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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영의 글과 발언대

시련 속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시련 속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지난 2002년 3월 23일경, 부활주일 예배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날 세례를 받기위한 젊은 여 성도 한사람의 신앙 간증이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그날 간증한 여 성도는 결혼한 남편 때문에 미국에도 왔고, 연합교회도 나오게 되었다지만 그 성도가 하나님을 확실히 영접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성도는 4년 전에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다고 하며, 

조산으로 체중미달과 신체의 미숙으로 태어난 간난 아이 때문에 좌절 속에 마음 아파하는 심정을 간증하면서 아팠던 기억 때문에 흐르는 눈물로 몇 번씩 간증이 끊기고 있었다.다른 아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첫 번째 아이가 3개월 조산아가 되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례는 안 받았지만 그래도 남편 따라 교회엔 열심히 나왔는데, 세례라는 형식이 무어 중요한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하지 않았는가?”“열심히 교회에 나온 나에게 어째서 이런 고통을---”. 이러한 자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연신 눈물을 닦고 있던 그녀의 얼굴엔 하나님을 원망했던 솔직한 마음도 엿보였다.

남편 따라 찾아온 낮선 이국땅에서 새로 가정을 이룬 여인으로 이민생활에 적응하기에도 힘든 시간이 많았을 텐데, 부부간의 사랑의 아름다운 결실로 축복받을 건강한 아이대신 3개월이란 조산아를 생산하게 했던 하나님을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산아를 보는 엄마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간증하고 있는 그 여신도처럼 예쁘고 앳딘 얼굴의 며느리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 성도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그치고 지난날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었음을 참회하며, 그녀의 시련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고 스스로 위로 하며 조숙아가 건강하게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린 결과 이제는 아이가 점점 건강해가는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며 아픈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 하고 세례를 받기로 했다는 고백을 담은 감동적인 간증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과 시련은 어쩌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 인간에게 근심 걱정 없는 지상낙원 속에 영원히 살 수 있는 특권을 허락 하셨으나 엔덴동산에서 사탄의 꼬임으로 창조자를 배신한 때부터 죽음과 시련이 예고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겐 누구나 시련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직 시련의 크기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 막 태어난 천진난만한 조숙아인 어린자식의 고통 받는 모습 앞에 주체할 수 없는 절망과 번민으로 가슴 아리를 하면서도 엄마로서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에 복 바치는 슬픔과 아픔의 고뇌로 번민 했던 그 젊은 여인의 아팠던 간증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안경 너머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나이가 들어서 눈물이 흔해서인지 아니면 감성이 여려졌는지 요즘 들어 드라마를 보다가 딱한 처지의 장면을 보면 눈시울을 붉히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는 때이기도 하다. 이날 그 여신도의 간증은 지금까지 잊고 지내던 지난날 나의 꿈 많은 대학시절 때 폐결핵이라는 가슴앓이로 절망 속에 좌절하던 기억 속으로 나를 몰고 있었다.

대학 2년, 서울 수유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대학생활에 충실하던 어느 날 이었다.

감기처럼 기침과 피로가 찾아오더니 좀처럼 회복되지를 않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당시 함께 자취하던 친구 총길이가 “야 ! 니, 병원에 가봐야 되지 않겠나? 억지로 나를 대학병원으로 끌고 가다 시피 데리고 가서 찍은 X-Ray 결과는 
폐결핵 ”중등증“ ”당장 투약시작, 영향 섭취 및 대학 휴학 요“란 진단을 받고 온 것이다.

당시 고시공부를 한다며 무절제한 식사시간과 운동 부족, 적당히 허기만 달래던 식사 습관 때문에 영양실조와 과로로 결국 “폐결핵 중등 증”으로 진행된 것이다.

당시 만 해도 결핵은 법정 전염병은 아니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일컬을 만큼 완치하기 힘들었던 병이었다. 
당시 의약으로는 결핵은 완치 된다는 보장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약 잘 쓰고,

*영양섭취 잘하고

*공기 좋은데서 잘 쉬어야 되는 사치성 병이었다.

가정교사로 학비를 보태며 겨우 대학을 다니고 있는 당시 나의 처지로서는 위의 치료여건을 어느 하나라도 자신 있게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좌절과 상심이 컸었다. 나는 기침이 심해 염려 하는 어머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감기라고 속이고,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 김삿갓처럼 산천을 돌며 멋대로 살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꿈 많던 대학생으로서의 보라 빛 꿈을 모두 버리고 정상적인 치료마저 포기하기로 했었다.

자격지심인지 모든 주위친구들까지 나를 멀리 하고 외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좌절감으로 밀려오는 고독을 감당할 수 없어 몇 일간 눈물로 밤을 지새기더 했다.

 

“왜 나에게 이런 몹쓸 병을?”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원망했었다.

