행사 초청으로 몇 몇 임원들과 다녀온 곳이라 여행지를 상해 쪽으로 방향을 바꾼 셈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엔 나의 머리속에 늘 어린소년으로 남아 있는 막내 아우 내와와 함께 하기로 했다. 아우의 나이도 이제는 50이 훌쩍 넘어 같이 늙어가는 것을 실감하게된다.
중국이란 나라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해를 돕자는 의미에서 여기 간략하게 설명해두고자 한다.
중국은 5,000년의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로 56개의 민족이 모여 복합 문화를 이루며 사는 나라로 수도는 북경, 국기는 오성홍기로 되어 있다.
면적은 960만 평방키로 메타, 인구는 12억 9천만 명에 달한다.
행정구역은 4개 직할시, 22개성, 5개 자치구, 2개 특별자치구(중국 정부는 대만을 23번째 성으로 간주함)로 되어있다. 한반도와는 지리학적으로 인접해 있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식민지 되었을 때, 애국독립투사들의 활동무대로 우리 민족의 숫한 애환이 곳곳에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영토가 워낙 광대하고 역사가 길다 보니, 세계적인 유적과 물적 자원 그리고 경치가 수려한 곳이 많은 나라이다. 21세기를 맞아, 폐쇄적인 공산국가를 과감히 개방하여 세계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 세계중심의 “중화”를 실현하려는 야심에 차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반도 통일 후를 내다보고 한반도 정책에 유리한 고지점유란 전략적 차원으로, 북한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를 중국의 한 부족 국가로 날조 하여 주권국가인 우리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을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1. 상하이--,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
우리 일행은 아시아나 항공기로 11월 15일 아침 10시 50분 인천 공항을 떠나 상해 공항에 현지시간 오전 11시 35분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하이’라는 이름으로 더 우리 귀에 익은 우리 선배 독립 투사들이 활동 무대로 사용했던 도시--, 우리나라와 1시간 30분이란 지척지간에 있는 이 길은, 지난날 우리의 애국선열들이 일제 식민지에서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개나리 보집 둘러메고 기약 없이 밀항선을 타고 잠입하던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일그러진 얼굴로 기필코 내 나라를 찾으리라, 찾아서 후세에게 광명 된 조국을 넘겨주리라, 나라를 찾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고, 죽어도 결코 눈을 감지 않으리란 비장한 각오로 이곳 상하이를 찾아 조국을 떠나던 우리의 애국선열들--.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위해 상하이의 긴 밤을 깊은 고뇌 속에 지새우는가 하면, 낮선 거리에서 추켜올린 칼라의 코트자락을 이슬비에 적시며 방황하던 선열들의 모습이 주마등같이 머리를 스쳐가며 마음이 아려 온다.
이제는 그분들의 희생된 피의 대가로 영광된 독립국가의 당당한 민족의 자격으로 절기마다 무리지어 선배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를 살피며 여유를 부리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만감이 교차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건너 상해 시가지가 보인다
상하이는 동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고 서쪽은 약간의 구릉지대로 연해 있으며, 양자강 어귀에 있는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던 곳인데, 19세기 중엽 아편전쟁결과 영국과 남경조약이 체결 되어 개방 된 후 외국세력에 의해 국제적 무역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곳이다.
도시의 크기는 교외의 면적을 합쳐 5,800km2라고 하나, 대부분의 관광 명소들과 현대건물이 144km2 안에 밀집해 있어, 인구 밀도와 차량과 자전거 등이 넘치고 있다.
그래서 상해 관광은 사람과 건물의 관광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2.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서
시내 중심부에서 점심을 한 후, 안내원을 따라 ‘마당로’라는 거리 코너에 위치한 3층짜리 벽돌집 ‘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다. 말이 청사이지 도심가 모퉁이의 여염집 같은 곳이다.
