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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러시아 편( 1. 모스코 & 2. 성 피터스버그 )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러시아 편


   이번 러시아 여행은 전 세계 각국에서 “9평회”(9기 민주평통 회장단)회원 부부 15커플이, 2004년 6월 1일 부터 8박 9일 까지 일정으로, 한때 철의 장막으로 가리 워 진 구 쏘련을 돌아보는 의미있는 여행을 추진한것이다. 본 여행기를 “모스코 편과 성 피터스버그 편”으로 나누어 여행안내자의 설명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행 자료를 바탕으로 필자의 여행 소감을 정리해 본다.
다음 슬라이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간추려 놓은 것으로 슬라이드 다음에 여행기를 써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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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스코바 편


2004년 6월 1일, 아침 6시경 자리에서 일어나 꾸려놓은 짐을 점검 했다.

짐은 간단하게 꾸렸는데 휴대 가방을 합쳐 3개가 되었다.

우리부부는 지난 3월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 올 때와는 달리 공산국의 종주국이었던 구 쏘련을 여행한다는 설레 임으로 지난밤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일어난것이다.

우리는 한 달 전에 뉴욕 케네디 공항을 출발 하는 ‘Aeroflot’ 러시아 항공표를 예약 했었다.
케네디 공항 까지 교통 편은 아침 10시  Door to Door로 Pick Up하는 리무진을 이용하여 오후 3시 30분경에 공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항공기 출발예정 시간 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했지만, 별로 쉴 곳도 없어 예약된 항공사 카운터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5시가 가까워지자 텅 비어 있던 공항이 순식간에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기 시작 란다.

아마도 러시아 항공기는 하루에 한번 운행되는 희기성과 다른 항공기에 비해 항공료가 저렴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 같이 보였다.

오후 5시 가 되자 Check In이 시작되었고, 짐 검사는 기계 탐지기 대신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되어 지루한감은 있었으나 별로 까다롭지 않게 짐이 통과 되고 있었다.

그렇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또기다리다보니 예정시간 보다 3시간이나 늦게(밤 10시 30분) 육중한 항공기가 케네디 공항 활주로를 이륙하고 있었다.

항공기에서 밤 12시엔 기내 식사가 시작 되었고, 'Steak과 Chicken'중 한 가지를 택할 수 있어 Steak를 택했다. 음식은 비교적 깔끔하고 맛있는 편이었다.

음료수는 한번에 2-3가지씩 Order하도록 하고 있었다.
서비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인것 같았다.

미모의 러시아 여인이 러시아 말을 사용하며 서비스 하고 있으나 영어를 사용하는 여객에게는 서툰 영어로 최선을 다하느라 미소는 잊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코는 미국동부와 시차는 8시간, 비행시간은 9시간이다.

항공기 저녁 식사를 하고 난후 기내 스크린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으나 헤드폰이 작동되지 않아 들을 수가 없었다. 스튜어디스 에게 고장을 알렸으나 어께를 들먹이곤 그냥 지나쳐 버린다.

영화 보기를 단념하고, 아내가 준비해온 “책에게 길을 물어”란  책을 읽다 보니 현지 시간으로 6월 2일 오후 2시30분경이 되면서 모스코바의 ‘쉐레메체보’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 나온다.

항공기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삐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착륙을 위해 기체 바퀴를 펴고 있는 소리라 직감 할 수 있었다.

낡은 여객기라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한다. 곧이어 파이롯트의 기술이 의심될 정도로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활주로에 부디치며 거칠게 내려 앉으면서 항공기 기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사 도착을 환영하는 승객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불안했던 심정은 승객 모두가 마찬가지였나 보다.

문득 84년도 구 쏘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으로 무고한 269명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사망당했던 구 쏘련의 만행이 스쳐간다. 그들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하여 필라 독립 공원 및 DC 구 쏘련 대사관까지 원정 하며 규탄데모를 하던 생각도 스쳐 간다.


공항분위기는 출입국 관리들이 현지어를 사용(영어 불사용)하면서 조금 무뚝뚝하다는 것 이외에 비교적 자유로웠다. 80년대에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장의 기행문에서 소개한 러시아의 공항 분위기와는 완연히 달랐다. 우리 부부는 비과세 대상자가 통과하는 ‘그린간판’이 달려 있는 출구를 통하여 검색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나 공항 출입국 출구를 통과하는 순간 출입관리소 직원이 아내의 여권을 이유없이 압류하며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다.
30여분 기다리니 아무 설명없이 여권을 내어주며 통과 시킨다. 그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꾹참고
세관 대를 통과하고 밖으로 나오니 “이오영”이란 표 말을 들고 서있는 영국 여행사 본사에서 왔다는 안내원(Mr. 정)이보였다.

우리 내외는 안내자를 따라 시내 ‘코스모스’ 호텔에서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호텔 에선 Check in시에 여권을 2시간정도 카운터에 맞기라 했다. 

아마, 러시아 공안당국에서 비자를 재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역시 공산국은 아무리 개방되었다 하드라도 신분확인 절차가 까다로운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느낄 수 있었다.

코스모스 호텔

‘코스모스’란 호텔 이름이 한국 가을 들판에 피는 향토적인 꽃 이름 같이 정답게 느껴져, 이곳에서 성공한 고려인이 운영하는 호텔로 생각했었으나 내 생각은 빗나갔다.

‘코스모스’란 말이 러시아말로 ‘우주’라는 의미로, 현재 러시아인이 소유 하고 있다고 하여 약간은 실망했다. ‘모스코바’는 현지에서 ‘모스코’로 불리고 있었다.

호텔은 별이 5개로 비교적 큰 편이나, 화장실 내부 구조가 낙후 되어 있었다.

이번에 세계각처에서 모여드는 일행(9평회: 9기 평통 회장들의 모임)들이 서울에 모여 함께 출발하는 관계로 밤 10시가 넘어 도착하기로 되어있어 이들을 기다렸다 함께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고, 우리는 내일부터의 여행 일정을 상의한 다음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6월 3일! 드디어 모스코에서 첫 여정이 시작 되는 날이다.

잠자리가 바뀌면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습관 때문인지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 5시 40분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 역시 밤잠을 설치다 새벽에 깊은 잠이든 상태라 혼자 호텔주위를 걷기 위해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호텔 문을 나서자 일행 중 LA에서온 이SJ 라는 약사 부부가 벌써 나와 있어 자연히 합류하게 되었다.

아침 공기는 손에 장갑이라도 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싸늘했다.

우리는 함께 호텔에서 지하도를 건너 어제 보아둔 우주 발사 기념탑이 건립 되어 있는 ‘코스모스’공원으로 향했다.

지하도 여기저기엔 밤새 마시고 버린 빈 맥주병이 뒹굴고 있었고, 입구와 중간지점 코너에는 술 취한 홈레스 피풀이 웅기 종기 모여 앉아, 지나는 우리를 보고 러시아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초점잃은 눈동자로 우리를 응시 하고 있었다. 거지가 없다는 사회주의 허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일것이다.
그들의 우리를 향한 초점 잃은 눈동자가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대로 지나 쳤다.

지하도를 지나 공원 중심부에 다 달으니, 방금 발사 되어 하늘높이 치솟아 비행을 시작하고 있는 듯 한 거대한 로켓 조형물이 있었다.

