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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발칸반도 편

이오영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발칸 반도를 찾아서(작업중)

 



2016년 3월 28여행일이 다가왔다.

3월이 가고 4월의 계절적인 봄은 찾아왔지만 날씨는 아직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이런 계절에 적절한 옷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무엇을 입을까망설이다 아무래도 여행 중엔 편리한 옷차림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벼운 스웨터에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키를 걸쳐 입고 나섰다.


여행 전에 이것저것 정리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출발 2시에 맞추어 늦지 않게 집결지(한아름)로 달려가니 벌써 일행들이 거의 다 도착하여 관광버스 승차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번 여행은 발칸 반도일대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젊은 층이 주를 이루고 약간 명의 장년층(내 또래)의 부부가 섞여 37명이나 되는 대 집단이다. 대부분 낮선 얼굴들이었지만 이미 버스 앞뒤에 자리한 상태에서 인사를 나누기에 번거로워 그대로 필라 공항으로 향했다.모두들 동유럽의 발칸이란 미지의 세계를 찾는다는 퍽찬 기대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발칸 지역의 지도

 

낭만과 야만이 교차하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6개국으로 형성된 발칸반도----.원래 필자가 학창시절 역사나 지리시간에 흥미가 없었던 덕분인지 현재 발칸을 이루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 별로 익숙지 못한 면이 있기도 하다. 원래 Balkanization(발칸화)이란 뜻은 작은 나라로 분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때는 유고스로비아 연방이었던 나라가 쇠잔해지면서 분열하기 시작,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바니아, 마케토니아, 보스니아 등 6개국으로 갈라지게 된 나라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르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보스니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지역에는 많은 민족들이 모여 있어 민족 간의 반목이 있기도 하였으나,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여러 민족들을 잘 융화시켰다. 하지만 티토가 사망한 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의 후원을 받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무장 세력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세르비아 민족 영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격했고, 곧 전쟁은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 민족 청소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된 것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탈퇴·독립한 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시 1992229일과 31일에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했던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이 투표를 조직적으로 보이콧했으며,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투표에 참가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권자 64%의 투표, 투표자 98%의 찬성으로 독립 안이 가결되자 스릅스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하루를 보낸 후 자그레브에서 본격 여행이 시작되고

 

328, 필라 공항에서 오후 6시 항공기의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기 하는 동안 여행 동료들과 대강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울 했다. 같은 여행지로 간다는 동료의식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에 모두들 금방 친숙해 질수 있었다.우리가 탑승한 항공기는 예정시간 보다 약간 늦게 필라 공항을 출발,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날라 독일의 프랑크푸르드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크로아티아항공편으로 갈아타고 현지 시간 29일 낮 1230크로아티아수도 "자그래브공항에 도착했다. 필라델피아와 시차가 6시간임을 고려 할 때 비행시간이 12시간이나 되는 것이다. 모두들 항공기에서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피로하겠지만 내색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여행의 첫날을 마지하고 있었다. 여행을 통하여 인생은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란 열차 속에 승차권 한 장을 들고 떠나는 나그네란 어느 철인의 말이 생각났다. 처음 필자가 여행을 시작 할 때만해도 우리부부는 일행 중 항상 젊은 층에 속해 속된 말로형님들 눈치 보느라 바빴는데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연로 인사 대접을 받으니 어느새 필자부부도 많이 늙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여행을 마치는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잠시 생각 하다가 이번 여행 일정 중 일행들에게 누가 되지 않아야 갰다는 다짐으로 옷깃을 여민다.

자그레브 시가지

아침 독일 푸랑크 푸르트공항에서 갈아탄 항공기로 시골 냄새가 물신 풍기는 자그레브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공항 출구를 나서니 검은 코트 차림의 건장하게 생긴 한국 청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첵코에서 왔다는 이 청년은 발칸반도 일대를 안내할 가이드 김형환이라 스스로 소개하며 이라 불러 달란다.

코트차림이라 날씨가 추우냐고 물으니, 섭씨 13도라 춥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온도라면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외지에서 왔으니 우리와 같이 이지역이 낮설 것이란 생각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이드를 따라 공항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현지 관광버스에 오르자 버스는 이내 출발 했다.얼마쯤 갔을까 가이드의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아든 가이드는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뿔싸! 우리가 타고 가는 관광버스가 다른 일행의 버스와 공항에서 바뀌었다는 것이다. 서울 하나여행사에서 도착한 한국인 관광 그룹이 타고 갈 관광버스를 우리가 잘못 타고 출발한 것이란다. 어찌 이런 일이---,누구의 과실일까? 안내는 애써 한국말을 모르는 현지 자그레브 지역 운전기사의 과실로 떠넘기려는 듯한 태도이었지만, 같은 한국인 구릅이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같은 이름의 여행사(서울과 필라 소재의 동일한 이름의 하나 여행사)가 같이 공항에 내려 같은 목적지로 이동하는 경우 안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우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미안해하는 안내에게 그럴 수도 있다며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오고 있다는 버스를 기다려 바꿔 탔다. 여행에서 안내는 관광의 이다. 그러나 안내가 이지역출신이 아니고 체코에서 왔다기에 만족할만한 지역설명이 가능할까 우려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색 할 수도 없었다.

 

시가지로 접어드니 도로 옆으로 고풍스러운 작은 도시 풍경이 전개되며 도로중앙엔 아직도 전차가 선로 위를 다니며 역사의 무게를 더해 주고 있었다. 이 지역에 지하철도 있느냐고 안내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은 하고 있었으나 지하철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오후 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밤새 날라 온 덕분에 출출했는데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며 우리를 현지 식장으로 안내했다.점심을 하고 난 후 자그레브 유명지역부터 시작으로 반 젤라치크 광장을 돌아보는 일정을 시작하게 된다.

 

자그레브의 광장의 1948년대 통치자 Ban Jelačić” 동상


자그레브는 3 개의 타운으로 구별 할 수 다는데, Upper Town은 구시 가지처럼 평화와 고요를 느낄 수 있었으며, Lower Town은 상업 중심가답게 번화하였다. 그리고 신도시인 New Zagreb는 현대 건물로 들어서있었다. 뉴타운입구에는 관광객을 위해 자그레브를 축소한 모형도가 있었다.


자그레브 축소 모형도

 

우리일행은 모형도 앞에 모여 섰다.

