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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영의 글과 발언대

교장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실제 상황을 정리한 글로서

2009년도 교회 방주용 책자에 실렸던 내용임을 밝혀둔다.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2009년 12월   일                                        이 오 영

                               

1960년 4월, 광복이후 10년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린 4.19학생 운동의 거룩한 주역이었던 일부대학생들은 점차 본분을 망각하고 직간접으로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거나 참여 하려는 정치 발언과 행동을 서슴치 않음으로 뜻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나게 했다.

그것은 장기 집권의 자유당 아성을 무너뜨린 열기에 편승하여 “하면 된 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학생은 학생대로 사회구성요원은 그들대로 거리에 뛰쳐나와 욕구 불만의 목소리를 뿜어내는 풍조가 만연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게 되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수원에서 명문 고교로 후진들이 배출 되고 있지만, 당시 나의 모교는 수원에서 유일한 인문 공립 중고등학교임에도 발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낙후되어 있다는 열등의식이 모든 재학생들에게 잠재하고 있을 때였다.

그 낙후된 이유를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대학엘 많이 진학하여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학교장의 무능과 태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을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은 울고 싶은 아이에게 울 수 있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자유당시절 말 교장선생님은 전교생을 강당에 모아 놓고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부통령후보 선거운동을 했으니 말이다.


교정 구석구석에서는 교장선생님의 부당성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 했고, 총 학생회에서는 이를 빌미로 “어용 교장(?) 축출”이란 강수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동반하지 않으면,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시대적 소영웅심리의 사회 분위기가 전국 고등학교 까지도 만연하고 있음이 한몫 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면 당시 나는 중고등학교 총학생 회장으로 학생들의 불만을 무마시켜 학교장 축출이란 불미스러운 사건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나는 학교장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 학생회 임원회 의결을 그렇게 유도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내가 학생대대장으로 학생들을 지휘 하고 있을 때였다. “교장선생님에게 대하여 경례!”

아침 조회 훈시를 위해 단상에 올라가신 교장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경례를 받고 훈시를 하셔야 할 교장선생님이 경례는 받지 않고, 단 상 아래로 성큼 내려와 내 앞으로 다가서신다.

“대대장 학생이 운동화 꼴이 뭐 이래, 그리고 머리는 네가 장발족이야--”라며, 전교생 앞에서 모자를 벗겨 던지며 머리에 군밤을 주었다. 참으로 망신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정형편상 머리를 제때에 깍지 못하고 빛바랜 교복에 운동화바닥이 찢어져 움직일 때마다 숨 가쁜 강아지 혀 바닥 같이 너덜거리고 있어 가능한 단상 앞에서 발을 고정시켜 놓고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은 지금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눈에는 가난한 학생의 모습이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빛바랜 교복과 너덜거리는 운동화로 단상 앞에 서기가 창피하여 대대장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분께 딱 걸린 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수치감이 증오로 변하여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그때 그분께서 지혜를 발휘하여 나를 전교생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고 조회가 끝난 후 조용히 교장실로 부르던가 아니면 담임이나 교무주임에게 지시하여 시정 시켰었다면 나는 그분을 증오대신 존경 했을 것이다.

   

그 후 나는 학생회 간부들의 요청에 의해 긴급 학생간부회를 소집 하게 된다.

“우리는 학교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포괄적인 주제로 회의를 소집했지만 주제는 어용교장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통상 총 학생 간부회의는 학생회 임원과 중고등학교 반장들이 모이는 회의로서 교무처에 보고를 하면 지도 교사가 나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따라 지도 교사님들은 통상 총학생회 월례회 정도로 생각하고 아무도 참석 하지 않았다. 회장인 나의 사회로 학생간부들은 학교 발전을 위해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 학생들의 열띤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전에 학교장이 우리를 강당에 모아 놓고 선거 운동을 한 것은 어용교장이니 이에 대한 교장선생님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긴급 동의안이 나왔다.