그 조형물엔 최초 우주 탐험대원들의 혁명적인 모습들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침 조깅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내와 함께 2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벌써 각지에서온 여행 단체 손님들로 식당은 초만원인데 그중에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띠였다.

한국이 불경기라지만 그리스, 터키와 이곳에서 많은 여행객을 보면서 불경기란 뜻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국에서 동족을 만난 기쁨은 언제나 반가운 것이라, 우리는 ‘즐겁고 보람된 여행이 되라’는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음식의 종류는 유럽 식당에서는 ‘7분간 삶은 달걀과 그리스 정의의 신인 아테네여신이 인간에게 하사했다는 올리부’가 빠짐없이 등장 했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의 호텔 수준 이상이었다. 이곳에 동포가 운영하는 한인 식당은 백학, 가야, 서울 가든을 비롯하여 5-6개 정도라 한다.
식수(물)는 안내가 별도 구입하여 제공하는 생수를 마셔야 했으며, 호텔과 식당에서 물 인심은 인색하여 물을 주문하면 별도 Charge를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LA의 오랜지 카운티의 김태수 장로의 하루의 무사일정을 기원하는 기도를 시작으로, 모스코바 대학, 렌닌언덕, 노보데 비취사원, 트레찌 꼽스까야 미술관, 구원의 성당을 돌아보고, 저녁엔 ‘발쇼이 극장에 발레지젤’을 보기로 한 날이다.
 

‘렌닌 언덕’에 오르니 모스코 중요지점들을 한눈에 들어왔다. ()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에 담아 놓고, 우리는 언덕 아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적인 정치가, 철학가를 비롯하여, 음악, 문학, 미술등 각종 예술가와 석학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모스코 국립대학’ 캠퍼스로 도보로 옮겨 갔다. 
 

‘로마노스프’란 학자가 창설 했다는 이 대학은 높이 240m, 정면의 길이가 450m의 대리석으로 건축된 건축물로서는 가장 크다고 한다.

모스코대학 앞에서 필자 부부


학교 정문으로 연하는 정원 양측에는 본 대학 출신들인 스탈린, 렌닌, 후르스초프, 톨스토이, 푸시킨, 도스트에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등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지구상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동상이 양쪽으로 줄을 지어 있었다.

‘모스코 대학’은 입학하는 것도 어렵지만 졸업하기란 더 힘들다고 한다.

캠퍼스에 드나드는 젊은 학생들은 유행과는 동떨어진 허스름한 옷차림이었으나 비교적 조용한 표정으로 학풍이 풍기고 있었다.

모스코 대학 뒷면에서-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왔으니 우리는 모스코대학 동기생이라--!!


우리 일행은 대학 정문을 통하여 후문으로 나오는 동안 대학 내를 살펴본 후 대학 앞 계단에 다시 모여 기념 촬영을 하면서 ‘모스코바 대학 동창’이라 농담을 나누며 다음 예정지인 ‘노보데 비취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보데 비취사원

‘노보데 비취사원’은 1524년 바실리 3세가 리투아니아로부터 스몰렌스크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고 폴랜드등 서부 방면으로부터 요새화하기 위하여 건설 하였다는 사원으로, 러시아 귀족들의 자녀 혹은 부인들을 유폐시킨 수녀원으로도 유명했으며, ‘피터 대제’ 집권 후 이복누이 ‘소피아’와 그의 첫째 부인 ‘에브도키아’를 유폐시킨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사원에는 ‘후루스초프’를 비롯하여 많은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다.

점심을 마치고 ‘트레꼽스까야 미술관’을 관람했다.

특히 11세기 이후의 러시아 미술의 명작들이 수집되어 있는 본 미술관은 1856년에 개관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세기 자본가였던 ‘트레챠코프’의 ‘파벨르와 세르게이’ 두 형제가 수집한 작품들이 전시 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레핀의 작품인 독제자 이반대제 4세가 아들을 철붠으로 내리쳐 죽인후 서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모습에서 독제자 그도 어쩔수 없이 자연인 인간 임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앞에서 필자의 발을 머추게 했다.

레핀의 "이반대제와 그의 아들"


‘이반대제의 아들’을 감상하고 보니 계속해서 슬리코프의 ‘공작모조로프’, 페로프의 ‘도스토예프스키’등의 명화를 비롯한 구 쏘련 화가의 작품까지 연대순으로 5만 여점이 명화가 50개의 홀(room)에 전시 되어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을 감상해나갔다.

그림에는 문외한에 가깝고 그림 설명이 러시아 말로 되어 있어 답답했지만, 작가가 의도 하고 있는 의미를 내 멋대로 상상해야하는 시간이었으나 안내원의 자상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되어 그런대로 내 일생일대의 값진 시간이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우리 일행은 ‘백학’이란 식당에서 동태 찌게로 저녁을 하고, 러시아에서도 유명한 ‘발쇼이 극장’에서 공연 중인 ‘발레지젤’을 관람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발쇼이 극장에 발레지젤’ 극장에서 "발레지젤"

우리은 모스코 시내의 전통이 있다는 발쇼이 발레 극장으로 안내되었다. 발쇼이는 크다는 뜻으로 큰 극장의 뜻을 갖인 극장으로 정식명칭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이다.
정장을 요한다는 극장이지만 근래에 와서는 여행객 유치를 위해 복장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는것이다.

발쇼이 극장 전면,원명칭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


불란서 작곡가 ‘A. Adam’이 설화 문학을 소재로 사색의 깊은 감정세계를 2막으로 나누어 아주 단순 하면서도 표현력이 넘치게 창출한 작곡을 연출가 J.Coralli, J.Perrot, M.Petipa의 연출에, 러시아의 명배우 ‘라브레뉴크’의 지휘로 ‘사랑의 위대함은 죽음을 이겨 낸다’는 내용을 발레로 공연한 것이란 설명이 붙은 안내서를 받아 들고 지정 좌석에 앉았다.
 

제 1막 서두에서, 조용한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 지젤은 Albert라는 농민으로 가장한 귀족청년과 아름다운 자연에 어울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마을엔 지젤을 짝사랑 하는 산림 지기 청년이 이를 보고 가슴 아파 하고 있었다.  1막 말미에 귀족 일행이 사냥에서 돌아가는 길에 그 마을에 들려 잠시 쉬는 자리에서 Albert라는 귀족 청년이 그의 약혼사실을 숨기고 농민으로 가장하여 지젤에게 접근했던 비밀을 산림 지기 청년이 Albertt가 숨겨 놓은 귀족가문의 보검을 찾아 들고 나타나 그의 정체를 폭로 한다.

지젤은 고귀하게 믿었던, Albert에 대한 사랑의 믿음과 소망과 꿈이 한순간에 깨져버리게 되어 이의 배신감으로 미쳐 죽어가는 장면으로 드라마틱하게 1막이 내린다.

제 2막이 열리고, 월광이 비취는 야밤에 Albert는 지젤의 무덤을 찾아간다.
사랑이 진실이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이때 처녀귀신들인 유령들이 나타나 Albert를 원무 속으로 유인하여 죽어 가게 하는데---,
이때 나타난 지젤의 영혼이 Albert를 극적으로 살려냄으로서 사랑은 죽어서도 위대함을 나타내고, 그 귀족청년의 심장 속에 지젤이 영원히 자리 하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관람객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영혼들이 사랑을 속삭이듯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

결혼을 앞두고 죽은 저주 받은 귀신들의 향연을 연상하기에 충분한 음침한 멜로디---.