안내로 부터 지역에 대해 대강 설명을 듣고 몇 군데 유명하다는 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반 젤라치크 광장(Ban Jelacic Square)Upper TownLower Town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광장의 이름은 초기엔 분수의 이름을 딴 만두세바크(Mandusevac)였다가 수차례 변경되어왔다고 한다. 1848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이 당시 통치자의 이름인 반 젤라치크 광장(Ban Jelacic Square)으로 불렸으나, 2차 대전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공화국 광장이라 명하고. 반 조셉 젤라치크의 동상을 제거하였으나, 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사회주의에서 벗어난 이후로 오스트리아 조각가 Anton Dominik Fernkorn에 의해 Ban Jelačić 동상이 다시 복구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드넓은 광장엔 관광객이 몰리는 야외 카페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종종 지역의 큰 축제의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반 젤라치크 광장은 지상 전차를 통해 .자그레브어느 곳으로나 갈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었다.

 

광장에서 아랫마을 내려다보니 일반 건물의 지붕위로 높다랗게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솟아 있었다. ‘자그레브대성당’(=성 스테판 성당)이란다. 성당의 첨탑은 네오고딕양식, 성당의 전반적인 외관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이 건물은 1102년 완공된 이래 1000년이 넘는 동안 전쟁,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번의 수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지금도 오른쪽 탑은 수리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자그레브 대성당 뾰죽탑


그리고 성당 앞에는 당시 매몰되었다 발굴된 십자가를 든 성모님상이 황금조각처럼 서있었다.

성당 앞 성 마리아상

 

저녁 615분경, 자그레브 광장을 돌아본 우리는 이제 슬로바니아의 블레드 호수로 이동해야 했다. 블레드 호수 근처에서 하루 쉬고 아침부터 불레드 호수를 관광하기 위해서다.우리는 슬로바니아를 가기위해 크로치아에서 북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필라를 출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드 공항에 도착하여 크로치아 항공기편으로 슬로바니아를 넘어 크로치아로 왔다가 다시 버스로 슬로바니아로 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자동차부품, 공산품등의 수입이 주를 이룬다 하며 국민성은 낙관주의로 즐길 줄 아는 민족으로 생활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한다. 오랜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활철학이 이들의 가슴속에 자리하게 된 모양이다. 슬로비아 날씨는 크로치아 보다 2도 정도 낮다는 안내의 말을 들으며 우리를 실은 버스가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는 동안 창문을 통하여 농촌과 계곡의 산림이 번갈아 시야에 들어 어는 것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날씨는 흐렸다 개였다 변덕을 피고 있었다.우리가 버스로 달리고 있는 도중 비가 내리더니 밖의 온도가 빙점으로 내려가고 있는지 간간히 눈발과 빗줄기로 변하여 창문을 적시기를 반복하다가 슬로바니아 블레드 지역에 도착할 때 쯤 내리던 비는 그쳐 버리고 비쳐오는 석양의 저녁노을이 먹구름을 뚫고 제법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리가 달려온 이 길은 계속 내려가면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터키까지 연결 되어있다고 했다.

슬로바니아의 불레드호수를 찾아서(3.30)


 


  불레드호스 전경(가운데 작은 섬 중앙에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 보인다)불레드는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관광객이 많이 찹는 관광지 가운데 한 곳으로 호수와 성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호수는 지구상에 숨겨놓은 보석이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빙하 활동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한다. 블레드 호수 주위에는 바위로 만든 블레드 성이 있다. 이곳은 독일의 크림 케이크(Cremeschnitte)에서 유래된 슬로베니아의 크림 케이크인 크렘나 레지나(kremna rezina)로 유명하다. 온난한 기후 때문에 옛날 유럽의 수많은 귀족들이 방문했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스포츠 활동(골프, 낚시, 승마)을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인근에 있는 산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블레드성 요세지 전망대(일행들)

 

이러한 호수를 보기위해 우리는 호텔에서 예정보다 10분 늦게 호텔을 출발, 1시간 30분 정도 달려갔다. 도착지에 보랏빛 에메랄드 색깔의 아름다운 호수가 우리를 마지하고 있었다.호수의 한쪽 옆에는 옛날 불레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높이 100m나 되는 가파른 돌 벽 위에 옛 군주들이 양민들을 동원 하여 구축해놓은 블레드성 요세지가 호수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한쪽은 호수로 자연 방어가 되고 높다란 돌 벽 위에 견고하게 건축된 성벽은 그 어떠한 적이라도 쉽게 방어 할 수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 앞에 도착하자 부지런한 젊은 여성 팀들은 안내를 앞질러 요새성곽 전망대로 재빠르게 오르고 있었으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가 힘에 부치는 사람들은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전망대 계단이 나무로 되어 있고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 발길에 닳아 움푹 파인 곳도 있고 가팔라서 위험하기까지 했으나 필자부부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올랐다. 성곽 전망대를 오르는 동안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보이는 호수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호수 한 가운데는 작고 아름다운 인공 섬이 자리하고 있었고 섬 중앙에는 높다랗게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라 했다. 호수와 섬은 멋진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불레드 호수의 섬의 나룻배 선착장


성곽에서 내려온 우리는 인공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착장에서 플레타나(pletana)’라고 부르는 나룻배를 타고 10분 정도 호수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섬모마리아 승천 성당으로 가는 나룻배를 타고나룻배는 20명 정도 탈수 있는 규모가 작은 배여서 우리일행은 2 구릅으로 나누어 타기로 했다. 나룻배 이동 중 전복 사고 예방을 위하여 나룻배 안에서 자리를 옮기거나 움직이지 말라는 특별 주의가 있었다. 강이나 호수에서 작은 나룻배(보트)를 타게 되면 승선한 여행객들이 시진을 찍기 위하여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다. 자리를 옮기는 사람의 무게이동으로 보트가 물속에서 전복할 우려가 있어 안전을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에서 종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져 종을 울리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한다. 블레드 작은 섬에는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Živa)의 성지로 여겨진 곳이다.. 승천 성당은 입구에 계단 99개가 있는 높다란 지역에 세워져 있었으며 이 계단은 전통적인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를 안고 계단 99개를 오르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성당 앞에 성모마리아 상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엷은 푸른색을 띄고 있는 대리석으로 제조된 오래된 마리아 상이었다. 오래된 99개의 계단을 올라가보니 쉽지 않았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애인이 청혼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안고 오르라면 어떠했을까? 합격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높이이다. 섬에서 2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얻어 돌아본 후 힘들게 올라간 99계단을 다시 내려와 타고 왔던 나룻배를 타고 섬 밖으로 나와 오찬장소로 이동했다.