이것은 이미 예견한 발언이었다.

하급생들은 상급생들의 주장에 이의를 달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동조 하고 있었다.

결국, “학교장께서 스스로 물러가도록 건의 하고, 만약 건의를 받아 드리지 않는 다면 물러갈 때 까지 동맹휴교에 들어간다.”는 그야 말로 엄청난 거사(?) 내용이 채택 되었고, 모든 실행 권한은 학생회장인 나에게 위임되었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뒤탈이 없으려면 전교생의 동의서가 필요 했다.

그러나 전교생을 소집하는 총회는 지도교사가 틀림없이 참석할 뿐 아니라 거사가 사전 누설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전에 결의문을 작성하여 각 학급 대표인 학급 반장들의 동의 서명을 개별적으로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 했다. 그날부터 나는 초조와 두려움 속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오른 것인가 번민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학생회의 결정사항을 위임받은 총학생회장으로 배신행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위임된 결정 사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몇 일간을 학생회 간부들과 인근 시골 초등학교에 모여 밤늦도록 학교교장이 물러나야 하는 이유를 숙의 하고 유인물(손으로 철판에 글자를 긁어 써 먹물을 무친 롤러로 밀어서 카피)을 작성하면서 각 임원들에게 거사 날 행할 각자의 임무를 부여했다. 각별히 선생님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은밀하게 전교 학급 반장을 학교 변소 뒤에 있는 작은 공터에 모이게 해야 하는 계획에 차질 없도록 몇 번이고 다짐했다.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 되어 각급 반장들이 거의 다 모였다.


나는 5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배석시키고, 그날 긴급히 모인 각급 반장들에게 전일 밤늦도록 준비한 “결의문”이 담긴 유인물을 연람시키면서 동조할 것을 설득하며 지장을 찍도록 했다.

말이 설득이지 거의 반강제적이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나를 비롯한 간부 모두는 주동학생으로 퇴학을 면치 못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회 임원들의 얼굴엔 비장함 마저 흐르고 있었다.

설혹 불안해하는 임원에겐 “책임은 내가 진다. 너희들은 나를 믿고 따르면 된다.”며 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주로 고 3 상급생들로 구성된 학생간부들의 위력 때문인지 다음과 같은 결의문에 지장 찍기를 거부 하는 학급 반장 들은 없었다.


결  의  문


1) 우리 학교는 수원에서 유일한 인문 공립 중 고등학교로 창립 된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낙후 되고 있다는 것은 학교장님의 태만이나 무능 때문임으로 학교장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갈 것.


2) 특히 학교장님은 X년 X월 X일, 선거권도 없는 중고등전교생 전원을 강당에 모아 놓고 정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는 선거 운동을 한 “어용교장”임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갈 것.


3) 학교장이 물러날 때 까지 전교생은 동맹휴교에 들어간다.


당시 학교장은 낚시를 좋아하여 자주 낚시를 다니는 것으로 전교에 소문이 나있었다.

이를 두고 학생들은 학교장이 학교발전은 외면 한 체 일과 시간에도 낚시터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 학교가 낙후 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전교생을 강당에 모아 자유당 지지발언을 한 것은 어용교장으로 용납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날 학교 변소 뒤 보리밭공터에서 이와 같은 결의문에 전교 학급반장들의 지장을 받아 들고, 이 사실이 누설되기 전에 학생회 간부 중 조XX, 유XX, 김XX, 이XX, 김XX등을 대동 하고 직접 교무실로 달려갔다. 마침 교장 선생님은 부재중이시라 교감선생님 주제 하에 교무 회의를 하고 있는 순간에 무법자처럼 휘젓고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깜작 놀라 무엇들 하는 짓이냐고 우리의 무례를 나무랐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재빨리 교무주임 앞을 지나 어리둥절하시는 교감 선생님 앞으로 다가가 상기된 목소리로 준비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그 시간 다른 임원들은 각급 반을 돌면서 “우리의 의견이 관철 될 때까지 동맹휴교”에 들어간다는 것을 전교생에게 알리면서 귀가를 독려 했다.

