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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및 자료 모음

한국의 무궁화 꽃의 유래 및 터키와 우리민족의 관계



한국의 꽃-무궁화
▲ 한국의 꽃-무궁화(한화.훈화초)
 
무궁화에 대한 유래

예로부터 상당히 광범한 지역에 관상수로 재배되어 온 무궁화는 우리 나라에
자생하고 있었으며,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나타 내는 꽃으로 인식되면서 나라
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무궁화가 나라꽃임을 알고 있으나, 그 근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문헌에는 무궁화가 우리의 꽃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국화로 제정된
정확한 근거에 관해서
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무궁화가 우리
민족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은 역사적으로 그
연윈이 한국시대까지 거슬
러 1만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선군(환인천제)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
하며 저절로 환인을 추대
하여 환화(무궁화)가 피어난 돌무지위에 앉으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
하고 환호가 넘쳐 흐르
니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라고 한다...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가멸지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람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부지런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한인,
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 구을리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한인

이르니 혹은 단안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
이라고도 한다"
[한단고기-태백일사-한국본기]
 
우리 나라의 상고시대를 비추고 있는 [단기고사]에는 무궁화를 '근수'라 하고
있으며, [환단고기]에는
 '환화','천지화'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규원사화]에는 '훈화'로 표현하여 단군시대에
무궁화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고대 지나국의 지리서인 [산해경]에는 물론 [고금주]
등에
도 우리 한반도가 무궁화가 많은 나라로 적혀있다.

 
신라의 혜공왕 때와 고려 예종 때에는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서 우리 나라를
'근화향'이라 표현할 만큼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었다.
 
이홍직의 [국어대사전]에 "무궁화는 조선말부터 우리 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
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를 옛부터 '근역' 또는
'무궁화 삼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선인들도 무궁화를 몹시 사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되어 있다.

 
1928년 발행된 [별건곤]3권 2호에 실린 <조선산 화초와 동물>편에는 "조선민
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는
꽃으로 개화기가 무궁하다 안이할 수 없을 만치 참으
로 오래며 그 꽃의 형상이 엄연하고 미려하고 정조
있고 결백함은 실로 민족성
을 그리여 내었다. 한국을 막론하고 각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 같이 모습으로나 질으로나 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고 실려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많이 심고 가꾸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
내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 [풍류한국]에 보면 프랑스.영국.지나국 등 세계
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
졌으나, 우리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
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
가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전통의 부분이라 쓰고 있다.

 
우리 민족과 무궁화를 결부시켜서 이야기한 것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1896년 독립협회가 추진한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내용이 담겨질 만큼
무궁화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우리 국민과 애환을 같이하며 겨레의 얼로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확고히 부각되었고,고통 속의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역사와 더불어 자연스레 겨레의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사입력: 2010/08/10 [14:17]  최종편집: ⓒ pluskorea)
민족사 바로잡기와 민족혼의 재건이 급선무다
역사가 왜곡된 것은 역사교육부재에서 온 소치입니다..국민계몽 필요한 때입니다
박종호
오늘의 대한민국은 일찍이 4343년 전
국조단군(國祖檀君)께서 한웅천황(桓雄
天皇)의 개천(開天)과 건국이념인 홍익인
간이념을 계승하여 고조선의 통치이념인
천부(天符)의 뜻인 홍익인간이념을 받들
어 교육이념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봅니다.
천부의 뜻인 홍익인간이념은 오늘날 대한민국정부 정통성의 교육이념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대한민국은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 오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정통성을 부정하는 단체나 학자가 악의에 찬
궤변을 논(論)하고 있는 현실이다. 단군은 옛 시리아의 神 따위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지만 이는 거꾸로(逆) 생각할 일이다. 이는 한인신국시대(bc7197), 한웅배달국시대(bc3898), 단군고조선 시대(bc2333)등 때에 5색인종 중 구환(九桓)의 종교적 사상이 서진(西進)하여 그에 미쳤을 것이다.

현재 알타이 고원에서 살고 있는 흉노족 박물관장의 말에 따른다면 자기들의 최고 윗대 조상은 안판췐 이라고 한다. 그가 부르는 안판췐은 한단고기의 한인 안파견(BC7197)을 말하는 것이다.
 
흉노족들도 우리와 한 뿌리이고 그에게 물어보니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고 한다. 그들도 아버지를 아빠라 한다. 터기(돌궐)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다 오스만 제국을 개국하였다.

그 동안 역사가 거짓꾸며진 것은 이는 역사교육부재에서 온 까닭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중공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상고사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보기로 북경대학 한류빈 교수말의 의하면BC3500~BC3000경의 우하량
홍산문화유적, 중국학자들의 발표BC3000~BC2500년경의 하가점 하층문화
권의 고조선 청동화폐와 청동검 등 고조선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남북통일에 앞서 민족의 뿌리를 확인하고 고조선의
높은 정신
세계와 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역사적
사명과 역사의식을
새롭게 할 때입니다.
이에 역사의식과 역사적 사명은 몇 번씩 강조해도 무방합니다.
 