 


 이승천성당 앞 99계단 전경이곳의 현지 식사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오래 받았던 지역이어서 터키식이 많다고 한다. 오후 130분 오찬을 마치고 보스니아 동굴로 향했다

세계에서 2번째 크기를 자랑한다는 천연 동굴이라 했다. 동굴을 가기위한 이동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이번 여행은 유난히도 육로 이동이 심한 편이다

익살을 부리는 일행 중 한사람은 이번 여행은 버스타고 화장실가고 먹는 것이 전부 인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국경을 버스로 넘나든다는 것이 생각보다 절차가 간편했으나 장거리를 달리는 불편함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번 여행의 특징은 끝없는 들판과 산악과 계곡사이를 버스로 이동했던 기억이 전부인 것 같고, 많은 사람이 이동하다보니 이동 중에 유난히도 화장실을 자주 찾는 분도 있게 마련이다. 유럽에서의 대부분의 화장실은 유료였다

한번 사용하는데 통상 유로로 50센트였다. 이러한 화장실 비용은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여행객을 불쾌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여행객을 유치하려는 측에서 눈앞의 작은 이익보다는 미래를 위한 국가 위상을 위해 한번쯤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 보스니아 동굴 입구보스토니아동굴로 가기위해 관광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안내가 지역이나 역사 설명 대신 어설픈 농담을 다시 시작하려 하자 뒤 좌석의 일행 중 어느 똑똑한 여성 한분이 우리가 가고 있는 지역의 특성이나 역사적 배경을 미리 설명해줄 수는 없겠는가? 바로 필자가 하고 싶었던 요구를 했다. 그런데 안내 왈, “내 스케줄대로 진행 할 테니 기다리라했다. 언짢은 듯한 말투다. 마치 여행객을 무시하는 건방진 태도에 잠시 버스안의 분위기가 냉랭하기까지 했다. 야단을 치려다가 안내가 타 지역(체코)에서 왔으니 이 지역에 대해 상식 부족일수도 있겠다. 억지로 이해하고 침묵했다.


. 토스토니아 동굴(3.30)

보스코니아 동굴에 도착해보니 벌써 많은 관광객이 입구에 줄지어 붐비고 있었다. 유럽인들도 보였고 동양인의 얼굴이 많이 보였는데 유독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많다는데 놀랐다. 간혹 중국사람 일본 사람들의 구릅도 보이기도 했지만---. 입구에서 입장권구입이 끝나면 관광객을 동굴 속으로 운반해줄 대기하고 있는 꼬마 기차를 타게 된다. 승차 직전 현지 직원들이 관광객들에게 턴넬내의 각종 구조를 설명해주기위해 헤드폰(레시바)를 나누어 주었다.


동굴안으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꼬마기차

 

꼬마기차가 동굴 안으로 진입 시 전개되는 석순과종유석

 

우리 일행도 안내가 입장료를 해결하고 오기를 기다린후 곧 입구에 대기 하고 있는 꼬마 기차에 탑승했다. 꼬마기차는 관광객 6-70명이 한 번에 탈수 있도록 여러 칸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꼬마 기차의 자리가 만석이 되자 기차는 기적 소리를 내며 캄캄한 굴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옛날 한국에서 경부를 연결하는 기적소리를 내며 연기를 품어대며 숨가쁘게 달리던 완행 열차를 타고 가던 때가 생각 난다.
관광 꼬마 기차가 뱀처럼 구불구불 2-3분 동굴속에 진입했을까 갑자기 동굴 여기저기에서 밝은 조명이 깜깜한 굴속의 어두움을 걷어 대며 희한한 모습들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기이한 모습의 종유석과 석순이 불빛에 영롱한 빛을 발하며 이름 모를 보석 전시장에 들어온 느낌을 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환호 했고 필자는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눌러 댔다.

그렇게 15여분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동굴 속에 널찍이 자리 잡은 종착역이 나왔다.

거기서 부터는 모두 기차에서 내려 도보로 두세 시간 신비 하게 펼쳐지는 동굴 속의 광경을 직접 음미 하게 된다. 석순과 종유석이 어우러져 기이한 장면을 연출할 때 마다 관광객의 환호소리를 내며 머춰서는가 하면, 오색 찬란한 장면을 사진에 담기 위해 멈추어서는 비림에 좁은 통로가 붐볐다.
그리고 도보로 이동하는 동안 구역마다 전개 되는 장면을 미리 녹음으로 담아둔 내용을 듣기 위해서 리시버의 일정한 번호를 누르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피라 한아름 여행사의 배려로 리시버가 지급되어 현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었다

다만 안내의 사용능력 부족과 송신 거리의 제한과 굴곡이 심한사각지역에 단절이 생겨 안내와 일정한 거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단점은 감 수 해야했다. 




 

굴속의 종유석과 석순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천연굴속에 드리운 굵고 가는 종유석, 땅에서 솟아 오른 석순이 조명 속에 조명기술로 오색찬란한 광채를 띄게 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움은 무슨 형용사를 동원해도 부족할 정도로 장관 이였다. 여기저기서 감탄과 환호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어느 지역엔 석순과 종유석이 자연적으로 만나 넓은 동굴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여 그기둥을 없애면 동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만 같은 형상이어서 마치 인위적으로 조각한 기둥처럼 보였다.