청사 건물 옆 좁은 골목에는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들이 형형색색 만국기를 연상케 하여, 청사가 바로 빈민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옆골목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0-11일 대한민국 각 도의 대표와 해외에서 활동하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탄생화였고 그해 9월, 한성(서울)임시정부, 해삼위(블러디 보스토크)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등 3개의 임시정부를 ‘상해 임시 정부’로 통합하여 힘을 하나로 모아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았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이 건물은 1926년부터 1932년 4월 29일 홍구 공원의 윤봉길 의사의 왜장 폭탄 투척 의거로 일본 관헌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기까지 약 7년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곳이다.
그 후 항주-가흥-장사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최후로 1940-45년 까지 중경으로 이동 광복군(총사령관-이정천 장군) ‘제1,2,3지대’를 연이어 창설 하여 조직을 강화하고 광복투쟁을 본격화 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특히 1940년 5월 당시 임시 정부의 영도자들은 “한국 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등 3당을 합병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힘을 하나로 모았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 먼저 도착해 있는 다른 여행 그룹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감상하고 1-3층까지 건물 내부를 돌아보았다.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된 김구선생의 동상
아래층 입구 공간 홀에 들어서니, 왼편에 김구 주석께서 친히 쓰셨다는 ‘독립정신’과 ‘양심건국’이란 액자가 걸려 있었고, 좌측 벽엔 상해 임시정부 옛 청사가 개관된 이후 각계 인사들이 방문했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는 공간을 ‘영상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청사에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청사 전시실’, 당시의 임시정부 활동을 소개 하고 있는 ‘자료 전시실’ 그리고 ‘기념품 전시실’등 3부분으로 나뉘어 져 있었다.
임시정부는 초기에 부처마다 여러 장소의 청사를 썼다는 말도 있으나, 대부분 현재 그 청사 건물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층 회의실 정면 벽에는 임시 정부 초기에 사용했던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임시정부 내에 비치된 당시 태극기
당시의 태극기는 지금의 태극기와는 다르게 태극도 안에 음양을 나타내는 빨간 색과 파란색의 위치가 다르고, 태극도를 둘러싸고 있는 4괘의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응접실벽에는 1-5대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 하신 이승만, 6대의 박은식, 그리고 7대 국무령 이상용, 8대 국무령 홍진, 9대 국무령 김구, 그리고 10대 국무 위원장을 역임하신 이동영 선생 등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임시정부 당시 대통령과 국무령들의 사진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는 목재로 된 화장실과 1920년도에 상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했
다는 부엌 시설이 있었다.
2층으로 들어서니 백범 김구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이 있었다.
임시정부 집무실
1921년도에 찍었다는 가족사진에는 김구선생과 부인 최순례여사 그리고 아들 김인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두 모자는 불행하게도 폐병으로 1925년과 1941년에 상해와 중경에서 각각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진열장 속에는 필라델피아 서재필 기념 센터에서 볼 수 있었던 빛바랜 “독립신문”이 정리 되어 있었다. 독립신문이 서재필 박사에 의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발행되어 민족에게 독립 의지를 확산 시키는데 중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집무실 벽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기애타’(자기를 사랑하면 남도 사랑하라)라는 친필 휘호와 이동영 선생의 ‘광명’이란 휘호가 걸려 있었다.
3층에는 독립투사들이 임무를 부여 받기 위해 잠시 들릴 경우, 쉬어 가는 요인침실 이외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비록 임시라고는 하나 한나라의 정부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이청사는 본래 자물 쇄로 굳게 잠겨있어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허락을 받아야만 관람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청사는 해방이후 중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사드린 이후 수리하여 현재까지 한국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으로 청사 내부 관람을 마치겠습니다.”
강한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조선족 안내원의 투어를 마치겠다는 소리에, 청사내 애국 선렬들의 유품을 돌아보는 동안 독립투사가 된 듯한 깊은 꿈속에서 깰 수 있었다.
여기 유품의 주인공들이 있었기에 한반도의 독립과 오늘의 영광된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감사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선배들이 쟁취한 독립 국가를 민족분단의 불행한 국가로 전락시킨 오늘의 현실 앞에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에 자학적인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청사를 관리 유지하기 위해 성금을 접수 하고 있는 복도를 지나야 했다.