또한 나라를 일으키신 국조단군을 모시는 사상과 홍익인간이념은
세계평화와 통일이념으로 이를 계승발전시켜 통일사업에 이바지하도록 모든
국민들은 역대 국조단군(歷代 國祖檀君) 님(桓因 桓雄 桓儉)들의 꿈과 업적
과 사상적 이론을 개발,정립하고 그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민족사관을 구체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는 역사문화시대입니다. 우리의 고대사에서 한인신국시대.
한웅배달국시대.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 등 역사문화유적이 현재는 다른
나라의 영토안에 있지만 그 유적과 문화재만은 우리의 옛 역사이고 문화재
입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민족공동체의
 모든 사람의 할아버지인
한배검님(大祖神 大皇祖)桓因 桓雄에 이어 ‘이어져
내려온’ 국조 단군왕검님은 우상이나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존인물임을 이제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남북통일에 앞서 역사 바로잡기와 국조 단군황검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이념과 민족혼 재건을 위한 국민적 계몽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상을 가진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종교는 다원하고 개인의 선택: 조상과 국조는 유일하다.>
웅기5908:단기4343년3월 개천민족회 단군봉헌제 강론 일손 박종호


 
흉노의 갈래인 터키(돌궐)는 왜 대한민국(KOREA)을 형제국이라 역사교과서에 적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돌궐(터키)족은 동맹국이였던
고구려
가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동맹으로 멸망한 후에 강성해진 당나라에게 공격당하고 서진(西進)을
계속하게 되었고, 터키지역에 정착한 후에 오스만이 오스만터키 제국을 개국한 이래로 유럽과 아프
리카지역을 지배 하여 유럽을 지배한 훈족.몽골족처럼 유럽사를 바뀐 한민족의 갈래다.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했다가 한나라의 이이제이(북방 한민족을 서로 이간질시켜 분열시키는 지나
국의
지배정책)에 분열되어 버린 흉노의 갈래였던 돌궐족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가 멸망
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개국했는데, 당나라가 개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써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뒤바뀐다. 당은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고, 돌궐의 키엘리 커한(='큰 해'란
 뜻의 頡利 可汗, Kieli Kağan, Hieli Kağan, İliğ Kağan)은 당나라에 신속하면서 당과 돌궐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한다. 지나국과 돌궐의 관계를 보면 주도권 관계가 서로 엇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나국이 분열되면 지나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지나국에 복속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중원 왕조는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다.
 
670년경에는 강성해진 당(唐)나라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당(唐)나라와 위그르의
침략으로 돌궐민족이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682년 몽골초원에서
고구려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여 힘을 기른 돌궐은 울란바토르 ( 지금의 몽고 )에서 동(東)동궐을 다시
 건설하였다.745년 같은 계통의 부족인 <위그르>의 공격을 받아 동(東)동궐은 멸망하였다.중앙 아시아
로 옮겨간 서(西)돌궐은 657년 당(唐) 나라의 공격으로 다시 서쪽으로 밀리면서 세력은 점점 약해져갔다
.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진 후의 돌궐제국의 영토
 
돌궐족은 나라를 세운 552년부터 나라가 멸망한 745년 까지 200년간 중앙
아시아에서 셰력을 펼쳤으나
수차례의 전쟁에서 져 주민들은 점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들 주민들은 지금의 터키
지역까지 옮겨 가게
되었던 것이다.1037년 터키에서 셀주크 왕국을 세운 돌궐족들은 크게 번성
했다가
징기스 칸의 몽고군에 지배를 받다가 1453년 돌궐족 출신의
<오스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오스만 터키
왕국을 건설하였다.돌궐족
(투르크=터키族)도 몽골을 근거로 돌궐(突厥)제국을 세웠을 때는 지금의
우리의 얼굴모습과 비슷한 몽골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당(唐)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
에서 이란,아랍인들과 피를 섞어 서양사람을 더 닮은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되었다.

 
터기(돌궐) 사람들은 고구려와 군사적 동맹관계을 통하여 당나라 침략을 서로
방어하였고,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KOREA
=고려=고구려)를 형제국으로 역사교과서에 적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 20만이 돌궐로 들어 갔다고
하니 우리와 형제국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유민
(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에 임명했다. 이를 <탕구르=당굴래=단군> 라고
했는데, 고조선 시대 제사장의 수장(首長)을 <단군>이라고 한것과 비교하면
 <탕구르>는 <단군>과 같은 계열의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돌궐(터키)여인
돌궐족이 고구려 여성을 종교수장인 제사장으로 뽑았
다는 사실은 인류문화사적 으로도 유라시아 초원세력이
1만년전 마고성의 통치자였던 한민족 시왕모였던
마고를 숭배한 마고족의 후손들임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또한 이들 초원세력의 조상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 한반도
지역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여 백두산지역의 송화강
과 흑룡강지역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다가 몽골초원으로 옮아간
 말갈(몽골)족이고, 이들 말갈족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
리카로 건너간 인디언 들로서 말갈족의 선조는 고구려가
일어난 환인지역에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피라미드문명의
초기양식이라 할 수 있는, 지나국에서 홍산문명의 뿌리라
추정 하면  '새벽문명'이라고 이름짓고 있는 백두산지역의 피라미드문명을
건설한 숙신(조선)족의 후손들이라 할 것이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