이것이야 말로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인가 입이 벌어진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종유석과 석순 그리고 석주가 되는 기본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종유석은 동굴 천장에서 드리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이 이산화탄소(CO2)를 함유한 물에 녹아서 탄산수소칼슘(Ca(HCO3)2)을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용액이 종유동의 천장에 스며 떨어질 때, 이산화탄소를 함유한 수분이 공기 중으로 방출되기 때문에 다시 탄산칼슘의 결정으로 침착(沈着)하여 고드름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하며, 석순은 종유석 바로 밑의 동굴 바닥에는 종유석에서 떨어진 지하수에 의해 종유석과 같은 성분으로 땅에서 위로 올라오는 결정체를 석순이 이라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종유석과 석순이 충분히 자라나 서로 만나 석회 기둥을 형성하는데 이를 석주라고 부른다.필자가 중국의 황룡 동굴을 보면서 드넓은 중국의 땅덩어리에 걸 맞는 거대한 천연동굴에 앞도 당했던 기억이 새롭지만 이번 포스토니아의 동굴은 황룡동굴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앞에 한없이 작아져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런데도 이 동굴은 세계 두 번째로 큰 동굴이란다. 지구상에는 이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한 동굴이 있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첫 번째 큰 자연동굴은 어딜까? 궁금해진다. 필자가 알아본 바로는 미국의 켄터키에 길이 560 Km나 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자연 동굴이 있다한다. 이름은 "매머드 국립공원 동굴 및 지하 동굴"(Mammoth Cave National Park &Undergraund Passage Way)이라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호주의 제놀란동굴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도 아직 켄터키와 호주의 동굴엔 가보지 못했음으로 한번 기회를 만들어 가보리라 생각했다.

동굴속을 돌고 돌아 오르내리막 길을 2-3시간 오르내리면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취해 



 

동굴 속의 스냎

 

있다 보니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어디선가 쏴 쏴 거세게 흐르는 물 소리가 들린다. 마치 체면에서 깨어난 듯 소리 나는 곳을 살펴보니 발아래로 100여 미터나 되는 절벽 낭떠러지 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파른 급경사에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쏴 쏴물소리는 동굴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물방울과 가는 물줄기가 한곳에 모여 굵은 물줄기로 변화하며 동굴을 탈출하여 Sava 강으로 뻗어 나가려는 힘찬 출발의 신호요 이 물줄기가 강물에서 다시 바다로 흐르는 창조의 시발점의 소리였다. 중국의 황룡 동굴에선 이렇게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 보트 선착장이 마련되어 관광객들이 보트를 이용하여 동굴 밖으로 나갔던 색다른 추억거리가 있었지만 이곳에는 그런 보트 설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동굴 종착점에는 1만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음악 홀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큰 규모의 광장이 동굴 속에 있다는데 또 한번 놀라야 했다.

광장 모퉁이에 제법 큰 규모의 선물센타가 관광을 마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동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선물센터에 들려 eye 쇼핑이나 각자 소중한 사람들에게 줄 기념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필자도 일행과 함께 출발 전 여유시간을 이용 선물센터를 들렸으나 별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 1645분경 안내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필자는 광장 모퉁이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곳이 있어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투명유리 Box로 만들어 놓은 수족관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사람사이를 비집고 시야에 들어온것은 유리 수족관 안에 이곳 동굴에서 서식한다는 도롱뇽같이 생긴 인간 형체를 닮은 물고기(?)가 보였다.
눈은 완전히 퇴화되어 그 형상만 남아 있었지만 긴 미꾸리 크기의 연체 Fish에 사람의 팔과 다리 위에 손가락 과 발가락 모양의 형체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이를 휴먼 Fish라 부른다.

이런 종류의 물고기는 이런 자연동굴속에서 서식할 수 있는지 필자는 중국 황룡 굴에서도 본적이 있었다. 지느러미의 일반물고기 생김새의 정의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자료이다.

이물고기와 인간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다음 관광 지역은 신들이 노니는 정원이라 예찬 한다는 폴리트비체”로 가기로 했다..



플리트 비체 (3.31 오전)

 

10시경에야 `플리트 비체호텔(Degenija)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이 늦은 덕분에 호텔식당에서 식은 음식을 저녁으로 대신해야 했다. 원하는 사람은 음식을 오븐에 데워주고 있었으나 모두가 동굴여행에서 많이들 피로 했는지 입을 다문 체 묵묵히 찬 음식으로 적당히 때우고 각자의 호텔방으로 헤어졌다.
피로는 입맛마져 잃게 하나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대신 피로회복후에 진수 성찬이란말이 생각 난다. 다음날 아침은 6시기상, 7시 조식, 8시 초텔 출발, 소위 6.7.8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침에 기상해보니 기온은 섭씨 18도에 맑은 날이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신들이 노닌다고 묘사했을까 잔뜩 부푼 기대로 플리트 비체산중 호수로 향했다. 호숫가에 도착해보니 드넓은 대지위에 마치 물의 홍수로 넘쳐 나 얕은 지역으로 흐르며 하얗게 반짝이는 물의 향연을 보는듯하여 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곳 호수는 본래 하나였던 강이 오랜 세월 동안 석회암 지대를 흐르는 동안 쌓인 침전물로 일대가 늪지대와 16개의 작고 큰 호수가 만들어 졌고, 이 호수가 넘쳐흐르는 물들이 마치 계단식 폭포를 만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플리트 비체 (1)

어떤 폭포는 높이 80m정도로 높았고, 낮은 곳은 계단만큼 아주 낮은 댐들이 넘쳐흐르면서 폭포가 되어 맑은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며 햇빛에 무지갯빛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광경이 가히 신비스러웠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폭포소리들은 서로 다른 높고 낮은 폭포 소리가 어울려져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 하고 있는 양상이랄까? 어디로 부터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물줄기가 뒤엉켜 발산하는 물보라는 마치 천사들이 노니는 신천지라라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왜 사람들은 이곳을 신들이 노니는 정원이라 했다.



 

플리트 비체 (2)


 


플리트 비체 (3)- 



보라바위 위에 만개한 저 물보라의 아름다움을-


플리트 비체 입구 선착장에서(4)


일행은 이곳에서 1시간 동안 자유 시간을 가졌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물줄기가 작은 웅덩이와 호수를 만들고 여기서 넘쳐나는 물줄기로 작은 폭포를 만든 사이사이로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연결해놓은 나무다리를 거닐며 자연을 만끽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모두들 소중한 추억을 한 폭에 사진으로 남겨 놓기 위해 사진기의 방향을 여기저기로 바꾸고 있었다. 간혹 폭포가 내려오며 바위에 부디쳐 사방으로 튀며 통로에 물세례를 퍼붓기를 반복하는 사이 물세례를 피해 통로를 지나며 지르는 즐거운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필자부부는 비교적 조용한곳을 택해 거닐었다.
결혼 전 연애시절을 생각하며----가깝게는 남산으로 부터, 소요산에, 창경원을 비롯한 고궁에, 인천 작약도에, 부산 해운대에, 동해안에, 수원 딸기 밭에, 설악산등등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간다.  