낭독한 위 결의문은 바로 교감선생님에게 제출되었고, 또 한부는 지체 없이 “경기도 교육청”으로 발송되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학생들이 군사부일체인 선생을 내 쫒으려 하다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하며 우리를 지탄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는 가하면, 정의감에 사로 잡혀 있는 중고생들의 정의감을 꺾으면 미래가 없게 된다고 동정하는 선생님도 계셨다.

이틀이 지나자 도 교육 감독청에서 발 빠르게 현지조사를 나왔다.

교육감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나 조사를 했다.

조사는 선거운동사실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교무주임이 나를 불러 결의문을 취소 할 것을 설득하였다.

“일시적인 소영웅심리에서 저지른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사과하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다. 아니면 “자네 퇴학 당 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도 놓았다.

마음이 약해졌다. 용서해달라며 당장 무릎을 꿇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간 학교발전을 위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보리밭 공터에 학급 반장들을 모아 놓고 결의문에 각급 반장들에게 찬성을 함께 종용하던 친구들, 인심 좋은 시골초등학교출신 친구를 앞세워 학생문예활동 행사에 쓸 유인물이라고 속여 프린터를 빌린 후 필적 좋은 친구가 손으로 글자를 긁은 결의문을 잉크 묻은 롤러로 밀어유인물을 만들며 밤을 지새우던 혁명 동지 같은 친구들의 모습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비록 내가 퇴학을 당할 지라도 나는 결코 친구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교무주임 선생 님! 이제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교무주임도 체념한 듯 더 이상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교무실은 비상이 걸렸고, 긴급 교무회의가 수차례 소집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 드리느냐 주동 학생을 퇴학 시키느냐 열띤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차피 실패하면 퇴학을 각오한 만큼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교무처 옆방에서 교무회의가 계속되는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회장인 나를 비롯한 강력 주동학생 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쏠리고 있었다. 불안 하여 입안이 타들어 갔다.

교장 측근선생님들은 일벌백계로 교권을 바로 잡아야 한다며 총학생회장인 나를 비롯하여 주동학생 간부들을 가려내어 퇴학 시키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나의 담임선생(이해창)님이 입을 여셨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학교장이 물러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분명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학생들을 퇴학 시킨다는 것은 교육자인 우리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아이들의 장래를 망쳐 놓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본 사태에 대해, 학생회 간부들의 학생 된 도리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책임을 묻기에 앞서 이들을 교육시킨 우리교원모두의 책임이 없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려운 시대에 정의감에 불타는 순수한 중고등 학생들에게 여당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 교장선생의 태도에 교육자로서 신중한 처사가 아니었다는 것은 학생들 보다 교육자인 여러 선생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를 규탄하고 교육의 정도를 갈망하고 주장하는 학생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가 교무실 분위기를 제압했다.


교무실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듯 조용했고, 그때 까지 눈치를 보교 계시던 선생님들도 담임선생의 말을 지지하는 쪽으로 교무회의 분위기는 역전되고 있었다.

결국, 교무회의에서 학생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경기도 장학관의 조사결과에 의한 조치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교무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도장학관은 교장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전보 발령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 하겠다며 학생회에 통보가 왔다.

학생회는 이를 받아 드리기로 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종용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퇴학직전에 있던 나와 학생 간부들을 구해 놓고, 당신께서는 학생들을 사전에 예방하지 못한 교육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나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자 당황한 우리들은 담임선생님을 찾아 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잘못을 사과하며 다시 학교로 돌아오실 것을 간청하였다.

“너희들의 젊음과 정의로운 뜻을 마음 것 펼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간절한 청을 끝내 거절하시고 그분은 교육계를 그렇게 영영 떠나셨다.