주머니를 뒤져 일금을 모금함에 넣으니 청사 관리 위원회명의로 감사장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번에 이곳을 오게 되면 내이름(100불 이상 헌금 하는 사람)명단에 게시 되어 있을 거라는 안내의 말을 들으며 청사를 나왔다.
청사를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갔다.
이국의 가을 하늘 높이 떠가는 한조각의 흰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조국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떠나며 울분을 토로하던 독립투사들이 생각나 고교시절 내가 좋아 했던 박용철 선생의 ‘나두야 간다’ 라는 시가 머리에 맴돌아 조용히 읊어 봤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췌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멧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 --,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훼살 짓는다.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3. 윤봉길의사 의거, 역사의 현장 홍구공원(노신공원)을 가다
오후 3시경, ‘윤봉길’의사가 왜장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져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역사의 현장 ‘홍구공원’을 찾았다.
홍구공원 앞
현재는 ‘노신공원’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노신의 묘와 기념관이 있었다.
노신(1881-1936)은 중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홍구공원 내 (노신공원)의 노신의 동상
노신 동상 앞에서
일본에 유학하여 의학을 배우다 중국인의 정신병 치료가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그는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유명하며, 그의 저서로는 ‘광인일기’등 많은 작품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 공원중심 부분에 지금은 연못으로 변해 있었지만, 당시는 행사를 치루기에 충분했던 넓은 광장 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원 안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런곳에 조국 독립을 위해 장열히 산화하신 우리의 애국 선각자를 위한 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앞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이 광장에서 ‘상해 사변 전승축하식’을 개최하고 있는 당시 이곳 주둔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아 대장’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폭사시키고, 현장에서 체포 되어,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네자와’에서 일본군에 의해 향년 25세의 장렬한 일생을 마치셨다.
윤 의사는 한국 충청남도에서 태어나셨으며 호는 ‘매헌’이시다.
이 공원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작은 기념정자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을 맞고 있었다.(사)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 선열들의 침략적 근성과 만행에 일말의 가책을 받아서 또는 침략군의 후예들로서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스쳐갔다.
윤봉길의사 흉상
이런 생각도 잠시, 무엇이 윤봉길 의사에게 25세의 꽃다운 젊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까? 이런 의문이 나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나의 눈길을 끌고 있는 기념관 전시실에 걸려있는 한편의 시 속에서 풀 수 있었다.
그 시를 여기 옮겨 본다.
사람은 왜 사느냐 ?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꽂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계례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 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 매헌 윤봉길 의사서에서-
윤봉길의사 기념비
이 시속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그분의 가슴속에 넘치고 있는 숭고한 겨레와 나라사랑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분의 불굴의 용기와 뜨거운 열정이 함축되어 있음을 강렬히 느끼며 나는 시를 읽어 내려갔다. 이제 그의 젊은 몸은 가고 없어도 애국심과 희생심이 넘치는 그분의 고귀한 정신은 그분의 이름 속에 승화되어 우리 자손만대 가슴가슴 속에 길이 살아남아 본이 되리라---.
기념관을 나와 보니 함께 여행하던 일행들이 나를 향해 무얼 꾸물거리고 있었느냐고 한마디씩 핀잔을 주며 다음 행선지로 발길은 재촉했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 했다.
미리 예약했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마치고 '소주'로 이동하는 도중 저녁식사를 하기로했다.
35분 이상 버스로 달려온 곳은 주로 여행단체 손님을 받는 극장식 식당 에 도착했다.
둘러보니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는 꽤 넓은 식당이었다.
중국 민속가무를 곁들인 식당이었으나, 워낙 많은 단체 여행객들이 붐비는 바람에 중국 민속공연은 무대 구석에서 나홀로 연주를 하고 있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식사 서비스는 물론 음식의 질과 량 또한 수준 이하였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 9시경 식당을 나와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소주’로 향했다.
4. 소주의 명소들을 찾아서
밤 10시경 피로한 몸으로 ‘소주’의 오월산장’(WuYue Shang Zhuang)이란 호텔에 투숙할 수 있었다. 내일 오후 장가계로 이동하게 되어 있어 필수품만 꺼내고 짐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안내원은 오늘 강행군을 했음으로 서비스로 발 마사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단다.