자연과 노니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 정해진 장소로 집결해야 했다. 이제 우리는 호수를 뒤로 하고 안내를 따라 인근 식당으로 오찬을 위해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필자는 떠나기 전에 선착장에서 일행들의 기념사진을 찍을 것을 제의 했다. 여기서 일행 중 한사람(G)이 휴대폰을 물에 빠뜨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물이 맑아 물속에 잠겨 있는 휴대폰을 빤히 들여다볼수 있었으나 생각보다 수심이 깊어 어쩌지 못하고 그곳을 그대로 떠나야 했다. 정작 휴대폰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고 있었으나 필자가 사진 찍자는 말을 안했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을 생각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찬 식당은 드넓은 아드리아 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경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이날 오찬은 그 지역 호수에서 잡아왔다는 송어구이 요리였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송어구이요리는 별미였다. 오찬을 마친 후 우리는 아드리아해의 꽃이라 불리는 작고 조용한 어촌 마을 프리모스탠으로 다시 이동 해야 했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구비 구비 멀고 가깝게 겹겹이 쌓인 계곡의 풍경들이 우리를 실은 버스 창문을 스치고기를 몇 번이고 반복 하며 넓은 평야를 달리는 동안 계곡 아래로 지붕이 빨간 기와집들의 작은 마을이 아늑하게 보이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1412분이었다.

이곳이 프리모스텐이라한다.
이 지역은 땅에 철분성분이 많아 기와가 붉은 빚을 띤다고 한다.

저 멀리 아드리아 해속의 섬마을은 파도에 잠길 듯 작은 섬마을이 보였다.

잔득 기대에 부풀어 마을에 들어섰으나 도시가 텅 비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그로아티아 프리모스텐”(3.31)


우리일행이 토착한 프리모스탠은 마치 유령의 마을처럼 조용했다.

이곳은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2개의 반도지형이 특징인데 멀리서 보면 파도에 잠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적막한 섬도시지만, 5일 후면 성수기가 되어 섬전체가 번화해지게 된다했다. 해마다 비수기가 되면 이곳에서 휴양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마을을 비우고 삶의 본고지로 돌아가 있다한다.


계곡위에서 바라본 프리모스텐 섬마을 전경

 

프리모스텐 섬마을

 

이 마을위엔 성 죠지 성당이 자리하고, 그 성당을 보기위해 비수기에도 그런대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섬 입구에서 하차한 우리는 성당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일단 마을에서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인간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한다며 안내는 일행들을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카페를 찾았다 화장실을 가기위해서다.단체로 사용료 1인당 유로 50센트씩 계산하여 줄서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일행중 일부는 여유 있게 커피까지 곁들여 이곳에 들렸던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휴식을 끝내고 안내를 따라 우리는 도보로 입구에서부터 마을 한복판 제일 높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성 죠지성당을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거리 골목 여기저기에서 건물과 문화의 잔재들이 고풍의 맛을 더해 주고 있었다. 특히 땅과 벽에 그려져 있는 인식표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마치 고대 로마의 나폴리 인근의 화산재로 매몰되었다 발굴된 폼페이도시마을의 길과 벽 위에 표시되었던 고대인의 인식표의 흥미로웠던 이정표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태리는 엊그제 중부 지역에 강한 지진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혔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고대부터 화산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상업과 농업의 중심지요 귀족들의 휴양지였으나 인근 비수비오 산의 화산 분화로 쏟아져 나온 화산재에 도시전체가 묻혀 흔적도 없이 살아졌다가 1549년 수로 공사로 발견된 유적지이다.

 ‘현대 관광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 있는 봄페이 마을의 고대로마인들이 살던 지역 어구의 벽과 거리위에 이정표 역할을 했던 표식 판에 남자의 성기그림이 지금까지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고대에도 유흥가가 상존했다는 증거자료인 것이다. 이번 이정표를 보면서 유흥가는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에서 건 인류역사와 함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애써 찾아간 성당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성당 주의를 돌아보고 내려와야 했다. 이쯤 해서 우리 일행은 성수기가 되어 다시 활기를 찾기 까지 외로워야할 이 섬마을을 뒤로한 체 야속하지만 우리도 이곳을 떠나야 했다.



트로키르(3.31)

 

크리모스텐 섬마을을 떠나 우리는 버스로 40여 분간 이동, History 지역인 또 다른 섬마을 트로키르(trogir)’로 향했다. “트로키로(trogir)”는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안 지방의 섬으로 된 항구 도시이다. 본토와 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이 성곽 도시는 중세의 건물과 미로의 좁은 골목길이 그대로 보전 되어 1997년 유네스코에서 구시가지 전체를 문화유산으로 지정 한 곳이다.


크로아티아 트로키르 광장 앞 시계탑

 

구시가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16세기에 만들었다는 '바다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문에는 원래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풍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으나 2차 대전 당시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바다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광장 우측엔 유럽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성당이 있었다. 13-15세기에 건축된 성로렌스 성당 (Cathedral Of St.Lawrens)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정문에는 거장 라도반(Radoban)의 작품으로 좌우에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있고, 그 위에는 알몸의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드 조각이라 한다.

성당 앞에는 현재 법원과 시청이 연하여 있었고 광장 중앙에는 시계 부조 물의 건축물이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이 물신 풍기고 있어 역사와 함께 지내온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젊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저 시계탑 아래서 가슴을 조리며 울고 웃었을까 ---?!

 

성로렌스 성당 (Cathedral Of St.Lawrens)

 

현재 광장모서리에는 야외 카페가 자리하고 있어 피로한 여행객의 발길을 잠시 쉬어 가게 한다. 광장 주위에는 중세 시대 귀족들이 거주했던 저택과 고풍스런 건물들이 그대로 보전 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12세기 당시 도시의 모습을 추측해 본다.

 

스플릿 지역(4.1)

 

어제 오후 우리는 트로키르에서 스플릿으로 이동 호텔(Le Meridien Split Hotel)에 투숙했다. 호텔은 고급수준이었다. 하나 여행사에서 특별히 신경을 좀 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2일간 머물게 된다. 내일은 아침 일찍 로마 황제 디오클라티우스가 사랑하여 이곳에 궁전을 건축했다는 스플릿의 구시가지와 성곽 관광을 즐긴 다음 모스타르로 이동하게 된다.