학보다 곧고 예쁜 다리의 율동적인 움직임, 하늘하늘 잠자리의 날개 짓을 방불케 하는 천사 같은 발레나 들의 손발 놀림 ---, 

활처럼 휘는 기교 있는 몸의 유연성--.

이것이 바로 예술의 극치, 감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장내 관중을 매료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발레이의 종주국은 러시아라 했던가―-?

그것도 러시아의 수도 모스코에서 발레를 감상하는 느낌은 오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크레물린 궁전

6월 4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크렘린 궁전, 무기고, 붉은 광장, 바살리 사원주변, 무명용사의 묘, 그리고 유람선을 타기로 일정이 잡혀 우리 일행은 ‘크렘린 궁전’을 향하고 있었다.

‘크렘린’이란 모스코를 상징하는 핵심용어 이기도 하다.

클레물린 궁전 전경


우리가 흔히 응큼한 사람이나 석연치 못한 사람에게 ‘크레물린’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붉은 성벽으로 높이 가려져 있는 베일 속에서 모든 정책이 결정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공산 종주국인 구 쏘련의 위정자들을 비하해서 표현하던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러시아어로 크렘린은 요새라는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궁안에는 15세기에 건축된 교회로부터 현대 의회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있는 곳이다.

그레물린 궁전은 르시초프, 브레즈네프와 고르바초프가 이곳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한 곳이다. 피
터 대제때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궁전 ,병기고,원로원, 이반 대제의 종루,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12사도 사원, 우스펜스키 사원,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인 황제의 종, 황제의 개인 예배 사원이었던 블라고베시첸스키 사원,아르항게리스키 사원 등 많은 건물들과 보물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버스 유리창을 통해 나의 시야에 전개되는 ‘크렘린’ 전경은 모스코 강변을 둘러싸고 높이 5m의 아름다운 붉은 성벽과 그 안에 우뚝 솟은 성전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장관이었다.

클레믈린 궁전내에 러시아 수상 집무실


12세기 ‘유고 돌고루끼’가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여, 1712년 성 페쩨르부르그(성 피터스버그) 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황제의 임시 거처로 쓰이기도 했으며, 1918년 수도가 다시 모스코로 옮겨지면서 수상(대통령)의 집무실을 증축 보수하여 러시아의 정책을 쏟아 내는 핵심관청이기도 하다. 크레물린 궁전에 도착하니 제한된 관광객이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구역만을 둘러보고 나갈 수 있도록 크렘린궁내에서 파견된 자체 안내원들이 직접 여행객들을 맞아 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 뿌듯한 것은, 필자가 모스코 ‘쉐레메체보’공항에 내리자마자 중요 코너에 ‘삼성 TV 모니터’가 화면을 뽐내는 것을 보고, 삼성의 홍보 전략이 세계수준이라 느끼면서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었는데, 모스코 시내에 들어서니 유명 거리마다 LG와 삼성 간판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가슴 뿌듯함을 금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행객이면 누구나 크렘린 궁전을 들어서자마자 정문을 향해 안에서 밖으로 기념사진을 촬영 하게 되는데 크렘린 정문 코너 위로 “SAMSUNG"이란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크레믈린 안에서 밖을 향하여, SAMSUNG간판이 보인다.

 

크렘린 성에서 밖을 향해  찍은 기념사진엔 영어로 된 ‘삼성’이란 단어가 꺼꾸로 선명하게 보였다. 이 SAMSUNG(삼성) 간판은 크렘린 옆 고층건물에 과거 일본의 ‘소니’ 간판을 밀어내고, '삼성’이 차지하게 된 것이라는 안내원의 부언 설명이 있었다.


구 쏘련은 한반도에 6.25동란을 일으킨 당시 결정적인 북한의 막후 세력연방국으로 우리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을 결정 할 만큼 막강한 파워를 갖은 우리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 쏘련은 3차 대전을 예상하며, 한반도를 패권주의 확보를 위한 전략적 요충 거점 기지로 생각하고, 한반도의 통일 보다는 영구 분단을 원하고 있던 나라의 하나로, 노태우대통령 북방정책 이전에는 우리와 친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나라이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쏘련은 얼마 전 까지 북한에 경제 원조를 하며 공산권의 종주국의 위치를 고수하는 자존심을 세우던 나라로, 이들 나라 중심부 요소요소에 대한민국의 “LG” 와 “삼성”이란 간판을 내걸며 세계첨단의 전자 및 자동차 산업의 위용을 나타내고 있음은 삼성이란 한 회사의 홍보 전략 차원을 넘어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 또는 동포라는 자부심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클레믈린 궁전내의 성당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 했던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역사는 정의롭게 노력 하는 자 편에서 창조 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민족과 조국위에 영원토록---” 기도 했다.

크렘린 궁전 관리소에서 파견된 안내 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주물로 녹여 만든 거대한 대포를 볼 수 있었다.

클레므린 궁전네 전시되어 있는 대포- 포신이 외교 사절단 숙소 쪽으로 향해 있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포신을 외교 사절단이 묵는 건물을 향하게 진열해 놓았다는 것이다.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세계에서 제일 큰 포신의 이 대포는 아마도 전시용으로 외교 사절단의 경고 망동을 삼가라는 위협용(?)이 같이도 느껴 졌다..

대포 옆에는 역시 주조물을 녹여 만든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종이 제조과정에서 실수하여 한쪽 끝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전시 되어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울려 보지 못한 처녀 종이라 한다.

클레므린 궁전안에 전시된 미완성 종- 제조당시 깨져 한번도 울리지못 했다는종.호주의 추은택 회장 부부와


일행 중의 한사람이 ‘종이란 울려야 종이지, 한번 도 울려 보지 못했으면, 종이라 할 수 없지’ ‘종이야 에밀레종이 진짜지 ?!‘라며, 여기서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여 함께 웃었다.

크렘린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그 유명한 ‘붉은 광장’으로 이동했다.

길이 695m, 폭130m, 넓이 약 7만 3천 평방m라는 이 광장은 러시아 역사의 산 현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 주위에서는 크렘린궁전, 크렘린 성벽, 레닌 박물관등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붉은 광장은 구 쏘련 시절 5월 1일과 11월 7일에 혁명기념 퍼레이드를 하던 곳으로 모스코의 핵심 광장중에 하나인 곳이라 했다.
우리일행은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무기고’로 발길을 돌렸다.

무기고는 마침 open되지 않아 내부를 견학할 수 없었다.

이 무기고는 1702년 ‘표트르 황제 1세’에 의해 건축 되여 무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러시아 공예 예술품, 왕관, 의복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외국 왕들의 선물과 러시아 제국이 획득한 전리품, 귀금속 등이 전시 되어 있다 한다.

구원의 성당

무기고를 밖에서 돌아본 후, 우리일행은 “구원의 성당”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1812년 불란서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스꼬프’란 유지가 국민의 성금으로 고급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건축하여 내부는 성화로 화려 하게 장식해 놓은 곳이다.