동행한 부인들이 마사지라는 바람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퇴폐풍조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중국호텔 넓은 공간에서의 발 마사지는 퇴폐풍조가 아닌 건전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 종일 강행군하여 발이 피로한 여행객들에게 ‘발 마사지’는 인기가 있었다.
두 번째 날인 10월 16일 아침이 밝아 왔다.
어제 밤 발 마사지 덕분인지 일행 중 연로한분들 까지 밝은 표정으로 식당에 모였다.
조식의 메뉴는 빈약했다 기름에 튀긴 것 이외에 별로 먹을 만 한 것이 없었다.
커피도 서비스 되지 않았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후진 호텔이란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졸정원, 호구사탑, 한산사를 관광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5. ‘졸정원’을 돌아보며-
소주 동북쪽에 명나라 정덕왕 4년(1509) 당대의 어사 왕헌신이 비단 장사로 거대한 돈을 모아지었다는 정원으로 졸정원이란 이름은 ‘졸자가 정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졸정원 입구
이곳은 ‘유원, 이화원, 승덕이궁’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의 하나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고급 석조물과 수입 재료들을 사용하여 동, 중, 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조성한 것으로 명대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잘 표현 되어 있었다. (사)
졸정원 연못가
졸정원 전경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왕헌신 본인은 부인 했다지만, 그의 정치적 야심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단다.
졸정원내 원향당에서
총 면적은 5만 평방미터이며 그중 3/5는 연못이 차지하고 있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작은 정자나 복도, 특히 ‘견산루, 파산랑, 원향당’등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사)
6. 호구탑의 명검을 찾아 호랑이 입으로.
소주 북서쪽으로 5km떨어진 곳에 자리한 호구사의 언덕 모양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엎드려 이곳을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관광객은 그 입을 통하여 꼬리 쪽으로 나가도록 되어있었다.
호구사 입구
이곳은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 합려왕이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합려왕의 무덤을 만들 때 관속에 3,000개의 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호구사의 합려왕의 무덤
그리고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민속춤을 공연하고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당시 무덤작업에 동원 되었던 인부 3,000여명을 합려왕의 시신과 함께 묻어 버렸다는 곳이다.
보검의 보안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작업인부들을 모두 참살하여 피로 물들인 곳으로 전제 군주의 인권 말살의 폭거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 검들 중에 명검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여 춘추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의 지휘 하에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단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고, 지금은 이곳에 물이 차서 연못이 되어 사람들은 이곳을 ‘검지’(검 연못)라고 부르고 있었다. 호구탑(중국 피사탑)
이곳엔 수나라 때 지어진 40m높이의 언덕 정상위에 높이 47.5m ‘호구탑’이 있다.
소주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몇 차례 보수 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어 위험하다며 탑 내부의 출입을 금하여 주위를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탑을 ‘중국 피사의 탑’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사)
7. 한산사를 찾아서
원래명칭은 ‘묘보명탑원’이었으나, 당대 고승인 한산스님이 이곳에서 머문 후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다.
한산사 입구
대웅전의 높이는 12.5m, 뒤편에 유명한 종이 있는데 높이가 2m이고 직경이 1.4m 이다.
당대의 청동 유두 종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인이 광서 32년에 바친 것이라 한다. 현재의 건물은 파괴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한산사에는 당나라의 시인 장계의 ‘풍교 야화’라는 시가 유명하다.
‘장계’가 노를 저어 마을로 돌아가다가 한밤중에 풍교에 정박해 두고 있는데 그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상이 떠올라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산사의 종소리는 종을 한번 치면 10년이 젊어지고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사찰에는, 어릴 때부터 친구간의 우애가 남다르다는 ‘습득스님과 한산스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이 초상화는 친구간의 두터운 우의를 상징하는 심벌로도 사용하고 있다 한다.