 

41일 아침 호텔을 출발한 우리는 스플릿은 상가가 많고 복잡하여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안내의 말을 귓전에 흘리며 안내를 따라 로마전성시대 황제 디오클라티우스의 궁전으로 향했다.

기독교 신도를 가장 심하게 박해했었다는 이 황제는 궁전을 짓고 8년 간 이곳에서 통치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오클라티우스황제는 로마에 사두 청치를 창안 실시하여 로마를 가장 강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황제로 역사에 남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두 정치 체제 또는 테트라키아(Tetrarchia)? 국가 권력이나 왕좌를 네 명이 나누어 통치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293년에서 시작하여 약 20여 년간 존속했던 사두 정치 제는 이른바 3세기의 로마 위기에서 로마 제국의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한다그러나 그 황제도 인간인지라 권력이 쇠퇴해져 313년 죽게 된다. 그가 죽고 난후 콘스탄티노플황제가 등극하여 동서로마를 통일시키고 기독교 활동을 전면 허용하면서 탄압받던 기독교는 빛을 보게 되었다 한다.

 

성 그레고리 닌스키 주교 동상

 

 

원래 궁전의 모형도

 

10세기경 성 그레고리 닌스키 주교가 나타나 디오클라티우스황제가 머물던 궁전 자리에 성당을 증축하게 된다. 그는 로마교황에게 라틴어 대신 크로아티아어로 예배를 집전해줄 것을 요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1979년에 유네스코가 이 궁전을 포함한 구 시가지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궁전 앞에는 성곽의 전체 모형도가 있었는데 이곳을 찾는 모든 여행객은 일단 이모형도 앞에 모여 안내로부터 성곽의 개괄적인 설명을 듣고 각자 자유 시간을 얻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추억을 만들었다. 궁전모형은 성곽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대문이 4(철문, 동문, 은문, 금문)로 나뉘어 있었고, 사면이 성곽방어를 위한 바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정문 밑으로는 황제가 위기에 처했을때 궁전에서 도피하기위한 도피로가 베네치아 바다로 연결 로마 쪽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했다.

어느 시대건 국민에게 칭송받는 통치권자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겠지만, 폭군은 항상 국민의 저항을 두려워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도피로를 마련해 놓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유적지가 역사유물의 성곽지라기보다 이란 서민과 관광객을 상대하는 구멍가게가 밀집한 번화한 일반 상가로 변모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지역 관청에서 부족한 세원을 충당하기위해 무제한 상업 허가를 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옛 궁전 앞, 현재 전경

 

구시가지는 성곽으로서의 위엄대신 주위가 온통 상점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위한 생존경쟁의 전사들이 우굴 거리는 현장이 되어 있었지만, 그곳엔 성당, 회당, 부족마을센터, 박물관 등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중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동시에 유명 상품 점, 은행, 잡화점, 그리고 식당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성벽을 민간가옥으로 개조하여 여행객을 유치하는 민박집으로 까지 변질되어 있었다. 현재 궁전 터엔 약 2000여명의 민간인들이 살고 있어 마치 중세와 현대가함께 공존하고 있는 현장이란 느낌이 들었다.

과연 유적 관리를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나라가 가난하면 역사보존의 중요함보다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일 게다. 우리나라도 우리가 가난에서 허덕일 때는 고적 문화재관리가 엉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나라건 국가 보전을 위해서는 안보 다음으로 정책에 최우선과제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것이다.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성곽중심가에 아드리아 해로 흐르는 검푸른 바다를 끼고 야자수 잎이 늘어 진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리바거리라한다. 여행객들에게 산책로 추천되고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거리주변엔 노천 상점과 카페가 줄지어 이국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으며, 가끔 노천거리에 간이 무대 위에서 통기타와 드럼을 치는 무명의 젊은 가수들이 출연하여 실력을 과시하는 동안 지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마치 서울의 대학로를 연상케 한다. 연인과 산책을 하며 잠시 카페에 들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해보는 추억의 거리로는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스플릿 궁전 리바 거리에서, “꽃보다 필라 여인들의 커피 타임


한국의 꽃보다 누나라는 촬영지로 유명하기도 한 이곳은 한국여행객을 의식했는지 골목입구에 한글로 된 상품안내 문구가 보일정도로 한류풍이 물씬 풍기기도 했다. 필자 부부가 어느 모퉁이에 이르자 일행 중 이번 여행을 주도하며 분위기를 발랄하게 이끌고 있는 꽃보다 필라 여인젊은 구릅이 노천카페에 둘러 앉아 커피를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지나가는 우리 부부를 동석하게 한다. 마침 다리도 쉴 겸 젊은날의 향수도 그립고 그들의 나누는 대화의 소재도 궁금하여 동석을 했다

마침 동석한 사람 중에 옛날 필라에서 유학하고 돌아간 필자 조카의 절친 선배 부인이라 밝히는 분이 있어 반가웠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이국에서 또 다른 조카를 만난 기분이다.

 

모스타르(4.2) 42일이다.

아침 830, 아침 날씨는 흐리고 기온은 섭씨 15도로 제법 쌀쌀했지만 일행들은 개의치 않고 스플릿에서 모스타르로 이동하기 위해 2시간의 버스 여정을 시작했다.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국경을 넘고 디나릭 알프스 산과 계곡을 지나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네레트바 강에 자리 잡은 도시, 보스니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모스타르로 가는 것이다.  보스니아 모스타르에는 모스타르다리로 유명하다.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Old Bridge Area of the Old City of Mostar)는 국제적인 협력과 다양한 문화적·민족적·종교적 공동체의 공존과 화해의 상징으로 통한다. “모스타르의 어원은 네레트바 강 바로 위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수꾼들"을 뜻하는 “mostari”에서 비롯된 것이다. .

 

모스타리 다리(1993년 내전에 파괴, 2005년 복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간 보스니아 내전의 역사적 배경의 문헌을 살펴본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의 기미가 보이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탈퇴·독립한 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역시 1992229일과 31일에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했던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이 투표를 조직적으로 보이콧했으며,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투표에 참가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권자 64%의 투표, 투표자 98%의 찬성으로 독립 안이 가결되자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의 후원을 받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무장 세력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세르비아 민족 영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격했고, 곧 전쟁은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도시 중심지가 완전히 폐허가 되기에 이른다. 특히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 민족 청소가 자행되는 끔직한 만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1506년 터키의 통치하에서 건설되었던 모스타르의 상징 모스타리 다리19931191015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다리의 파괴를 명령한 크로아티아 군대의 사령관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은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 재판소에 제소당해 아직도 재판중이라 한다.