실내 벽에는 성인들의 초상화가 더욱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신자들은 각자가 간구 하려는 성인들의 초상화 앞에 서서 은사를 받기 위하여 기도드리는 모습들이 특이 하게 보였다.

러시아는 “정교”를 택하고 있다.

러시아가  평소 전형적인 사회주의 비 기독교국이라 생각해오던 것과는 달리 모스코 곳곳에서도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구원의 성당

 

‘구원의 성당’을 나와 우리일행은 기념식 때 불꽃이 타오른다는 성화대 좌우편에 키 크고 멋진 의장병사가 로버트와 같은 동작으로 서있는 “무명용사의 묘” 앞으로 이동하여 기념 촬영을 하고 모스코를 가로 지르는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모스코 내륙을 1시간 가량 둘러보았다.

저녁노을이 드리우는 내륙의 모스코 광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예정보다 늦게 석식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되었다.

그러나 거리는 어둡지 않고 밝았다. 이것을 백야라 하는 것이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6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백야”가 모스코에 서서히 찾아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마일스키란 벼룩시장

6월 5일 아침 8시30분, 우리 일행을 태운 관관 버스는 오전에 “이스마일스키란 벼룩시장”을 향했다. 이곳은 서민들이 즐겨 찾는 시장이기도 하다.

수 만 가지 종류의 물건들이 모스코 원주민은 물론 러시아 인근 도시와 국가들의 상인 및 소비자 그리고 세계 각국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으며, 물건 가격은 비교적 염가로 손으로 만든 각종 제품을 그 어느 곳 보다 싸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구경만 하는 것도 재미있는 곳이었다.

어림잡아 20m정도의 폭과 1 Km정도의 길이의 벼룩시장입구로 연하는 길에는, 오가는 사람으로 하루 종일 줄을 이었다.

이스마일스키 벼룩시장 입구- 벼룩시장을 향하는 무리들이 줄지어 있다.


시장 안이 너무 혼잡하여 우리일행은 8명씩 4구릅으로 나누어 둘러보고, 11시까지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구룹의 안내와 통역은 장발레 박사 부인이 맡았다.

그녀는 영어에 능통하여 대화에 불편이 없었다.

이스마일스키 벼룩시장 내부의 상점들


역시 쇼핑몰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가 보다. 여성들은 열심히 시장 구석 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모두들 각기 필요한 선물들을 사들고 나왔다.

그중에서 러시아가 원산지라는 ‘호박’ 과 ‘크리스털’이란 보석류 그리고 큰 인형 속에 5-6개의 적은 인형들이 들어 있는 ‘목각 인형’이 인기가 높았다.

모두들 시간이 짧았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정확한 시간에 모여 들었다.

거리의 예술가
모스코 교외한적한곳에 위치한 무명의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림을 둘러 보니 박물관에서 관람하던 그림 못지 않게 섬세하고 명암의 구분이 확실하고 아름다운 Oil Paint 와 수채화등 훌륭한 그림들이 보였다.

모스코바 거리의 화가들의 작품



모스코 거리의 화가들의 작품앞에서


우리가 접근해도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어서인지 겅터 앉은 의;자에서 꿈적도 하지 않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가격을 물어야 값을 대답할정도로----.
사진을 몇장 찍자 사진 촬영을 금지 한다는 뜻으로 손을 좌우로 흔든다.
 

피터대제의 생가

우리는 이어서 18세기경 러시아를 제패한 ‘피터대제’의 생가가 있는 ‘칼로멘스카야 공원과 박물관’을 찾았다.

널따란 공원 가운데 나무토막으로 지어진 오두막집(그 후 원형대로 보수되었다함)이 있었다. 그것이 피터 대제의 생가라 한다. ()


18세기 러시아를 제패한 피터대제의 생가

 

 

 

집안이 너무 좁아 먼저 들어간 여행객이 나올 때 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낙비가 쏟아져 일부는 추녀 밑으로, 일부는 준비해간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하느라 법석이었는데 소낙비는 이내 멎었다.

‘피터대제’의 키는 204m나 되는 장신인데 얼굴이 적 고 몸통이 커 생전에 자기 몸에 대한 컴풀랙스가 있었다 할 정도로 기형적인 거인이었음이 그의 사진과 조각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피터대제 동산앞에서 9평회 부인들, 피터대제는 머리가 작고 뭄은 거인으로 기형적인 몸매라고 한다.



그러나 그 는 러시아 국민으로부터 신적존재로 추앙받고 있었다.

피터대제의 생가를 돌아보노라니 켄터키에 보전 되어 있는 미 16대 대통령 ‘에브라함 링컨’의 생가가 생각났다.

절대 권력의 군주인 러시아의 ‘피터대제’와  미국 남북 전쟁당시 북군의 사령관으로 대통령이 되어 노예를 해방시키고, ‘By the Peaple, For the Peaple, Of the Peaple'를 정치의 기본 이념으로, 민주주의 꽃을 피운 미국의 ’에브라함 린컨‘대통령은 각기 상극의 정치이념 철학을 가진 지도자였지만, 각기 그 나라 국민들로부터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이 두 사람 모두 볼품없는 토막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엄청난 가난에 쫒기며 성장했던 공통점이 있었다.  후세들의 선조들의 유품 관리유지 상태는 ‘에브라함 미 대통령’의 생가가 훨씬 앞서 있었다. 이들에 버금가는 우리민족 가슴속에 영원히 추앙받는 조국의 위대한 지도자는 과연 누구일까 ?

고구려시대의 광개토대왕, 이조시대의 세종대왕 그리고 현대사의 박정희---????


우리는 ‘피터대제’ 생가를 돌아보고, 드넓게 조성된 공원을 부부중심으로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피터대제의 생가 정원의 오솔길을 필자와 아내가 --



러시아 도심지 그 옛날 피터 대제가 거닐었을 이 아름다운 정원의 오솔길, 그리고 네바강변을 연하는 산책길을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걸어 보니 옛날 연애 시절 명승지를 찾아 산책하던 때의 감회가 새로웠다.

힘의 상징


공원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는 여기저기 미술 학도 또는 무명 화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스켓취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 생가

피터대제의 생가가 있는 공원을 산책하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톨스토이’ 생가를 찾기로 했다.

나무로 건축된 2층집을 대식구가 함께 살 수 있도록 한편을 증축한 흔적이 보였다.

톨스토이가 거닐며 작품을 구상했다는 넓은 뒤 뜰, 그는 겨울엔 그곳에 스케트 장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즐길 정도로 인간적 이었다한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12자녀를 두었는데 4 자녀가 어릴 때 사망하고 8자녀를 키워 그의 후예들이 현재 인근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통상 아침 10시부터 저녁 4시까지 작품을 썼고, 작품은 연습이나 교정 없이 그대로 써내려가는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었다 한다.

그는 생전에 음악을 좋아 했고, 여가를 승마와, 스케이트를 즐겼다한다.

생가에는 그와 가족이 쓰던 그랜드 피아노 및 식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 특히 수염이 가득한 그의 생전의 사진과 함께 찍은 단란했던 가족사진, 그가 작품을 쓰던 책상과 의자, 펜, 그리고 그가 직접 만들어 신었다는 부스등 그가 상류층에 있었지만 검소했었음을 직감하게 했다.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엔 부부와 금실이 좋았으나 말년에 이혼을 하고 집을 떠나 어느 시골간이역에서 외롭게 객사하게 되는데--.