8. 비단 장사 왕서방(실크공장)을 찾아서
한산사를 돌아보고 실크공장을 견학하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우리를 특별한 방으로 안내했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과 교역하던 비단장사의 원조가 되는 역사의 현장이라는데 흥미가 있었다.(사)
실크제조 공장
아직까지 왕서방이 이곳 주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여명의 8등신 미녀들로 구성된 Fashion Model이 실크제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차례로 등장 관광객을 매료한 후 제조과정을 관람시키고, 이어서 매장으로 안내하여 실크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물에 불린 누에고치 하나가 사방으로 1-2m 이상 크기로 얇게 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했다. 누에고치 한를 확장한 모습
누에꼬치 누
이들은 누에고치로 각종 스카프, 부라우스 그리고 이불 등을 대량 생산 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온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실크 ‘스카프와 이불’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서 그 인기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들의 쇼핑이 끝날 때를 기다려 실크공장을 나왔다.
장가계를 항공기로 가기위해 1시간 30여분 드라이브 거리인 상해공항에 도착 하였다.
저녁식사는 ‘장가계’에서 하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저녁 7시50분 상해공항을 출발, 밤 9시45분 ‘장가계’에 도착하는 중국 항공기에 탑승했다. 예정시간에 장가계 공항에 도착하니 조선족 3세라는 안내청년이 관광 미니버스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근의 한국 식당으로 안내 되어 돼지 불고기로 늦은 저녁을 마치고 1시간 이상 비포장도로를 터덜거리며 달려, 밤 11시가 넘어서야 ‘무능원’(Wuilingyuan)이란 호텔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3일간 머물도록 되어 있어 짐을 풀었다.
9. 장가계(및 원가계)를 찾아서
10월 17일 아침 6시 기상하여 호텔주변을 산책하고 들어와 식당에 내려가니 벌써 식당 안이 대 만원이었다. 주로 동양인들로 중국 각지 특히 홍콩, 대만, 그리고 일본, 필리핀, 한국등지에서 온 관광객 들이었다.
식당은 뷔페로 메뉴는 미국 호텔과 비교 하여 빈약했다.
마침 찐 달걀이 있어 우유 한잔과 함께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아침 8시경, “장가계에 비하면 그랜드캐뇬은 동산(?)에 불구 하다”라고 과장되게 자랑하는 안내원의 허풍을 귀전에 흘리며 ‘장가계의 명승지’를 둘러 보기위해 호텔을 나섰다.
가) ‘장가계’는 1990년도 초부터 관광지역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량’이 ‘유방’에게 쫓겨 이곳에 잠적한 것이 연유 되어 ‘장가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산 입구에 다 달으니 ‘무릉원’이란 간판이 산 입구 옆면을 가득 차지했다.(사)
무릉원 입구
우리는 버스로 올라갈 수 있는 중턱 까지 오른 다음, 걸어서 긴 터널을 지나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 까지 등반하여 하룡공원, 천자산, 어필봉, 선녀산화, 천연석교, 미혼대등을 돌아보고, 높은 절벽 바위를 연하여 만들어 놓은 335m의 높이의 세계 제일의 관광전용이라 자랑하는 백룡 엘레베이터를 타고 정점 까지 올라가, 다시 길이 2,084m 높이 692m의 천자산의 케이불카(천자산 삭도)로 전체적인 산의 오묘함을 관광하면서 하산하는 코스를 택했다.(사)
백룡 엘레베이터
안내원이 입장권을 사는 동안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후는 흐린 날씨로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산이 워낙 험준하여 항상 구름이 끼고 가랑비가 오락가락 한단다.
비내리는 날, 장가계 입구에서
바로 이습한 기후 때문에 바위에 소나무가 자랄 수 있는 여건이 형성 된다는 것이다.
주변에있는 상가엔 비닐 일회용 우의들이 비치 되어있었다.
벌써 다른구릅들은 흰색, 파란색 형형각색의 비닐 우위들을 사서 덥어 쓰고 있었다.
우리는 노란 비닐 우의를 택했다. 색갈이 구릅별로 통일되어야 인원 통설이 용히 하여 낙오자를 챙기 용이 하다고 판단한 안내가 권한 색갈이다.