다리 앞에는 “Never Forget 1993"이란 글자가 돌조각에 새겨 있어 여행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민족의 피맺힌 절규를 함축 시켜 놓은 글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자의 의미를 물으니 원래는 같은 슬라브족인 이들이 종교로 인해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으로 나뉘어 죽이고 파괴하며 피 흘리는 바보 같은 내전은 결코 되풀이 하지말자는 민족적 각성을 스스로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1995년 보스니아에 냉전이 종식되고 평화가 정착되면서 카톨릭, 정교, 이스람교가 함께 공존의 법칙을 깨닫고 평화를 구가 하고 있음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아마도 지금 관광객들의 눈에 비치는 발칸의 도시들은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 평화를 구축했다는 배경이 있었기에 지금은 더없이 평화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이고 있는지 모른다.게다가 이 도시들은 꽃보다 누나란 제목으로 한국 유명스타들이 출연한 기행영상물이 세상에 나오면서 한류풍이 일어나 한인들의 관광객이 북적이기 시작했다는 곳이다.


여기서 필자는 북의 김일성이의 적화통일 야욕으로 일으킨 한반도의 6.25를 생각한다.“6.25의 비참 했던 당시 미국을 위시한 우방유엔연합군의 도움으로 국가는 위기에서 건질 수 있었으나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상의 피해로 국토가 초토화 되고 국민은 헐벗고 굶주렸던 당시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미완의 통일에서 남북이 분단 같은 민족 끼리 대치상태에서 북의 지속적인 도발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안타까움이 어찌 필자마음에 한하랴. ”나의 조국 대한민국 민족들이어! 어서 깨어나라. 지난 잘못된 역사를 이젠 되풀이 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확실한 국가관과 자유 민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 각성하자마음속으로 부르짖어 본다현재 모스타르 다리근처는 관광객을 상대로 번화한 상가가 이루어 져있어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다리 높이는 강으로부터 25M, 강의 수심은 5M이데 현재 65명의 젊은 다이버들이 점프구릅을 형성하여 다리위에서 년 중 다이빙 행사를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 다이빙구릅 멤버중의 한사람이라는 청년

 

다이빙의 의미는 1993년 다리가 파괴되었던 그날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는 같은 뿌리의 민족끼리 바보 같은 내전을 하지말자는 각오를 다지는 뜻이며, 행사를 통하여 모금을 하여 평화 유지를 위한 각종 사업에 기여하기 위해서란다. 우리가 방문한 그날도 다이버 구릅 멤버의 한사람이 다리위에 서서 다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었다.

다이빙 시범을 보일 수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누구든 을 주면 물에 뛰어 들겠다고 했다구태여 다이빙을 볼 필요가 없어 다음번에 라는 말을 남기고 다리를 떠났다.

 

드브로브닉크성벽을 찾아서(4.3)

 

해가 지기전에 우리는 스풀릿에서 발칸의 진주라 불리는 드보르크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호텔이 고급 수준이었다 이곳에서 2일간 관광을 마치면 코토르, 부드바해안 지대를 둘러보고 이번 제 1차 여행팀은 발칸 지역의 여행을 마치게 된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내일 돌아볼 드보르브닉크성벽을 제외 해놓고 성안의 구시가 지를 돌아 본 후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성곽 안은 14-6세기에 걸쳐 만들어 졌다는 구시가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 지르는 화강암 돌 조각들을 정교하게 바닥에 포장하여 마치 한 장의 넓은 화강암을 깔아 놓은 듯한 시원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플라차거리(Main Street)”라 한다. 이 거리는 거리 가운데 빗물이 모여 내려 갈수 있도록 영구 배수 시설이 되어 있었고 수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달아 반짝이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곳도 있었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25개나 되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골목들은 각기 골목 분위기에 맞게 오르내릴 수 있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는데 주위의 식당들이 계단을 이용하여 야외 테이블을 셋업해 놓았다. 테이블 군데군데에는 젊은 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정겹게 속삭이며 추억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그런대로 이국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리 주위에는 제법 유명한 식당들과 선물센터, 아이스크림상점들까지 보이고 있어 우리가 성곽에 온 것인지 상가지역에 온 것인지 헷갈린다.


드브로닉 성곽 요세를 배경으로 구시가지 정문 앞에서 꽃보다 필라 여인들

 

이곳 구시가지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사라질 뻔 했었으나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복원되어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많은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 교역중심과 대형 관광선박들이 드나드는 아름다운 항구로 바뀌어 활기찬 모습을 띄고 있었다.

 

구시가지 입구 가까이에는 2번의 걸친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건축했다는 대성당이 보였고, 그리고 지금도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약국이 있었는데 많은 관광객들은 호기심에 약국에 들려 기념으로 무엇이라도 사들고 나온단다. 그 옆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고, 확 뚫린 플라차거리(Main Street)”중심엔 시계탑(종탑)도 있었다. 시계탑의 시각을 알리는 숫자는 로마글자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5분에 한번 씩 바늘이 움직이고 있다. 구청사 옆에는 코가 유난히도 큰 좌상이 보였는데 드부르니크의 목사이자 극작가로 유명한 마린드르작(Marin Drzic) 목사의 상이다. 관광객들이 코를 하도 만져서 만들반들 광이 나고 있었다.그 왼쪽엔 스폰자 궁전과 오른쪽엔 럭터 궁전과 성 볼라이세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폰자 궁전은 1층이 아치형, 2층이 로마네스크양식, 3층이 고딕양식으로 한 건물에 3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 했다.

 

 

스폰자 궁전 전경

 

이렇게 구 시가지를 둘러보고 우리는 항구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일행 중 현지 생맥주를 쏘겠다는 고마운 분이 있어 한잔씩 곁들이며 항구 도시의 저녁을 즐길수 있었다.

 

드보르닉 성곽투어 (4.4)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어제 저녁 둘러본 구 시가지입구에서 까마득히 올려 보이는 드보르브닉크성벽에 오르기 위해 입구에 집결했다. 이곳을 돌아 보기위해서는 유럽의 여행지와 마찬가지로 현지 가이드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약속한 현지 가이드가 예정 시간을 훨씬 초과 했는데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예정 시간 보다 30분 뒤에야 “Jelena"(Lady)라는 현지 가이드가 허둥지둥 달려 왔다.

