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꽃-무궁화
무궁화에 대한 유래
예로부터 상당히 광범한 지역에 관상수로 재배되어 온 무궁화는 우리 나라에 자생하고 있었으며,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나타 내는 꽃으로 인식되면서 나라 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무궁화가 나라꽃임을 알고 있으나, 그 근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문헌에는 무궁화가 우리의 꽃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국화로 제정된 정확한 근거에 관해서 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무궁화가 우리 민족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은 역사적으로 그 연윈이 한국시대까지 거슬 러 1만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선군(환인천제)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 하며 저절로 환인을 추대
하여 환화(무궁화)가 피어난 돌무지위에 앉으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 하고 환호가 넘쳐 흐르 니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라고 한다...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가멸지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람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부지런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한인, 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 구을리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한인 에 이르니 혹은 단안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 이라고도 한다"
[한단고기-태백일사-한국본기] 우리 나라의 상고시대를 비추고 있는 [단기고사]에는 무궁화를 '근수'라 하고 있으며, [환단고기]에는 '환화','천지화'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규원사화]에는 '훈화'로 표현하여 단군시대에 무궁화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고대 지나국의 지리서인 [산해경]에는 물론 [고금주] 등에 도 우리 한반도가 무궁화가 많은 나라로 적혀있다. 신라의 혜공왕 때와 고려 예종 때에는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서 우리 나라를 '근화향'이라 표현할 만큼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었다. 이홍직의 [국어대사전]에 "무궁화는 조선말부터 우리 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 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를 옛부터 '근역' 또는 '무궁화 삼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선인들도 무궁화를 몹시 사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되어 있다. 1928년 발행된 [별건곤]3권 2호에 실린 <조선산 화초와 동물>편에는 "조선민 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는 꽃으로 개화기가 무궁하다 안이할 수 없을 만치 참으 로 오래며 그 꽃의 형상이 엄연하고 미려하고 정조있고 결백함은 실로 민족성 을 그리여 내었다. 한국을 막론하고 각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 같이 모습으로나 질으로나 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고 실려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많이 심고 가꾸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 내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 [풍류한국]에 보면 프랑스.영국.지나국 등 세계 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 졌으나, 우리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 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 가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전통의 부분이라 쓰고 있다. 우리 민족과 무궁화를 결부시켜서 이야기한 것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1896년 독립협회가 추진한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내용이 담겨질 만큼 무궁화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우리 국민과 애환을 같이하며 겨레의 얼로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확고히 부각되었고,고통 속의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역사와 더불어 자연스레 겨레의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사입력: 2010/08/10 [14:17] 최종편집: ⓒ pluskore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