장가계의 하늘로 치솟은 석봉과 석봉위에 뿌리내려 자라고 있는 앉은 뱅이 소나무는 장관이었다.
장가계전경(비내리는 날이라 시계가 흐리다)
미국 서부의 ‘그랜드캐뇬’은 태고의 어느날 지구의 한부분이 갑자기 쪼개져 내려앉은 듯한 천애의 가파른 절벽으로, 저녁노을 햇볕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는 절벽들이 끝없는 황홀감을 주는 신비의 계곡으로 감탄이 절로 나와 이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창조주의 오묘하고 위대한 힘 앞에 인간이 무력함을 스스로 깨 닿게 되어 조용히 무릎을 꿇게 한다면,
이곳 ‘장가계’는 헤아리기 힘들정도의 8,000여개의 석봉이 들쭉날쭉 하늘로 치솟은 모습이 장관이었으며 그 석봉위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분재 같이 자라고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의 운치가 흰 구름에 살짝 가려 수줍음을 나타내며 마치 생동하는 한 폭의 입체 식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마치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창조주의 쉼터 같은 생각이 들면서 금방이라도 석봉과 운단 사이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듯한 신비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어떠한 형용사라를 동원해서도 이 아름다운 광경을 수식하기엔 부족할 것 같았다.
장가계입구에 들어서자 중국 민속춤 공연
나). 하룡공원은 금릉원 중간 턱에 중국의 10대 원수 중의 한명인 하룡이란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공원 내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하룡동상이며 그 주위에서 기념 촬영하는 관광객이 많았다. 그 외에도 하룡병기관, 하룡전시관등이 있었다.
하룡공원
동상의 높이는 6.5m 이고, 무게가 9톤으로 지난 100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큰 동상으로 남아 있다 한다. 그리고 공원입구의 ‘하룡공원’이라는 붉은 4글자는 1995년 3월 강택민 총서기가 직접 쓴 것이라 한다.(사)
다). 어필봉은 세 개의 봉우리가 구름과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 높고 낮음이 들쑥날쑥 하면서도 잘 어울려 장관이다. 어필봉은 ‘무릉원’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대표로 뽑힌다.
흙이 없는 바위 봉우리 계층마다 푸른 소나무가 자라서 마치 붓을 거꾸로 꽂아 놓은 것 같았다. 전설에 의하면, 전쟁에서 패한 황재가 화가 나서 쓰던 붓을 천자를 향해 던졌다고 해서 ‘어필봉’이라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라). 선녀산화는 천자산 자연보호 구에 위치한 신비한 구역으로, 석봉이 구름에 걸쳐 서있고 봄여름이면 산 아래와 산허리에 야생 꽃이 목화밭처럼 펼쳐져 있다 한다.
계절이 지나서인지 야생꽂이 만발한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구름이 표류하고 있었다. 바로 그 모양이 선녀와 같아서 선녀산화라는 이름이 생겼다한다.
마). 금편 계곡은 장가계 삼림공원의 동북부에 위치해 있고 금편암을 지나서 흐른다는 데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뱀처럼 꼬불꼬불한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전체 길이가 약 7km 정도이며 도보로 이를 통과 하는데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 된다 한다.
길옆은 1,000여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고 수풀이 무성하여 공기가 상쾌하며 한적한 곳이다. 나는 안내원을 선두로 50분 정도 걸어 오르다가 연로한 분들이 힘들어 뒤따르지 못하고 있어 회군을 제의하고 되돌아 왔다.
우리보다 앞서 중간에서 포기 하고 돌아온 일행들은 입구에 우리를 기다리며 군밤 파티를 하고 있었다.
바). 십리화랑은 5km에 달하는 협곡 양쪽으로 수풀이 무성하고, 야생화가 만발하여 향기가 날리는 곳이란다.
4명씩 나누어 ’모노레일‘을 타고 산중턱에 오르니, 사방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기암절벽들이 마치 한 폭의 화폭에 담긴 듯한 오묘함을 뽐내고 있어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특히 ‘3자매’라는 석탑 모양의 바위와 ‘약재 캐는 영감’의 이름을 가진 돌의 형체는 일품이었다.(사)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현지 사진사들이 재빠르게 그들의 Digital카메라로 찍어 그 사진을 넣고 ‘Key Chain’을 만들어 2불씩 팔고 있었다.