그는 갔으나 그의 이름과 그가 남기고간 많은 작품들은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

유명인들의 무덤을 찾아서
이곳의 무덤은 묘지 기분이 나지 않고 유명인 들이 입체식으로 조각되어 관을 덮고 있어 아름 다운 공원 같은 기분이 났다. 주로 음악가, 예술가 , 러시아를 위한 영웅들을 비롯하여  정치가들이 안장 되어 있다고  한다.

마침 구 쏘련을 개방하여 오늘의 러시아가 있게한 코르바 초프수상이 그렇게 사랑했었다는 영부인 리사(?)의 아름다운 묘비가 있었다.

고르바조프의 부인 묘지및 동상, 뒷벽에 유명인들의 형상을 실은



공원 같은 묘지를 돌아 보다 모퉁이를 돌아서다 보니 다른 묘지 보다 초라하게 벽에 비석이 붙어 있는 한국인의 영정이 보여 발길을 멈추었다. 김백추라는 이름이 러시아말과 한국어로 새겨져있었다.
그무덤이 영웅들만 모시는 곳이란 말을 상기 해 볼때 이분도 러시아를 위해 공로가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필자는 같은 민족의 선구자로 외롭게 이국땅에 묻힌 이분의 영전에 카네이숀 한송이를 바쳤다.

필자가 러시아 유공자로 인정된 한인으로 추정되는 김백추씨 묘비 앞에꽃한송이를---




유명정치인들의 묘비


모스코의 서커스, 아! 사람이 저럴 수가 ---?

‘가야’에서 저녁을 마치고, 우리일행은 써커스의 종주국인 러시아에서 오리지날 서커스를 관람하기로 했다.

미리 예매 없이는 입장하기 힘들다는 이 써커스를 위해 장발레 박사가 한 달 전에 우리들을 위해 표를 구입해 놓았다 한다. 극장 앞에서 관광버스를 내리니 소나기가 쏟아 졌다.

공연장 입구 여기저기에 웅기 종기 서성이며 겨우 비를 피하여 입장했다.

러시아의 날씨는 금방 소나기가 쏟아지다가 이내 햇살이 비치는 등 변덕이 심했다.


써커스 극장 입구에서 관객들이 Open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안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라하여 극장 밖에서 몇장 기념촹영을 하고 극장 안으로 입장 했다.
저녁 7시, 시간이 되자 극장 실내는 만원이 되었다.

사람처럼 길들인 강아지, 원숭이 그리고 곰의 깜찍한 기교, 감탄을 자아내는 마술, 아슬아슬한 공중 곡예가 시작 되었다. 그들의 묘기와 곡예가 손에 땀을 쥐게 했지만, 여름 더위를 잊기에 충분 했다.

그런데, 까마득히 높은 공중 그네에서 아동이 한 바퀴 공중회전 후 상대편에서 그네 줄에 거꾸로 매달려오는 사람의 손을 잡아야하는 과정에서 서로 잡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노라니--.

마침 밑에는 안전 그물이 쳐 있었고, 그물의 탄력을 이용하여 떨어진 아동이 우뚝 서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안도의 숨을 쉬는데--,

그는 드리워진 외줄을 타고 다람쥐같이 까마득한 공중으로 기어 올라가 다시 시도하기를 2번, 그러나 결국 실패 하고야 만다.

그 순간 관중들의 환호와 우뢰와 같은 박수가 숨죽이고 있던 장내의 정막을 깨고 있었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 해도 된다는 격려의 박수였으리라. 


그렇게 공중 그네 묘기에서 떨어지는 실수가 있었기에 이들도 인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서커스 공연에서 실수하면 가혹한 체벌이 가해진다는 어느 비련의 서커스단의 생태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현대 사회에서야 그런 일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그들이 오늘 보여준 묘기가 있기 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강훈련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을까? 

마음이 애틋하게 아려 왔다.

공연이 끝나고 아내가 어께 뒤로 핸드백을 메고 극장을 나가려는데 현지 안내원이 다가와 가방을 앞으로 메라고 주의를 준다. '극장 밖에 날치기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서커스 극장 입구에서 서커스 선전원이 마네킹처럼 분장하고--.


어느 나라건 극장과 역전 부근에는 불량 청소년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그 나라의 ‘극장과 역전 주변의 범죄율’은 그 나라의 ‘치안과 문화수준’을 가름한다던가―-.?


우리일행은 오늘 서커스 관람을 끝으로 모스코의 일정을 마치게 되고, 오늘밤 11시 55 분 야간침대 특급열차 편으로 러시아의 구 수도인 ‘상트 삐쩨르부르그=성 피터스버그’로 이동  앞으로 3박 4일 일정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어있다.(모스코 편 끝-다음은 성피터스버그 편으로 계속)


2. 성피터스버그 편.

기차역전

저녁 9시정도 우리일행은 ‘성 피터스버그’에 가기 위해 ‘성 피터스버그’ 역에 도착했다.

러시아에서는 역전 이름을 출발지 도시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의 도시 이름을 붙여 놓고 있었다.

우리가 성 피터스버그 지역으로 가기위해 모스코에서 기차를 이용하게 되는데, 출발지인 기차역이 ‘모스코역’이 아니라 ‘성 피터스버그역’ 이라 하는 것이다.

기이하게 생각하며 열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열차 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모스코에서 성 피터스버그로 가는 기차 Station에서


‘성 피터스버그’도시에 도착하게 되면, ‘모스코역’에서 하차하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는 새로운 현지안내원이 우리를 안내하고, 열차 여행 중엔 장발레 부부가 안내를 자원 봉사 하기로 했다.

침대 특급 열차도 장바레 박사가 한 달 전에 예약 해놓은 것으로, 성 피터스버그 까지는

8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라고 한다.

러시아는 우리나라 한반도 크기의 47여배나 된다니, 특급열차로 8시간의 지속적인 여행은 보통인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장발레 박사 부부는 참으로 헌신적이었다.

장박사의 부인은 러시아인으로 그와 대학 동기생으로 연애결혼을 했다 한다..

한국음식과 문화를 좋아 한다는 그녀는 동양 여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7년 구 쏘련 스탈린 정부는 당시 고려인이 일본인과 구별하기 힘들어 정보 누출 방지라는 전략적 이유로 18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을 강제 동원, 맨손으로 기차에 실어 시베리아 벌판이나 다름없는 카자스탄으로 추방하여 1년 만에 10만 이상이 동사하거나 굶어 죽는 참사가 있게 되는 천인공로 할 공산학정을 자행 했다.