그분은 교육자로서 정의로운 행동과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의 용기는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교육자의 양심상 스승을 축출하는 제자들의 과격한 행위를 사전에 막지 못한 교육자로서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뜻 이었다.

도교육청의 후속 조치로 학교장이 외지로 물러가고,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들은 학교장과 우리가 존경하는 단임 선생님을 함께 잃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거사 성공 후에 더 훌륭하신 후임 교장선생이 오실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있었지만 반듯이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었다.

그렇게 교장선생님이 마음에 상처를 않고 떠나시고 얼마간 공백이 있은 후 후임 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실 때쯤 우리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 후배들로 부터 “구관이 명관”이란 소리가 들린다.

그 후, 나는 나이가 먹을수록 내가한 일에 대해 얼마나 후회 스럽고 마음이 아팟는지 모른다.


이 학교가 당시 나의 가정형편상 서울로 향한 진학의 꿈이 깨지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입학 을 허락하고 상당기간 학비 장학생대우를 해 준 모교라 늘 감사하고 있다.

만약 당시 담임선생님이 계속 침묵하고 계셨다면 나는 교장 축출 주모 불량학생이란 낙인(?)이 찍혀 퇴학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의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다른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나의 성장기를 사회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방황하게 되어 결국은 어둠속의 악명 높은 사나이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 진다.

그러한 생각에 잠길 때 마다 나는 나를 구해 주신 나의 담임선생님을 그리워한다.

그 후 나는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건 사람을 배척하거나 불신하기 전에 먼 훗날 정말 후회 하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는가를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문제의 핵심에 나의 잘못은 없었는가? 다시 한 번 진중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상대편을 용서 할 수 있는 다사로운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따금 M 군을 생각해본다.

그는 모범생으로 교장성생님의 아들이자 나와 총학생회장을 경선하여 낙선이란 아픔을 경험한  나와 동급생 이였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죄송함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또 아프다.

생각해보면 당시 발전 도상에 있는 공립학교의 발전 속도는 교장의 능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문교 당국의 소극적인 지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특히 학교가 침체 되어 있는 문제점을 학생들이 노력하는 학풍에서 찾지 않고, 교장선생님 한분의 잘못으로 몰고 가버린 학생회의 결정과 이것을 밀어붙인 것은 분명 경솔한 처사였다.


평생을 교육자로 보내시고 은퇴를 앞둔 교육자 말년에 건강을 지키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낚시를 다니기로서니 그것이 학교 발전과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단 말인가? 

당시 유행어처럼 퍼진 “어용학자”라는 굴레를 그분에게 씌웠던 일도 그렇다 공립학교 교장치고 정부입장을 설명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선거권도 없는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고의적인 선거운동을 했다기보다는 공립학교 교장으로 정부홍보용인 훈시를 선거운동이라 주장하던 당시 학생들의 판단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경솔했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후회하면서 “교장선생님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되새겨 본다.

동기생 M군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고 화가 나 있을까 생각하니 같은 반 친구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것 같아 나의 깊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만약 그때 진실로 하나님을 영접한 크리스천이었다면, 이렇게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나는 생전에 그분들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나의 마음의 창을 통하여 요즈음 조국의 사회상을 내다본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젊음은 거리에서 사회 정의를 지켜 가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조국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는 검은 세력들에 의해 “민족대단결”이란 달콤한 어휘로 거리에서 또는 인터넷을 통하여 순수한 젊음이 철저하게 악용당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더욱이 언제 부터인가 조국은 국가의 정체성과 존립의 뿌리마져 통째로 흔들리고 있는 혼돈된 사회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악용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먼 훗날 당신들도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을 돌아 볼 때 당신들이 가두에서 젊음의 열정을 앞세워 무비판적으로 부르짖던 투쟁적인 언행들이 조국대한민국 발전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는지 알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을 말해두면서 그때 가슴 치는 회한이 없도록 오늘의 일거수 일투족에 자숙을 당부하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