자기 사진이 들어간 것을 보고 뿌리치지 못하는 인간 심리를 이용한 상술이지만 기념이 될 것 같았다. ‘모노레일’을 기다리고 있는 내손엔 어느덧 4개의 'Key Chain'이 들려져 있었다.
산을 오를 때는 4명씩 타는 ‘모노레일’인데 하산 길은 6명씩 실려 삐걱거리며 아슬 아슬 내려 왔다. 내려오는 길은 중력이 초과해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 원가계는 ‘원가’라는 의적이 살던 곳이라 ‘원가계’로 이름 지어 졌다는 전설이 있는 이곳은 장가계와 같은 신비에 가득한 계곡인데 날씨가 흐려 구름속의 희미한 형상만 바라보여서 아쉽게 돌아 왔다.
이렇게 장가계의 ‘금릉원’일대의 관광을 마치고 내려오니 해가 저물었다.
10. ‘보봉호’ 유람선을 타다.
11월 18일 아침 8시경, 우리는 댐을 쌓아 물을 막아 만든 호수 ‘보봉호’를 찾았다.
날씨가 어제 ‘금릉원’을 오를 때와는 달리 쾌청한 날씨였다.
보봉호는 길이 2.5km이며, 수심이 72m의 아름다운 인공호수로 그윽한 주위 환경이 어울려 무릉원의 수경중의 으뜸이라는 곳이란다.
호수 안에는 작은 섬이, 바깥쪽으로는 기이한 봉우리들이 겹겹이 들어서 있으며, 봉우리는 물을 감싸 안고 있어, 위에서 내려 다 보면 마치 산속에 비취 알맹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입구에서 가파른 계단을 30여분 걸어서 오르면 배를 탈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 하게 되는데, 45여 분간 유람선을 타면 여 승무원이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워 놓고, 유람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우리는 고려 대학교 직원이라 소개 하는 팀들과 함께 승선했었다.
앞에 가는 유람선에서 ‘토요일밤 토요일밤’에란 귀에 익은 합창과 함께 요란한 박수와 즐거운 함성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흥이 많은 한국 여행객임을 알 수 있었다.
호수 군데군데에 지어놓은 움막무대가 설치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국의 젊은 남녀 가수가 지나는 유람선을 향해 중국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보봉호를 들어서는 입구에서 선착장까지 제법 길고 높은 계단을 출렁이는 대나무 들것으로 관광객을 싣고 오르내리고 있는 체구 작은 현지인들의 돈벌이 모습이다. 들것을 어께에 메고 여행객을 운반하고 있다.
구슬땀을 흘리며 자기보다 덩치 큰 사람을 들러 메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체구가 작아 계단에 미끄러져 주저앉거나 대나무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했으나, 숙달된 동작으로 별 탈 없이 선착장까지 운반하고 있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에게 ‘만원, 한국 돈 만원’ 하고 서툰 한국말로 유혹하여 들것에 싣고 목적지에 도착해놓고는 ‘앞뒤사람 각자 만원, 그리고 팁 만원, 3만원’이라고 말을 바꾸어 사람을 난감하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2만원씩을 주면 그대로 받고 있었다. 보봉호 전경
보봉호 유람선 전경
보봉호’유람선이 호수를 한바퀴 돌아 선착장에 돌아오니 12시가 되었다.
전통한식을 위해, 안내원은 우리를 북한당국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평양 식당’이란 한식집으로 안내 하였다. 김치찌개, 돼지 불고기등의 메뉴와 별도로 평양냉면을 시켜 점심을 마쳤다. 한 민족의 전통 음식 솜씨라 그러한지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식사도중 가슴에 ‘예쁜 부로지’ 대신 ‘김일성 뱃지’를 단 공산 당원으로 보이는 여 종업이 음식 서브를 하고 난후 카운터 옆에 설치해 놓은 노래방(TV)앞에 서서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노래 한 곡 불러 주겠다고 소개 하고는, 한 옥타부가 높은 북한여인의 특이한 음성으로 ‘통일의 노래’와 ‘고향의 봄’을 불렀다.