당시 살아남기까지의 고려인의 생활상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었으며, 생존을 위해 그 쓸모없는 황무지 땅을 맨손으로 개척하고, 농사를 일구어 지금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곳을 러시아에서 질 좋은 쌀의 곡창지대로 만들어 냈으며, 그분들의 후예가 지금은 40만을 육박 하고 있는 기적을 일구어 냈다지만, 지금도 영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히 그들이 살아온 역경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런 비운의 여건 속에서 장박사의 어머니는 어릴 때 부모를 잃게 되어 부모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장박사 역시 어릴 때 편모슬하에서 부친을 잃고 어렵게 성장하여 박사 학위를 받기 까지 온갖 고생 속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항상 뿌리를 찾고, 민족을 그리워하는 중에 우리를 만나게 되어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며, 이젠 조국 이 있어 외롭지 않으며, 항상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잔잔히 말하는 그의 눈 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는 그의 부인도 소리 없이 안경 속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고,

이를 보고 있는 우리 모두도 코등이 시큰거림을 참느라 여기저기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며, 사랑은 국경을 초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고난 받는 민족을 버리지 않고 보호 하시리라.


열차 속에서

드디어 특급 열차 출발 30분전에 열차 방을 배당 받았다.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 둘이 나란히 놓여있는 침대칸에 아침식사로 빵과, 음료수는 물 한 병을 포함하여 버드카, 포도주, 오랜지쥬스 중 택일하도록 제공 되었고, 화장실은 열차가 출발할 때 까지 잠겨 있어 불편했다.

그러나 그만하면 특급 침대 열차로 손색이 없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전일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긴 기차여행으로 온 몸이 끈적거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지만, 몇 일간 세수도 못하고 다니던 젊은 날의 무전여행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기가 아쉬워 간단히 몸을 씻고 콜럼비아에서 온 이경득 교수 방으로 갔더니 벌써 몇 명이 모여 있었다.

준비해온 포도주와 열차에서 제공하는 버드카를 나누며 우리 모임을 지속적으로 발 전 시키자는 내용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꽂을 피웠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내일을 위해 쉬자고 하며 각자 방으로 갔다.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이 몰려와 잠에 빠졌다.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4시간 가까이 깊은 잠을 잔 덕분으로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아내는 열차가 덜그렁거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 모양이다.

차창의 커튼을 여니 차장을 스치는 들판에는 우거진 산림 숲과 띄엄띄엄 인가의 전경이 보였다. 예정지인 ‘성 피터스 버그’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새도록 잠을 자느라 산과들의 야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7시 55분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서둘러 좁은 열차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어제 밤에 여 승무원에게 받아 놓은 빵을 먹는 등 마는 등 하는사이에 열차가 도착되어 짐을 챙겨 급히 내려야 했다.

역을 나와 보니 동포 안내원이 관광버스를 대기시키고 우리를 마중 했다.

예약되어 있는 ‘오진 스키야 호텔’ Check In은 오후에 하기로 하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여름 궁전’을 향했다. 시간을 아껴 한 가지라도 더 보기 위해서다.


피터대제의 여름 궁정

우리는 여름 궁전을 가는 도중 한 백화점 앞에 임시 정차 해야 했다.

열차에서 내린지 얼마 안 되어 볼일(?)이 필요한 일행에게 여름 궁전 가기 전에 무료화장실을 이용하도록 안내원의 특별 배려(?)에서이다.

피터대제 여름 궁전 전경



아침부터 한 번에 많은 사람이 화장실만 사용하기 위해 떼 지어 백화점에 들어가는 것은 염치없는 일 같아서 급한 사람만 2-3명씩 나누어 화장실을 공략하는 특별 작전이 필요했다.

러시아는 공중 화장실 문화가 뒤져 있어, 보통의 경우 호텔이나 식당을 제외 하고는 터키와 같이 유료 화장실이 대부분이다.


아침 9시30분경, ‘피터대제의 여름 궁전’에 도착 했다.

여름궁전 야외 연회장에서

 

원명은 ‘삐제르 궁전’으로 ‘표트르의 궁전’으로 표현해하지만 같은 의미이다. ‘표트르대제(피터대제)’가 여름을 보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 ‘여름 궁전’으로 불 리우고 있는 것이다.

성 피터스 버그에서 30 Km떨어진 핀란드 만에 인접 하고 있는 네바 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경이 일품이었다.

아니, 이 여인은 누구길래 낮선 남자품에 ---.


궁전 앞의 웅장한 황금 분수대에서 품어내는 물줄기가 장관이었다.

하늘높이 치솟는 분수가 시원함을 더해 준다.


그 옛날 이 앞에서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여름밤 연회가 자주 있었으리라.


여름궁전의 아리랑

특이한 것은, 정원 길모퉁이 마다 아코데온 과 바이올린을 연주 하며 관광객으로부터 몇 푼 식 온정을 기다리는 거리 악사들이 보였다.

그러데 우리일행이 향하고 있는 제법거리가 있는 곳에 ‘아리랑’을 연주 하며 우리를 기다리는 거리의 2인조 악사들이 있었다.

여름궁전 정원에들어서니 현지 악사들이 아리랑을 연주 하고 있다.덕분에 우리 일행은 향수에젖어 아리랑을 함께 하고 팁을 듬뿍---


멀리서 우리일행이 한국인임을 알고 ‘아리랑’이란 곡명을 택한 듯싶다.

연이어 ‘그리운 금강산’이 거침없이 연주 되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의 여행객이 오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국땅에서 우리 고유의 가곡과 민요를 이국인들이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듣는다는 것은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일행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다가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이 터져라 그들의 연주에 마쳐 ‘아리랑’과 ‘금강산’을 합창했다.

물론, 노래가 거듭 될수록 그들의 발치에 놓인 빈 모자엔 팁이 쌓였다.

오후엔 겨울궁전인 ‘에리미타주 박물관’을 찾기로 되어 있었다.


겨울궁전, ‘에리미타주 박물관’

우리가 도착 했을 때엔 벌써 많은 구릅의 광관 객들이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원이 단체로 입장권을 구입하기를 기다려 입장 했다.



이 박물관은 성 피터스버그에서 가장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곳으로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의 3대 박물관’으로 손꼽이는 곳이다.

박물관내에 전시된 옥자기


전시실 자체를 금으로 도금해 놓은 것도 있었으며, 전시실 마다 당시 값진 보석류의 유물과 성화 그리고 명화들이 꽉 차 있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란 명화도 볼 수 있었다. 만약 이곳의 총 전시실을 빠짐없이 모두 돌아본다면, 2-3일 이 소요될 것이며, 27Km를 걷는 것과 같다 한다.








유명화가들의 그림


지금은 이 거대한 궁전의 관광 수입으로 국가 발전기금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겠지만, 당시 절대 군주 시절 이런 궁전을 건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와 땀의 희생이 강요 되었을까 생각하니 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중요한 전시실 만 돌아보는데도 3시간 30분 이상 걸렸다.

박물관 앞에는 행상인들이 박물관홍보 책자를 팔기 위해 관광객에게 접근했다.

‘한권에 10불, 두 권에 16불’이란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의식해 한글번역 책자도 팔고 있었다. 뒤적이다가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된 책을 택했다.


박물관의 관람을 마치고 미리 예약된 ‘서울 가든’이란 한식당에서, 포도주엔 일가견이 있다는 이태리 박 회장이 구입해 온 러시아산 포도주와 러시아 장박사가 구입해온 버드카를 곁들인 특별 회식이 있었다.

그러나 식당은 자리가 좁아 다음 관광객 손님들을 위해 9시경 자리를 비워 줘야 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네바강’가를 따라 호텔까지 1시간 20분가량 차창 관광을 즐겼다.