도대체 하나님이 존재하기는 한건가? 이러한 하나님이라면, 마음속에 영접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하나님께 매달릴 생각대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스스로 어떤 절대자의 기적 같은 보살핌의 요행을 믿고 산천을 떠돌아 보리라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어느 절대자란 누구인가? 깊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의 힘을 가진 신 그 절대자 그는 분명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기 까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인간은 애써 하나님을 부인하려 든다. 인간들은 극한 상황에서 눈앞의 시련이 다가오면 하나님을 쉽게 원망하거나 그 시련을 이유로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누구보다 강하게 인정하고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기도로 매달려 간구함이 없는 인간에게도 항상 똑같은 자비와 사랑으로 은총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간의 오만 때문에 하나님의 적절한 은총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거나 인간에게 알지 못하게 베풀어진 깊은 은총에 대해 부인하고 원망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기욕심의 바탕에서 오는 현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시련에 대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하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이 알아서 나에게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았다는 불평과 원망이기도 하다.

나도 시련당시 자기 성찰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시련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데 서 온 반항적인 심리의 바탕위에 나의 투병이 가뜩이나 어려운 부모님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란 걱정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치료를 시작하라고 야단인 친구 종길이의 권고 까지 귓전에 흘리고 며칠간 시골집을 찾아 부모님을 뵙고난 후 절대자에게 나의 운명을 맞기고 조용히 집을 떠나 산천을 헤매리라 다짐한 것이다. 집에 머무는 동안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니, 감기만나? 일전에 X-Ray 찍었다 카드니 어이 됏노?”

멈추지 않는 나의 기침과 내 눈이 흐르는 눈물로 부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어머님은 다그쳐 물었다. 어머님께 별거 아니니 걱정 말라면서--, 얼떨결에 부모님의 고향인 칠곡에 며칠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느 날 야반도주 하 듯 부모님을 하직하고 집을 떠나려 생각 했었으나, 못난 자식 걱정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실 어머님을 안심시키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적당히 둘러댄다는 것이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얼버무렸던 것이다.

“니, X-Ray 찍은 거 폐병 맞지------?" 침묵하고 있는 나에게
"야야, 그러면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지, 감기라 속이면 되나--”

어머님의 직감은 언제나 예민하고 정확했다.

“어머니! 이병은 하루 이틀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래, 고향 같은 공기 좋은 시골에 내려가 얼마간 요양하면 괜찮은 거래--,그리고 내가 쓰던 식기나 수건은 다른 식구가 못쓰게 해--”

“니, 맞구나 폐 아픈 거, 문둥이 같은 녀석, 그걸 왜 감기라 켔노? 야야, 니 걱정 말 그라. 내 밥을 굶어도 약 값은 대 줄 테니, 그라고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 카노. 이제 공부 좀 그만 하고---, 절대 딴생각 말고 집에서 열심히 치료 하그레이.”

나의 속을 모르는 어머님은 이렇게 온통 자식걱정 뿐이다. 

그날 바로 어머님은 나를 끌다시피 약방으로 데리고 가서 약을 한보다리 구입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부터 닭고기를 비롯하여 구하기 힘든 개고기까지 구해 와서 잘 먹어야 한다며 다른 식구들은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하고 나에게 먹기를 권하시는 어머님의 넘치는 희생적인 사랑은 처절하리 만큼 나의 투평을 위해 모든것을 거신것 같았다. 이렇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던 어머님를 두고 훌쩍 집을 나가려던 내 생각은 또 다른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천을 방황하겠다는 생각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망상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름 모를 어느 산모퉁이에 지쳐 외로이 쓸어져 있을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니 두려움마저 생겼다. 
그렇다고 나의 치료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계속들어가야 하는 치료비 때문에 부모님이 더 어렵게 생활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산천의 방황은 치료가 아니라 하나님을 끝까지 원망하는 반항의 시위이요,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 하나님!" 눈을 감고 기도했다. 
너, 오영이! 만약 네가 집을 나간다면, 그것이 부모님께 씻을 수 없는 불효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가? 어디선가 책망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였다. 참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님께 지지치 않는 힘을 주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뒷바라지 해주게 할 절대자 하나님을 멀리 산천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지금 내주위에서 진심으로 매달려 보는 것은 어떠냐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며칠을 지새며 내방식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니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하면서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서서히 마음의 평온이 찾아 왔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모든것을 맞기고 투병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크로즈업 되었다. 결국 나는 러며님 곁에서 치료를 택했고, 어머님의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넓은 사랑과 정성의 보살핌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나는 1년 6개월이란 긴 투병 끝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더욱이 투병 중에 대학에서 학훈 장교(ROTC) 후보생의 강한 훈련을 병행하여 이겨 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7순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되도록 사랑하는 아내와 건강하게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성취감 속에서 살아 왔고, 나름대로 동포 사회에 기여하려 노력해왔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축복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허락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런 시련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을 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겸허하게 매달릴 수 있으며,,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더 큰 뜻을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그날 간증하던 젊은 여 성도의 경우도 지금은 참기 힘든 아픔과 시련의 시간이 될지라도, 엄마로서의 희생적인 사랑과 정성이 담긴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조숙아가 건강하게 잘 자라서 사회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를 기원한다. 끝

 

2002년 3월 23일


첼튼함 교구 이오영