집을 떠나 여행길에 있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통일의 노래 가사 중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나오는 ‘통일’이라는 가사를 1절은 ‘통일’ 2-3절은 ‘자주’로 바뀌어 불렀다. 왜 일까 ?
식당에서 까지 ‘자주’를 강조하며 은연중에 주체사상을 홍보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 했다. 아마도 종업원들이 훈련된 공산당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마치고 난 종업원은 ‘무공해 자연산 시음장’을 열람시킨다고 우리 일행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이들은 김일성주석의 이름을 걸고 진품임을 보장(?)한다고 강조하고 나서, ‘홍삼과 우황 청심환’을 본격적으로 판매 하며 외화를 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라는 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들은 이곳을 나와 ‘황룡동의 동굴’을 보기위하여 버스에 올랐다.
10. 황룡동굴의 1,800개 계단을 오르다
무릉원에서 동쪽으로 7km떨어진 이곳은, 1983년에 발견된 곳으로 몇억년전에 지각운동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용암 동굴로서, 중국 10대 용암굴중의 하나이다.
황룡굴 입구
황룡굴 뒷면 입구
‘중화 최대의 아름다운 저택’ ‘중국의 국보’ 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미국 버지니아 동굴과는 또 다른 차원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상하 총 4층, 총면적은 618ha, 동굴을 지탱하고 있는 종유기둥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 14,000m에 달한다고 하며, 오늘 우리가 밟은 돌계단의 총수가 1,800개 정도라고 안내원이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동굴 내에는 1곳의 물구덩이, 2곳의 하류, 3곳의 폭포, 4곳의 연못, 13개의 궁정, 96개의 길이 있으며, 많은 석순(밑에서 위로 자람/1cm자라는데 100년 걸린다 함)과 종유석(위에서 아래로 자람/1cm자라는데 200년 걸린다 함)으로 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환기시설은 없었고 유황 냄새가 나고 있었으나, 자연적인 환기로도 굴속의 산소는 충분히 정화되고 있는 편이었다.
석순의 높이가 19.7m에 달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98년 중국 평안보험공사라는 보험 회사에서 인민 돈으로 1억 원의 보험을 든 것으로 유명했다.
동굴 속에서 일반 관광구릅 안내원들의 고성 안내는 허용되지 않고 있으면서도, 동굴관리
회사(반관반민) 당국의 안내원들은 스피카를 들고 마음 것 큰소리로 설명하고 있어 굴속 전체에 울림이 되어 시끄러웠다. 그들의 텃세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가는 길은 수많은 계단을 오르느라 지쳐있는 여행객들을 위해 중간지점 나루터부터 출구 까지 굴속에서 생성되어 흐르는 냇물에 15인승 보트를 띄워 15분정도 타고 나올 수 있도록 하여 우리 일행은 그 보트를 이용했다.
참으로 엄청난 규모의 동굴임을 재삼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이 이러한 훌륭한 관광 자원에 비해, 부대시설과 서비스가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몰려오는 관광객으로 보아 현재도 막대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부럽기 까지 하였다.
지금은 동굴 주위에 부대시설이 보잘 것 없는 들판 길인데도 오가는 관광객이 장사진을 이루 지만, 5년 후 이길 주변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동굴입구 주변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사)
우리들은 저녁노을이 지는 황룡동을 뒤로 하고, 호텔 근처 ‘차집’으로 안내 되었다.
조선족이라 스스로 소개 하는 젊은 여종업원이 각종 차의 효능을 설명하며, 골고루 차를 끓여 우리에게 시음을 시켰다.
피로한 몸에 마시는 차 맛은 그런대로 차 종류 마다 색다른 면이 있었다.
우리는 공짜로 마신차가 미안하여 차 한 병씩을 사들고 호텔로 돌아와 내일 아침 상해 공항을 거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상해여, 소주여, 장가계여 안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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