성피터스버그 밤, 백야현상

밤 10가 넘어가는데 밖은 ‘백야’ 현상으로 아직도 밝았다.
사진을 찍으니 선명하게 나왔다.

러시아의 백야, 밤 10가 넘어서 ㅊ촬영 했는데--


차장을 통해 전개되는 성 피터스 버그의 거리는 17-8세기에 벌써 긴 안목으로 미래를 위해설계된 것으로 충분히 넓고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물론 저녁 시간도 이 도시의 거리가 텅 비어 죽음의 도시 같았다.

안내에게 물어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라 모두들 농장을 찾아 갔거나, 멀리 여행을 떠나 도시가 비어 있지만, 월요일부터는 많은 사람들로 교통 체증이 생길정도로 교통량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시점에서 단편적으로 시야에들어온 사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길 양쪽으로는 3-4 층의 석조 건물들이 연이어 연립으로 건립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아름답게 보였다.

러시아 추위로 지붕 Drain Pipe가 얼어 막히는 것을 감안하여서인지 굵은 원통의 파이프를 아름다운 석조 건물 벽 밖으로 드리운 것이 흉물스럽게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성 피터스버그’는 1703년 5월 피터 대제가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습지대인 이 지대를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요새화하고 200여 년간 러시아 수도로 그 위풍을 뽐내던 도시로서 300년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도시는 수 개의 섬이 수백 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도시를 이루고 있었으며, 현재 5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한다.

프랑스, 독일, 몽고 등 외세의 끝없는 도전을 받으며 그 땅을 지켜낸 그들, 특히 프랑스의 나폴레온이 1941-44년까지 900일간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이곳을 포위하고 먹을 것과 식수를 차단하여 수백만이 굶어 죽어갔지만, 결국 이도시를 함락하지 못했다.

이곳 주민들은 이렇게 지켜낸 이 도시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이 도시는 아름다워 오랫동안 많은 문학가들이 작품 구상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며, 작가나 예술가들이 이곳에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싫어한다는 곳이다.


이삭 & 카잔 성당

차장을 통해 바실리스키 섬 해안 양편에  마주 서있는 2개의 ‘오스트랄’이란 등대가 아름답게 스쳐 갔다.

오스트랄 등대


멀리서 회항하는 선박들에게 해안을 찾기 용이 하도록 램프를 켜서 방향을 알려 주는 높이 32m(with lamp)나 되는 등대란다.

밤 10시 20분이 되어서 우리가 2박 3일 머물기로 되어 있는 ‘옥진스키야’ 호텔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 호텔은 약간 후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규모도 모스코바의 ‘코스모스’호텔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호텔앞 바다를 연하는 조깅 코스가 조성 되어 있는 한적한 곳으로 3일간 지내기엔 불편할 것 갖지 않았다.

조깅 코스엔 빈병과 담배꽁초들이 나 뒹굴고 있어 관리 유지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젊은 아베크족과 난간 아래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족도 눈에 띠었다.


어제 열차에서 밤을 설치고 하루 종일 박물관을 돌아보느라 지친 몸이라 아내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국의 밤을 맞는 나그네의 노스탤지어 증상에서 인지 사워를 하고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독일에서 온 박변호사가를 비롯하여 일행 몇 명이 맥주를 기우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12시가 되어서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6월 7일이 밝아 왔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호텔 앞 출렁이는 바다를 연하는 산책코스를 걸으며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비린내 석인 시원한 새벽바람을 한 것 들이켰다.

그 시간에 벌써 콜럼비아에서 오신 이 교수내외와 서울에서 오신 그분의 친구 내외가 함께 산책 하고 있었다. 호텔의 아침 식사 메뉴는 야채를 포함하여 풍성 했다.


어제 강행군으로 고단해 하는 사람이 많아 오늘 아침은 9시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이삭 과 카잔’ 성당을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을 늦게 출발한 관광버스는 어제와 달리 교통량이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을 만큼 혼잡하여 상당히 지체 되고 있는 편이었다.

아침 10경이 되어서 ‘아름드리 원형기둥의 대리석과 청동문’으로 웅장하게 건축된 ‘이삭 성당’앞에 도착 했다. 

이삭성당 입구

 

 


‘이삭성당은 1만 4천여 명이 한 번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크기로 교통이 복잡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성당은 ‘노트르담, 베르사이유’와 함께 세계 3대 유명 성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본 성당 건축을 위하여 1818년부터 1858년 5월 까지 50만의 노동자를 동원되었다 하며, 내부는 모자이크화가 62점, 300개 이상의 부조 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었다.


이삭 성당 내부

 

최후의 만찬, 천국과 지옥, 12제자, 부활하시는 예수님, 성모 마리아, 베드로등 유명한 성화들이 가득 하여 성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카잔 성당’은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없었으나, 1801년 ‘보로니힌’이 건축한 대 성당으로 이 성당을 건립한연유로 독일군에게 승리 했다고 믿고 있어 이 성당에 애착이 대단 하지만, 지금은 무신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왕성한 복음의 전당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무신론 박물관으로 쓰이는 데 의문이 들지만,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으리라.


‘니콜라이’ 궁전 식당

그간 아침 호텔 식사를 제외하고 점심, 저녁 모두 똑 같은 메뉴의 한식에 식상하던 참에 오늘 정식은 ‘니콜라이’란 궁전 식당에서 ‘러시아식’으로 하기로 했다.

정시가 되어서야 입장할 수 있다고 일찍 도착한 우리 일행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식당 측의 오만함이 있어 불쾌했으나, 시간이 되어 옛날 귀족들이 드나들었다는 궁전식당의 넓고 높은 계단에 드리운 붉은 카펫을 밟고 올라가니 특별히 우리일행을 위해 마련했다는 특실로 안내 되었다. 그곳엔 미모의 러시아 여인이 하프를 연주하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 연주를 들으며 전통 러시아 스텍크에 포도주를 곁 드리는 점심으로 마치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예까쩨리나 궁전

점심 후 우리는 계속해서 ‘예까쩨리나 궁전’을 가기 위해 1시간 정도 드라이브해야 했다.

성 피터스 버그 근교에 마치 18세기 러시아를 연상케 할 고풍스러운 푸시킨이란 도시가 있었다. 시인 ‘푸슈킨’의 고향으로 그의 이름을 따 명명한 마을 이란다.

그 도시 중심부에 ‘예까쩨리나 궁전’이 호화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까제리나 궁전전경


‘예까쩨리나’는 여왕으로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권좌를 유지 하고 있었다 한다.

예까제리나 궁전 내부


그 내부 중 ‘왕관의 방’은 그야말로 황금덩어리로 장식되어 있었고, ‘호박의 방’은 모두가 ‘호박’이란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며 졌다.

예까제리나 내부 호화 연회실


더 많은 호박의 진품들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진품의 호박들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다 뜯어 가 그 행방이 알려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푸쉬킨’의 ‘마음의 벗’

우리는 예까쩨리나 궁전에서 나와 그날 저녁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가야 했다. 유람선을 전세 내어 선상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다.

선상 파티에서 푸쉬킨 의 시를 낭독하고


선상에 차려진 러시아식의 뷔페로 허기를 채우고 포도주를 나누며, 각자 주특기 자랑대화가 벌어졌다. 4명의 러시안 음악반주자들이 신나게 흥을 돋웠다.