이따금 여행객들이 늦장을 피우거나 낙오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으나 현지 안내가 이렇게 늦는 것은 처음이다. 문책할 여유도 없이 스케줄에 쫓겨 서둘러 가이드를 앞세우고 성벽입구 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산등성이에 길게 뻗어 있는 성벽에 도전하였다.

 

성벽은 관광객이 성벽을 따라 돌아 볼 수 있도록 길게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벌써 성벽 통로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치 인종 전시장처럼 각국의 인종들이 광광이란 이름으로 한데 어울려 같은 통로를 같은 마음으로 붐비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현지 행상들이 손에 기념품을 들고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사고 방지를 위해서도 관광도중 기념품을 사지 말고 대열을 지켜 달라는 안내의 당부는 잘 지켜 지고 있었다.그럼에도 이곳에서 일행 중 2명씩이나 소매치기를 당한사건이 발생했다. 여행객이 붐비는 곳에서 휴대가방은 항상 소매치기의 목표물이 된다. 오죽하면 지역 관광중 가방을 뒤로 메면 남의

 

 

 

것이고 앞으로 메어야 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내가 당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명 모두 여성분으로 등에 메고 있던 가방 속에 넣어둔 귀중품과 약간의 현금을 잃었다했다. 한명은 여행 중 경찰에 신고절가 번거로움이 싫다고 포기하였지만, 다른 한분은 다음 여행객들을 위해서라도 현지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중도에서 당일 관광코스를 포기하고 먼저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드보르닉 성벽 통로에서

 

드보르닉 성안의 플라차 거리(Main Street)

 

성벽을 따라 길게 설치된 통로는 안전한 콩크릿에서 부터 부서진 콩크릿을 보수하기 위해 임시 나무다리를 설치한곳도 있어 긴장해야 했다. 성곽끝자락에 있는 스루지산 전망대에서 두브로닉 시내를 내려다보니 검푸른 바다와 해안 마을이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오찬식당의 전망도 좋았다. 오찬을 마치면 이제 남은 오후 관광일정을 위해 장시간 버스를 타고 코트르부드바로 이동하게 된다. 이제 지루했던 버스 이동도 오늘이 지나면 모두 끝나게 되는 것이다. 발칸에서의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 들고 싶은지 7일간의 여행이 피로함직도 한데 모두들 피로 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는 몬테네그로의 코트르부드바는 아쉽게도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곳의 관광이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이동해야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크트르와 부드바의 관광은 오늘 저녁 독일로 이동하는 항공 스케줄에 차질이 없도록 버스 창문 관광이 주가 될 것이다.

 

 

스투지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드보르닉 해안 마을과 성벽

 

몬테네그로의 코토르를 찾아서(4.4)

 

몬테네그로(Montenegro)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 남단 고원지대에 위치한 남북으로 흐르는 아드리아 해()를 품고 290km에 걸쳐 뻗어 있는 '땅과 물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말을 쓸 만큼 유럽의 숨겨진 아름다운 보석이라 불리는 모두 휴양지로 유명한 작은 해안 마을이다.

코트로의 크기는 강원도만한 작은 도시이다. 이스탄불의 소피아성을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때 건립된 요새도시로 시작 했다는 이곳, 현재는 해안을 따라 백만장자들의 별장이 즐비한 곳이다. 이곳은 현 주민 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와 중세의 흔적 그대로 간직한 구시가지로 나뉜다.인구 40만이지만 교육수준이 선진국수준이라 한다. 수입원은 관광수입에 의존 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발칸의 해안과 호수가 있는 도시는 아름다운 보석, 신이 노니는 곳등 최고의 미사려구가 붙어 다니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몬테네그로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해안도시 코토르와 부드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코트르까지 버스 이동 시간은 약 세 시간, 여기서 다시 3-40분 이동하면 부드바에 가게 된다. 이동 중의 날씨까지 쾌청하여 우리를 축복해주고 있는 듯 했다.


코토르 해안지대

 

버스창문을 통하여 시야에 들어온 해안은 서쪽으로는 코토르 연안이 길게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코토르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만큼 명소가 한군데 있다했. ‘성 니콜라성당이다.

이 성당은 19세기에 건축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세기에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재건축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현재는 세르비아 정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엔 귀족들이 남긴 진귀한 예술 작품이 대거 보관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교회 주변에 늘어선 옛날 귀족들의 저택을 통해 이지역의 화려했던 당시를 찾아볼 수 있다. 잠간 버스에서 내려 자유시간을 가졌다.옛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구시가지의 건물들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에 실려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벌써 주어진 자유시간도 지나가버렸다.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버스에 올라야 했다.

부드바(Budva)

코토르에서 3-40분 거리의 부드바라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란 나라 이름도 생소하지만, ‘부드바(Budva)’란 도시 이름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이다. 이곳은 노르웨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산 정상에 바닷가가 물이 들어와 형성 되었다는 피요르드바다호수가 고고함과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내려다보이는 붉은 기와지붕의 건물들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자리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부드바는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해안으로 조약돌이 파도에 밀려 뒹굴고 있었으며, 오른쪽엔 출렁이는 푸른 바다가 오후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어 마치 동화속의 그림 같이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그래서 이곳은 여름철에 많은 유럽인들의 휴양지로 사랑받고 있다 한다.


부드바 산정상의 피요르드바다호수

 

그러나 언제 까지난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을 수 는 없다. 이제 7일간의 발칸 여행을 마치고 아름다운 해안의 도시 코토르부드바를 뒤로 하고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크로아티아 공항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항공편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가게 된다.

함께 했던 일행들은 7일 간의 발칸 여행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34명의 일행 중 일행 중 한 가정 2명은 필라로 돌아가게 되고, 나머지 본진은 프랑크푸트 공항에서 다시 34일간 독일의 로텐베르그’ ‘슈투트가르트‘ ’오르링겐’ ‘바덴바덴‘ ’하이델베르크’ ‘뤼데스 하임’ ‘로렐라이언덕이 있다는 랑인 강을 선박 관광으로 계속하고 필라로 돌아가게 된다. 본 발칸의 여행기를 마치고 다음은 34일간의 독일 관광 편을 지속 하려한다.

많은 애독을 바란다.

 

드보로니크 성벽


플리트 비체


모스타르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