우리 일행의 노래실력은 모두 수준이상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 좋아 하던 ‘푸쉬킨’의 ‘마음의 벗’이란 시가 생각이 났다.

이럴 땐 노래보다는 시한구절 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푸쉬킨 마을을 가로 지르는 강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노라면

머지않아 기쁨이 돌아오려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설 어운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지는 것’


‘푸쉬킨’작 ‘이오영’ 낭독


잔잔히 물결치듯, 끊길 듯 이어지게 감정을 한 것 살려 시를 낭독하는 내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었다.

이렇게 시낭독이 끝나자 환호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러시아 원어로 준비해 오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시인의 거장 ‘푸쉬킨’의 시를 그가 탄생한 고장에서, 그가 시상을 떠올렸을 바로 네바 강을 혜 쳐 가는 유람선 위에서, 그를 대신하여 읊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어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시를 외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가 즐기는 동안 유람선측과 계약된 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일행들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우리는 많은 미련 속에 ‘고향의 봄’을 합창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행사를 마치기로 했다.

밤 10시 30분 이 지난시간에 호텔에 돌아 왔으나 밖은 백야현상으로 아직 도 환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감흥에 우리 부부는 그대로 잠들 수가 없어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자 호텔을 나와 강을 연하는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별안간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산책을 중단 하고 호텔로 돌아 와야 했다.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6월 8일, 아침 8시가 되었다.

어제 밤부터 내린 비는 아직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날씨가 너무 좋아 우산이 준비 되지 않아 비를 맞아야 했다.

오늘 일정은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를 돌아보고, ‘피터스버그 콘서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한 후에, 밤 11시 50분 열차로 모스코시로 돌아가기로 되어있다.

열차로 밤새 달려 9일 아침 8시에 모스코시에 도착하면 ‘지하철타기와 쇼핑몰’을 돌아보며 러시아를 보다 깊이 감상 하고 각자 공항으로 향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다. 주 러시아 한국 대사관(정태익 대사)의 초청이 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우중이라 그러한지 교통이 복잡하여 예정보다 늦게 ‘페트로 파불로프스크’에 도착 했다. ‘페트로 파불로프스크 성당’은 ‘뾰족탑’이 인상 적이었다.

네바강변에는 많은 러시아 남녀노소가 상의를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장소가 있다고 하여 가보자는 측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바강가에는 ‘피터 대제’의 청동 동상(사)이 우람하게 서있었고, 지난 200여 년간 홍수가 왔을 때 물높이와 년도를 표시해 놓은 흔적이 담 벽에 남아 있었다.

모두 기념사진을 찍은 후, ‘조패공사’ 건물을 밖에서 둘러보고 ‘예술의 전당’을 찾기로 했는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피터스버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다.

저녁 7시 우리는 미리 예약해 놓은 유명한 ‘피터스버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관람 하였다. 원래 정장을 하지 않으면 들어 갈수 없는 극장이었는데 4-5년 전 부터 여행객의 유치를 위해 복장은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텅 빈 극장 안은 공연 시간이 임박해 지자 청중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무겁게 드리운 막이 오르자, 28세의 젊은 지휘자 ‘프로코비에프’의 신들린 듯 한 지휘로 모찰트, 바하, 그리고 러시아의 유명 곡들이 연주 되고 있었다.

젊은 피아니스트 ‘포르테’의 피아노독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그날의 연주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우뢰 같은 박수가 그것을 의미해 주고 있었다.


주 러한국 대사관

밤 11시경 지는 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우리는 ‘모스코’로 가기위해 ‘모스코’란 간판이 붙은 기차역에 도착했다. 엊그제 이곳에온 것과 반대 방향으로 아침 8시경 ‘모스코시’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대기한 전용 버스를 타고 성 피터스버그에 가기 전에 불필요한 짐을 ‘코스모스호텔’에 맡겨 두었던 짐을 찾기 위해 호텔에 잠간 들렸다가 곧바로 주러 한국대사관을 향해  달렸다.

대사와 오전 10시 30분에 약속이 잡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주러 한국 대사관 정면에서, 계양대에 태극기가 보인다


전직 민주평통회장(제 9기)들의 모임이라 주러 한국 대사가 특별히 초대해 준 것이다.

차량이 막혀 약속시간 보다 30분 늦은 11시가 다 되어 겨우 대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대사관은 정말 아름다웠다.

 

주러 한국대사관 정면- 다른 각도에서

 

5층의 대리석과 석조로 깔끔하게 새로 지은 대사관 우측 앞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러시아 땅에서 창공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니 가슴이 뭉클 해진다.

이곳의 어느 외국대사관보다 한국 대사관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건물이라며 공관 측의 자랑이 대단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구한말 서울에 위치했던 러시아 공관 터에 러시아 공관을 지어 주는 조건으로, 이곳 터를 기증받아 대사관을 건축하게 된 것이라 하며, 넓은 뒤뜰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청기와의 8각 정이 한국의 고풍을 풍기고 있었다.

주러 한국 대사관 정원의 팔각정 앞에서 주러 한국대사와 추회장, 필자,이태리의 김회장


대사관은 크렘린 궁전이 15분 거리에 있고, 러시아 각종 공공건물이 가깝게 있을 뿐 아니라 톨스토이 생가가 걸어서 5분정도의 거리의 요지에 있었다.

‘러시아는 개방의 물결을 타고 현재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이고, 현재 한국정부와는 외교 관계가 좋은 편으로 한반도 통일을 찬성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기본입장이라 하며, 한국의 우주산업은 러시아와 깊은 협조관계에 있다.

노태우정권 때 빌려준 30억 차관의 변재 능력이 없는 러시아정부에게 일부 변재조건으로 대신 무기를 받아 한국의 1개 사단이 러시아 무기로 시험 무장 하고 있다’는 주러 공관의 특별 설명에 시사 하는바가 컸다.

러시아 정부 차관 변제 일부 탕감설(?)에 대해 낡은 무기대신 러시아에 거주 하고 있는 고려인복지 정책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외교 능력을 발휘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스쳐간다.

이번 대사관 방문을 통해 한. 러 관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여행을 마감하면서,

한 막스 교수의 미망인을 초청 오찬을---.

드디어 ‘우리’라는 한식당에서 ‘우리들’의 송별회 겸 ‘모스코’에서 여행을 마감하는 마지막 점심을 나누었다. 자칼타의 천 회장의 제의로 지금은 유명을 달리 하신 전 러시아 지역 한인 회장 겸 제 9기 민주평통 러시아지역 협의 회장이었던 Dr.한막스 교수의 미망인을 초대하여 그녀를 위로 하고, 추회장은 즉석에서  동지들의 성금을 모아 미망인에게 전달했다.

Dr.한막스 교수의 미망인을 추청 위로금 전달


남편이 가신 후 미망인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데, 한 달 봉급이 $100이라니 고생이 많으신 것 같았다. 우리들의 작은 정성에 눈물로 감사해 하는 미망인을 뒤에 하고, 우리는 내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로 다짐 하고 석별의 악수를 나누며 각자 지구촌에 흩어져 있는 거주 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끝



무명 용사 영령비

 



무명용사 영령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